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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 후손의 변명' 조상 배설과 명량을 읽다
[프로파일러의 범죄이야기] 반역자도 많구먼
2014년 09월 29일 09:56 오전
어렸을 때 아버지가 족보 얘기와 조상 얘기를 할 때 늘 언급하던 줄거리는, 딱 세 개, 박혁거세와 함께 신라를 건국한 6촌 중 배씨도 그 하나라는 것, 왕건의 개국공신 배현경, 이성계의 개국공신 배극렴이었다.
신라 6촌 개국설화를 포함, 후세가 왕조의 개창이라는 영광과 함께 역사적으로 기억하는 인물들에 대한 일이었다. 그러나 삼별초의 배중손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의 일이었다. 그것도 역사책을 직접 보고 알게 된 것이다. 배중손이 대몽항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데, 그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 하지 않고…
그런데 이유는 간단하다. 배중손은 대몽항장을 이끌기는 했지만 몽고에 항복한 고려 조정에 대해서는 반역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대대로 고려 조정에 반역자였던 낙인을 끝낸 것은 이성계의 오른팔로 활약했던 배극렴이었다.
배극렴은 어린 창왕을 끌어내서 죽인 그 인물이다. 그렇지만 고려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배극렴은 이성계라는 반역 수괴의 앞잡이임에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왕건의 최측근 배현경도 이런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만약 신라의 건국설화에서 6촌이 역사적 사실이고 그 중 하나가 배씨 성을 가졌다면 배씨들은 신라 왕조를 떠받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물론 천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그 집단의 중요한 구성원이 신라 왕조에 대해 반역을 꾀했던 왕건의 최측근이 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물론 배현경은 실제 태생이 배씨 성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라 왕건에 의해 배씨로 사성된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아마도 신라 왕조를 떠받치는 중요한 집단을 회유하거나 분열시키기 위해, 왕건이 벌인 고도의 정치적인 한 수였을 것이다.)
어쨌든 배현경은 왕건의 최측근 6인 중 하나로 고려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그 집단이 무신정권에서 대몽항쟁이 이끌던 배중손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렇듯 왕조가 바뀌면서 충신과 역적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배설의 경우에도,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사만 보면, “배설은 적이 많이 올 것을 염려하여 달아나려고 했으나, (중략) 몸조리 좀 해야 하겠다고 하였다. (중략) 배설은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렸다.” 그 이틀 뒤엔 “오늘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 후 배설은 본가에 있다가 정유재란이 끝난 뒤 권율 장군에게 붙잡혀 서울에서 참수됐다고 한다.
물론 배씨 후손들은 이에 대해 “휴양 중에 느닷없이 모반죄로 모함을 받아 처형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참수 6년 뒤 조선 조정이, 배설이 전쟁 중 세운 공을 인정해 1등 공신으로 삼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아마도 조선 왕조가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면 배설은 1등 공신이고 그 후손들은 1등 공신 가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칠천량’의 패전을 포함, 전반적으로 볼 때 배설이 전쟁 중 소극적이었고 전장에서 장수의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물론 후손들은 모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왜란 이후 전쟁 중의 공과를 둘러싼 치열한 당쟁을 생각하면 1등 공신이 된 것은 전쟁 중 공을 세워 그리한 것이 아니라 조선 조정의 정치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비겁한 장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명량대첩을 소재로 한, 영화 ‘명량’의 큰 성공 이후, 역사적 실존 인물에 대한 ‘사자에 대한 명예 훼손’과 ‘창작의 자유’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논란은 주지하듯이 과거에도 더러 있었다. 1997년 드라마 <김구>에서의 특무대장 김창룡과 관련된 소송, 2005년 10·26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과 관련된 소송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자의 경우, 표현의 자유를 더 중시한 판결이었고, 후자의 경우, 몇 장면을 삭제하라고 판결을 했다. 지금 ‘명량’ 사건의 경우, 검찰 관계자는 명예 훼손 의도와, 관객들이 영화 내용을 모두 사실로 받아들였는지 등을 기준으로 본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논란을 창작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보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법적으로 ‘사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측면에서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필자는 이런 논란이, 역사의 특정한 사건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다르냐? 등과 같이 법적, 해석적으로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또한 이를 얼마나 가공했는가? 라는 방식의 창작의 정도에 대한 문제도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지금의 이 논란을, 한국사회의 개방성과 역사 청산의 측면에서 보려고 한다. 이 문제의 본질은, 한국 사회가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개방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본다. 주지하듯이 한국 사회는 너무나도 많은 금기가 있는 사회이다. 그리고 그 금기가 사회를 지배하는 특정한 규범으로서 작동되는 사회이다. 폐쇄적인 계서제와 논란에 대한 침묵이 사회의 지배질서인 것이 한국 사회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한국이 피동적인 근대로의 전환을 한 원죄이기도 하며, 그 과정에서 식민의 역사와 그 청산을 하지 못한 아픔이 자리 잡고 있다. 외부로부터 이식된 지배질서는 지배집단의 정당성을 스스로 구현할 기회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
반면 비록 (양계 혹은 모계적 질서가 강한 신라사회이지만) 부계가 요동으로부터 이주했다고 전하는 왕건의 세력이지만, 궁예라는 토착 세력을 극복하고 왕조의 정당성을 폭 넓게 인정받을 기회는 있었다. 또한 조선의 경우도 함경도 변방의 일개 무장 세력이 고려 왕조를 전복하면서 신진사대부와 결합하여 왕조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일제 식민 질서의 경우 굳이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거기에 그 질서에 결탁한 식민지 조선의 지배세력들이 있었다. 이 식민 질서의 핵심은 억압과 폐쇄성이었다. 지배자는 지배할 뿐이고 피지배자는 지배당할 뿐이었다.
그리고 더욱 비극은 그 체제가 해방된 것도 타율적으로 진행되어 질서의 성립에 대한 평가는 물론이거니와 그 청산에 대한 과제도 이루지 못한 것이 현재이다. 즉 이전의 사실에 대해 제대로 된 역사적인 평가를 진행하지 못한 현재 우리사회의 원죄이다.
주지하듯이 하다못해 친일 잔재도 거의 손을 못 대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만주의 황군 장교 ‘다카끼 마사오’가 ‘남로당원 박정희’를 거쳐, 대통령 박정희가 된 것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며, 현재 한국의 지배세력 대부분이 식민지 시기 어떤 행적이 있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확인조차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히려 현재의 권력을 이용해 과거의 행적을 미화하고 지울 것은 지우기에 바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게다가 그러한 식민 잔재에 대한 청산 시도를 공개적인 토론 자체부터 현재의 법적 잣대로 방해하고 처벌하고 있는 것이 현재 아닌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공과를 떠나 기본적으로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회의 비극이라고 본다. 막힌 사회, 이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따라서 배설과 명량에 대한 논란도 이런 폐쇄적인 사회 분위기라는 선상에 있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에 대해 개방적인 토론과 평가가 필요한데, 한국 사회는 그런 풍토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와 관련되어 이순신에 대한 평가 부분은 한국 사회에서 민감하고 금기의 영역인 문제이다. 한 쪽은 나라를 구한 ‘성웅’이고 다른 이들은 그의 조연일 뿐이라는 이미지를 부정하지는 못한 것이다. 그러나 반면 이순신이나 유성룡 등을 제외하고 당시 왜란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진행된 것은 거의 최근의 일이다. 배설 말고도 비겁자나 반역자들은 더 많은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또한 왜란 당시 그 많던 (평민) 의병장들은 어디로 갔을까?
따지고 보면 조선 중기 쯤 양반의 인구가 10% 정도였고 전쟁을 통해 돈으로 산 양반이 그의 2-3배 정도, 지금 길을 막고 물어보면 누구도 노비의 후손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럼 그 많던 노비들과 그 후손들은 어디에 갔을까? 또한 사실 지금 행세하는 집안 중에 식민지 시대에 ‘나카무라’도 있었을 것이고 ‘기무라’도 있었는데, 그 많던 나카무라, 기무라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데 옛날에 조상이 노비였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배질서를 통해 끊임없이 그런 의식을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정당하지 않게 얻은 권력을 소수가 독점하고 그 소수가 다시 권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다른 집단을 배척하고 그 배척의 이데올로기에 혈연의식과 집단의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를 미화하고 왜곡하고 지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개방적인 토론이 아닌 억압과 은폐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순신도 공도 있고 과도 있다. 또한 배설도 공과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순신은 과거 군사정권에 의해 ‘성웅 이순신’이라는 이미지가 선입되어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가로막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풍토에서 배설과 같이 역사적 비중이 작은 인물에 대한 공과 평가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만무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필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유로운 창작을 옹호한다. 그러나 거기에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토론과 평가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논란이 크게 불거지기 이전에 ‘명량’의 제작진이 배설의 후손들과 터놓고 이야기할 자리를 가지지 못한 것에 큰 아쉬움이 있다. 물론 사과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촌로들인 배설의 후손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픽션에 도입한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고 이해를 구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사회가 소수에 의해 독점될 때 그것을 유지해 줄 지배이데올로기가 동원되곤 하는데, 가장 유력한 것이 혈연과 혈통 등에 대한 의지이다. 또한 이는 주변부로 전락한 집단도 동일하게 복사한다. 그래서 배설의 후손들이 지방 사회에서 손가락질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연줄과 가문이 현재를 규정하는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그런 것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조금만 더 넓게 보면, 조상이 지금 현재의 삶을 구제해 줄 수는 없다.
비겁자의 자식이면 어떤가? 반역자의 후손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오류를 극복, 만회해서 역사에 더 나은 기여를 하면 되지 않는가? 근대사회의 핵심이 연좌제의 극복이 아닌가? 출신성분이나 혈연이 아닌 능력에 따라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 아닌가?
조선 시대에 배설은 비겁자였지만 굳이 절망할 것까지야. 배씨 성을 가진 만인의 첫 사랑 ‘수지’가 있지 않은가?
필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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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높은 견해에 공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