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원래 영화를 좋아 합니다.
하지만 휴일이 따로 없는 경매컨설턴트의 직업 특성상
직접 극장을 가서 관람하기 보다는 씨네폭스나
파일조에서 컴퓨터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영화 '1987'의 경우
저와 직접 관련이 있는 내용이라 1월1일
모처럼 시간을 내어 극장을 방문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화대금은 순수한 제 카드로 직접 결재하여 비용부담 하였고
어떠한 협찬이나 홍보의뢰 없이 단순히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자 하는 관람객 입장이었음을
밝혀 드리며 이후 글의 편의상 존칭을 생략 하여
작성 하겠으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
1986년 서울아시안 게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며
국가적으로나 국민들 마음속에도 자부심이 생기게 되었고
거꾸로 민주화에 대한 열망의 씨앗도 자라는 계기가 되었다.
*1987년1월14일*
당시 서울대생이던 故박종철 열사는 학생운동을 하던
수배자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한 경찰에게
강제 연행되어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10시간 이상
각종 고문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수차례 가해진
물고문으로 사망 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다.
다음날(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군 친구의 소재를 묻던 중
책상을 탁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 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며
단순 쇼크사로 공식 발표했다.
*1987년1월19일*
그러나 강민창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부검의(剖檢醫)의 증언과
언론 보도 등으로 의혹이 제기되자 사건발생 5일 만인 19일에
물고문 사실을 공식 시인했고 수사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등
2명을 구속했다.
당시 나는 이러한 언론의 발표를 100% 신뢰하고 믿고 있었으며
새롭게 시작할 대학생활에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1987년3월*
나는 서울시 서대문구 남가좌동 소재
**대학 경영학과에 87학번으로 합격하여
체육관에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마친 후
처음으로 캠퍼스로 통학 하게 되었다.
(당시에 **대는 남가좌동 캠퍼스를 명지대학교와
명지전문대가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고 나중에
명지대학교 자연캠퍼스는 경기도 용인시로 이전 하였고
현재 남가좌동에는 명지대학교 인문 캠퍼스와
명지전문대만 남아있다.)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처음 캠퍼스에 발을 디뎠을 때의 충격을 선명히 기억 한다.
그것은 내가 당초 생각하던 대학 캠퍼스의
낭만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 정문을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동아리 회원을
모집하는 선배들이 나와서 반겨 주었는데 한쪽에
몇 명의 대학생들이 ‘광주학살 책임자 전두환을 처단하자’
‘군부독재 타도하자’ 라는 등의 살벌한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일부 글자는 붉은 색 페인트로 칠해져 마치
피를 연상케 하는 듯 섬뜩하고 무섭기 까지 하여
나는 그들을 슬그머니 피하고 다녔다.
나의 본적은 경상북도 예천군 이며
출생지는 대구광역시 원대동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정통 TK(대구경북)진골 출신으로
어린시절 부터 어른들에게 가난을 몰아낸
박정희 대통령의 찬양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자 나는 내 개인 비밀 비망록에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애통해 하는 헌시를
직접 작성하여 바치기 까지 한 사람 이다.
또한 당시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광주사태는
일부 불순분자와 무장폭도들이 일으킨 반란 이라고만
언론을 통해 알고 있었는데 어찌 선배들은 광주학살이라고
표현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987년4월13일*
18년 동안 독재를 하던 대통령 박정희가
1979년10월26일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 총탄에 의해
사망하자 급작스럽게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당시 박정희는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령부를
통하여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대통령 시해 혐의로 전두환의
지시를 따른 헌병감 김진기 준장에게 체포 되면서
국군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全斗煥)에게
모든 권력과 정보가 몰리게 되었고 전두환은
이를 이용하여 1979년12월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면서 군권을 장악하여
명실상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 하였다.
전두환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1980년5월17일
계엄령을 확대 하면서 김대중/김영삼/김종필등
정계를 대표하는 3김을 체포 또는 가택연금하고
그 외 정치세력을 모두 체포 하였다.
이처럼 계엄이 확대되고 김대중 등의 정치인이 체포되자
분노한 광주시민들은 1980년5월18일 민중혁명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은 선량한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잔인한 진압을 감행 하였고
심지어 진압부대는 평화적인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여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기 까지 하였다.
이러한 광주518민중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전두환은 자신이
스스로 대통령이 되고자 최규하 대통령을 하야 시키고
장충체육관에서 군부의 호위를 받으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간접 선거에 무소속으로 단독 출마해
99.9퍼센트(2524표) 지지율로 제 11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 하였다.
이후 또다시 체육관 선거를 통하여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영구집권을 획책하기 위해 자신의
친구이자 육사동기인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고 자신은 일해재단을 통해 노태우를 뒤에서
조정 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러한 영구집권 계획의 일환으로
전두환은 당시 국민들이 열망하던 대통령을
‘국민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를
외면하고 소수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체육관에서 모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의원
간접선거가 규정된 헌법을 개정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413호헌조치'를 발표 하였다.
대학에 들어가 내가 본 세상은 그때까지 내가 알던 곳이 아니었다.
전두환은 강압적인 탄압정책을 통하여 언론을 장악하고
'보도지침'을 통하여 자신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내보내면서 국민과 여론을 현혹하고 있었고
광주의 양민을 학살하고 꼭두각시 노태우를 통하여
영구집권을 꿈꾸었다.
나는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비겁하게도
전두환의 이러한 413호헌조치에 맞서 다른 선배들처럼
용감하게 앞장서 나가 ‘광주학살 책임자 전두환 처벌’
‘군부독재 타도’의 구호를 외칠 용기는 없었다.
무엇보다 나는 대학등록금을 전액 내가 벌어서
내야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계속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었고 하루라도 쉬게 되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상태 였기 때문 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 보는 데서는 전두환 욕을 하지만
앞장서지는 못하고 단지 선배들이 시위를 할 때
지나가면서 인사도 드리고 가끔 음료수나 사다 드리며
감사함을 표시할 수밖에 없었다.
*1987년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경찰관 2명의 일탈로
발표된 故박종철열사의 고문치사 사건이
실제는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8과장 황적준의 부검소견서가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요청으로 '외상 없음'으로
조작되었고 박종철열사 고문치사에 가담한 경관도
이미 구속된 조한경/강진규 외에 3명의 경찰관
(반금곤, 이정호, 황정웅)이 더 있는데 이를 경찰이
은폐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발표하여 온 국민의
충격을 자아냈으며 언론은 최초의 고문 가담자
2명에 대한 경찰간부들의 회유과정을 끈질기게 추적했다.
결국 여론의 압력에 밀려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임하고
박종철열사 고문 치사에 가담한 사실이 추가로
확인된 3명의 경찰 반금곤/이정호/황정웅과
고문치사의 은폐·조작에 관련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을
비롯한 박처원 치안감/유정방 경정/박원택 경정 등
다수의 경찰간부가 구속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나는 완전히 전두환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학교에서는 처음 몇 명이서 하던
전두환 독재타도 시위가 몇 십 명으로 불어나게 되었다.
*1987년6월9일*
계속되는 전두환의 강압적인 독재에 국민들의 증오는
들끓어 오르기 시작 하였고 학내 시위는 어느새
명지대학교와 명지전문대생 그리고 여학생들까지
백여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커졌다.
그러는 와중에 서울 연세대학교에서 시위에 참여한
‘이한열’ 군이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을
뒷머리에 맞고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註1)
註1)영화를 보면서 내가 눈물을 쏟은 장면이다. 마침 영화를 본
롯데월드타워에서는 어제 밤에 2018년 새해맞이 성대한 불꽃놀이가
열렸는데 만약 이한열 열사가 살아 있었다면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불꽃놀이를 감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