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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75) 2026. 8. 9
마음에 격분하여
행17:16-21
<베뢰아에서 떠나다>
데살로니가에서 유대인의 박해를 피해 베뢰아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전례대로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은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11절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 ‘더 너그러웠습니다.’ - ‘편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달랐던 것입니다.
3)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매일같이 성경을 연구했던 것입니다(‘고난받는 메시아’(행17:3-4)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속적인 사역).
그 결과, 유대인 중에도 많은 사람이 믿었고, 헬라인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의 선교 여행 중,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이런 곳이라면 얼마든지 오래 머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그리 오래 머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베뢰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들은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이곳 베뢰아까지 원정을 와서(약 80~100km 거리),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살기등등했던지, 베뢰아의 형제들은 우선 급한 대로 바울을 데리고 항구로 피신을 시켰습니다. 아직 실라와 디모데는 합류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항구에서 제일 빨리 떠나는 배를 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배는 ‘아덴’(Athens, 아테네)으로 가는 배였습니다(480km). 베뢰아의 형제들은 함께 배를 타고까지 동행했습니다(박해를 통한 선교의 확장,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까지).
아덴에 도착한 바울은 자신을 데려다준 형제들을 다시 베뢰아로 돌려보내면서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오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올 때까지 바울은 한동안 아테네에 혼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최소한 8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빨리 잡아도, 함께 온 베뢰아의 형제들이 다시 베뢰아로 돌아가는 데 나흘, 그리고 실라와 디모데를 다시 아덴으로 데려오는 데 또 나흘, 그러니까 아무리 빨리 잡아도 최소 8일은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그렇게 시간에 딱 맞게 움직였을 가능성은 없음, 실제로는 상당 시간이 더 걸렸을 것).
<우상의 도시 아덴>
바울은 동역자들을 기다리면서, 그동안 소문으로만 듣던 아테네를 직접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16절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아덴은 BC 5세기 이래로 가장 중요한 도시국가였습니다. 이 도시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학문과 예술, 정치, 과학, 철학 등 서양 문명의 근원이 되는 유산이 풍부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네 자신을 알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철학계에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수많은 거장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읽을 만한 책들로 가득 찬 도서관이 있었고, 아름다운 그림과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멋진 음악 소리가 들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위세를 자랑하는 도시였습니다. 시내 전체가 박물관처럼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또한, 장터(‘아고라’ - 일종의 광장)에서는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모여 예술을 논하고, 철학을 논하는 등 토론 소리가 가득한 활기찬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제국에 합병되고 난 다음에도 그 철학적, 문화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나라는 로마제국이지만, 문화적으로는 헬라제국이었던 것입니다.
<마음에 격분하여>
아마도 그 도시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입이 딱 벌어질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난 요즘, 그 도시의 유적들만 보아도 감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도시를 처음 방문한 사도 바울의 입에서는 감탄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음에 ‘격분’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우상숭배를 기초로 세워진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우상이 가득하다’라고 표현했습니다(한 마디로 아덴에서 사는 것은 우상의 숲속에서 사는 것).
일반 사람들의 눈에 부러움과 감탄의 대상이 된 것들이 바울의 눈에는 분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실제로 아테네에는 그리스 신화(神話)에 나오는 신들을 위한 크고 작은 신전들과 신상들과 제단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당시 아덴에는 약 25,000~30,000개의 우상이 도시를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합니다. 실제로, 그리스(아테네)를 방문해 보면, 웅장하고 아름다운 고대 건축물들은 신들을 모시는 신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에는 도시마다 높은 언덕의 아크로폴리스가 있었습니다(도시 중심에 있는 언덕을 다 아크로폴리스라고 부름). 그중에서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가 가장 유명한 것은 파르테논(Parthenon) 신전(아테네의 수호 여신인 아테나를 모시기 위해 기원전 438년에 준공, 파르테논 신전 안에는 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12m 높이의 거대한 아테나 여신상이 서 있었음) 때문입니다. 바울이 아덴에 있을 때 이 신전을 보았을 것입니다. 역사의 부침 속에 지금은 다 파괴되었고, 기둥만 (복원되어) 남아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 외에도 니케(Nike) 신전, 여성 조각상으로 기둥을 세운 에레크테이온(Erechtheion) 신전 등이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남쪽에는 아테네가 연극의 발상지라는 것을 보여주듯, 최대 만 7천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디오니소스 극장이 웅대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아래로는 동남쪽에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기둥만 100개가 넘고 그 당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신전이었습니다(BC 6세기). 아테네를 방문한 바울은 100개가 넘는 기둥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제우스 신전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세상의 화려함을 영의 눈으로 보고 판단해야). 겉으로 드러난 현상보다는 그 현상이 나타나게 한 내적인 정신세계를 보아야 합니다(신앙의 눈으로).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다>
마음에 ‘격분’이 일어난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17절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회당에서, 장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였습니다. 변론’(辯論)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리를 밝히는 논쟁’입니다. 이성적이고 지성적인 태도처럼 보이지만, 논쟁은 반드시 말싸움(논쟁을 넘어선 다툼)으로 발전하게 되어있습니다. 분노에 휩싸인 바울은 그들과 다투어서라도,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가짜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우상 숭배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대신에 변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분노’의 마음을 품고 ‘변론’을 했기에, 결과적으로 아덴에서의 사역은 실패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격분’의 감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증인에게 필요한 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지, 격분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논쟁을 통해서 설혹 상대방을 굴복시키고 승리할 수는 있지만, 결코 상대방의 마음을 얻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설혹 상대방의 잘못이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대해서 화를 내고 싸우려고 덤벼들면 그 사람의 마음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정당한 논리로 상대방을 굴복시켰다고 하더라도, 논쟁은 결국 상대방을 적으로 만들 뿐입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기를 비우심으로 복음이 되셨습니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태도로는 그러한 섬김과 십자가의 길을 제대로 전할 수 없습니다.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바울이 만나 변론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아테네에 살고 있던 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18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당시 아테네를 주름잡고 있던 두 주류의 철학이 있었는데, 하나는 ‘에피쿠로스 학파’와 다른 하나는 ‘스토아 학파’였습니다. 이 두 가지 학파의 사유체계는 아주 대조적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그 시조인 에피쿠로스(Epikuros, 342-270 B.C.)의 이름에서 유래합니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동요로부터의 자유’로 규정합니다. 쾌락이란 모든 육체적 정신적 불안에서 해방된 상태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하여 쾌락을 추구하여 삶의 행복을 이루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물론 이 쾌락은 말초적인 욕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쾌락 추구는 필연적으로 육체적 타락을 가져왔습니다. 한 마디로, 아테네의 타락한 쾌락 문화에 정신적인 배경이 된 학파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제논(Zenon, 340-265 BC)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래 스토아(stoa)란 전방을 기둥으로 후방을 벽으로 둘러싼 건축물을 의미합니다. 제논이 아테네의 한 ‘주랑’(柱廊)(스토아)에서 강의를 한 데서 이 학파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 스토아 학파의 주장은 에피쿠로스 학파와 정반대입니다.
이들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는 ‘금욕’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을 중요시했으며 이성으로서 자기를 통제하는 금욕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이 사람들은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범신론 사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아테네 사람들의 우상숭배의 정신적(종교걱) 배경이 되었습니다(‘이름을 알 수 없는 신’의 제단, 23절).
이 두 학파가 서로 대립하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 헬라의 이원론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과 육을 철저히 구별하는 것입니다. 영은 구원받아야 귀한 존재이지만, 몸은 버려져야 할 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몸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일원론 - 영과 몸의 구원.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그리하여 바울과 그들의 변론은 ‘쟁론’으로까지 번졌습니다. 더욱 심한 다툼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구약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어릴 때부터 헬라어로 고등교육을 받았던 바울은 그리스 철학에도 밝았기에 그들과의 논쟁에서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라고 합니다. 즉 조롱이 섞인 말이지만, 역설적으로 바울이 논증에 엄청 능했음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도들을 ‘말쟁이’라고 놀라곤 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원조가 바로 바울입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기는 했습니다. 초기 한국 교회 안에서 현대 교육을 받은 성도들은 말을 조리 있게 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화로 이길 수 없자, ‘말쟁이’라고 조롱한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이를 자극받아 실천하는 사랑으로까지 나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약2:14~17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또 어떤 사람은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라고 합니다. 그저 또 하나의 이방 신을 전하는 한 사람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의 공개적인 변론>
논쟁(쟁론)은 공개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아고라(장터)에서 바울과 논쟁을 벌이던 철학자들이 바울을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갑니다.
19~20절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아레오바고(‘전쟁의 신의 언덕’)는 아테네에서 북서쪽에 위치한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언덕인데, 주로 이곳에서 시민들은 공개강연이나 재판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여자들은 들어올 수 없는 곳이며, 남자들 중에서도 대단히 지적인 부류의 리더들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도 이곳에서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곳 ‘아레오바고’에서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시간에).
(사진 보기 – 아레오바고와 바울의 기념비)
지금 아레오바고를 가보면 높지는 않지만 조금 올라가서 언덕 맨 위 한가운데에 바로 그 자리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음을 나타내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레오바고 정상으로 올라가는 정면 계단 오른쪽에는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설교한 내용(행17:22~31)이 새겨진 동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울을 붙잡아 아레오바고로 간 것은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을 재판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그들이 듣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이상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부활’은 그들에게 이상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 그 한 사람이 죽음으로 모든 사람의 죄가 사함을 받고, 그 한 사람이 부활함으로 모든 사람이 영생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식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와 부활’에 대해서 바울로부터 조금 더 자세하게 듣기 위해 바울을 복잡하고 시끄러운 시장에서 저 위에 있는 아레오바고로 데리고 간 겁니다.
복음을 공개적으로(공식적으로) 전할 기회를 얻은 바울은 최선을 다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바위 위에 올라,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역사’에 대해 증언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소수이지만, 귀한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34절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거기 모인 사람들의 특징>
한편 아레오바고에 모이는 사람들의 특징을 본문 21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21절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2천 년 전 아테네 사람들의 가장 크고 주된 관심사는 뭔가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 혹은 주장을 듣고 논쟁하는 것이었습니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위대한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책 속에서 주전 5세기 아테네의 정치가 클레온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너희들은 새로운 것이라고 하면 금방 속아 넘어가는 인간들이구나!”하고 비난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와 부활’이 자기들의 이성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이상한 내용이었지만, 지금까지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이야기였기 때문에 새롭다는 이유 한 가지만으로 조금 더 들어보겠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새것에 대한 그들의 지적인 호기심, 지적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덴으로 대표되는 모든 도시들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날의 대도시들을 보십시오. 미국의 뉴욕이나 유럽의 파리나 런던, 로마, 또 아시아의 도쿄나 서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대도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 특징 중 하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해 관심이 높다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뭔가 특이한 것, 이상한 것,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새로운 옷, 새로운 헤어 스타일, 화장법, 화장품, 디자인, 구두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새로운 단어인 ‘신상’까지 나왔습니다. ‘새로운 상품’입니다. ‘신상’이 아니면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밉니다[저는 ‘철지난’ 제품만 모아서 파는 아웃렛(할인매장)이나 당근에서 사도 좋던데….].
이토록 새로운 것만 추구하는 것은 장단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열정은 찬란한 헬라 문화를 꽃피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치명적 단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진리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두 주제 - 기다림과 반복>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두 주제는 기다림과 반복입니다.
우리는 주님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면서 주께서 명하신 일들을 날마다, 혹은 매 주일 반복합니다. 예배를 반복하고, 기도와 말씀 묵상을 반복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일들을 반복합니다. 우리를 구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전에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말씀, 이미 우리가 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들어야 할 바로 그 말씀입니다(찬송 205장 ‘나 항상 듣던 말씀 또 들려주시오’ - 목사들이 제일 좋아하는 찬송^^). 매일 반복해서 밥을 먹듯이 말씀도 반복해서 듣고 묵상합니다. 듣고 또 듣고 주님 오실 때까지 이렇게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맺는 말씀 – 구령의 열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도시도 아덴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고, ‘새로운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진리를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말쟁이’란 조롱까지도 극복하고, ‘분노’가 아닌 ‘구령의 열정’(안타까운 마음)으로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오늘도 진리를 모른 채, 죽음의 길로 내달리는 이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을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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