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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화주현벌진주강문 전세계종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破天荒 姜錫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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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공(通溪公)의 휘(諱)는 회중(淮仲)이오 字는 중부(仲父)이며 관향(貫鄕)은 진주(晋州)이다. 公의 시조님이신 휘 강이식(姜以字式字) 장군은 고구려 병마도원수로 용력(勇力)이 뛰어나고 지략(智略)이 통신(通神)한 희세(稀世)의 명장(名將)이었다.
일본의 가미가재(神風)은 이미 고려시대에 잉태되었다. 가미가재는 태풍으로인해 일본이 살아났다하는 연유를 두고 한자식 신풍을 일본식 발음으로 읽은 것이다.
號는 양진당(養眞堂))이시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8년 기묘(己卯) 12월 22일(서기 1339년)에 출생하셔 8세에 음직(蔭職)으로 연능직(延陵直)하시고 공민왕(恭愍王) 6년 정유(丁酉·1357)년에 성균시(成均試) 염흥방(廉興邦)) 방(榜)에 등제하여
판도판서(版圖判書) 밀직부사(密直副使) 단성보리(端誠補理) 추충보조공신(推忠補祚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 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使) 판선공시사(判繕工寺事)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하시고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봉하였다.
공목공께서 하정승 원정공의 따님과 혼인하여 이곳에 살게 되었으며 통정공 형제가 이곳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월리(沙月里) 남사들은 하원정공(河元正公)의 세거지(世居地)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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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명신 통계공(諱 淮仲) 선조님 ⑤ <지난호에 이어> <지난호에 이어> |
봉강서원(鳳崗書院) 소재: 경북 상주시 박사공 7세 강회중(姜淮仲)및 박사공 11회 강형(姜형)배향
*고려말 정난은거 불사 ,두문동(杜門洞) 72賢 중 일인
문과장원,15세 소년장군,탐라평정,봉익대부 보문각대제학(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
1358年生1373年恭愍王甲寅筮任軍資寺丞與崔瑩討平耽羅事載耽羅誌1382年禑王壬戌以典農寺丞登第柳亮榜官至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麗社爲屋入杜門洞自靖太祖御極初徵以形參再徵以兵參三徵以兵判1421年世宗申丑徵以摠制皆不出同年六月卒.
공의 의리와 절개는 진정한 강문(姜門) 고집의 표상이며 당시 국가에 선비교육120명의 영재교육을 시키신 분(영재교육의 선구자)
자 중보(仲父) 호 통계(通溪)
1373년 공민왕 갑인년 14세에 어린 신동(神童)을 공민왕이 정청으로 불러 군자시승(軍資寺丞)을 보하고,
15세 소년장군으로 최영장군과 탐라평정(耽羅平定).우왕8년 유랑방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壯元)
1382년 우왕 임술년 전농시승(典農寺丞),감찰,집의, 가선대부 상주목사, 홍주목사,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고려말 이조에 불복하시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심.
태조가 형조참판(刑曹參判),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태종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세 번 불렀으나 끝내 불응하시고 나가지 않으셨고,
1421년 신축 세종이 도총제(都摠制)로 불렀으나 또한 나가지 않으셨으니 끝내 이조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동년 6월에 강직함을 지키시며 서거하심.
1557년 정유 후손 적성(積誠) 묘소 비석및 재각 건립.
1817년 후손 응교 諱 세백(世白) 경덕사(景德祠) 창건.
1977년 정사 봉강서원(鳳崗書院)으로 승격.
1990년 경오 후손 구재(鳩財) 중건 서원 정화.
후손 세마 필효(洗馬必孝) 찬기.
안동 김윤동(金潤東) 찬.
신도비석 후손 맹희(孟熙) 술(述)
표구원(表구元) 찬.
경덕재기 봉희(鳳熙)찬.
문신혁(文信赫) 찬.
인주 장병규(張炳逵) 기(記)
석의(石儀) 진성 이원영(李源榮)찬.
통정공,통계공 형제의 630년 단속사 정당매(斷俗祠政堂梅)
보물 72호 동삼층석탑과 73호 서삼층석탑이 남아 있음.
통계공(通溪公) 묘소
*찬기문 보기 ㅡ>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통계공 휘 회중(淮仲).
配位:군부인 의령남씨(郡夫人宜寧南氏)
父ㅡ 판서(判書) 징(徵)
配位:군부인 전주최씨(郡夫人全州崔氏).
父: 통정대부 지성주사 녕(寧)
祖:동지밀직사 완성군 을의(乙義)
曾祖:전교서승 사검(思儉)
자(子)는 중보(仲父)이시고 경자년에 탄생하시었으며 형제 다섯분 중에 둘째 아드님이시다.
큰선비가 태어 나 스스로 우뚝 서서 외로이 지조를 지켰음은 쉬운일이 아니다.
시(詩)에 이르기를...
"조상을 평안하게 할지니라,이 일은 오래도록 어기지 말지니라"하였다.
진주강씨(晋州姜氏) 대성(大姓)이라 대로 이어 빛났도다.
벼슬 자리 이어져서 나라 안에 이름난 집!
위대하신 원수공은 고구려를 구하시고,
통계공이 자취 이어 그 거동이 덕이 높아,
뛰어나신 무예에다 대제학에 뽑혔으며
고려사직 망했을 때 이 내 홀로 절개 지켜
이조때에 불렀어도 부귀영화 뿌리치고,
내 한 몸을 숨어 살며 하늘 두고 맹서했다.
대자리의 기슭에는 공의 무덤 있었는데
오백년의 세월 흘러 잃은지가 오래되어
서리내림 근심해도 성묘조차 찾지 못해
흩어사는 후손들이 한이 서려 눈물짖다.
천지신명 도움있어 마침내는 묘소 찾아
한 해 한 번 제사하니 자손 도리 하게 되어
재실에는 주련 달고 길가에는 비를 세워
千秋萬世 빛이 나서 비 바람도 깎지 못해...
경자 9월 16일 안동 김윤동 지음.
1358年生1373年恭愍王甲寅筮任軍資寺丞與崔瑩討平耽羅事載耽羅誌1382年禑王壬戌以典農寺丞登第柳亮榜官至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麗社爲屋入杜門洞自靖太祖御極初徵以形參再徵以兵參三徵以兵判1421年世宗申丑徵以摠制皆不出同年六月卒.
고려사직이 망할 때 선생께서는 이조에 불복하시로 맹서하고 화를 입거나 복을 누리는데 불복하거나
흔들리지 않이하여 두문동 여러 선비들과 뜻을 같이 하셨으니 백세를 두고 뛰어난 귀감이 되었다.
위대하도다!
고려의 운세가 기울어감을 읽으시고 궐문에서 나라 바로잡을것을 외쳤으나 오히려 왕은 공을
귀향보내었으니 참으로 어리석도다.
결국 이태조의 혁명으로 왕씨(王氏)족들은 참살당하고 말았으니 또한 안타까운 일이로다.
삼가 살피건데 공의 충성을 다한 큰 절개는 마땅히 우주에 드러났고 옛과 거금을 통하여
인간윤리에 공이 있을것이며 후세 사람들도 본 받아야 할 것이다.
그 5대손이신 대사간공 휘 형(言+同)은 폭군 연산주 때 나라의 기강이 물란함을 보고 국법을 바로잡고
간신배들을 성토한 해와 같은 매서운 충절이셨으나 폭군 연산군의 비위를 거슬려 온 집안이 화를 당하고
공의 4부자가 하루 아침에 죽음을 당하여 곧고 빛나는 순절을 하신 예도 있었으니 어찌도 그렇듯 선조의
깨우치심을 이어 받았으랴!
뼈에 사무치도록 꼭 알맞으니 진실로 신명의 이치가 도왔던것일까!
통계공의 굽히지 않이하는 큰 절개와 대사간공의 나라 위한 순절(殉節)은 전이냐 후이냐가 다를 뿐,
어진이를 사모하고 덕을 기리는 떳떳한 충정(衷情)은 매 일반이라.
항차(沆且)!
우리 두 선조님의 혈액을 이어 받은 자손들이야 어떠하리!
오호라!
선조께서 가시온지 오래되시었으며 자손들은 각처에 흩어져 살아서 집안을 중하게 여기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다시금 정성을 들임이 어떠하리.
선생의 후손들이 각처에 두루 흩어져 살고 경학(經學)과 문장 그리고 무예에도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과 행실이 빛났으므로 남의 이목에 드러났으니 어찌 성(盛)한 일이 아니겠는가!
천세 만세의 기틀을 닦을 때 선생은 부귀 영화도 뜬 구름같이 여기시고 형벌도 언제나 예사롭게
달게 받았으며 오직 의리를 지킴으로써 편안하실 수 있었다.
소재: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경덕사에서 참배한다.
자료참고: 여사제강(麗史提綱),동국통감(東國通鑑),탐라지(耽羅誌),진주강씨(晉州姜氏) 대동보 제1권.
경자년 8월 19세손 신혁 삼가 지음.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휘 필효(必孝) 撰.
*통계공 사실(事實)과 고려말 수절제신 수록자(守節諸臣收錄者) 102명 中 공의 사적(事蹟) 대동기문록중(大東奇聞錄中)
고려 공민왕이 손위(遜位ㅡ임금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하는 날에 백관(百官)들이 국쇄(國쇄)를 왕대비전(王大비殿)에 모셔놓고 우현보(禹玄寶)의 손자 단양군(丹陽君) 우성범(禹成範)과 진원군 강회계(姜淮季)를 참살(斬殺)할려고 하니
이태조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참살을 못하게 만류하고
찬성사(贊成事) 성석린(成石璘)과 그 아우 성석용(成石瑢)과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원굉(李元紘) 청성군(菁成君) 강시(姜蓍)와 대제학(大提學) 한장(韓藏)과 전밀직(前密直) 유혜손(柳惠孫)과 군자윤(軍資尹) 강회중(姜淮仲)과 소윤(少尹) 유백(柳白)등을 외지(外地)로 내쫓았다.(참고문헌 ㅡ 여사제강(麗史提綱)).
강회중(姜淮仲)은 진주사람으로 자는 중보(仲父)요,호는 통계(通溪)이다.
홍무 15년(서기1328년)에 전농시승(典農寺丞)으로 유량방(柳亮榜)에 등제하여 관직이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이르렀고 이태조가 즉위하여 처음은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부르고 재차 병참,세번째는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세 번 불렀으며 세종이 신축년(서기1421년)에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제(五衛都摠府都摠制)로 불렀으되
모두 나가지 아니하였으며 고려가 망하던 날에는 부친을 등에 업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니라.
당시 사대부(士大夫) 모두 지조가 높고 깨끗하여 굽히지 않음을 도(道)로써 바라는 자는 오직 그러하지 못함을 두려워하며 서로 고쳐 표방하여 일거르드라.
통계공께서는 정성스럽고 갸륵한 마음인 즉 어진분이라 할것이다.
태양을 뚫을듯한 충정(忠精)과 하늘을 받들만한 대의(大義)는 정포은,이목은선생들에게 양보하지 않을것이다.
그 유풍여렬(遺風餘烈)이 5대안에 끊이지 않이하여 현손인 대사간공(大司諫公) 휘 형(言+同)께서도 역시 불행하게도 혼탁한 때를 만나서 가강과 인륜의 법을 세우시고 거짓을 들추어내어 물리치시다가
김한원당,정일두선생들과 더불어 재앙을 입으셨으니 이런 강직한 할아버지가 계셨으므로 나라 다스리는 좋은 꾀를 낼 수 있는 많은 후손들이 있음이니 마땅히 함께 한 사당에 높이 받드는것이 실로 자손이 선조를 공경하는 정성에 떳떳함이 아니겠는가!
옛날 정축년(1817)년에 공(通德郞)의 14대손이신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휘 세백(世白)께서 경덕사(景德祠)를 창건하시고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었고 후일 응교공의 손자 휘 주영(胄永)께서 다시 중수하셨는데 상세한것은 후손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휘 필효(必孝)께서 쓰신 기문 가운데 있다.
무진년(1868)에 국령으로 철폐를 당했다가 100여년 후 모든 후손들이 협력하여 복구하니 새로운 사당 모습은 고요하고 엄숙하며 강당은 크고 아름다우니 어찌 정성을 쌓아 이룩한것이 아니라고 할까!
1년이 넘어 어느새 많은 선비들이 재실에 모여 공손히 제사를 모실때에 외람되게 나도 끝자리에 참석하여 위패에 글쓰는 책무를 하였다.
또 정사(1977)년 봄에 이르러 사당을 서원으로 승격하여 편액을 봉강서원(鳳崗書院)이라 하니 명궁(名宮)이 자손들 모여사는 마을에 그 빛을 더한다.
아! 성대하도다!
서원이 된 후로는 선현(先賢)과 같이 높이어 공평할 지위인고로 유림(儒林)에서 쓴 글을 벽에 붙여야 된다고 하면서 후손 강신각(信珏),신창(信昌) 형제등이 부탁함에 감히 사양할 수 없고 또한 병규가 생각하기를 유림에서 버림을 받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기어 염치를 무릎쓰고 쓰노라.
광복 후 정사년(1977)년 6월 10일 인주인(仁州人) 장병규(張,火+丙,逵) 삼가 지음.
동별사(東別祠)
봉양사(鳳陽祠)의 별사로 6세 공목공(蓍)와 그 아들 5형제분(7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봉실록 발췌.
대제학(大提學)통계공(通溪公)회중(淮仲)
공은 지리산 단속사에서 고승으로부터 글을 배우면서
이미 10여세에 사서삼경을 읽어 신동(神童)으로 그 소문이 났고
백형(淮伯)과 함께 양촌(陽村) 권근(權近)문하에서 더욱 학문을 연마하셨다.
단속사네 절간에 있는 고승으로부터 무술과 병법도 익혀
그 용술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학문을 잘 한다는 소문을 임금이 듣고,
아버지 공목공으로 하여금,공을 개경으로 부르게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에게 어떤 벼슬을 주어서 등용 할 것인가로 논의가 분분 하였다,
군사 물자의 관리 책임자인 군자승에 특체가 논이됨에 그 당시 판서(判書)의 아들이요,
정승의 외손자로 그 추이가 여러 사람의 관심과 흥미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다,
15세의 꽃다운 나이로 군자승을 감네 해낼 수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하는 반대측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임금으로부터 군자승 제수 최후 결정이 나므로
이 소식은 각 지방 관서와 본가에 전해져 축하에 기쁨으로 가득찼다.
소년 군자승의 출현으로 주위 사람들이 크게 촉망 하게되었다.
흥안에 군자승은 업무를 파악하고 닦고간 방법의 용술과 학문에 근거하여
업무를 쇠신하고,상사에 나름대로 비전을 개진하여 장래를 다져나가셨다.
다시 명망과 문무의 실력을 겸비한 백전 노장 최영 장군의 눈에 들게되어
측근으로 발탁되였으며,엄격한 지도를 받아 오시던 중 최장군 탐라 출정에 막료(군자승)로서 장도에 따라 오르시었다.
(공민왕23년)탐라 토벌에 공을 세우시고,승진할 기회가 열려 있었으나
과거를 치루지 않고 특채되어 의견이 분분 하던점을 감안,우왕8년 유랑방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 급제 하시었다.
궁중의 대제에 쓰일 곡식을 관리 보관하는 전농시 승(丞) 으로 재출발하여
잠시 상주 목으로 나가시었다가 감찰 집의에 오르시어 군의 기강을 세우고
정병육성을 하여 보국안민하려는 충성심과 절개가 대단하시었다.
어느날 미복 차림으로 열병장에 거동한 공양왕 앞에 백관이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렸으나,
공께서는 미복 차림인 제왕의 잘못을 백관이 주시하는 곳에서 간할 수 없어
자기 임무를 모두 수행한 뒤 나아가 인사를 하매, 왕이 대노하여 공에게 집무정지를 명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내색도 하지않다가 조용한 기회를 맞아 경미하나마 전일에 임금의 잘못을 충간하시기를...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시옵니다. 지존하신 몸이 올시다,
미복 차림으로 함부로 나들이를 하시면 나라의 체통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깊이 통촉 하옵소서” 라고 읍소(泣訴)하시매, 임금이 전일의 잘못을 뉘우치고 곧 군자윤으로 제수하셨다.
그 후 왕의 자문 역할을 하는 보문각 대제학의 높은 지위에 오르셨다.
그러나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가고 있을 때 공양왕의 사위이자 공의 막네 아우이신
진원군께서 찾아와 앞으로 진퇴를 논의 하심에... “나는 나의 뜻 대로 할 따름이다.”
라고 하시며 새나라가 들어서도 부름에 응치 않으실 뜻을 강건히 굳이셨다.
무장 군인을 이끌고 대궐에 들어닥친 배극렴,이방원 등은 대비로부터 공양왕을 패서인케 하는
조서를 강압적으로 받아 내므로 공양왕은 대성 통곡하며 쓰러졌고,왕위를 옹호하던 측근들도 통곡의 바다를 이루웠으며,
통정공의 끝에 아우 진원군 께서는 부마의 위치에서 겨우 참화를 면하고 평안도 안면 땅으로 종적을 감추셨다.
이태조는 재신공(宰信公) 휘 강황보(姜璜寶) 공을 따르는 종유(從儒) 중 일인이었으나 그 둘 중 유일하게 고려를 배신한 일물이기도 하다
이에 강황보선조는 의관을 문에 걸고 하늘도 처다보지 않으시다 돌아가셨으니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며
그 스승과 친유(親儒)들 마저 배신한 것이니 오래 못가 그의 아들 이방원과의 관계에서부터 혼란을 맞았도다.
이성계가 등극하자,새나라에 동조하지 않는 고려의 충의 열사들을 죽이고 도태 시키는데 방심하지 않았다.
왕씨(王氏) 종친들을 수장(水葬)시키고 불복하는 충신들에게 가차없이 철퇴를 내리쳤다.
이때 백형 통정공께서 끌려 나가 관직을 삭탈하시고 곤장 백대를 맞으셨으며
아버지 공목공의 직첩을 삭탈하고, 매를 쳐 내쫓아 유혈이 낭자하였다.
참으로 통곡의 세태이며 고구려를 이어 천년 사직을 이끌어가야 할 고려가 400년으로 종말을 고하는 때였도다.
그런 한편 이조는 고려의 옛 충신을 회유하는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태조가 공에게 처음에 형조참판 두 번째 병조참판 세 번째는 병조판서를 제수,세종 때 또 총재를 내렸으나,
이 모두를 공목공 통계공 부자 모두가 사양하시고 벼슬 길에 오르지 않으시다가,세종 삼년(서기1421)에 세상을 떠나시었다.
문하 시중 문경공 휘 군보(君寶)는 조부,
문하 찬성사 공목공 휘 시(蓍)는 아버지,
정승을 지낸 원정공의 따님 정신택주는 어머니가 되신다.
*통계공(通溪公)과 수헌공(守憲公)
홍무 25년 壬申(1392)년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혁명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게 되는데
대부분의 강문(姜門)선조님들께서는 이에 항거하여 끝내 이조를 인정하지 않으셨도다..
통계공처럼 미련없이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신 분들 107위(位)와 의관을 문에 걸고
하늘도 쳐다보지 않으신 분들이 참으로 많았으니 강문 선조님 대부분이 그런 굳건한 절개의 분들이셨노라....
그러한 선조님들의 대의(大義)와 굽힐줄 모르는 큰 절개는 천년을 두고 필자뿐만이 아닌 천하 130만 후손들에게
뛰어난 귀감이 되었고 삶의 지표가 되었도다.
대부분의 불의(不義)한자들이 이성계에게 아첨하며 벼슬을 노렸건만 그 누가 전일 고려의 신하가 아니였던가!
선조님들은 그 비열한 대열에 끼지않으셨으니 존경과 흠모의 마음을 금치못하여 600여년이 흐른 작금
이렇듯 늦게나마 글을 올리는 것이니...
이조가 들어선 후 많은 피의 숙청이 있었으며 결국 500년 사직이 피로써 결말을 맺게되었건만
그 암울한 시대를 살다가신 선조님들의 심중은 수헌공 유사에 잘 나타나 있어 간략하게 나마
심취해보고자 하노라.
<수헌공유사>
公平生無意干綠而强從任宦者專以爲親也及基親목也.
累徵不起永謝功名介石之操可想而可親之孝亦可知也.
공은 평생에 벼슬에 뜻이없었으나 구태여 벼슬을 한것은 부모를 봉양키 위함이였다.
급기야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누차 불러도 가지 않이하고 기리 공명을 사양하니
가히 개석지조를 알 수 있으며 사친지효 또한 알 수 있도다.
통계공(通溪公) 휘 회중(淮仲) 유운(遺韻 남긴 시)
旅창첨雨故難聽 여관에서 빗소리 듣기가 괴로운 것은
況復斑衣趨鯉庭 색동옷 입고 부모님 계신 곳에 가고파서다
夢似秋雲歸不住 꿈은 가을 구름같이 돌아가기를 멈추지 않으니
愁隨春酒醉無醒 시름은 봄 술에 취하여 깸이 없어라
江山此日頭將白 이곳에서 오늘날 나의 머리 희려하니
骨肉何時眼更靑 사랑하는 나의 형제를 어느 때에 다시 반갑게 볼 것인가 ?
宦路險夷曾歷識 벼슬길 험난한 줄 내 일찍 알았다면
是身天地一浮萍 이 몸은 천지의 한낱 부평초일것을...
고려 충절지선조록(高麗忠節之先祖錄)
시대 |
휘(諱) | 관직 및 품계 | 원사(院祠) |
高麗 |
재신공(宰臣公)諱 황보(璜寶) *종1품* |
*숭록대부 재신 겸 이병부사 판밀직사사 합문지후(崇錄大夫宰臣兼吏兵部事判密直司事閤門祗侯)공의 종유에 문사(文士)로는 이익재(제현=齊賢),이목은(색=穡),정포은(몽주=夢周)같은 어진 이가 있고,무반(武班)으로는 강중경(姜仲卿),최영(崔瑩),이태조(이성계)같은 무략이 있어 문무 수십명이 서로 힘을 다하여 보좌하니 무엇이 걱정되며 근심되리요마는다만 간당들이 용사하여 국사가 날로 그릇되거늘 공이 이에 탄식하여 일으기를"나라가 장차 위태로울것이다,어찌할고, 기틀을 일찍 보지 못하면 후회할곳이 없느니라"하시더니결국 공의 종유 중 유독 이성계만이 위화도 회군하여 고려왕실을 칠 것을 내다보시고 통탄해하시며두 아들 손기,손수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 오셔서 합천의 미숭에 둔거(遯居)하여 문을 막고 의관을 걸고서 1381년 고려 우왕(禑王) 신유년에 돌아가시니 묘소는 성주읍 동쪽 가리면 묵방곡(墨方谷) 자좌이다.*찬기문 보기 ㅡ>숭록대부 사재 겸 병부사판 밀직사사 합문지후 재신공... |
추원재(追遠齋)ㅡ경북 고령군 월성동 |
*정1품* |
*3년여묘효자(孝子) 문과장원,단성보리추충보조1등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상의 문하찬성사 진산부원군.(匡靖大夫端誠輔理樞忠補조公臣三重大匡尙議門下贊誠事晋山府院君).1392년 조선이 개국된 뒤 맏아들 통정(通亭) 회백(淮伯), 둘째 아들 통계(通溪) 회중(淮仲)등이 우현보, 이색, 설장수 등과 고려말기에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반란을 모의했다고 직첩을 회수당하고 진주 지방에 유배되었고, 공양왕의 사위인 다섯째 아들 회계(淮季)도 이때 변을 당했다. 뒤에 풀려나와 1400년에 별세하셨다. 시호는 공목(恭穆)≪참고문헌≫ 高麗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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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공(侍中公)諱 윤보(允輔)
*종1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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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중대광 전객령 문하시중 (三重大匡 典客令 門下侍中)호는 서은(西隱). 1328(충숙왕 15)년 무진문과에 급제하여 전객령 문하시중을 역임하고 치사 했으며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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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공(副使公)諱 원길(元吉) *정3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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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추밀직부사(中樞密直副使) 중추밀직부사(中樞密直副使)로 제직중 김 수(金守), 조연(曺連)등 쿠테타를 일으킨 50여명이 공민왕을 시해할 때 의로써 반항하다가 별세하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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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은공(旅隱公) 諱 손기(孫奇) *종1품(從1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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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정난은거 불사 고려말 영동정(領同正)조선조 증숭정대부 판의금부사 겸 오위도총부 총제(崇政大夫 判議禁府事 兼 五衛都摠府 摠制). 공양왕 때 산원령동정역임. 고려가 멸망하자 조선조 벼슬은 않고 1392년 경남 합천 미숭산(彌崇山)에 들어가 10여년간을 두문불출 은둔생활을 하였다. 1452(문종 2)년 숭정대부 의금부사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증직되었다. 사인 최산두(崔山斗)가 찬한 행장이조정랑 이희민(李希閔)이 찬한 갈명.*찬기문보기-> 여은공 諱 손기(孫奇) 행장. 파천황 주 ㅡ 대 다수가 이성계에게 아첨하며 벼슬을 노렸건만 공은 그 대열에 끼지 않으셨으니놀랍도다! 그 의리와 절개 ! 나 통계공 손 진풍류인 파천황은 흠모하며 존경을 금치 못하노라... |
단원재(丹原齋)ㅡ경남 의령군 전화리 | |
자은공(自隱公) 諱 손수(孫壽) *종6품(從6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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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정난은거 불사 문과 현령(縣令) 형님이신 도은공과 협천 은거하시어 만년에 낙서(洛西)에 정자를 짓고 후학들에게 대장부(大丈夫)의 의리(義理)에 대해 강론하셨다.세상사람들이 일컫기를 낙강조수(洛江釣未)라 하였다. 史見:추모록(追慕錄),여은유사(旅隱遺事) |
단원재(丹原齋)ㅡ경남 의령군 전화리 | |
諱 문우(汶, 人+犬)*정3품(正3品)* |
*고려말 은거불사 중봉대부 예빈경(中奉大夫禮賓卿)[고려] 말엽의 문신. 첨사(僉使),중봉대부 예빈경(中奉大夫禮賓卿), 고려가 망하자 은적(隱跡)하고 불사했다. 조선조에 통정대부 예조참의 겸 예문관 직제학(通政大夫禮曹參議兼藝文館直提學)에 증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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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공(通溪公)諱 회중(淮仲)*정2품(正2品)* |
*고려말 정난은거 불사 문과장원,15세 소년장군,탐라평정,봉익대부 보문각대제학.(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 공의 의리와 절개는 진정한 강문(姜門) 고집의 표상!! 1373년 공민왕 갑인년 14세에 어린 신동(神童)을 공민왕이 정청으로 불러 군자시승(軍資寺丞),15세 소년장군으로 최영장군과 탐라평정(耽羅平定).우왕8년 유랑방에 응시하여 당당히 장원(壯元)1382년 우왕 임술년 전농시승(典農寺丞),봉익대부 보문각 대제학(奉翊大夫寶文閣大提學),고려말 이조에 불복하시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심.태조가 형조참판(刑曹參判),다시 병조참판(兵曹參判),태종이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세 번 불렀으나 끝내 불응하시고 나가지 않으셨고,1421년 신축 세종이 도총제(都摠制)로 불렀으나 또한 나가지 않으셨으니 끝내 이조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동년 6월에 강직함을 지키시며 서거하심. |
봉강서원(鳳崗書院) | |
어사공(御史公)諱 전(詮)*정3품(正3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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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낙향 은거불사 감찰어사 봉상시첨정(監察御使奉常寺僉正) .재임 중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인 진주(晉州)로 내려가 전남 강진(康津) 금여(金與)리로 이거하여 은거(隱居)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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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여(餘)*종2품(從2品)* |
*고려말 함평 은거 불사
가정대부 대호군(大護軍).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내놓고 가족을 데리고 전남 함평군으로 내려가 은거하게 된 연유로 후손들이 전남에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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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원군(晉原君)諱 회계(淮季)*정2品(正2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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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대왕의 사위 중대광 정당문학 부마도위 진원군(重大匡政堂文學駙馬都尉晉原君). 고려사에 의하면 1392년 공양왕이 폐위될당시 우성범(禹成範)과 함께 회빈문(會賓門)밖으로 끌려가 참화(慘禍)를 당했다. 이때 이태조가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면서 정도전과 이방원을 꾸짖었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달성보(達城譜)에 의하면 대비의 간청으로 화를 면하고 가솔을 이끌고 개성에서 500여 리 떨어진 평북 안변군 배화면 수악리에 피신하여 이름을 회조(淮祖)로 고치고 아들 염(廉)의 효성으로 9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담론보기 ㅡ> 공양대왕 부마(駙馬:사위) 중대광(重大匡)진원군(晉原... 配位:고려왕씨 경화궁주(高麗王氏敬和宮主) 父:공양대왕(恭讓大王) |
영모재(永慕齋)ㅡ전남 나주시 남평면 | |
諱 계좌(啓佐) |
*청백 은거불사(淸白隱居不仕)
[고려] 말기의 은사(隱士), 은거불사(隱居不仕)하고 청백(淸白)하여 경남 합천으로 이거. 삼가 사곡리(三嘉沙谷里)에 은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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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효손(孝孫) |
*고려말 은거구도,효자정려(求道孝子旌閭)
생원(生員) 고려가 망하자 부모를 모시고 회적(晦跡)한 산중에 들어가 낙지구도(樂志求道)하면서 양친진성(養親盡誠)하며 그 효성(孝誠)을 조정에서 알게되어 정려(旌閭)를 내렸다. |
효자정려각(求道孝子旌閭閣) | |
시랑공(侍郞公)諱 서우(胥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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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전남 나주은거 불사
예부시랑(禮部侍郞) [고려] 말기의 은사(隱師).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있을 때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키자 지금 전남 나주군 다도면 깊은 산중에 은거하며 문밖도 나가지 않았고 하늘도 쳐다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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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공(孝子公) 諱 안명(安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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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행 정려.
효자(孝子). 고려가 망하자 아버지 통계공(通溪公)이 관직에서 나와 매일 이웃노인과 더불어 술을 즐겨하므로 정성을 다하여 공양하고 상을 당하여 너무나 애통해하며 예를 다하고 시묘(侍墓)하면서 살아 생전처럼 모셨다하여 1450(세종 32)년 나라에서 효자 정려를 내렸다. |
경남의령 삼강문 칠정려 문화재의령군기념물 제35호 . | |
장령공( 掌令公)諱 종덕(宗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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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안동 물계촌(安東勿溪村) 은거
대호군(大護軍)보(譜)에는 고려가 망하자 안동 물계촌(安東勿溪村)에 은거했다고 하나 방손(傍孫) 응교(應敎) 세백(世白)이 찬한 묘표(墓表)에는조선조에서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며 왕조실록(王朝實錄)에는 1409(태종 9)년 경차관(敬差官). 이듬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1414년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했다고 기록(記錄)되어있다. *찬기문 보기 ㅡ>*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장령공 휘 종덕(掌令公諱宗德)... |
일남재(逸南齋)ㅡ경북 예천군 가천면 천향동 석송령(石松靈) 천연기념물 제294호 | |
諱 숙현(淑賢) *종1품* |
*고려말 황해도 덕천 은거불사
자청광록대부 문하시중 상서좌복야(紫靑光錄大夫門下侍中尙書左僕射) [고려] 말엽의 문신. 검교 중랑장 자청광록대부 문하시중 상서좌복야를 역임. 고려가 시운이 다하자 치사하고,황해도 덕천(德川)에 은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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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
諱 손명(孫命) |
*첨사(僉使) [고려] 말엽의 문신으로 첨사(僉使)를 역임하던중 혁명이 일어나자 벼슬을 내놓고 형과 같이 고향에서 은거하면서 조선조에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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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휴(休) |
*고려 은덕불사 송원현령(松原縣令)[고려]. 자는 정지(正之). 음(蔭)으로 벼슬을 시작 도정랑(圖正郞), 송원현령(松原縣令)을 지내고 고려가 망하자 청백한 절개를 지켜 벼슬을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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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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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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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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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무겸비 대제학 통계공(通溪公) 강회중(姜淮仲) 선조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통계공 21세손 by unprecedentedness 破天荒 삼가 筆하다!!!
첫댓글 본 글은 경북봉화의 법전문중 강석태님의 화주현벌진주강문 전세계종친모임 카페에 올려진 글을 옮겼습니다
글이 희미하게 보이지 않는 부분은 복사지정하시면 읽기 편하실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우리 카페에 옮긴 이유는
통계공 선조님에 대한 오해와 잘못 알려진 사적내용에 대한 검토를 하기 위해
대표적인 글이라 생각하고
이를 하나하나 지적하며 수정해 나갈 것입니다.
법전의 강석태님과는 간접적 접촉이라도 시도하기 위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연락처를 수소문했었으나 현재까지 불가능하였고
제가 남긴 댓글에 대한 회신을 직접 받은 적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