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준 교수로부터 들은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서해안의 안면도와 관련된 이야기다. 6·25가 나던 해인 1950년 3월 무렵 야산은 제자들에게 다짜고짜 통고하였다.
“자네들 집에 있는 재산 가운데 10만원만 남겨 놓고 나머지는 전부 나에게 가져와.”
말하자면 비상금 정도 남겨 놓고 나에게 재산을 다 바치라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평소 스승의 남다른 선견지명을 여러번 경험한 바 있는 제자들은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하며 시키는 대로 하였다고 한다. 제자들은 당시 금액으로 집에 10만원만 남겨놓고 가산을 정리하여 현금으로 가져왔다. 그때 야산을 충실히 따르던 핵심 제자가 1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야산은 이 가운데 2명의 제자가 가져온 돈을 마당에 내던졌다고 한다.
“너희 둘은 제자가 아니다.’
2명의 제자는 재산 가운데 일부만 정리하여 가져왔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부끄럽게 여긴 이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 제대로 재산을 정리하여 나머지 돈을 모두 가지고 왔다. 제자들은 왜 우리 선생이 재산을 가져오라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으면서도 감히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다.
10명의 제자들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갈취한(?) 야산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남길 뿐이었다.
“음력 6월 초에 서산 포구에서 다시 만나자!”
약속한 그 날짜에 서산 포구에 제자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도착해 보니 배가 2척 마련되어 있었다.
“모두 이 배에 타거라.”
“배를 타고 어디로 가는데요?”
“안면도(安眠島)로 간다.”
지금은 안면도에 다리를 놓아 육지와 연결되었지만 당시에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이었다.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야산은 제자들에게 한마디 했다.
“앞으로는 안면도의 면(眠)자에서 눈을 떼어야 할 것이다.”
눈이라 하면 눈 목(目)자를 의미한다. ‘眠’에서 ‘目’을 떼어내면 민(民)자만 남는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안면도는 백성을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즉 안면도에 가야 살 수 있다는 말이다. 안면도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이미 야산이 집을 빌려 놓은 상태였다. 쌀로는 부족해 보리를 특히 많이 장만해 놓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 상황을 목격하고서야 비로소 스승이 왜 터무니 없이 돈을 가져오라고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야산이 미리 안배해 놓은 덕택에 제자들과 그 가족들은 안면도에서 무사히 6·25를 넘길 수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야산의 그 선견지명에 크게 놀랐다.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철저하게 대비할 ?있었다는 말인가. 어떤 경우에는 미리 알 수 있어도 보안이 새어나가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는 수도 많다. 하지만 야산은 확실하게 대안을 마련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 혼자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까지 난리를 피하게 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난세에는 자기 한몸 가누기도 힘든 법인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까지 건사 할 수 있었을까.
비상계엄령 선포 직감
나는 이 준 교수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야산이란 인물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더듬어보고 싶었다. 이 준 교수에게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물어보았다. 1977년 무렵 야산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아산(亞山) 김병호(金炳浩·1920~82)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김병호는 경남 고령 사람이었다. 점필재 김종직의 14대 후손으로 주역을 비롯한 도학을 평생 연구하다 야인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다.
뼈대 있는 선비 집안의 후손이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주역을 공부해서 언제 광명이 올 것인가 예측하는 일뿐이었다. 아산 김병호는 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었다. 주역에 심취했던 선비가 해방후 할 수 있는 일은 사업을 하거나 회사에 다니는 일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뜻있는 사람들을 만나 주역을 강의해 주는 ‘마지널맨’(marginal man)의 삶이었다. 1977년 경에는 서울에 자주 들러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주역을 강의하였는데, 그가 남산의 여관에서 머물고 있을 때 자주 찾아간 이교수에게 해준 이야기가 바로 문경과 안면도 이야기였다. 한번은 아산이 이교수에게 밑도 끝도 없이 “다음주에는 서울에 못 올라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내뱉었다.
“그러면 언제나 오십니까?”
“다음주에 못오면 아마 2주나 있다 오게 될 걸세.”하고는 사라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 직후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령 하에서는 모든 집회가 금지되었다. 당연히 주역 강의나 모임도 불가능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산이 수도하던 장소 중 하나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峯) 밑의 구룡정사(龜龍精舍)라는 곳이라고 했다. 답사해 보니 터가 암벽으로 짜여 있어 영기가 있는 곳이었다. 일부 선생이 거처하던 토굴에서 10분 더 내려와 위치해 있다.
계룡산 국사봉은 특별한 곳이다. 이름 그대로 국운을 염려하던 국사(國師)급 인물들이 자주 찾던 봉우리다.
장래 희망이 국사가 되기를 원했던 사람들도 계룡산 국사봉을 반드시 찾았다. 국사봉 앞으로는 교과서에 나오는 토체(土體) 안산(案山)이 가로놓여 있어 이곳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려준다.
필자가 그동안 구경해본 토체 안산 가운데 국사봉 앞의 안산이 단연 최고다. 김병호는 구룡정사에서 주역을 공부하려는 제자들에게 면벽(面壁)을 시키곤 하였다. 면벽은 정신집중 훈련이다. 면벽의 과정 없이 주역의 64괘만 달달 외운다고 대가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산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추적하던 중 만난 사람이 대전에 사는 이응국(李應國·43)·응문(應文·42) 형제다. 야산의 손자들이다. 야산에게는 5남1녀가 있었다. 장남은 진화(震和), 차남은 감화(坎和), 3남은 간화(艮和), 4남은 이화(離和), 5남은 태화(兌和), 그리고 딸은 손화(巽和)다. 이름에 사용된 진·감·간·리·태·손은 모두 주역의 팔괘에서 따온 것이다. 4남 이화가 바로 순 토종 역사학자로 유명한 이이화(李離和) 선생이다. 3남 간화의 아들이 이응국·응문이다. 이응국은 대학을 졸업하고 은행에 근무하는 일상적인 봉급쟁이의 삶을 살다 어느 순간 ‘이렇게 살 것이 아니라, 가학(家學)을 잇는 일이 더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하게 직장을 그만두고 월급도 없는 주역인의 길을 택하였다고 한다.
동생 이응문은 형보다 한 술 더 떠 대학 재학 시절부터 주역에 심취해 대학 3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주역 전문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웃사이더의 인생을 감수한 것이다. 형인 응국이 주역의 의리적 해석에 밝다면, 동생인 응문은 상수적 해석에 능하다. 형은 주로 전라도 쪽, 동생은 경상도 지역의 주역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 이들 형제를 보면서 느낀 소감은 ‘혈통은 무시하지 못하겠구나!’였다. 올초 대전에 사는 이응국씨를 만나 안면도 사건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주역적 배경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야산이 제자들을 데리고 안면도에 들어간 시기는 6·25 전쟁 발생 며칠 후였다.정확하게는 인민군이 예산·홍성에 진입하기 하루 전이었다고 한다. 이때 야산을 따라 안면도로 건너간 인원은 제자 몇명만이 아니라 약 300가구에 이르렀다고 한다. 300가구의 인원이라면 한 가구에 3명만 치더라도 약 1,000명에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다.
안면도 300가구 피난의 비밀
야산을 따르던 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안면도 일대로 피난했다. 안면도 일대라 하면 충남 광천·서산·홍성 일대까지 포함하는 지역이다. 야산은 이 사람들에게 가지고 있던 재산을 다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그 돈으로 곡식을 사서 광천·서산 등지의 주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음은 물론이다. 얼떨결에 공짜로 쌀과 보리를 받은 광천 사람들은 야산과 그 추종자들에게 고맙게 생각했음은 불문가지다.
이 적선으로 말미암아 안면도 일대로 피난했던 야산 일행은 6·25때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하게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6·25라는 것도 깊이 들어가 보면 좌.우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개인감정의 청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명분인 경우가 많다. 원래 난리가 나면 평소 원한 있는 사람부터 손보게 마련이다.
6·25때 안면도에는 인민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왜 야산이 안면도의 잠잘 면자에서 눈 목자를 떼라고 했는가.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사연이 있었다. 첫째, 피난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목을 피하라.
둘째, 원래 이름이 안민도(安民島)인데, 일제 때 일본 사람들이 우민화 정책을 쓰면서 눈 목자를 일부러 붙여 놓았던 것이다. 이제 해방되었으니 눈 목자를 떼어야 한다.
셋째는 안면도의 또 다른 이름을 개락금(開洛金)이라고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락(洛)은 하도(河圖)·낙서(洛書)의 낙서를 의미한다. 하도는 선천이요, 낙서는 후천세계를 상징한다. 금(金)은 오행 가운데 후천세계로 변하더라도 살아남는 강한 기운이다. 그러므로 안면도는 후천세계를 여는 중요한 시금석이라는 뜻이 된다. 최근 들어 안면도는 육지로 연결되면서 장엄한 서해 일몰과 함께 아름다운 꽃축제로 유명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두고 볼 일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왜 피난할 때 하필 300가구였는가 하는 대목이다. 주역의 괘를 들여다보아야 해명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괘는 천수송(天水訟) 이다. 위가 건괘이고, 아래는 감괘로 형성된 괘가 천수송 괘다. 이 괘의 뜻은 송(訟)이다. 분쟁한다는 뜻이다. 서로가 자신을 믿으므로 송사가 쉽게 끝나지 않고 잘잘못도 판별되지 않는 상태이니, 꼭 송사에 이긴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두려운 괘라고 설명되어 있다.
야산은 6·25가 발발하기 전에 이 괘를 뽑아보고 사태를 미리 예견했던 것 같다. 6·25라는 전쟁은 천하의 큰 송사(訟事)가 아니었던가.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이 완전히 이긴 것도 아니니 잘잘못도 판별되지 않은 셈이다. 천수송 괘에서 음미할 부분은 ‘구이(九二)는 불극송(不克訟)이니 귀이포(歸而逋)하야 기읍인(其邑人)이 3백호(三百戶)면 무(無) 하리라’는 구절이다. ‘구이는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읍 사람이 300호면 재앙이 없으리라’로 해석한다.(‘大山周易講解’上,143쪽) ‘읍 사람이 300호’라는 대목에서 300가구가 연유하였다. 천수송 괘를 뽑았을 때 그 송사를 피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300가구를 데리고 어디론가 피하는 것이었고, 야산이 볼 때 그 피난하는 장소는 백성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뜻을 지닌 안면도였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상황을 재검토해 보면 이렇다. 야산이 6·25 전에 천수송 괘를 뽑은 것은 순전히 영감이었고, 직관의 영역이었다.
네 글자 안에 포함된 주역과 오행의 신비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이기도 하였다. 64괘 중 다른 괘를 선택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필 천수송 괘를 선택하였는냐 하는 문제는 야산 본인의 직관적인 판단이라는 말이다. 그 다음 의문은 300가구다. 100가구, 아니면 400가구, 또는 다른 규모의 인원이 아니고 왜 유독 300가구로 정했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주역이라는 경전에 나와 있는 구절을 참고한 것이다. 경전에 나와 있으니 이를 보고 참고한 셈이다.
바꾸어 말하면 직감과 학문이 종합된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직감만 있고 천수송 괘의 구절을 몰랐다면 100가구를 데리고 갔을 수도 있다. 반대로 주역의 구절만 알고 직감이 없었으면 현실에서 무력할 뿐이다. 거울 같이 비추는 직감과 박식한 학문을 아울러 갖추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그래야만 쌍권총을 차는 셈이다. ‘OK목장’에서 결투할 때는 쌍권총을 차야만 승산이 있는 것 아닌가. 학문만 있고 직관의 세계를 모르면 초월을 모르니 속되고, 직관만 중시하고 학문을 모르면 부황해질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8·15와 6·25에 대한 야산의 예언을 추적하다 보면 이 보다 더 기막힌 이야기가 나온다. 대동아전쟁이 시작되던 194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 도쿄(東京)제대를 졸업한 인텔리였던 김병윤(金炳潤)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세상이 뒤숭숭해지자 김병윤은 주역의 대가라고 소문났던 야산을 찾아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겠읍니까?”하고 물었다. 야산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거두절미하고 ‘위성황련’(胃醒黃連)이라는 네 글자를 묵묵히 써 주었다. 이는 한약의 처방전이다. 위성(胃醒)이란 위장에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소화불량·식욕감퇴·구토와 같은 증상을 말하기도 한다. 이때 사용하는 약재가 황련(黃連)이다.
‘한국본초도감’(韓國本草圖鑑)을 찾아 보니 황련은 매자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인 깽깽이풀의 뿌리라고 되어 있다. 열을 내리고 독을 다스리며, 위를 튼튼히 하고 설사를 멈추게 하는 효능이 있다. 주로 위장에 이상이 생겼을 때 사용하는 약재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난데없이 ‘위성황련’이라는 처방을 써주었으니 받는 사람 측에서는 어리벙벙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보면 자네 위에 열이 차서 답답한 상태이니 황련을 쓰라는 뜻도 내재되어 있었다.
야산은 자기를 찾아온 상대의 얼굴을 쳐다보고 위에 이상이 있음을 한눈에 간파했던 것이다. 짐작컨대 야산은 ‘본초강목’(本草綱目)이나 ‘방약합편’(方藥合編)과 같은 의서(醫書)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사 묻기 전에 먼저 네 몸부터 돌보라는 뜻도 내재해 있다. 한약재와 처방에 관한 이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김병윤이 무슨 뜻인지 좀더 풀어 이야기해달라고 하자 다시 써준 문구가 ‘계명월성전 전중공거지’(鷄鳴月星田 田中共車之)였다. 이는 위성황련이라는 글자를 파자(破字), 즉 인수분해한 문구였다. 위성을 인수분해하면 계명월성전(鷄鳴月星田)이 된다. 한문이 지닌 은유와 상징의 극치를 보여주는 고단백 압축 사례이기도 하다.
먼저 성(醒)자를 뜯어보면 왼쪽에 유(酉)자가 나온다. 유는 닭을 가리킨다. 그 다음에 위성이라는 두 글자를 합해 놓고 거기에서 유를 빼면 월성전만 남는다. 위는 월과 전이고, 나머지는 성이다. 가운데에 성을 배합해 넣으면 월성전이 된다. 무슨 뜻인가? 월성전은 달과 별의 밭이라는 뜻이다. 하늘의 은하수를 지칭한다. 계명월성전은 닭이 하늘의 은하수에서 운다는 뜻이 된다. 이 시기는 음력으로 7월7일을 가리킨다. 칠월 칠석은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날이라서 은하수가 장관을 이룬다.
음과 양이 합하고, 산택(山澤)이 통기(通氣)되는 날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이는 1945년 음력 7월7일을 가리킨다. 1945년은 을유(乙酉)년이다. 닭의 해다. 닭이 운다는 것은 1945년에 해당하고, 월성전은 7월7일이다. 음력 7월7일은 양력으로 8월14일이다. 그러니까 ‘월성’ 두 글자에는 1945년 양력 8월14일에 해방된다(닭이 운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일본의 항복 선언은 15일이었지만, 실제적으로 항복선언문은 14일 완성되었다고 본다.
‘황련’을 인수분해 하면 ‘전중공차지’(田中共車之)가 된다. 황(黃)자의 중간에는 전(田)자가 있다. ‘전중’은 황자 중간에 전자가 자리잡고 있음을 뜻한다. 황에서 가운데의 전을 빼면 공(共)이 된다. 그 다음에 련(連)을 분해하면 차(車)와 지(之)이다. 책받침( )은 갈 지로 보았다. 그래서 공차지가 나온다. 다시 전중을 보자. 전중은 밭의 가운데다. 고대에 정전법(井田法)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토지를 우물 정자로 9등분하여, 가운데 중심은 공전(公田)이고, 나머지 8군데는 사전(私田)이었다. 즉 사전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자기 것이지만, 가운데 밭에서 생산되는 농작물은 국가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었다. 가운데는 국가와 공중(公衆)의 것이었다. 전중은 정전법의 가운데 부분을 상징한다. 사유가 아닌 공유, 나아가 오행으로 중앙 위치의 토(土)를 가리킨다. 토가 가리키는 숫자는 5(五)와 10(十)이다. 그러므로 전중은 5월10일로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음력이다.
그 다음 공차지를 보자. 공이란 공산당(共産黨) 또는 공산군(共産軍)을 의미한다. 지는 ‘간다’는 뜻이다. 조합해 보면 5월10일에 ‘공산군의 수레가 지나간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음력 5월10일은 양력으로 6월25일이다. 6·25에 대한 예언을 이런 식으로 하였다. ‘위성황련’ 네 글자에는 1945년 8월15일 해방과 그 다음의 6·25가 예언되어 있었다. 이 얼마나 절묘한가! 한약재 처방전에서 시작하여 주역과 오행을 거쳐 8·15와 6·25까지 꿰뚫었다. 단 네 글자로 말이다. 이 예언 내용을 미리 예측하기도 어렵거니와, 그 예측을 이렇게 고준하면서도 압축된 표현으로 정제해낼 수 있는 야산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야산은 왜 대둔산을 주목했나
누가 한국 땅에 인물이 없다고 그랬는가! 모르는 소리다. 찾아보면 기막힌 인물이 정말 많았다. ‘위성황련’이라는 글씨를 받은 김병윤은 93세의 고령이지만 경북 봉화에 생존해 있다고 들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번 봉화에 가서 만나 뵈어야겠다. 봉화·풍기라는 지역은 구한말과 6·25의 난리를 겪으면서 ‘비결 따라 삼천리를 유랑한’ 한국의 비결파(秘訣派)들이 선호했던 땅이다. 지금도 비결파와 그 후예들이 더러 남아 있는 낭만적인 곳이기도 하다.
충남의 대둔산(大屯山)으로 가 보자. 논산과 대전 사이에 있는 대둔산은 험악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통 화강암인데, 한마디로 악산(惡山)이다. 계룡산이 쇠주먹에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기운과 같다면, 대둔산은 창검과 같은 기세다.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서악(西嶽)으로 불리는 화산(華山)과 비슷한 기세를 지녔다. 화산도 온통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이라서 강렬한 에너지를 내품고 있다.
무협지에 나오는 화산파(華山派)의 무공은 단단한 화강암에서 나온 것이다. 대둔산은 화산보다 규모는 작지만 쭉쭉 직선으로 뻗어 있는 바위 봉우리 산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흡사한 형국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예로부터 무인들이나 장군들이 많이 수도하였던 산이기도 하고, 신라와 백제가 결전을 벌이던 산이기도 하다. 동학 때에도 일본군에 마지막까지 저항한 동학군들이 결사항전을 벌인 곳도 대둔산의 험한 바위 봉우리들이었다. 천연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대둔산 여러 봉우리 중에서 고급 기운이 뭉쳐 있는 봉우리는 독수리봉이다. 정신세계에 들어가 보면 독수리 형상의 바위산에는 독수리의 기운이 뭉쳐 있는 법이다. 신기하다. 이 봉우리 앞에는 태고사(太古寺)가 자리잡고 있다. 태고사는 옛날부터 호남의 3대 수도처(대둔산 태고사, 변산 월명암, 백양사 운문암) 가운데 하나로 손꼽혀 왔던 곳인만큼 영험한 곳이다.
에너지가 강해 기가 약한 스님들은 오래 버티지 못하는 곳으로도 소문나 있다. 독수리봉 뒤로는 석천암(石泉庵)이 있다. 해발 600m 높이의 고지대다. 뒤로는 깎아지른 바위절벽이 버티고 있는 강렬한 느낌의 절경인데, 바위 속에서 솟아 나오는 샘물의 맛이 일품이다. 도 닦는 장소는 물이 좋아야 한다. 매일 먹는 물은 인체에 중요한 작용을 하므로, 도 닦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석천암은 역대 대둔산에서 수도하던 도인들이 특히 선호하던 곳으로, 해방 후에는 야산이 제자들을 데리고 주역을 공부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야산의 학통을 이은 제자인 대산(大山) 김석진(金碩鎭·1928~)이 스승을 처음 만나 공부를 시작한 곳도 바로 대둔산 석천암이다. 당시 108명의 제자들과 공부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김석진 선생이 험난했던 자신의 주역 공부 과정을 밝힌 책 ‘스승의 길 주역의 길’(한길사, 2001)을 보면 당시 석천암의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주역을 좋아했던 사람들의 관심사와 담론을 엿볼 수 있다. 당시 미국에서 들어오는 신학문을 택하지 않고 재래의 전통 한학을 고집하던 ‘도꾼’들의 내면세계와, 무엇을 위해 그 고생스러운 길을 자진해서 택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기도 하다.
야산이 대둔산을 주목한 시기는 1945년이다. 그해 음력 2월 대둔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해방 되기 전에 대둔산으로 가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이전까지는 솜리(裡里)의 묵동(墨洞)에서 숨어 살았다. ‘솜리’라는 지명에는 ‘숨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일제 치하에서 숨어 살기에는 적당한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둔산으로 거처를 옮긴 배경에도 역시 주역이 작용하였다.
대둔산이라는 이름에는 둔(屯)자가 들어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둔은 괘 이름이기도 하다. 수뢰둔(水雷屯)이 바로 그것이다. 위에는 감괘(坎卦가 있고, 아래에는 진괘(震卦)가 배합된 괘다. 위에는 물이 있고, 아래에는 우뢰가 있다. 물속에 우뢰가 들어 있는 상이다. 둔괘의 의미는 건곤이 서로 사귀어 만물이 시작한다는 뜻이다.
해방되기 전에 서둘러 대둔산으로 거처를 옮겼던 이유는, 해방이 되면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므로 새로 시작하는 시대에 인재를 키우고 기초공사를 하는 데는 둔의 이름을 가진 대둔산이 최적지라고 판단되었던 것이다. 야산은 이처럼 거처를 택할 때도 그 지명이 지닌 상징에 주목하고, 그 상징이 주역의 괘상과 부합되는 곳을 특히 선호하였다.
둔괘가 지닌 상징처럼 야산이 자신의 학문과 포부를 세상에 공식적으로 공개한 곳은 대둔산이었다. 이전까지는 기인 또는 광인으로 행세하였지만, 대둔산 시절 이후부터는 주역 학자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마터면 끊길 뻔했던 주역의 맥이 대둔산에서 결집되었고, 거기에서 시작된 맥 하나가 대산을 통해 오늘날까지 세상에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1950년대 중반의 일화를 하나 살펴보자. 당시 신소천(申素天) 거사라는 분이 있었다. 평생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면서 한 경지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던 도인이었다. ‘금강경’은 선불교(禪佛敎)에서 애호하는 경전이다. 상(相·집착과 분별심)을 없애는 데 특효가 있다는 경전이기도 하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만약 모든 사물의 형상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면 그 즉시 부처가 된다)라는 구절은 한국의 선승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금강경 내용이다.
대전시 동구 비룡산 정상 바위에 새겨진 也山의 초서체 글씨. ‘號神發’이란 ‘신이 부르면 발(반응)한다'는 뜻이다. |
신소천 거사와 야산의 일화
신소천은 바로 이러한 비상(非相)의 경지를 맛본 도인으로 소문나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서울 조계사에서 시작한 금강경 강의는 도학에 관심이 많은 식자층들의 화제에 오르곤 하였다. 그 신소천 거사가 한번은 야산과 만나게 되었다. 신소천 거사 쪽에서 먼저 야산에게 한번 만나자고 초대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 편지 겉봉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거이탈삼취무공이차기여우국성’(去二脫三吹無孔 以此寄與憂國聖).
신소천이 써 보낸 편지 겉봉의 글씨는 난해하였다. 편지를 전하던 야산의 제자가 무슨 뜻인지 해독을 못하고 스승에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야산은 이 글귀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고 전한다. 과연 신소천 답다. ‘거이탈삼’(去二脫三)은 둘을 보내고 셋을 벗긴다는 뜻이다. 이는 신(申)자에 대한 인수분해다. 신자의 양쪽 변의 세로로 된 작대기 두 개를 떼어내고, 다시 가로로 된 작대기 세 개를 벗기면 무엇이 남는가. 기둥(申) 하나만 남는다. 이 기둥은 ‘구멍 없는 피리’(吹無孔)를 상징한다. 이것을 나라 걱정하는 성인에게 보낸다(以此寄與憂國聖)는 내용이다.
신소천은 신씨다. 그러니까 신소천의 마음 속에 간직한 진심을 나라 걱정하는 도인인 야산에게 보낸다. 그러니 한번 만나자는 뜻이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금강경’과 ‘주역’대가의 만남이었다. 두 사람의 장문인이 만났으니 당연히 스파크가 튀었을 것이다. 먼저 신소천 거사가 야산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역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점술(占術)에 있습니다.”
“점술의 핵심은 무엇입니까?”라는 신 거사의 재차 질문에 야산은,
“건괘(乾卦) 구오(九五)에 있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매우 짤막한 두 사람의 문답이었지만 그야말로 핵심은 다 들어 있는 대화였다. 주역 64괘 중에서 제일 비중 있는 괘는 역시 첫번째 괘인 중천건(重天乾) 괘다. 위 아래가 모두 건괘로 이루어졌다. 그 건괘의 하이라이트는 구오다. ‘구오는 비룡재천(飛龍在天)이니 이견대인(利見大人)이라’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용이 하늘에서 여의주를 굴리며 신묘한 변화를 나타낸다는 내용이 구오에 담겨 있다. 야산은 바로 이 구오를 주역의 핵심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야산이 신소천 거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금강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있습니다.”
야산이 재차 물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신소천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그 자리에서 바닥에 떨어뜨렸다.
“파상(破相:상을 깨트린다)입니다.”
과연 고수다운 문답이었다. 고수들일수록 문답이 짧으면서도 영양가는 높다. 하수들일수록 이야기가 늘어지면서 영양가는 없다. 고수들 문답은 들을수록 압축된 인생의 향기가 느껴진다.
이러한 인생을 살다 간 야산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가? 야산의 생년, 월, 일, 시를 손자인 이응국 씨에게 물어 보았다. 1889년 음력 9월16일 진시. 만세력에서 육십갑자를 뽑아 보니 을축(己丑)년 갑술(甲戌)월 기미(己未)일 무진(戊辰)시가 나온다. 소위 말하는 무진축미(辰戌丑未) 사주다. 흔히 제왕 격의 사주라고 한다. 야산의 사주를 감정한 당대의 술사들은 ‘후토성군’(後土聖君)의 사주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지지에 이처럼 토가 많이 있는 사주는 정치 쪽으로 가지 않더라도 대체적으로 종교나 도학과 인연이 깊다. 야산과 혼사를 맺은 사돈들도 모두 당대의 기라성 같은 도인들이었다. 야산의 셋째아들인 양화(艮和)의 장인은 송을규(宋乙奎)였는데 그는 지리산 문도사(文道士)의 제자였다. 송을규의 별호는 성성주인옹(惺惺主人翁)이었다고 할 만큼 한가락 하는 인물이었다. 송을규의 스승이었던 지리산 문도사는 구한말 조선의 4대 기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도꾼들이 꼽았던 4대 기인은 김일부·강증산·박만수(경상도에서 활동함)·문도사였다고 한다. 문도사는 지리산 청학동으로 내려오는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이라는 것이 손자인 이응국씨의 설명이다. 지리산파의 비중 있는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아쉽게도 문도사에 대한 별다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야산의 생애와 일화를 대충 더듬다 보니 불현듯 산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인다. 산신령이 나를 부른다.
조용헌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