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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4.20 03:30
한양의 수도 성곽
▲ 한양도성 성곽길. /위키피디아
문화재청이 서울·경기의 '한양의 수도 성곽'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신청 후보로 선정했다는 뉴스가 나왔어요. 오는 9월 예비평가 신청서를 유네스코에 제출할 계획입니다. '한양의 수도 성곽'이란 조선시대 수도였던 한양을 지키기 위해 만든 한양도성과 북한산성·탕춘대성을 포함하는 개념이에요.
18㎞ 도성 쌓고 8개 문 만들어
"이제 새 도읍에 성을 쌓도록 하시오!"
조선왕조가 개국한 지 4년째 되는 해인 1395년 9월, 태조 이성계는 그 전해 막 천도(遷都·수도를 옮김)한 한양에 성곽을 축조할 것을 명했어요. 왕명을 받은 신하는 개국공신 정도전(1342~1398)이었습니다. 이미 궁궐인 경복궁을 먼저 짓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제대로 된 도읍 건설을 위해선 도시를 둘러싼 성곽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죠. 근대 이전의 성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동시에 도시의 경계를 구분 짓는 역할을 했습니다.
곧 도성축조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이 생기고 도성을 짓는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한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다시피 한 도시였어요. 정도전은 북쪽의 백악(북악산), 서쪽 인왕, 남쪽 목멱(남산), 동쪽 낙산에 올라 실측한 끝에 네 산을 연결하는 성곽을 구상했습니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높고 낮은 지형과 자연스럽게 한 몸이 되도록 어우러지는 성이었죠.
그래서 이듬해인 1396년 전국의 장정 11만8000명을 동원해 한양도성을 쌓게 됐습니다. 성 쌓는 구간을 97개 구역으로 나눠 구역마다 책임질 관리를 72명씩 모두 약 7000명 뒀다고 해요. 이렇게 꼼꼼하게 전체 길이 약 18㎞에 이르는 성을 축조하고 4대문과 4소문의 8개 문을 만들었습니다.
4대문은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청문(숙정문·북대문), 4소문은 홍화문(혜화문·동소문), 소덕문(소의문·서소문), 동남쪽 광희문(수구문·남소문 역할), 서북쪽 창의문(자하문·북소문)이었습니다. 한양을 오가는 사람들은 오직 이 문들로만 통행할 수 있었는데, 문을 열고 닫는 규정이 아주 엄격했습니다. 새벽 4시쯤 종을 33번 치는 '파루(罷漏)'에 열고 밤 10시쯤 종을 28번 치는 '인정(人定)'에 닫아야 했으니까요. 다음 이야기는 1823년(순조 23년) 8월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엄격하게 열고 닫혔던 도성 성문들
"큰일 났다! 파루야 파루~ 어떡하지?"
어느 날 새벽이었어요. 흥인지문을 담당하던 수문군(각 궁궐이나 성의 문을 여닫고 통행인을 검속하던 군인)들은 사색이 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어요. 성문 안팎에 모인 사람들은 "왜 문을 열지 않느냐"며 볼멘소리를 내고 있었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성문 개방 시각이 됐는데 열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던 거예요. 그때 한 군졸이 씩 웃더니 "좋은 수가 있네"라며 한 동료를 가리켰어요. "자네, 우리 중에서 뜀박질을 제일 잘하지?"
"어쩌려고, 이 사람아"라고 묻는 동료들에게 그 군졸이 말했어요. "가까운 광희문으로 가서 열쇠를 좀 빌려오게." 흥인지문에서 광희문까지의 거리는 약 700m입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이렇게 말했어요. "이건 나만 아는 비밀인데… 흥인지문하고 광희문이 자물쇠 규격이 같아! 히히히…."
발이 빠른 군졸이 후다닥 광희문에 달려가서 빌려온 열쇠로 성문은 무사히 열렸어요. 이제 새로 열쇠 하나를 만들어 원래 열쇠인 척 위장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었겠죠. 그러나 이들의 '꼼수'는 곧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원래 흥인지문 열쇠는 어찌 된 일인지 거리가 꽤 먼 창덕궁 단봉문 근처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곳을 순찰하던 군졸이 주워 상부에 보고했던 것입니다. 관련자들은 곤장 60~90대를 맞고 최대 2년 반 동안 유배를 가는 중벌을 받아야 했어요. 그만큼 조선왕조 내내 한양도성의 보안은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한양도성을 보완하는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한양도성은 1422년(세종 4년) 32만여 명을 동원해 한 차례 대대적인 개축(改築·고쳐 쌓음)을 거쳤습니다. 일부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양도성은 대규모 침입이 발생할 때 성에 의지해 싸우는 수성전(守城戰)에는 취약한 성이었습니다. 규모가 너무나 커서 방어를 위한 병력이 많이 필요했고, 성벽 주변에 땅을 파거나 하천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막는 해자(垓子)도 없었습니다.
한양도성은 실질적인 군사상의 목적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라는 성격이 더 컸던 것이죠. 그래서 임진왜란(1592),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같은 변란이 일어날 때마다 임금은 도성을 벗어나 피란을 가야 했습니다.
큰 전쟁을 치른 조선왕조는 수도 한양의 수비를 보완하는 대책이 절실했습니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나선 임금은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이었죠. 숙종은 세종에 이어 1704년 한양도성의 두 번째 대규모 개축에 나섰습니다. 또 백제 때부터 전략적인 요새였던 북한산에 1711년 돌로 쌓은 성을 지었습니다. 외부의 침입이 있을 때 한양도성에서 가까워 대피 장소와 방어 거점으로 삼기 좋은 요새를 만들었던 것이죠. 이것이 북한산성입니다.
숙종은 여기에 성 하나를 더 추가했습니다.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주면서 수도 서북방의 방어를 더 튼튼히 하기 위한 성, 바로 탕춘대성이었습니다. 1715년 그 출입문인 홍지문과 함께 만들어진 길이 4㎞의 탕춘대성은 한양도성을 보강하는 성곽이자, 숙종이 추진한 '수도 성벽 3종 세트'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탕춘대성이란 이름은 연산군이 봄을 질탕하게 즐겼다는 인근의 탕춘대(蕩春臺)에서 딴 것입니다. 평화롭게 봄을 즐기는 가운데서도 늘 국토 방위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1904년 돈의문의 모습이에요. 돈의문은 1915년 일제가 철거했어요. /위키피디아
▲ 숭례문. /이태경 기자
▲ 흥인지문. /장련성 기자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김윤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