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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神學大學校神學大學院
Ⅰ. 序 論 기독교대한성결교회는 2001년 현재 교회 3,101개, 목사수 5,010명, 교인수 62만 3,813명의 교세로 한국개신교의 한 교파를 이루고 있다. 100여년의 역사를 통하여 급속한 성장을 이룬 성결교회는 한국 개신교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교단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외양적인 중요성과 함께 성결교회는 한국 개신교회사에 있어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교회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국의 다른 개신교회는 외국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인 반면에 성결교회는 한국인에 의하여 시작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천주교가 “선교이전의 구도”라는 면에서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 자신의 손에 의하여 한국에 전래된, 기독교 선교사상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교회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면, 한국 개신교의 성결교회도 또한 외국 선교사가 파송되기 전 한국인에 의해 시작된 선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개신교 선교사상 특이한 사실로서 새롭게 평가가 되어야 할 귀한 일이라 하겠다.
1) 무엇보다도 교단 창립 100주년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평가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미래를 준비하는 첫 단추를 끼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결교회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는 1970년대에 들어서게 되면서이다. 20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미국에서는 웨슬레에 대한 재발견이 하나의 거대한 경향으로 일어나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은 한국교회로 이어지면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웨슬레에게 두고 웨슬레에게 돌아가자는 운동이 전개 되었다. 한편에서는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외국의 다른 어떤 것에서 찾기 보다는 성결교회 자체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것은 70년대부터 한국교회에 일기 시작한 민족주의적인 경향과 맞물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연구에 근거해야 할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주관적인 것을 강조할 경우에 사실을 왜곡시킬 수가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한국인이 주도한 자생적인 교단이라는 데 두고 성결교회의 역사적인 발전과정, 신학적인 입장, 선교적인 입장, 제도적인 차원에서 자생적 교단으로서 가지는 특이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역사적인 발전과정에서는 성결교회의 태동기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양선교회와의 관계를 살펴보고, 신학적인 입장에서는 감리교와 동일하게 웨슬레 신학에서 시작하면서도 미국의 19세기 만국성결교회와 연관하여 새로운 전통을 세웠음을 밝히고자 한다. 선교적인 입장에서는 한국인에 의해 복음전도관을 중심으로 전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고 고찰한다. 제도적인 차원에서는 치리권이 어떻게 다루어졌는가를 통해 성결교단의 특이성을 발견하고자 한다.
Ⅱ. 歷史的 特異性 - 성결교회의 자생적 교단으로서의 특이성
1. 宣敎의 始作 - 韓國人에 의한 宣敎 성결교회는 외국선교사들에 의하여 한국에 이식된 교회가 아니라 한국인에 의하여 시작된 전도관 중심의 선교활동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발전되고 성장된 결과 오늘의 교파교단으로 되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강근환 교수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를 한국인에 의하여 시작되고 한국 땅에서 수립된 한국의 자생적 교파교단으로 본다.
2) 이에 본 소고 한국성결교회 정체성의 특이성 중 소제목인 역사적 특이성을 연구하고 논함에 있어 선교사에 의한 교파이식이 아닌 자생적 교파교단수립의 관점에서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東洋宣敎會 設立과 目的 동양선교회는 미국인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일본인 나까다 쥬지, 사사오 데쓰사브로 등 5인에 의하여 세워진 초교파적 독립 선교단체이다.3) 1901년 2월 1일 일본 선교에 대한 원대한 꿈을 안고 카우만 부부가 일본에 도착한 후 그 해 4월에 나까다 쥬지 목사와 함께 동경 한복판에 있는 간다 지역의 2층 건물을 얻게 된다. 이들은 이곳에 중앙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달고 도시선교적 복음전도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같은 건물에서 시작된 성서학원에서는 전도자 양성에 주력하게 된다.4) 초창기 이 건물은 낮에는 성서학원의 교실로 사용하고 밤에는 복음전도관의 전도 집회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04년 10월 31일에는 가스와키라고 하는 곳에 3천여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건물을 신축 이전하여 독립된 공간에서 성서교육을 하게 된다. 성서학원이라는 학교이름은 이때 비로소 부르기 시작하였다. 복음 전도관과 성서학원을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아서 활발한 전도운동5)으로 점차 많은 평신도들이 생겨났는데, 밤마다 전도 집회와 노방전도를 개최하였고, 청년들에게 성서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운동이 확산되어 1905년에 이르러 각 지방에 지방전도관이 7개소로 확장되었고 애초 일본인 목회자 양성을 목적으로 시작한 성서학원에도 그 발전과정에서 중국인들은 물론 한국인들과 아시아 각국의 유학생들이 입학하여 공부하게 됨으로서 국제적인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6)7) 이러한 과정에서 동양선교회 창립자들은 일본 선교를 위한 자신들의 비전을 확대하고 이 활동을 관장하기 위한 좀 더 조직적이고 발전된 행정체계를 갖춘 기구의 필요성을 느껴 1905년 11월 초기 동역자들과 함께 도쿄에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 OMS)’를 세우고 동양각국에 순복음 전파를 위한 단체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2)韓國人에 의해 始作된 宣敎 - 한국인에 의한 자의적 선택과 불타는 선교열정 “성결교회는 외국선교사가 파송되기 전 한국인에 의해 시작된 선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개신교 선교사상 특이한 사실로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귀한 일이라 하겠다.”8) 동양선교회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러일 전쟁시 종군목사로 한국을 경유하여 만주로 가던 중 일본군 진지를 방문하여 전도하고 한국인 집회를 인도한 나카다 쥬지 목사를 통해서이다.9) 이 집회에 김상준과 정빈 양인이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동경성서학원을 소개받았다.10) 또한 카우만 부인의 말에 의하면 성령 충만한 성결의 생활을 갈망하던 이들이 동경성서학원에서 몇 달 동안 지낸 경험이 있는 한국인 의사 고명구를 만나게 되어 동경성서학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이곳이야 말로 자신들이 가야할 곳으로 결심하고 고국을 떠나 일본 동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1) 이와 같이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은 동양선교회나 성서학원 측의 초청에 의하지 않고 오직 성결의 복음을 좇아 자진하여 고국을 떠나 동경성서학원에 찾아가 입학을 하였고,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선교사의 입국을 기다리지 않고 종로구 염곡에 임시로 셋집을 얻어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붙이고 노방전도를 실시함으로서 한국 선교를 시작하였던 것이다.12)13) 이 두 사람이 선교활동을 시작한 지 1년 후에는 이장하가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합류한 후 세 사람은 선교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 당시 복음전도관의 중요한 특징은 번화한 길거리와 야외에 나가서 큰 목소리로 복음을 외치는 노방전도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에 주력했다는 것이다. 14) 이렇게 이들은 조국을 복음화하기 위한 구령열정에 불타 각고의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이 입국 전 사전에 동양선교회와 재정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후원을 약속받았고 입국 시에는 카우만과 길보른이 동행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전도관의 매입과 선교과정에서 지속적인 유대관계가 있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의 동경성서학원 입학이 동양선교회의 선택과 초청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김상준, 정빈 두 사람의 자의적인 구도적 판단에 따라서 입학이 결정되고 실행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졸업 후 바로 귀국하였던 것도 조국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그들의 불타는 선교열에 기인한다는 것을 보아야 하며 이러한 한국인의 선교열에 더하여 동양선교회의 선교적 조력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강근환 교수는 한국선교의 능동자는 바로 한국인으로서 한국인은 선교의 초기부터 현재까지 주도적 위치를 차지함은 물론 그 주체가 되어왔다. 또한 동양선교회는 피동자로서 보조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15)고 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동양선교회의 영향력과 그 역할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성결교회의 자생적 교파교단으로서 의 정체성을 주장하게 되는 근거와 이유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한국 개신교 선교사에서 주목받아 마땅한 사실로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2. 自生 및 獨立敎派敎團으로의 發展
1) 自生敎派敎團으로의 發展 - 福音傳道舘 時代(1907년 ~ 1921년)16) 동경성서학원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정빈과 김상준은 조국에 복음전도관을 개척할 것을 계획하고 현재의 염곡에 셋집을 얻어 복음전도관이란 간판을 붙이고 외국인 선교사가 입국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이 복음전도관을 시작한 구체적인 이유는 “조선에 복음이 들어오지 아니한 바도 아니고, 신도의 수가 많지 않은 것도 아니나, 완전한 은혜, 곧 ‘성결의 도리’와 전도상에 활동이 없는 것을 일대 유감”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17) 이 두 사람은 이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전도표제로 삼아 불을 토하는 듯 열열히 복음을 전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전도에 예수 믿고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18) 이명직은 이들의 당시 노방전도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매일 저녁마다 한 사람은 장등을 들고, 한 사람은 북을 치며 황토현에 가서 ‘밋기만 하오. 밋기만 하오’하고 찬미를 부를 때에 미신자는 물론하고 신자의 안목에도 만물의 때와 갓치 보일 뿐만 아니라 ‘굿중패’나 ‘남사당패’와 같다고 조롱하였더라. 그러나 김. 정 량인은 엇더한 방법이던지 령혼을 구원함에는 개가죽이라도 무릎 쓸 경우에는 그것을 사양하지 아니하겠다는 주의로 오직 충성을 다하야 역사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함께 하섯더라. 그때에 엇더한 사람은 그러한 방법은 시대가 지나갔다. 또는 천루하다고 비평하였으나 이와 갓이 길가에서 전도함으로 말매암아 구원을 밧은 영혼이 경향간에 그 수효가 실노 적지 아니하니라19) 이상의 글은 초기 복음전도관의 모습과 성격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이렇게 한국인에 의해 시작되고, 한국인에 의해서 주도되어진 조국을 향한 선교 활동은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무릎쓰더라도 북을 치고 소리를 외치며 복음을 전하는 직접 노방전도방식을 통해서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또한 노방전도는 물론 간접전도방식을 통해서도 전도를 하였고 낮에는 전도하고 매일 밤에 개최되는 집회와 주일에 있던 구령회, 성별회를 통해 구원받는 자들을 날로 더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교파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집회에 참가하여 구원받은 자들을 가까운 교회로 인도하여 신앙생활을 하도록 함으로서 순수한 구령열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들의 불타는 선교열과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서 날로 부흥을 함에 따라서 좀더 넓은 장소의 필요를 느껴 염곡에서 구리개전도관으로 이전하고 얼마 후 구리개전도관도 비좁게 되자 동양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현 무교동 12번지에 위치한 집을 얻고 무교동전도관을 열게 되었다. 이후 초기 복음전도관은 더욱 더 부흥을 거듭하여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1910년 동양선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토마스목사가 내한하기 전까지 국내에는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사역중인 교역자가 남자 8명, 여자 2명으로 도합 10명에 이르고 있었다. 한편 서울 전도관에서는 이미 25명에 이르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지도자 양성을 위한 준비로서 성서교육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것은 다음해인 1911년 경성성서학원을 개원하는데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20) 때문에 선교사 이전에 이러한 한국인에 의한 선교활동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자생교파교단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중요한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후 한국인 교역자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서 영국인 토마스목사가 동양선교회 최초의 선교사이며 초대 감독으로 한국에 입국하게 된다. 이 시기부터 복음전도관은 동양선교회의 직접적인 지도하에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21) 1911년 3월 13일에는 일찍부터 전도관 안에서 실시되던 성서교육을 바탕으로 무교동 전도관을 임시교사로 하는 성서학원을 개원하게 됨으로서 복음전도에 적합한 사역자들을 지속적이고도 체계적으로 배출하게 됨으로서 복음전도관 사역의 확장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복음전도관이 확장되어서 1913년 이후에는 30개가 넘게 설립되었으며 1914년 4월 22일에는 제1회 목사안수식도 거행되어 김상준을 비롯한 5인이 최초로 안수를 받기에 이르렀다. 22) 2) 基督敎大韓聖潔敎會 創立과 再興總會 1945년 8월 15일 일제 강점기의 암울했던 시기가 끝나고 광복을 맞이하면서 한국 성결교회도 3년간의 강제 해산기를 지나 새로운 독립교파교단으로서 출발을 위한 전환점에 서게 된다. 광복 후 교단재흥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교단 재건을 도모하다가 마침내 1945년 11월 9일 오전 10시에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각급 대표 73명이 회집된 가운데 역사적인 재흥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 재흥총회에서는 신학교 개교 문제와 활천의 복간, 교회의 부흥대책 등이 논의 되었으며 성결교회 재흥선언서23)와 강령이 발포되기에 이르렀다. 24) 민족적 독립, 정치적 자유, 종교적 해방의 기치아래 이 선언서와 강령에는 자생적 독립교단을 지향한 성결교회의 기조적 방향이 제시됨으로서 동양선교회와의 관계에서 독립적인 새로운 교파교단으로 출발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25) 3. 結 論 한국성결교회가 선교초기 동양선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면서 많은 지원을 받고 교류를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생적 교단으로서의 특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생사적 관점에서 근거로 삼는 이유는 첫째. 한국선교가 동양선교회의 직접적인 계획과 선교에 의해서 시행되지 않고 한국인이 자발적으로 동경성서학원에 입학을 결정하고 수학한 후에 귀국하여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이다. 이 당시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대한 선교계획이 수립되어있자 않았던 것인데 한국인들의 선교열에 의해 선교지원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선교의 주도적 위치에 있는 것도 한국인이고 그 선교활동의 주체도 동양선교회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동양선교회는 그 보조적 역할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초기 3년간의 복음전도관 전도활동에서 한국인에 의해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 3년 동안 동양선교회의 선교사는 파송되지 않은 체로 오직 한국인에 의해서 복음전도관이 세워지고 한국인에 의해서 전도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성서교육이 이미 영국인 토마스 선교사의 입국 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은 중요한 자생사적 사건이라고 아니 할 수없다. 셋째. 재흥총회를 통한 자립교단의 수립을 들 수 있다. 일제하 강제 해산기를 거친 후 광복을 맞아 한국성결교회는 교단의 재건을 위하여 한국인들만으로 구성된 재흥총회를 개최하고 강령이 포함된 재흥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일련의 근거와 이류를 들어 기독교대한성결교회와 동양선교회의 관계성에 대한 설정에서 지배적 관계에서의 교파이식보다는 선교적 관계성을 맺고 상호협력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Ⅱ. 神學的 特異性 1. 신학의 계통 1)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조직되어 교단의 교리신조를 제정할 때, 당시 「헌법」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본 단체에서 주장하는 교리는 새로 만든 교리가 아니오, 오직 옛날 웨슬레 씨와 감리회의 초시대 성도들이 조장하던 교리, 곧 하나님의 단순한 근본적 진리니라 ... 곧 최초 감리교회에서 주장하던 진리 그것뿐인데, 웨슬레씨의 주장하던 진리와 조금도 다름이 없나니라.26) 곧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은 웨슬레 신학과 최초 메소디스트 운동에 있다는 것이다. 이명직 목사는 그의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혹시 동양선교회(성결교회)는 어떤 교파이며, 어떤 계통인가 알고자 사람이 있을 줄 안다. 그런데 우리 동양선교회(성결교회)는 결코 창립자 자신이 어느 교파에 반대하고 니너님도 아니요(빌1:15), 무삼 교리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어서 새로운 교회를 창도하고 니러남도 아니오, 오직 감리교회의 개조인 요한 웨슬레를 니어 니러나 곳, 초대시의 감리교회와 갓치... 복음을 고도하며, 미신자에게 진격적으로 전도하여야 저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저 함이니, 곧 우리 교리나 정신을 순 초시대 감리교회로 인정하여야 틀림 없슬지니라.27) 이런 입장은 초대 성결교회에서 발생한 여러 문헌에서 뒷받침되어 있다. 당시 《활천》은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된 동양선교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동양 모든 나라에 대하여 순젼한 복음을 전하기로 목적하는 단테이다. 그 특색은 지금부터 1백 80여년 전에 요한 웨슬레 씨가 전하던 복음 그래로, 강령은 요한 웨슬레 씨가 증거한 성결 그대로 일호도 가감 없이 전함이다. 그런고로 누구던지 동양선교회를 알고저 하면 초시대 감리교를 알면 넉넉하고, 성경을 알녀하면 감리교회 창립자 요한 웨슬레 씨의 심령상 경험을 드러보면 넉넉하다. 우리 동양선교회가 탄생한 이래 20년간 하나님의 크신 축복하에서 금일까지 니르게 된 것을 감사하는 바이다. 수년 전까지는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복음전하는 것으로만 목적을 하였으나, 시세와 평판에 의하여 교회로 조직되었난대, 종래의 복음전도관이라는 명칭을 변경하고 성결교회라는 새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28) 당시에 『성결교회 헌법』(1925, 1933, 1936)은 그 서문에서 동양선교회의 기원을 밝히면서 본 단체가 주장하는 교리는 이명직 목사의 주장과 동일하게 옛날 웨슬레와 초대 메소디스트의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29) 2) 감리교와의 차이 그렇다면 성결교회와 감리교회는 어떻게 다른가? 먼저 한국에 들어와 있는 감리교와의 관계성에 대해서 이명직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노 말매암아 나타내심과 요한 웨슬레의 성경해석의 근본적 교뢰와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를 토대로 주 강생 1925년에 공포하여 성서학원과 온 교호와 신도들에게 가라쳐 영구(永久)하도록 직히는 신경(信經)으로 하나니라.30) 이 말의 의미는 성결교회의 신학적 배경이 웨슬레 신학과 그 초기 운동에서 기인하고 있지만, 이 계통이 19세기 미국에서 불일 듯 일어났던 만국성결운동을 통하여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성결교회는 그 신학적 기원을 감리교회와 같이 웨슬레 신학에 두고 있지만, 만국성결교회와의 연관성 속에서 성결교회는 새로운 사명을 띠고 설립된 것이다.31) 3) 만국성결교회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가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신앙개조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1925년에 제정된 성결교회 조례는 현재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조례의 영어판이 있는데, 이에 의하면 만국성결교회의 헌법과 한국성결교회의 목적, 신앙개조, 입회서약, 교회계약, 교역자들에게 주는 특별 권면 등은 거의가 그대로 동양선교회의 헌법과 장정에 수록되었다.32) 1916년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는 모두 17개조로 되어 있다. 이들 중에서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에 누락된 것은 제 11조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회중에게 말하는 것에 관한 조항이다. 이 조항은 방언으로 회중에게 말하는 것은 비성서적이라고 말하며, 또한 성령세례를 성결 체험이 아닌, 방언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가 이 조항을 삭제하였다 해도 이런 정신은 동양선교회에서 계속 유지되어 왔다. 또한 대폭 수정한 것은 세례에 관한 부분이다. 만국성결연맹은 세례의 형태는 각자의 자유로 할 것이며, 아무도 어떤 형태를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또한 유아세례는 유지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침례가 세례의 성서적 형태라고 말하면서 부득이한 경우에는 약식으로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유아세례에 관한 조항은 빠졌다. 동양선교회의 신앙개조는 만국성결교회의 신앙개조 가운데서 하나는 삭제되고, 다른 하나는 대폭 수정하고, 나머지는 만국성결교회의 것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33) 만국성결교회와 한국성결교회의 직접적인 관계는 1933년 최석모 목사의 미국 방문을 통해서이다. 1933년 한국성결교회는 제 1회 총회를 조직하고, 자치를 선언하였다. 총회의 조직과 함께 한국성결교회의 최고의 책임자는 한국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제 1회 총회 이후 한국성결교회는 교단의 주도권 문제를 놓고 동양선교회와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그 후에는 곧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여 필그림 성결교회(만국성결교회의 후신)와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지 못하였다. 4) 복음적 알미니안주의 동양선교회의 신학은 웨슬레안 체험주의에 입각한 복음주의 신학인데, 이것이 알미니안 계통이다. 메소디스트 신학 초시대 사상과 같은 계통이다.34)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믿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졌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의 이중예정설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19세기 미국의 복음주의교회는 이런 알미니안주의를 자유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복음적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렀다. 복음적 알미니안주의는 은총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35)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동양전도가 목적이어서 교회 선전이나 교파분립이나 신학 사상의 보급이 아니라 그 전도표제의 강조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깃발을 나섰다.36) 강근환 박사는 “기독교 대한성결교회의 신학적 전통은 동양선교회와 미국의 성결운동을 통한 웨슬리안-알미니안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이라고 밝히고 있다.37) 2. 한국 성결교회의 사중복음 한국성결교회가 초기 설립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주창하고, 강조해 온 사중복음은 한국성결교회의 전통적 유산으로서 초기에는 전도표제로서 머물렀으나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성결교회의 교리적이며 신학적인 내용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사중복음은 한국에서 복음전도관 설립 당시부터 현재 성결교회에 이르기까지 교리뿐만 아니라 신앙에 있어서도 전통적인 교단의 특색을 이루게 하였다.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각 각의 의미와 특색이 있지만, 이것을 하나의 틀로 모아 강조한 교단은 한국교회 중에서 성결교회만이 점유하는 유일한 전통이다.38) 동양선교회에 영향을 미친 만국성결교회는 19세기 미국의 성결-오순절 운동에서 사용했던 순복음 전도운동에서 순복음의 내용으로 강조된 구원, 성령충만, 신유, 재림의 사대표제를 수용하여 웨슬레가 강조한 중생, 성결과 신유의 권능을 증거하며 예수님이 재림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한국에 들어온 동양선교회 성결교회가 초창기부터 웨슬레가 주창한 성결의 도리를 그대로 전하려는 사명 아래에서 사중복음을 힘있게 전파하였다는 것은 1933년과 1936년도 당시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헌법이 순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성서적 성결과 세계복음화에 불가결하다”고 하며, 본 교회의 사명은 순복음 곧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국내외에 전파함에 있다고 천명한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39) 이렇게 이해하고 표현했던 것을 1945년 성결교회 재흥총회에서는 ‘우리교파의 사명’과 ‘성결교회의 전도표제’라는 조항을 새롭게 만들어 다음과 같이 이를 수용 정리하면서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의 초대 창립자들이 성결교회를 창립하였음이 ... 영국을 누란의 위기에서 구원한 요한 웨슬레의 주장던 성결의 도리를 전하려는 사명 하에서 일어났으니, 이 조류를 밟아 일어난 우리들은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을 더욱 힘있게 전하여 모든 사람을 중생으로 인도하며 교인들을 성결한 신앙에 인도하여 주의 날에 주름 잡힘이 없는 영화로운 교회로 서게 하기를 기할지니라.40) Ⅲ. 宣敎的 特異性 정상운 교수는 “성결교회가 가진 특성은 무엇보다도 두드러지게 ‘복음전도’에 대한 우선강조에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41) 초기 형성과정에 있어서, ‘선교 우선주의’의 모습을 보였고, 그런 ‘선교 우선주의’는 다음의 세 가지 고유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첫째, 한국인에 의해 시작된 선교 , 둘째, 복음 전도관 으로 시작된 선교, 셋째, 전도자 양성 우선적 선교이다. 이 세 가지 특성은 초기 성결교회의 선교에 있어 독특성을 형성하였다. 1. 한국인에 의해 시작된 선교 선교활동을 펼치는 정빈, 김상준 두 사람의 사역은 한국인에 의하여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한국인만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물론 그 사역의 물질적 배경에 동양선교회의 후원이 있었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에 성결교회가 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한국인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정빈, 김상준 두사람이 타의에 의해 동경성서학원에 간 것이 아닌, 본인들의 자의에 의한 선택이었으며, 그들의 불타는 선교열정과 뜨거운 선교활동은 조국선교에 대한 주도적인 행동의 뜨거운 열기에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창립자)들이 함께 동조하게 되었고, 이것은 동양선교회가 인적, 재정적 부족으로 인하여 한국선교에 발을 내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수순한 한국인 선교의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두 선구자에 의해 시작된 한국선교 3년 후에는 이들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동양선교회가 영국인 토마스 목사를 한국에 초대감독42)으로 파송하였던 것이다.43) 물론 토마스 감독의 부임으로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업이 한국에서 본격화되었지만 토마스 선교사가 오기까지의 3년에 걸친 선구자들에 의해 수행된 초기 ‘복음전도관’을 중심한 선교활동은 선교사가 오기 전에 한국인의 손으로 시작되고 닦아진 한국성결교회 수립의 바탕이 됨으로 이는 강근환박사는 초기 한국성결교회에 나타난 선교정책적 특색을 세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그것은 첫째, 한국인으로 시작된 선교, 둘째로 복음전도관으로 출발한 선교, 셋째로 성서학원을 우선시하는 선교라고 요약하고 있다. 한국성결교회사에서는 물론 한국 개신교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선교사적 독특성이라고 하겠다.44) 2. 복음 전도관 으로 시작된 선교 서양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인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1885) 자극을 받은 한국의 젊은이들은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세워보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된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성결교회의 선구자인 정빈, 김상준은 동양선교회가 운영하는 동경성서학원에 입학45)하였고, 2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1907년 졸업과 함께 곧바로 귀국, 선교활동을 시작하게되었다. 이 두 사람은 서울의 중심지인 종로 염곡, 현재 종로2가에 위치한 작은 집을 세내어 ‘동양선교회 예수교 복음전도관(Oriental Missionary Society Jesus Doctrine Mission Hall)’이라는 간판을 붙였다.46) 이것은 한국 성결교회의 ‘복음전도관’의 시초이다. 그리고 이들은 번화한 길거리로 나가 큰소리로 복음을 외치며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1월의 정빈, 김상준이 보고한 사역내용에서 그 모습이 나오고 있다.47) 정빈과 김상준의 뜨거운 전도활동에 계속적인 성령의 역사로 복음전도관은 경성 장안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카우만과 길보른의 도움으로 염곡의 것보다 더 큰 기와집을 ‘동현’이라는 곳에서 한채 세얻어서 이전하게된다. 동현은 그당시의 말로 ‘구리개’ 요즘의 ‘을지로 입구’이다. 그러나 이 곳도 곧 자리가 좁게되자 장로교인 이씨의 도움으로 경성중심지 번화가(현 무교동12번지)로 옮기게 되었으니, 이곳이 경성중앙복음전도관이 세워진 한국성결교회의 요람이 되었다. 1908년에는 이장하, 김혁준, 강태온 세명이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이장하는 서울에서 전도활동을 도왔고, 김혁준과 강태온은 지방인 황해도 진남포에 가서 전도관을 세우고 전도활동을 하였다. 1909년에는 김두엽이 귀국하여 개성에서 전도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 이듬해인 1910년에 안동원이 동경에서 돌아와 그와 함께 활동 하였다. 복음전도관 최초의 여성사역자인 여교역자들도 이 기간에 두사람이나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와 전도관 활동에 동참하였다. 박기반48)은 1909년에 돌아와 서울에서, 최홍은도 1910년에 귀국하여 진남포에서 사역하였다. 그러므로 이기간 전도관 사역에 임하였던 교역자수는 남자 8명이고 여자 2명으로 도합10명이었고, 그지역은 서울과 진남포, 개성등이었다.49) 그들은 전도관에서 전도활동 뿐 아니라 성결교육도 실시 하였다. 곧 1910년에 동양선교회 최초의 감독인 토마스 목사가 내한하기 전에 서울 전도관에서는 벌써 25명 정도에 이른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토마스 감독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부임 이듬해인 1911년 봄에 쉽사리 성서학원을 개원할 수 있었고, 또한 개원해야 될 상황으로 기틀이 마련되었다.50) 이 성서학원이 오늘의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이라고 볼때 그 성서학원의 바탕이 된 이 시기(1907-1910)에 있어서의 한국인 선구자들에 노력은 귀중한 역사적 뿌리가 될 뿐만 아니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신학교육의 근본이 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와같이 최초의 두 선구자들이 귀국하여 전도활동을 시작했던 1907년으로부터 토마스목사가 내한하게 되었던 1910년까지 이르는 3년의 시기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자생사적발전과정에서 볼때 한국인에 의하여 선교가 시작되었으며, 전도자 양성의 준비로서 성서교육까지도 실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시할 자생사적 기초 기간이라 할 수 있다. 3. 전도자 양성 우선적 선교 초기 성결교회는 직접전도 방법을 택하여 개개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렇기에 동경성서학원에서 훈련받은 정빈, 김상준 두사람의 전도활동을 통해 자국민에 의한 전도의 성과가 크다는 것을 알게된 동양선교회는 피선교지의 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와 같은 성서학원을 세워 훈련시키는 일을 선교전략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다. 처음에 동양선교회는 한국 청년들을 동경성서학원에 입학시켜 훈련하려했으나, 언어문제, 경비등이 문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 9명, 여자2명의 동경성서학원 졸업생을 만들기도했다. 그러던중 1910년 토마스 목사가 감독으로 파송된 것을 계기로 성서학원의 설립계획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경성성서학원은 뜨거운 전도열에 불타는 젊은 전도자들을 양성하였는데 1912년 4월에 1회 졸업생으로 이명헌을 비롯하여 1920년까지 남자 43명과 여자 1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초기 성결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1915년 12월에는 10곳의 전도관과 여러 곳의 순회전도소(현재의 기도처와 유사)를 세워 선교사 4가정, 안수받은 한국인목사 5명, 안수받지 않는 전도사 12명, 전도부인 8명과 수양생 24명 등 아내와 자녀까지 합하여 100명의 식구가 동역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성결교회에 있어서 황금기였다. 외적으로는 동양선교회 본부가 경성으로 이동되었고, 그 결과 조선지역 선교확장에 인력과 재력이 크게 투자되어 1916년 9개소이던 전도관이 1921년에는 34개소로 증가되어 거의 수직에 가까운 성장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내적으로는 이명직이 성서학원 교수로 임명되고, 한국인 교역자의 활동 범위가 넓어졌으며, 경성성서학원이 각 도에 5개처 전도관 설립계획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되었다. 특히 여선교사들의 복음적이고 구령열에 불타서 순복음적 성결부흥운동을 일으켜 한국교회의 여성들을 영적으로 부흥시켰다. 이러한 활동은 한국성결교회 전도부인과 사모들이 활기차고 능동적으로 역사할 수 있게 하는 정신적, 신앙적, 실천적 기준이 되었다. 당시 압제받고 짓밟힌 백성들을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하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느낀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은 마을마다 다니며 천막을 치고 전도하는 ‘장막전도대’를 만들어 수많은 영혼들을 예수께 인도했다. 이 ‘장막전도대’는 가는 곳마다 북과 나팔을 불면서 사람들을 모아 옥외집회, 노방전도, 축호전도, 전도지배포 등을 통해서 전도했다. ‘장막전도대’ 외에 순회 전도팀이 있었는데, 선교사와 성서학원 수양생이 한조가 되어가 훈련된 한국인 목사와 수양생이 한조가 되어서 마을에서 마을로 다니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예수의 70인 제자가 복음전도를 위해 짝을 지었던 것과 동일한 전도방식을 취했다. 또한 성결교회는 민족적으로 암울한 시기에 일제에 대한 항장과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김상준, 토마스, 강시영, 김시삼, 천세봉, 백신영, 한도숙, 윤판석, 서용란 등이 앞장서서 주도하였다. 한편 성서학원은 1921년 3월 경기도 고양군 룡강면 아현리(현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에 현대식 5층 건물의 남자부 신축교사를(구 서울신학대학 교사) 준공하였다. 1921년 10월 복음전도관 시대가 끝날 때까지 전국에 설립된 복음전도관의 수는 34개처(이외에 순회소가 여러 곳이 있었음)에 달하였다.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일본의 지배하 에 있었던 암울한 시기로, 일본의 박해 속에서 한국교회는 일대 수난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는 한마디로 성결교회의 부흥회의 시대였다. 한국성결교회가 조직되게 된 요인과 역사적 과정은 다름 아닌, 처음에 사용한 복음전도관이 교회가 아닌 전도관이라는 이름때문에 같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백안시되고 이단시되었다. 그리하여 교세확장과 발전에 이 시기는 마을전도운동과 북선(북한과 만주)지역과 호남지역에 대한 전도의 열기가 뜨겁게 타올랐고, 1921년에 준공된 성서학원에서 배출된 많은 신학생들이 전국으로 파송되어 한국교회 부흥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인간의 구원은 사회개혁으로 되지 않고 순수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며 따라서 영혼의 구원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당시 성결교회의 지배적 선교관이었다.51) 1929년 2월 26일부터 3월3일 기간 동안은 한국성결교회에 중요한 주간이었다. 이때에 세계적인 부흥사 리다웃(Ridout)목사를 강사로 모시고 심령수양회를 열었고, 성결교회는 전국 수양대회를 자주 열어 회개와 구령열을 찾는데 힘썼다. 먼저 본 교단은 1907년 한국인 두 선구자의 뜨거운 선교적 열정, 그리고 전도활동으로 복음 전도관이 설립되어 최초 선교활동이 시작되었고 스스로의 자의적인 구도라는 점에서 기독교 선교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점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 성결교회의 시발점인 복음 전도관 시대의 의미를 살펴본다면, 이 시기는 성결교회가 자생적 교단으로 그 기반을 다지는 시기였고, 이 때의 선교활동은 순수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진 자국민의 선교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타 교단에 비하여 성결교회만의 주체성과 긍지를 갖게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10년부터 1921년까지의 동양선교회 복음 전도관 시대를 지나서 1921년부터 조선 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교단 명칭의 변경과 함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결교회가 그 신앙적 절개로 인하여 강제 해산을 당하고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순교를 각오하고 믿음을 지켰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한국인에게 정신적 고결성의 본이 되었고, 신앙적 자부심을 갖게 하는 요소로 오늘날까지 이어온 훌륭한 신앙유산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이후, 재흥 총회가 개회됨으로써 순수하게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이전의 동양 선교회의 의존형태에서 탈피한 완전한 독자적 독립 교단을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자생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후에도 성결교회는 민족의 동란과 성장, 분열과 통합 등 민족과 한국교회의 고난에 동참하여 이제는 한국내 주요 교단이 되었고, 특히 1977년 이후 국내 선교까지 그 선교적 역량을 넓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성결교회는 아쉽게도 성결교회만의 정체성을 조금씩 잃어버리고 있다. 오히려 타 교단에서 이러한 장점들을 받아들여 부흥,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성결교회는 성결교회의 특징인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며, 교단 신학의 재정립을 통하여 21세기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Ⅳ. 制度的 特異性 1. 동양선교회의 특성 동양선교회는 19세기 미국의 성결운동에서 출발한 성결운동 단체로서 동양선교회가 출발할 당시에는 성결운동을 표방하는 교파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귀환하여 돌아갈 교회를 본국에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따라서 피선교지 교회와의 관계에서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오랫동안 치리권을 행사할 가능이 많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2. 치리구조의 이중적 특성 1930년대가 넘어서면서 한국교회는 자치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우선 한국인 교역자들수가 증가하면서 한국교회의 치리 지도권이 선교사들에게서 한국인에게 이야되기 사작하였던 것이다. 장로교의 경우는 1912년 총회가 독립하면서 선교사들은 미국 장로교에서 파송하여 한국 장로교의 총회와 노회의 치리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52) 물론 총회 초기엔 선교사들의 총회 내에서 위상이 한국인 목사들에 비하여 월등하게 컸던 것이 사실이지만 점차 장로교 선교사들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재단부, 사회부, 농촌부등 선교활동의 제2선으로 물러서 가면서 한국교회에 점차로 치리권을 이양하였던 것이다. 감리교의 경우도 1930년 남북 감리교가 합동하여 조선 감리교회로 통합할 무렵 자치 교회로 한걸음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비록 ‘선교사들의 복무와 재정적’도움을 몇 년 더 받아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달려 있기는 하였으나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치리할 수 있는 자치 교회를 형성하였던 것이다.53) 아직 완전한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감독이 취임하지는 않고 총리사가 취임하였고 초대 총리사에는 야주삼 목사가 취임하였던 것이다. 감리교회의 선교사들이 실질적인 주도권을 상당 부분 가지고 있었으나 형식상으로는 한국 연회의 치리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는 한국 장로교 총회나 한국 감리교 연회의 직접적인 치리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치리의 법적인 토대는 한국 장로교 총회 헌법과 감리교 교리와 장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 성결교회는 독자적 치리 기관이 선교부의 지도권에 종속되어 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이 점이 성결교회가 장로교나 감리교와 다른 차이점이었다. 한국 성결교회의 치리 제도의 발전은 감독제에서 출발하였다. 1907년부터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시작으로 지속된 발전으로 인해 동양선교회는 한국에 정주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초대 한국 정주 선교사로 존 토마스(John Thomas)를 1910년 11월 한국에 파송하였다. 토마스는 한국동양선교회의 정주 선교사이며 초대 감독으로 활동하게 되었다.54) 이 감독제는 제2대 감독이었던 헤슬롭 선교사가 부인의 병으로 귀국하고 뒤를 이어 부임한 길보른 감독도 1924년 2월 찰스 카우만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총재 자리를 맡기 위해 미국으로 귀국하게 된 것을 계기로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21년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은 그 명칭을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바꾸었다. 성결교회는 그 필요에 의해 목회체제를 도입했지만, 그 중심은 언제나 전도에 있었다. 이렇듯 한국의 복음전도관의 발전과 더불어 성결교회는 전도와 목회의 양면적 선교정책을 시행하는 교파교회의 면모를 갖게 되었다.55) 교회가 조직된면서 감독을 자문하기 위한 고문회가 신설되었다. 이 고문회에 한국인으로 이명직, 이명헌, 최석모 등이 참여하게 되었다. 교회의 조직과 더불어 감독제를 고문회로 대치하게 된 배경에는 감독정치의 폐회, 교회의 발전, 시대의 취향 등이 있었다. 물론 고문회를 구성하는 고문들이 선출된 것이 아니라 동양선교회의 최고ㅗ 지휘 감독기관이었던 총무부에 의 해 임명된 것이기는 하지만 행정상 유익함이 적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비록 제한적이기는 했지만, 한국인들은 이때부터 비로소 성결교회의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문회는 한국인들이 성결교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최초로 열리게 되었다는 의의를 갖고 있다.56) 1924년에는 감독제와 고문제가 폐지되고 이사회제도가 도입되었다. 이사은 선교사였으나 이사에는 한국인 목사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한국인의 참여가 지속된다는 점에는 고무적인 점이 있었으나 이사들은 모두 동양선교회 총 본부에서 임명하고 있었다. 성결교회의 실질적인 치리 기관인 이사회는 선교사에게 귀속되어 있었고 결국 성결교회는 선교사의 치리권 하에 있었다. 즉 동양선교회 부총재 겸 한국 감독으로 부임하여 길보른 감독이 시작하였던 고문회 제도는 과도기적 정치기관이었다. 고문회 제도는 길보른 감독이 창스 카우만 총리의 유고로 생긴 공석을 메우기 위해 귀국하게 됨을 계기로 폐지되었고, 이사회제도가 새롭게 시작되었다.57) 한편 성결교회 한국 교역자들의 치리 기구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형성되고 있었다. 그것은 1921년 성결교회가 교회로 조직되면서 생겨난 교역자 간담회였다. 교역자 간담회(1921-1923)는 매년 열리는 교역자 수련회를 통하여 자연스럽게 한국인 교역자들의 모임이 생기면서 모임이 구성되었다.58) 그러나 간담회는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하였다. 1924년 교역자회(1924-1928)는 간담회가 발전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교역자회는 체계화되고 내규도 가지게 되는 등의 보다 공식적인 모임이 되었다. 1929년 한국 성결교회는 연회(1929-1932)를 열게 되었다. 연회가 생겨난 동기는 한국 성결교회의 치리를 선교사와 이사회가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어서 일반 교역자들의 불만이 높았고 이에 연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당시 감리교가 자치의 기반을 구축하여 가고 있었기 때문에 성결교회는 의회적 치리기구인 연회를 설립한 후 1932년 제4회 연회에서 자치 선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한국 성결교회는 아직 경제적 자급을 달성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치를 이루지 못하였다. 1933년 4월 11일 경성성서학원에서 제1회 총회59)를 개회하였다. 여기서 이명직 목사 총회장에 선출되었으며, 형식상 자치적인 교단이 되었다. 또한 총회는 이사회의 권한을 대폭 약화시키고 성결교회의 실질적인 치리 기구를 완성한다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동양선교회는 한국성결교회는 자급을 이러야 자치권을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총회의권한에 제동을 걸었다. 감리교와 장로교는 선교사들이 한국 치리 기구의 치리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선교회는 총회가 설립된 후에도 한국 성결교회의 치리를 받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제3회 총회를 불법으로 단정하고 변남성, 곽재근, 정남수 등을 제명하였고 그래서 이들은 성결교회를 탈퇴하여 1936년 11월 평양의 상수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창립하게 되어 성결교회의 분열 문제를 야기하였다. 다른 교파 교회는 자치가 이뤄진 후 연회나 총회등 단일 치리 기구를 가지고 있었으나 성결교회는 한국 성결교회의 의회적 기구인 간담회-교역자회-연회-총회와 선교사와 연계된 중앙 기구인 감독-고문제-이사회가 있어서 실질적으로 선교사들이 치리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자치를 원하는 한국 성결교회와 자급을 전제로 한 자치를 주장한 선교사와의 대립으로 하나님의 교회 분열의 원인을 제공하고 말았다. 즉 한국 성결교회는 치리기구 설립 이후에도 선교사가 한국 성결교회의 치리를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이 있으며 이는 동양선교회가 모교회가 없는 순수 선교단체였다는 것에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Ⅴ. 結 論 성결교회의 정체성의 문제는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성결교회의 과거와 전통을 분명히 하는 것이며, 현재의 위치와 역할을 재확인하는 것이고,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에서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한국인이 시작한 자생적인 교단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네 가지 측면에서 이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성결교회에 있어 웨슬레 신학과 동양선교회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결교회가 이러한 것들의 영향아래에서 수동적인 태도를 가진 것이 아니라, 복음전도를 위하여 이들을 찾아나서고 적극 수용한 능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1. 단행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한국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2.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역사편찬위원회, 「간추린 한국성결교회사」, 서울: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출판부, 1994. 박명수, 「초기한국성결교회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이응호, 「한국성결교회사1, 2」, 서울: 성결문화사, 1992 이명직,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약사(朝鮮耶蘇敎 東洋宣敎會 聖潔敎會略史)」, 서울: 1929. 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 서울: 성경읽기사, 1987. 정상운, 「한국성결교회사1,」,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7 2. 논문 및 정기간행물 강근환, “초기 한국성결교회에 나타난 선교정책적 특색”, 「신학과 선교」제4집, 1977. 강근환,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자생사적 소고”, 「교수논총」창간호,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