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금관가야의 건국자인 김수로 왕과 허황옥(허왕후)의 이동 경로에 대해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학계에서는 여러 학설과 주장이 있습니다. 또한 허황옥에 대해서도 인도 아유타국에서 건너왔다는 내용에 대해 이는 믿을 수 없는 단순 신화의 인물로 취급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김수로 왕릉과 인도 아유타국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쌍어문 문양을 통해 가야의 건국 세력들이 인도 지역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수 있으며
서울대 유전자 분석 연구팀에 의해 가야 대성동 고분의 유골 DNA를 검사한 결과 순장자가 인도 타밀 지역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확인 되었습니다. 이는 가야인들이 인도인과 혈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유전학적인 증거입니다.
또한 고려대 산학연구팀에 의해 허왕후가 가져온 파사석탑의 돌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이는 우리나라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은 광물이 라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고려대 산학협력단의 암질분석. 파사석탑은 엽랍석 성분의 사암으로 밝혀졌다. 연구를 진행한 조호영 고려대 교수(지구환경과학과)는 “정확한 암석분석을 위해서는 현미경 관찰 등 구성광물의 검증이 요구된다”는 단서를 달면서 “파사석탑에 사용된 암석의 산출지를 한반도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잠정 결론을 내렸다."
<고려대 산학협력단의 보고서 내용>
이렇게 유전학적인, 과학적인 다양한 분석과 증거를 통해서도 허왕후가 인도와 연관되어 있음이 증명 됨에도 현 강단사학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연구된 자료와 문헌과 유물들을 통해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이동 경로에 대해서 알아 보려고 합니다.
1) 허황옥 세력의 이동 경로
허황옥 세력의 이동에 대해서는 김병모 교수의 주장이 가장 설득력있으며 그 주장을 바탕으로 추정한 허황옥 세력이 가야까지 이동한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태어난 곳은 현재 사천성 안악현의 보주(普州)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허왕후 릉의 비석과 김해 김씨 세보를 보면 허왕후에 대해 보주태후(普州太后) 라고 하는 기록이 있는 데, 이것이 바로 그 문헌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 사천성(四川省) 안악현(安岳縣) 일대에 허씨 집성촌이 있으며, 이곳에 보주(普州) 허씨 사당 대문에는 쌍어문(雙魚紋)이 있고 신정기「神井記」 금석문에 이곳이 보주(普州)라는 내용과 허여황옥(許女黃玉) 이 새겨진 명문을 발견되었습니다.
"보주(普州)에 대하여 자세히 연구를 해 봤더니, 보주는 옛날 중국의 한 지명이었다. 중국 후한 때의 역사서인 후한서를 찾아 보았더니 당시 그 땅 이름은 '촉'이었는데 그 촉 땅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 즉 남만(南蠻)들이 중앙정부에 대항해서 두 번의 봉기를 일으킨다. 그런데 그 주동자의 이름이 허성(許聖) 이었다. 그러니까 후한 때 보주땅에 허씨 성을 가진 집단이 있었는데,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허황옥(許黃玉)이 가야(伽倻)에 출현하기 1년 전인 서기 47년에 보주(普州)를 비롯한 사천성(四川省)에서 소수민족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이 진압된 후 연루자들은 양자강 연변(沿邊)의 무한(武漢)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실제 후한서에는 위 내용을 뒷 받침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二十三年春正月,南郡蠻叛,遣武威將軍劉尚討破之,徙其種人於江夏
서기 47년 양자강변의 남군(南郡)에서 토착인들(南郡蠻)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정부는) 무위장군(武威將軍) 유상(劉尚)을 파견하여 반란세력을 제압했다. 그 무리의 사람들을 강하(江夏, 양자강 하류 무한武漢지방)로 추방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즉 허황옥(許黃玉) 가문은 보주에 있다가 남만의 반란에 가담하여 양자강(무한)으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그 뒤에 배를 타고 양자강을 지나 바다를 거쳐 가야 지역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2) 김수로 세력의 이동 경로
그렇다면 김수로왕의 이동 경로는 어떠 할까요? 먼저 김수로 왕의 출신, 김씨의 시조에 대해 문헌을 살펴보면 흉노 출신 투후 김일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중국의 역사 기록, 문무왕 비문, 김인문 비문, 대당고김씨부인묘 등 많은 비문과 문헌의 증거들에서 밝혀 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秺侯祭天之胤, 傳七葉以▨▨焉. 十五代祖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 肇臨▨▨ 以對玉欄 始蔭祥林 如觀石紐 坐金輿而(…).
투후(秺侯)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하였다.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옥란(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祥林]처럼 많아 석뉴(石紐)[7]를 보고 금가마[金輿]에 앉아 … 하는 것 같았다.
<문무왕(文武王)의 비문>
遠祖諱日磾 自龍庭 歸命西漢 仕武帝 愼名節陟 拜侍中常侍 封秺亭侯 自秺亭已降七葉 軒紱燉煌繇是望係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또한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와의 관계에 대해서 문헌 기록에서는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신라인들은 자신들이 소호(少昊) 김천씨(金天氏)의 후예라고 여겼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한다고 했고, 유신의 비문에도 ‘헌원(軒轅)의 후예이며, 소호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남가야 시조 수로(首露)도 신라와 성이 같았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즉 이런 여러 문헌과 유물들로 비추어 볼때 김씨의 조상은 투후 김일제이며 신라 김씨와 가야 김씨는 그 뿌리가 같고, 모두 북방 흉노계 유목민족인 출신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수로왕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씨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현재 중국에는 2군데의 김씨 집성촌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데 하나는 흉노의 고향이라고 하는 감숙성에 김씨 집성촌이 있으며. 또 하나는 안휘성(안후이성) 양자강 유역에 있는 김씨 집성촌이 있습니다.
https://youtu.be/jMDyGPaPeNc
또한 이 위치는 박창범 교수가 주장하는 초기 신라의 천문 관측 위치와도 일치 하는 내용입니다. 즉 이는 신라와 가야의 김씨 세력의 초기 위치가 양자강 유역임을 알수 있는 내용입니다.
김씨 세력들은 광무제에 의해 신나라가 멸망하고 이곳 양자강 안후이성 지역에 머물러 있다가 한반도로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하나 논라운 점은 허황옥이 강제 이주 당한 무한의 지역도 같은 양자강 지역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추정하건데 김수로와 허황옥은 한반도로 들어오기 전에 만나 세력 간에 동맹을 맺고 먼저 한반도 남쪽 땅에 김수로왕이 가야를 세워 터전을 잡고 이후에 허황옥이 바다를 건너 들어 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서로 혼사가 예정된 정략결혼이라는 점은 다음의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王荅曰 “朕生而頗聖, 先知公主自逺而届, 下臣有納妃之請不敢從焉
”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
또한 실제로 중국 대륙에서 가야 까지 이동하는 뱃길 해상로에 대해서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의 기록을 통해 실제로 존재 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기록에서는 김수로와 석탈해가 대결을 하였는 데, 석탈해가 패하자 중국에서 온 배를 타고 (계림으로)도망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즉 이는 중국과 가야를 오가는 해상 뱃길이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僕之與王爭位良難. 便拜辝而出, 到麟郊外渡頭將中朝來泊之水道而行
(석탈해)내가 (수로)왕과 더불어 왕위를 다툼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곧 왕에게 절을 하고 하직하고 나가서 이웃 교외의 나루에 이르러 중국에서 온 배가 와서 정박하는 수로(水路)를 통해서 갔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
실제 해류의 흐름을 보면 쿠로시오 해류가 중국 대륙 및 한반도의 남쪽으로 흐르고 있으며 이는 중국 양자강에서 한반도 남부 지역 뿐 아니라 일본으로도 오갈 수 있는 해로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가야사 연구가 이진아 자료
3) 종합 의견
위에서 언급한 여러 문헌 기록, 유물, 지명 등을 통해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낼수 있습니다.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 흉노계 김일제가 김씨성의 시조이며, 전한 이후 같은 김씨 집안인 왕망이 신나라를 건국하였지만 얼마 않가서 후한의 광무제 세력에 멸망하여 김씨들은 흉노의 감숙성지역과 양자강 안위성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안위성으로 이주한 한 세력이 김수로왕의 세력들이며 허황옥 세력은 본래 아유타국 출신인데 허황옥은 보주에서 태어나고 이후 허씨 들이 난에 휘말려 무한으로 추방되었고 그 지역의 김씨 세력과 허씨 세력이 만나 정략적인 동맹 관계를 맺게됩니다. 새로운 땅을 찾아 먼저 김수로의 세력이 배를 타고 한반도 남부로 이동하여 금관가야를 세우고, 이후 허왕후를 비롯한 허씨 세력이 가야로 이동하여 정식적인 혼인을 맺게 됩니다. 이것이 김수왕과 허왕후의 추정되는 이동 경로이며 또한 인도 출신인 허왕후가 파사 석탑을 가지고 한반도로 이동하여 불교가 전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해류의 이동로를 보면 허왕후의 인도계 세력들은 한반도 남부뿐 아니라 일본에도 진출했음을 알수 있으며 이는 인도계로 추정되는 다파라국의 신라 시조 석탈해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또한 양자강 유역의 김씨 세력은 신라의 건국 세력과도 관계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다른 가야사 연구가들의 주장에 의하면 가야는 한반도 남부 뿐 아니라 중부, 중국 남부와 일본과도 문화적인 교류나 영향권이였다고 합니다.
가야 문화의 영향권
첫댓글 김해 김씨가 나서면 뭐 문제있나?
한국인의 유전자 분포 분석 지도를 통해 다수의 세력이 양자강 유역에서 한반도로 이동하였음이 유전학적으로도 확인 되었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http://m.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37132
2004년도에 북경지사에 있을 때 ,,, 친구들이랑 우한(양자강 중심)으로 며칠 간 여행갔었는데~
우한 주변지역에
한강, 강릉 등 친숙한 이름이 많이 있어 놀랐는데 ,,,
그쪽 사람들 얘기로는
춘추~한나라 시기에 양자강 지역에서 한국으로 사람들이 갔다고 해서
별로 신빙성 있게 듣지 않았는데~
무언가 연관이 있는 듯 합니다.
산동성 양자강 지역은 전통적으로 동이족 거주 지역인데 과거로 부터 양자강에서 동이족들이 한반도 남부로 이동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구당서나 신당서를 보면 신라를 묘족이니 변한이니 하는 내용들이 나오는 데 아마 단군조선의 변한과 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