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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봉으로 머리와 옆구리를 후려쳐
증언자 : 백계남(남)
생년월일 : 1940. 10. 14(당시 나이 40세)
직 업 : 냉장고 수리업(현재 음식점 경영)
조사일시 : 1989. 1
4·19 때 경찰서 신세를 지기도
내 고향은 전북 남원이다. 1940년 나는 그곳에서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는 세무서에서 근무하고 계셨기 때문에 집안형편은 넉넉하였다.
어머니와 셋째 삼촌은 트럭으로 화물을 배달하는 수송업을 하고 있었다. 2층 우리 집 옆에는 가게로 내놓은 집 한 채가 더 있었다.
나는 용산국민학교 4학년 때 6·25를 맞았다. 아버지께서 공무원이셨기 때문에 우리 집은 피난을 가야 했다. 식구들은 남원에서 20리 떨어진 왕친면이라는 곳으로 피난을 가 그곳 친척집에 머물렀다.
나와 내 바로 아래 여동생은 곡성 큰집의 할아버지를 따라 곡성으로 가 거기서 6·25를 보냈다. 수복이 되어 남원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보니까 집 꼴이 말 아니었다. 2층 한옥은 폭격으로 주저앉아버린 뒤였다. 그리고 화물수송을 했던 트럭은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아 있는 가겟집에서 기거를 해야 했다.
내가 6학년 2학기가 되던 해 우리 집은 곡성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께서 그곳 세무서로 발령이 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 곡성중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를 닮아 성격이 활발했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었다.
1958년도 광주에 올라와 광주기계공고에 다녔다. 졸업한 후에는 한양공대 산업공학과에 합격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낯선 서울생활에 적응해 가던 대학 1학년때 4·19를 맞았다.
19일, 우리 학교 학생들은 퇴계로에 있는 대한극장 앞에서 돌을 던지며 데모를 했다. 차량을 집어타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나는 경찰에게 붙잡혀 성북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도 했다. 4·19 이후에도 학내문제로 좀 시끄럽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평온한 대학생활이었다.
대학 졸업 후엔 '삼강'(지금은 롯데삼강이다)에 들어가 일했다. 그곳 판매과에 있는 김병남 과장은 전남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같은 고향사람이라고 와서 근무 좀 해달라고 해서 그곳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거기 공무과에서 일하면서 월급으로 3만 4천 원을 받았다. 당시의 공무원 월급에 비한다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1970년도에는 식구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퇴직하시고 시골 큰댁에 계셨다. 동생들 학비 때문에 생활이 어려웠으므로 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일을 하시며 생활을 이끌어가셨다. 여름에는 모시장사를 했고, 겨울에는 부산에 내려가 시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셨다.
1974년경 나는 결혼한 후 광주로 내려왔다. 조그만 회사에서 일하다 그만둔 뒤로 누문동에서 전기냉장고 제작수리업을 했다. 아내와 나 그리고 종업원 몇 명을 두고 일했다. 생활은 그런대로 넉넉하였다.
1980년 봄이 되면서 대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다. 내가 살고 있던 누문동은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학생들의 데모를 과히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구경하는 시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며 협박
5월 18일 집 부근에 있는 누문동 파출소를 공수부대가 점거했다. 그러고는 파출소 앞을 지나가는 젊은 사람들을 무조건 잡아서 때리기 시작했다. 오전 11시경, 공원 쪽에서 청년 한 명이 파출소 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쪽 길목에 있던 경찰들이 위험하니까 내려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것 같았으나 그 젊은이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 생각컨대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학생이 아니다. 그러니까 두려울 게 없다.' 그 젊은이가 파출소 가까이 오자 공수대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젊은이는 엉겁결에 부근 건물의 지붕을 타고 도망갔다. 공수가 쫓아가자 그는 지붕에서 뛰어내리다가 공수부대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는 워커 발로 사정없이 그를 짓밟기 시작했다. 나는 집 유리창 너머로 그 광경을 보면서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누문동에 사는 주민들도 몰려나와 그것을 구경했다. 공수부대는 주민들에게 총부리를 들이대며 '어서 해산하라. 그러지 않으면 쏜다'고 소리쳤다. 주민들은 놀라 모두 도망쳐 버렸다.
나는 공수부대의 잔학성을 보고 난 뒤라서 좀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궁금해서 나와 본 것이다. 일고 앞으로 가보니 그곳에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 막 투입된 듯한 공수부대가 모여 있는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핸드 마이크로 어서 해산하라고 소리치기도 했고, 일부 사람들을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쉽게 흩어 지지 않고 한걸음씩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집으로 들어왔다.
19일 거의 모든 상가가 철시를 했으므로 우리도 가게문을 닫았다. 나는 어둑어둑 해질 무렵인 8시경 금남로에 나가 보았다. 금남로엔 시민들이 상당히 많았다. 내가 나갔을 때 시민들은 마이크가 필요하다며 덕영상사 인켈대리점 음향기기 취급업소에 핸드 마이크를 얻기 위해서 몰려가고 있었다.
그곳에 핸드 마이크는 하나 있었는데 건전지가 없는 모양이었다. 건전지가 없다는 가게 주인의 말에 시민들은 흥분해서 가게를 부숴버려야 한다고 소리쳤다. 나는 그들을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민들 재산을 부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사람들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군중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옳은 얘기는 호응을 얻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자제를 하자 인켈대리점에 있던 나이드신 주인이 핸드 마이크를 내줬다. 건전지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가면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건전지를 구하러 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들어갔다.
머리부상
20일은 오전에 시위대와 함께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가보았다. 몇백의 시민들이 돌이 실린 대형 트럭 앞에 모여 있었다. 번호판으로 보아 경상도 차인 것 같 았는데 시민들은 그 차를 뒤집어버려야 한다고 난리였다. 마침내 몇 명의 시민이 달려들어 한쪽 바퀴 쪽을 들어버리니까 차는 쉽게 넘어갔다.
대형 트럭을 넘어뜨린 뒤에 거리에 세워져 있던 아치를 뜯어 차 밑에 넣고 불을 질렀다. 사람들은 서로 환호하며 차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위험하니까 피해야 한다는 얘기들을 했다. 차에 있는 휘발유가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 듯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계엄군이 사진촬영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므로 뒷일이 어찌 될지 몰라 옷을 바꿔 입었다. 그리고 도청으로 나갔다. 도청 앞에는 공수부대가 도청 분수대를 중심으로 서 있었다. 그 앞에는 시민들이 그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나는 맨 앞으로 갔다. 내 옆에는 플래카드를 든 사람이 있었다. 공수부대와 마주 서 있기는 했지만 별로 두렵지는 않았다.
어둠이 내리자 사람들은 깡통과 드럼통을 두들기며 사기를 북돋았다. 또 거리에 서 있는 아취형 철판을 떼내어 두들기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수대가 최루탄을 쏘면서 시민들을 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나도 죽어라고 뛰었지만 앞에 있었으므로 자연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한참 달리다가 한국은행 출입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골목인 줄 알고 들어갔으나 막다른 골목에 이르러 다시 뛰어나오다가 뒤쫓아온 공수부대에게 잡혀버렸다.
두 명의 공수부대가 나를 덮쳤다. 살기등등한 그들은 곤봉으로 먼저 내 머리를 내리쳤다. 순간 내 손이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다시 곤봉으로 옆구리를 강타했다. 이어 어깨를 후려쳤다. 나는 그자리에 쓰러져버렸다. 그러자 공수대는 나를 버려두고 가버렸다.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의식이 가물거렸지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솟아났다. 그러기 위해선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더라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충장로로 들어갔다. 가다가 젊은이들을 만난 뒤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 보니 여인숙이었다. 심부름하는 총각이 나를 보고 '죽지만 말라'고 했다. 나도 죽고 싶은 맘 하나도 없다고 대답했다. 그 총각이 약을 사다 줘서 먹고는 잠을 좀 잤다. 머리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그대로 있다간 안 될것 같아 집에 전화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불통이었다. 일률적으로 불통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는 전화번호를 더듬어 다이얼을 돌려보았다. 그러다가 계원인 김양근 씨와 통화가 되었다.
사정 얘기를 듣고 얼마 후 그와 다른 한 사람의 계원이 왔다. 그는 일단 우리 집에 알려야겠다며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으로 갔다. 거기서 아내와 함께 왔는데 아내는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은 벽이고 이불이고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아내는 내 머리를 살펴보더니 7센티미터 정도가 찢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여관 주인한테 고맙다며 방 값 이상의 돈을 지불한 뒤에 계원들이 나를 부축하여 여관에서 나왔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으려 했으나 태워주지 않았다. 부상당한 사람을 싣고 가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서성이다 김양근 씨가 택시 앞을 아예 가로 막아버린 후에야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하여 나는 집으로 갔다.
기억력 상실
집에 갔으나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어서 병원에 가야 했다. 집 앞에서 만난 학생들이 서석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서석병원에 가서 입원을 하고 엑스레이를 찍었다. 엑스레이를 찍은 결과 갈비뼈가 하나 부러졌다고 했다. 병원은 이미 부상자들로 꽉차 있어 치료를 잘 해주지 않고 대충대충 해줬다. 나는 백제약국 등에서 약을 사다가 먹었다. 병원측에 치료가 잘 안 된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의사 몰래 약을 사다가 먹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다쳤기 때문에 머리가 약간 이상해져 버렸다. 한번은 집으로 가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가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집으로 간다고 간 것이 충장로 3가 사거리에 있는 콜롬방빵집 있는 데까지 가버렸다. 거기서 보니까 언뜻 아내가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곳이 집인 줄 알고 나도 얼른 뒤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 있는 젊은 남자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마누라 금방 이리 들어왔는데 혹시 못 봤소?"
"당신 뭐요?"
"여기가 우리 집인데 어째 사람들이 다 바뀌었소?"
그러자 그는 별 미친 놈 다 봤다며 나를 내쫓고 쥐어박았다. 그때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이 나를 보고 알은 체를 했다.
"아저씨, 지금 여기서 뭣 하고 있소?"
"아니, 여기가 분명 우리 집인데......."
"여기는 아저씨 집이 아니라 충장로예요. 충장로."
그러면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자전거에 타라고 했다. 그의 짐발자전거에 타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지금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자 차츰 좋아졌는데 그때부터 병상일지를 썼으나 지금은 없다. 입원하고 얼마 지나자 합동수사부와 검찰청에서 조사를 나왔다.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와서 데모를 했는지의 여부를 묻곤 했다. 나는 한 달 후에 퇴원했다. 치료비는 전액 국고에서 부담한 걸로 알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 아직 완쾌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얼마간 통원치료를 다녔다. 이것저것 약도 많이 먹었다. 백제약국에서 영양제 같은 것을 사 먹기도 했고 단방약도 먹어보았다. 개고기를 먹기도 했다. 서너 달 그렇게 치료를 하다 보니까 머리에 상처가 가시고 통증도 가셨다. 부러진 갈비뼈는 병원에서 큰 반창고 같은 것을 붙인 후로 아물어버렸다. 어떤 약효과를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다행한 일이다. 아마 복합적으로 모든 약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를 다친 뒤부터 기억력이 많이 쇠퇴해졌다. 5·18 이전까지만 해도 기억력이 비상했다. 대학교 다닐 때 역학시험 범위를 거의 다 외워서 거기다 숫자만 대입해서 풀곤 했다. 또 주위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적지 않고 머리에 담아두곤 했는데 머리를 다친 이후론 어려웠다. 성격도 예민해졌다. 원만한 성격이었는데 다혈질로 변해 버렸다. 가끔씩 난청현상이 생길 때도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내가 병신이 다 되었다고 수군거렸다. 몸이 온전치가 못하다 보니까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일에 대한 자신감도 없어졌고, 전기를 다루는 일이라 위험하여 '전기냉장고 제작수리소' 문을 닫아야 했다. 그 후론 아내가 살림을 맡아서 했다.
아내는 누문동에서 조그만 소주코너를 내어 소주와 막걸리 등을 팔았다. 애를 업고 술장사를 했는데 처음엔 잘되지 않았다. 기껏 번 돈으로 내 약값을 충당하기 바빴다. 그 후 누문동 파출소 앞에서 로스구이식당 겸 식육점을 한 지 4년이 되었다. 로스구이만 하면 잘 안 될 것 같아서 식육점을 겸했다. 이것도 아내가 전담하다시피 하고 나는 옆에서 조금 도와주는 형편이다. 지금까지 아내가 고생하고 살아 온 것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아직도 어렵지만 이제는 전에 비하면 그런대로 살만하다.
1988년 봄에 부상자 신고를 하러 시청에 갔더니 이미 신고가 돼 있었다. 입원환자였기 때문에 명단이 도청 보건과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1988년 11월부터 YWCA에 있는 5·18 광주민중혁명부상자동지회에 나가고 있다.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분위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모르겠다. 하지만 분열되어 있는 부상자회가 어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것 같다.
5·18과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이 정치권력의 희생물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어서 빨리 진상규명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이 정도의 사실이 밝혀진 것도 다행한 일이라면 다행한 일이다. 나는 내 생에 있어서 광주문제가 거론될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렇게 시대의 하늘을 암울하게 느꼈던 것이다. 보상도 확실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진 다음에 해야 떳떳할 것이다. (조사정리 최정숙)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