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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임경석 교수는 최근 출간한 ‘이정 박헌영 일대기’에서 “소설 속의 주인공 김동렬은 박헌영을, 그의 연인 강세정은 주세죽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동방의 애인’은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 혁명을 위해 활동하던 청춘 남녀들의 인간 관계와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심훈(1901~1936)은 이 소설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정지처분을 받았다.
책에 언급되진 않았지만, 임교수가 이 소설 주인공을 박헌영 부부로 보는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심훈과 박헌영은 친분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은 경성고보 동창생이다. 두 사람이 중국으로 유학을 간 시기도 거의 엇비슷하다.
박헌영은 1921년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유학을 간 것으로 전해진다. 심훈도 3·1운동 가담 혐의로 투옥됐다 풀려난 뒤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 1923년 귀국하자마자 당시 급진적 문예조직이던 ‘염군사’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입한 것으로 봐선 중국 유학시절 사회주의 사상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임교수는 “심훈은 상하이 시절 박헌영과 함께 혁명 운동에 참가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적었다.
“심훈은 뒷날 쓴 시에서 자신과 박헌영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사이였다고 표현한 바 있다.”
심훈과 박헌영은 신문사에 몸담았다는 공통점도 있다.
임경석 교수가 집필한 `박헌영 일대기'에 수록된 관련 사진.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설 각국 혁명가들과 함께 한 박헌영(앞줄 오른쪽 세번째).주세죽(가운데줄 오른쪽 세번째), 김단야(앞줄 왼쪽 두번째), 호치민(뒷줄 오른쪽 끝)이 보인다.//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4.4 .1 (서울=연합뉴스)
① 노획된 사진 1949년 박헌영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일성(왼쪽)이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 주고 있다.
노획문서에서 박헌영과 마주치다
해방후 강철같은 혁명가로 비유되던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 1946년 중반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평양으로 건너간 중년의 이 사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옆에 26살의 새 신부 윤레나가 다소곳이 서 있고, 풍채 좋은 김일성이 파안대소로 축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1949년 9월에 찍은 결혼식사진이다. 불과 몇 년 뒤 세 사람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라졌다. 박헌영은 ‘혁명동지’의 손에 의해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고, 윤레나와 그의 아이들의 운명 역시 비감해졌다. 음울한 눈빛의 박헌영이 약간은 의외이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찍은 결혼축하기념 사진첩은 1950년 평양을 점령한 미 극동군사령부에 노획되었다....-<한국전쟁>의 저자 정병준 목포대 교수의 한겨레 기고문에서..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과의 인터뷰
때 : 2001년 3월 20일 2시, 2001년 6월 6일 그리고 2001년 6월 18일 장면 1: 1956년 7월 19일 동틀 무렵, 평양 인근의 어느 야산 기슭. 방학세 : 박동무, 동무의 죄과를 이제서야 청산할 수 있게 되었소. 방학세 :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소?
방학세 : 물론이지. 시간이 흐른 만큼 세상도 많이 변해버렸지. 스탈린 동지도 서거했고, 전쟁도 끝났으니까. . . 방학세 : 하지만 미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을 몰아내지 못한 반쪽 승리에 불과하오. 눈을 감으시오. 이젠 갈 시간이 됐어.
장소 : 강남 한 식당(진달래), 경기도 어느 국도변 사찰(만기사)
박헌영 : . . . . . .
박헌영 : 오랫 동안 태양을 보지 못했어. . . . 해가 뜨려면 아직 멀었는가?방학세 : 시간도 시간이지만 안개 때문에 그건 포기해야할 거요. 내가 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소.
박헌영 : 시간이라. . . . 멈춰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사이에도 시간은 흘렀던 모양이군 . . . .
박헌영 : 그렇군. 전쟁이 끝났단 말이지 . . . .
박헌영 : . . .진정 해는 뜨지 않는군. . . 동지들이 원하는 나머지 반쪽의 승리를 . . . 내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눈을 감으며) 한산! 네게 너무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는구나. . .
조선공산당의 당수이자 남조선 노동당 부위원장, 그리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그의 이름 앞에 늘어놓은 긴 수식어 대신, 지난 50년간 우리는 그를 매우 간명한 수식어로 꾸며주었다. '빨갱이' 혹은 '미제의 간첩'. 북한의 前職 고위관리였던 강상호씨와 박길룡씨의 증언에 따르자면 박헌영은 1956년 7월 19일 경, 평양 근교에 있는 한 야산에서 북한의 내무상이었던 방학세에 의해 처형되었다고 한다. 박헌영의 최후에 대한 또 다른 증언은 그가 1955년 12월 15일 재판이 종료된 직후 교수형에 처해졌다고 하기도 하고. 인터뷰는 박헌영의 죽음에 관한 것은 물론 아니다. 박헌영에 대한, 조선공산당 그리고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에 대한 평가를 의도하지도 않는다. 오늘 우리가 만날 사람은 단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애써 되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의 아들일 뿐이다. 아들의 이러한 소박한 희망은 그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무척이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또 앞으로도 당분간은 그럴 것으로 보인다.
"내가 길어 온 물은 그저 江에서 퍼 왔을 따름이예요. 돌아 보니 그 江의 이름이 아버지더군요."
스님과의 인터뷰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이 류준범씨로부터 왔다. 평일 낮으로 시간을 잡았던 것은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스님의 성격 탓이리라. 하지만 예상밖으로 한식당 안은 무척 시끄러웠다. 칸막이 저쪽 편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 때문에 먼저 도착했던 퍼슨웹 인터뷰어와 류준범씨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강남 계꾼들의 모임인 듯 했다. 긴장한 탓인지 처음 다루어야 하는 녹음기기가 못마땅한 듯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만지작거렸다. 인터뷰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를 찬찬히 다시 확인해야 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머리 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 주시려나. . . .'
10분 정도 기다렸을 때,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허름한 점퍼를 입은 거구가 몸을 드러냈다. 스님이었다. 승복 입은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첫 인상은 의외였다. 표정도 약간은 험상궂었기(?) 때문에 적잖이 긴장하고 있던 인터뷰어들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스님이 자리에 앉고, 종업원이 물컵에 물을 채우는 동안에도 퍼슨웹의 인터뷰어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전화로 인사를 드릴걸'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어렵게 어렵게 첫마디를 꺼냈다.
퍼슨웹> 안녕하십니까, 스님. 류준범씨(『박헌영 전집』 편집작업 참가, 서울대 강사)한테 전해 들으셨겠지만 저희는 「퍼슨웹」이라고 하는 인터넷 잡지입니다. 인터뷰만 전문으로 하는 곳입니다. 먼저 인터뷰를 허락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집』도 나오고 또 한번 뵙고 싶기도 해서 겸사겸사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인터뷰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그저 스님 살아오신 이야기를 저희에게 들려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 . .
원경> 허허...
스님은 그저 웃기만 하셨다. 지난번 『역사비평』에서 같이 인터뷰를 하셨던 윤해동 선생께 동석해 주십사고 하는 부탁을 드린 상태였지만 아직 도착하질 않으셨다.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서였건만, 늦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인터뷰어의 난처한 표정을 읽었는지 옆에 있는 류준범 씨가 거들고 나선다.
류준범> 뭐 그렇게 학술적이거나 딱딱한 내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난 번 역비 인터뷰하고는 좀 분위기는 다를꺼 같네요.
원경> 내가 한다고 대답은 했는데. . .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말이야. 허허.... 질문 내용을 조금 알아야겠다고 했는데. . .
퍼슨웹> 장기수 분들을 인터뷰할 때도 느꼈습니다만, 저희가 전후 사정을 모두 안다거나 또 이런 저런 것을 꼬치꼬치 캐묻는 인터뷰라기 보다는, 그저 그 분들이 살아오신 이야기라든지 그런 걸 자연스럽게 이야기해주시는 게 좋았습니다. 저희들이 스님께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여러 번 부탁을 드렸던 것은 『박헌영 전집』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스님과의 인터뷰가 의미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대학생들 가운데는 박헌영이 누군지도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현대사를 잘 모르는 거지요.
비단 학생들 뿐 아니라, 한때 역사의 한 가운데 있었던 박헌영이란 존재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박헌영 전집』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그런 내용을 좀 전달해주고 싶었습니다. 또 선친의 활동이, 인생이 어떤 의미를 가질지도 그렇구요. 그런 부분에 대해 담담하게 말씀을 해 주시면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원경> 『전집』은 제가 잘 몰라요. 어떤 자료를 어느 정도를 모았는지 잘 몰라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자료라는 것은 한평생 가더라도 다 확보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전집』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자료를 내가 찾아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예를 들어 러시아의 대통령궁이나 KGB 문서보관소 등에 있는 박헌영 선생에 대한 파일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파일 같은 것 말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박선생'이 일제시대 때 투쟁을 하시면서 지하에서 계시다가, 南行(대구-광주)을 시도하시고, 해방이 되어서 서울에 나타나셨을 때, 사람들이 말하는 '8월 테제'말이지요. 이것이 (당시에)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분이 벌써 지하생활 하면서 구상 속에 있다가 나온거라고 생각하거든요. 해방이 되면서 정리가 되었다고 보거든요. 8월 테제보다 뭐 더 중요한 것은 그 당시 서울 부영사(샤브신)로 와 계시던 분을 통해서 스탈린 원수한테 보낸 「정책입안보고서」라는 것이 있거든요. 내가 자료를 찾고자 한다는 것은 이것을 찾기 위한 작업입니다.
샤브신은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서울에 있던 러시아 영사관 부영사로서 당시까지는 가장 믿을만한 '조선통'이었다. 샤브신의 부인이었던 꿀리꼬프 샤브시나 여사는 박헌영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해서 해방 이후 남한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1945년 남한에서』(한울)라는 글을 남겼다. 스님은 선친에 대한 호칭으로 '박선생'이라는 일반명사를 사용했는데, 선친인 박헌영 선생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지는 스님의 평생 고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원경> 「정책입안보고서」라는 것은 해방 정국에 대한, 남북한에 대한 당신(박헌영)의 구상이랄까 설계라고 할까? 아무튼 그런 종류의 문건입니다. 이것을 정식으로 그분(샤브신)을 통해서 스탈린 원수한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걸 현재까지 찾덜 못했어요. 대통령궁에 있는 문서보관소에는 연락이 안되고, KGB도 안되고. 또 한번은 (박헌영 선생이) 북쪽에 가셨을 때, 그 당시 스탈린 측근에서 (박헌영 선생에게) 다시 또 요구했습니다. 「정책입안보고서」를 다시 올리라고 말이지요. 남쪽에 있을 때 생각과 북쪽에 있을 때 생각이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지를. 레베데픈가 그 분을 통해서 정식으로 다시 전달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찾는 것만이, 그것으로서 박헌영이라는 선생에 대한, 그분에 대한, 그분이 공산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민족적 공산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든, 그분이 생각했던 우리 조국에 대해서 구상해 놓은 것을, 이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당부를 '누구'한테 받았어요.
원경 스님 인터뷰 녹취를 가다듬으면서 참으로 인생이란 길다고 느낀다.
특히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 '인생'이란 특별히 길고 또 깊은 시간이다. 원경스님에게도 그 시간은 길고도 깊었고 그만큼 많은 사람과 사건이 그 깊은 골 속에 묻혀있었다. 때로는 이름을 밝히기도 했지만, '누구' '어떤 사람' 등등으로 끝내 꺼내놓지 않은 인물들도 꽤 있었다. 스님은 여러번 '누구', '어떤 사람'들에 대해 언급했지만 기억에 남은 인물은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런 당부를 '누구'한테 받았어요"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는 스님의 표정에서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곧 영어 단어 하나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Deep Throat'
비록 영화(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였지만 워터게이트 사건의 본질에 접근하는 통로를 열어준 '익명의 제보자'를 가리키는 단어다. 스님이 인터뷰 시작 이후 처음 사용하신 비인칭 대명사 '누구'로써 지목했던 이 신비로운 인물은 원경 스님과의 인터뷰 내내 부침을 거듭한다. 어쩌면 스님과의 인터뷰를 거대한 하나의 '수수께끼'로 만들어버릴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첫댓글 거꾸로 된 대한민국이다......누가 애국하라고 할수 있는가.......참 답답한 현실이다......
일제시기 독립운동 으로 일경에 체포된경력이 있는 인사들중 석방된 사람들의 공통점 한가지가 변절된후 철저한 일본 첩보부대의 사냥개가 되었다는것이다. 그리고 해방후 그들의 행보또한 미군 cia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 또한 생각해볼만한 문제가 아닐까? 진실은 하나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