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진화
[李東震華, 1893~1968]
본명은 경수(慶洙). 법호는 육타원(六陀圓). 법훈은 종사. 1893년 5월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부친 화실(和實)과 모친 김(金)씨의 2남 3녀 중 3녀로 출생했다. 천성이 인자 고결 침착 과묵했고, 일찍 부친을 사별했다.
18세에 이왕가(李王家) 종친 댁으로 출가(出嫁)하여 상당한 부귀를 누렸으나, 세속생활의 재미보다는 종교적 수양생활을 마음 깊이 동경했다.
1924년(원기9) 봄, 서울 당주동 성성원(成聖願)의 집에서 박사시화(朴四時華)의 소개로 소태산대종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성불제중이 가장 큰일이라는 말씀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해 여름 침모 김삼매화(金三昧華)를 대동하고 만덕산에서 초선(初禪)을 열고 있던 소태산을 다시 만났다. 이 자리에서 동진화(東震華)란 법명을 받고 초선에 참석했다.
이때부터 출가(出家)를 결심하고, 1925년(원기10) 4월 가산을 정리하고 총부로 와서 전무출신을 시작했다. 이때 교단에 희사한 서울 창신동 가옥은 서울교당의 시초가 되었다. 1931년(원기16) 여자수위단 시보단을 조직할 때 건방(乾方) 단원으로 내정되었고, 뒤에 정식으로 수위단이 발족할 때 이방(零方) 단원이 되어 평생을 수위단원으로 봉직했다.
많은 이들이 관세음보살로 숭배했으며, 여자계의 대표적 수행자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말없는 가운데 교단 구석구석에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베풀었다.
광복이 되자 전재동포구호사업을 후원하면서 서울지방 교세 발전에 전력했다. 춘천에 출장교화를 하는 한편 당시 개성교당의 이경순과 함께 북한교화 개척의 계획도 세웠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는데 다른 동지들을 피난하도록 도와주면서 점령치하의 서울교당을 지켰다. 서울 수복 후에는 금산요양원장의 책임을 맡아 교단 요양사업의 기반수립에 노력했다.
금산요양원은 뒤에 동화병원ㆍ원광한의원 등으로 개편되었고 교단 병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1955년(원기40)부터는 총부교감ㆍ교령으로 금강원(金剛院)에 주재하면서 인욕수행과 무시선(無時禪)의 실천에 정진했다.
이때부터 자비보살이요, 교단의 어머니로서 교역자들을 두루 보살폈다. 소태산에 대한 신성이 투철했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나이가 아래인 정산종사에 대해서도 신성을 다해 받들었다. 이동진화는 이완철과 함께 건강이 좋지 못했던 정산을 보필하는 교단 남녀계의 두 기둥이었다.
대산종사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나이였으나 소태산과 정산을 받들 때처럼 신성을 다해 보필하고 받들었다.
1968년(원기53) 1월 어느 날, 좌우동지 후진들에게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영원무궁한 일원(一圓)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서 고락을 초월하자”는 최후 법문을 남기고, 1월 18일 75세의 세연(世緣)을 마치고 열반에 들었다. 1977년(원기62) 출가위의 법위와 종사의 법훈이 추서되었다.
‧ 1893년 5월 5일 서울 출생
‧ 원기 10년(1925) 4월 출가
‧ 서울 교무․교감 / 중앙총부 순교감 / 금산요양원장 / 수위단원 / 교령 역임
‧ 법랍 43년
‧ 정식 출가위
‧ 원기 49년(1964) 대봉도 추서
‧ 원기 53년(1968) 1월 18일 열반
‧ 원기 62년(1977) 종사 추서
「사람이 세상에 나서 할일 가운데 큰 일이 둘이 있다. 그 하나는 正法의 스승을 만나서 成佛하 는 일이요, 그 둘은 大道를 성취한 후에 중생을 건지는 일이다. 두 가지 일이 모든 일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고 큰 일이 된다」
원기 9년 봄, 六陀圓 李東震華 宗師가 一陀圓 朴四時華 大奉道의 안내로 처음 대종사를 만 났을 때 대종사께서 육타원 종사에게 하신 말씀이다.
육타원 종사는 평생을 이 말씀을 받들고 이 말씀에 충실하게 살았다.
육타원 종사는 갑오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1893년 5월에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에서 부친 李和實 선생과 모친 金씨의 2남 3녀중 3녀로 출생하였다. 천성이 인자 고결 침착 과묵하였고, 일찍 부친을 사별하였다. 18세에 이왕가 종친댁으로 出嫁하여 상당한 부귀를 누렸으나, 세속생활의 재미보다는 종교적 수양생활을 마음 깊이 동경하였다.
마침내 원기 9년 봄, 서울 당주동 成聖願의 집에서 박사시화의 소개로 대종사를 만나게 되었고, 이 자리에서 성불제중이 가장 큰 일이라는 대종사의 말씀에 큰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 해 여름 육타원 종사는 침모 金三昧華를 대동하고 전라도로 대종사를 찾아나섰다. 부귀한 귀부인의 몸으로 기차를 타고 가마를 타고 걷기도 하면서 서울에서, 전주, 임실, 진안 마이산을 거쳐 마침내 만덕산에서 대종사와 다시 만났다.
이때 대종사는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마치고 만덕산에서 初禪會를 열고 있었다. 육타원 종사는 이 자리에서「東震華」란 법명을 받고 初禪會 에 참석하였다.
이때부터 육타원 종사는 出家를 결심하고, 그 후 원기 10년(1925) 4월 가산을 정리하고 총부로 와서 전무출신을 시작하였다. 서울 창신동 가옥은 교단에 희사하여 서울교당의 시초가 되었다.
서울 수복 후에는 금산요양원장의 책임을 맡아 교단 요양사업의 기반수립에 노력하였다. 금산 요양원은 뒤에 동화병원․원광한의원 등으로 개편되었고 교단 병원사업의 시초가 되었다.
원기 40년부터는 총부교감․교령으로 金剛院에 주재하면서 인욕수행과 無時禪의 실천에 정진 하였다. 이때부터 육타원 종사는 자비보살이요 교단의 어머니로서 교역자들을 두루 보살폈다.
육타원 종사는 처음 서울의 귀부인으로서 부유한 생활을 했으나 전무출신한 후로는 검소 질 박(質樸)한 생활이었고 모든 수용에 교단과 스승과 동지와 후진을 먼저 생각하였다. 행주좌와어 묵동정 간의 모든 행동과 육근동작에 수행인의 자세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자애로운 성 품, 주밀한 실행력, 겸손하고 과묵한 성격, 감사생활의 낙천적인 일상생활, 신비스런 감화력, 세련된 예절 등 조용하면서도 종합적인 수행인의 표본이었다.
「이렁성 사십시다. 저렁성 사십시다.
分別妄想 다 잊으면 시비곡절 흔적 없다.
우리님 계신 곳 고락도 없사오니 울면서 웃으면서 임계신곳 찾아가세」
육타원 종사는 평소 이런 자작시를 애송하면서 성불제중의 한 길을 걸었다. 또「涵養大圓氣 三界超越自在遊」를 수행의 좌우명으로 삼아서 法아닌 언행을 삼가며 宗統을 보필하기에 정성을 다하였고, 파사현정에 솔선하였다.
스스로 숨어서 조용히 일하고 공덕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며 자애로움으로 뭉친 육타원 종사. 가난한 교당의 교무, 총부간사, 식당공양원 등 그늘에서 일하는 후진들을 특별히 정성 다해 보살피던 보살의 생애였다.
원기 53년 1월 어느날, 육타원 종사는 좌우동지 후진들에게 부촉했다.
「진리는 무상하여 만물은 쉬지 않고 변화한다. 영원무궁한 一圓의 진리를 잘 배우고 닦아서 고락을 초월하자」
육타원 종사의 최후 법문이었다. 며칠 후 1월 18일 육타원 종사는 마침내 75세의 世緣을 마 치고 열반에 들었다. 창공을 나는 孤高한 鶴과 같고, 잔잔한 호수위에 청초하게 피어난 水蓮같 은 생애였다.
원기 49년 제9회 임시수위단회에서는 그의 공덕을 기리며 大奉道의 법훈을 서훈키로 결의하 였으며, 원기 62년 제71회 수위단회에서는 법위를 出家位로 추존하고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했다.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
후진들의 온갖 세정 보살핀 대자모
초창기 어려운 교단을 돕기 위해 평생을 흔적없이 도왔던 육타원 이동진화 종사. "나는 종사님 심부름이나 잘 할라네"라며 일은 앞에 서서 하나 공은 뒤로 물리는 공성신퇴(功城身退)의 일생이었다. 이러한 그의 신성과 생애를 나주교당 방길튼 교무가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를 통해 밝혔다.
방 교무는 "그가 소태산에게 귀의하기 전 삶은 왕궁가의 첩이었다"며 "일찍 양친을 여의고 어린시절부터 형제 친척에 의탁해 살다가 18세시 소실로 들어가게 됐다"고 밝혔다. 이동진화 선진은 가난한 양반 집안 출신으로 보이며, 당시 몰락양반 집안에서 양첩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당시의 삶을 언젠가는 시들어버릴 '꽃병에 든 꽃'과 같은 신세라고 한탄했었다고 한다. 방 교무는 "그의 일대 전환기는 박사시화를 통한 소태산과의 만남이었다"며 "소태산의 비범함을 본 후 한평생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각성이 들자 소태산 문하에 입문하게 됐다"고 말했다. 원기9년(1924) 소태산은 최도화를 길잡이 삼아 남대문정거장(現 염천교 아래)에서 내려 숭례문 근처의 태평여관에서 일숙했다. 또 성성원의 집에서 2~3일 유숙하면서 일행인 서중안의 주선에 의해 당주동에 경성임시출장소를 마련하게 된다. 이곳에서 박사시화에 의해 북촌 가회동에 살던 궁가의 여인, 이동진화는 소태산에게 안내된다.
방 교무는 "이동진화 선진의 법명은 소태산의 소재를 물어물어 만덕산을 찾아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며 "'동쪽(東) 하늘에 번쩍번쩍 진동(震)한 불꽃(華)'을 통해 볼 때, 만덕산을 찾는 사건이 동진화(東震華)의 기연으로 여겨진다"고 설명하며, 권동화 선진의 구술자료를 소개했다.
'경험 없는 산길이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어찌할 바 모르는데 날은 어두워 오고 갑자기 으슬으슬 몸이 떨려왔다. 이때였다. 뇌성벽력 같은 큰소리가 산 위에서 울려 나왔다. "어서 정신 차려 이리 올라오시오!" 소리 나는 쪽을 향하여 허위허위 올라가니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선생님이 아닌가. 생불 도인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그네들은 반가움과 안도의 숨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동쪽 하늘에 번쩍번쩍 꽃이 피고 뇌성이 울고 비구름이 몰려오고 광풍이 휘몰아치며 거세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육타원종사문집> 권동화 구술)
이후 그는 회상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게 된다. 원기11년 음력 7월에 경성회원 10여 명이 경성출장소 설립 발기를 하자, 이동진화는 자신의 수양채인 창신동 605번지의 목조 초가 2동과 대지를 희사한다. 원기13년에는 인재양성소 창립연합단의 거진출진 제1회단에 소속되며, 의견제출로 양잠조력의 수수료로 단금 납입 안과 회채 보상에 관한 제의, 조실 사무실간 초인종 가설 안을 제출하는 등 적극적인 교단활동에 나선다. 또 원기15년 소태산은 임시여자수위단을 최초로 구상하는데 이동진화를 수위단 단원에 임명한다. 원기18년에 전무출신을 서원한 그는 바로 경성지회 여자 교무에 임명된다. 이후 경성지부 순교, 서울지부 교무, 전재동포구호사업 후원 등 어려웠던 한국 사회 속에 처했던 교단에 최선을 다해 봉직하게 된다.
방 교무는 "그는 사업과 공부에도 정성을 다했던 선진이었지만 무엇보다 후진들에게 세정을 통해 준 상담자로 기억되고 있다"며 "당시 총부는 구조실에는 응산 이완철, 금강원에는 육타원 이동진화 선진이 상주하면서 모든 후진들의 온갖 세정을 보살펴 주었다"고 말했다. 응산과 육타원은 경성지부 돈암동 회관에서부터 익산총부에 이르기까지 도량을 훈훈하게 감싸는 환상의 투톱이었다. 후진들이 육타원을 부를 때는 사제관계보다는 따스한 정의가 건네는 정겨운 호칭으로 여겼는데 '육타원'은 곧 어머니, 할머니와 동격이었다.
육타원은 평상시처럼 목욕제계하고 소태산 대종사 성탑을 참배하며 노년의 일상을 보낸다. 그러던 중 원기53년 1월16일 조반 뒤 서울에서 찾아온 교도들을 종법원으로 안내하여 종법사께 인사를 올리게 한 후 금강원에 돌아오다 갑자기 쓰러져 43시간 동안 깊은 잠 속에 빠진다. 원기53년 1월18일 결국 세수 75세를 일기로 열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