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Herman Melville>의 소설 ‘백경(원제: 모비 딕 Moby- Dick)’에는 구약성서 인물의 이름을 딴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주홍글씨’의 작가 <호오도온>과 동시대인인 <허먼 멜빌>은 청교도 정신으로 미국이 건국된 후 전 세계를 향해 의욕적으로 세력을 펼쳐가던 시기에 이 소설을 집필한다.
그는 미국의 동부 뉴욕에 거주하였는데, 가세가 기울어진 이후 일자리를 찾아 직접 포경선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거의 노예와도 같은 취급을 받는 선상에서의 혹독한 통제를 견디다 못해 배에서 탈출한 후 남태평양의 원시적인 섬에서 지내기도 한다.
그곳에 기거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타국의 배를 만나 귀국하기까지 그는 온갖 고초를 겪는다. 귀국 후 집안 사정이 조금 나아졌기 때문에 소설가로 변신하게 되는데, 위와 같은 실제 경험은 그의 소설에 그대로 묻어나게 된다. '백경'은 남북전쟁(1861)이 일어나기 10년 전에 발표된 것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의 실재 경험이기도 한 고래잡이 어선(포경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소설에서 어느 누구를 확실한 주인공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면서도 스토리의 중심에 있는 두 주인공, 즉 <에이허브>와 <이스마엘>은 구약성서의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다.
이 소설은 당시 기독교도들의 세계관과 활동방향에 대해 여러 각도로 시사하는 바가 많다. 피쿼드호라는 이름의 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군상들이 등장한다.
선장 <에이허브 Ahup>, 이성적 인물인 항해사 <스타 벅>, 목사 <매플>, 그리고 작살잡이 선원으로 <이스마엘>과 그의 동료 <퀴케그>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선장의 명에 의하여 5대양 육대주를 누비며 찾아다니는 대상 <모비 딕>이라는 흰 고래가 있다.
여기서 소설이 배경이 되는 포경선의 이름 <피쿼드>는 17세기에 퓨리턴 이주민들에게 몰살당한 코네티컷 인디언 부족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아울러 <이스마엘>의 동료인 <퀴케그>는 라마단을 지키는 이교도 작살 잡이로서 코코보라는 섬 추장의 아들인데, 포경선을 통해 기독교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고래잡이가 된 이다.
<에이허브>는 우리나라 개역성서에서는 <아합>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여러모로 그 평가의 대상이 되는 북 이스라엘의 왕이다. 미국 역시 당시 남북의 갈등이 있었고, 결국 내전을 치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멜빌은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있었던 이스라엘의 인물을 끌어 와서 소설을 전개하는데 당시의 상황과 빗대어 어떤 교훈을 남기려 한 것은 아닌지 판단된다.
구약성서는 <에이허브>와 <여로보암>을 당대의 대표적인 악한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여로보암>의 경우 다윗의 아들 솔로몬 임금의 사후 이스라엘을 분열시킨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의 예배 보는 곳(성전)을 분열시켰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에이허브>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왕으로서, 이방 여자와 결혼하고 우상을 숭배하기도 하였다. 다만 몇몇 전쟁에서는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두어 이스라엘이 좀 힘을 쓸 수 있도록 했던 왕이다.
<이스마엘>은 사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다. 그러나 정실인 사라의 소생이 아니었고, 사라의 몸종 하갈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적자가 되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자식을 잉태한 하갈이 정실인 사라를 멸시하자 광야로 쫓겨나게 되는데, <이스마엘>은 자연스레 광야에서 태어나 유리방황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런데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소외됨으로써 비주류의 인간이 되어 버린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이 고통을 호소하자 ‘신께서 그 고통을 듣고 응답’하시는데 <이스마엘>이라는 이름자는 바로 그런 뜻을 지닌 이름이다.
성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중동의 역사에 있어 <이스마엘>은 아랍족속의 조상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아랍민족 역시 아브라함을 자신의 시조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 멜빌은 백경의 주인공들 중에서 이 <이스마엘>을 통하여 자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에 와서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전쟁의 불씨를 남기고 있는 곳은 중동이다. 아시다시피 유태인들이 주도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아랍권>과 끊임없는 다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도 있었지만, 그러한 맥락이 현대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참으로 뿌리 깊은 연이라고 생각된다.
멜빌은 이 뿌리 깊은 갈등구조를 바탕에 깔면서 소설을 전개하는데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는 신의 뜻이 그렇게 흑백으로 가르듯이 간단치만은 않음을 서술한다.
‘백경’의 줄거리에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포경선을 몰아가는 이는 <에이허브>다. 그는 성서에서의 역할을 증명이라도 자기 한 쪽 발을 잃게 만든 흰 고래 <모비 딕>을 철천 지 원수로 삼아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면서 지구 끝까지 추적해 나간다.
복수의 화신이 되어 어떤 이성적인 만류도 모두 뿌리치며 끝까지 추적하여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이게 되는데 그 결과는 <피쿼드호>의 침몰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 한 사람만이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는다.
여기서 <모비딕>이라고 불리었던 힌 고래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악의 화신인가 아니면 그를 쫓고 있는 당사자에 의하여 그렇게 애써 포장되었을 뿐인가.
<에이허브>는 물론 자신의 한 쪽 발을 잃게 한 대상이기에 어느 정도 원한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상당한 액수의 자본을 투입하여 운영되는 포경선 <피쿼드호>는 보다 많은 고래를 포획해야만 했다. 선장 <에이허브>는 이 배의 최고 책임자로서 그러한 수입제고를 위하여 고심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건만, 오직 <모비딕>의 처치에만 골몰한다.
당대에 있어 고래의 기름은 증기선의 연료가 되기도 하는 등 주요한 에너지원이었고, 고래잡이는 특히 미국의 주요한 산업이었다. 포경선을 띄울 때는 인부와 연료를 구하기 위하여 선자본이 투여된다.
그렇게 투여된 자본의 회수는 포획된 고래로 만선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런 상황에서 일개인의 지엽말단적인 복수에 소진하는 행위는 <피쿼드호>의 출범 목적마저 방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경이 표상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렇게 원한을 품는 자체가 어이없는 처사다. 사람을 해치는 <상어>도 아니고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한 마리의 고래일 뿐이기 때문이다.
고래가 상징하는 것은 악이라기보다 영물이라 할 수 있다. 고래는 양옆에 눈을 두고서 사방을 살필 수 있는 동물이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서 새끼를 낳는 유일한 포유류로서 어미 고래는 자기 목숨이 위험하게 되어도 결코 그 새끼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알기 때문에 뱃사람들은 고래를 포획하는 그 순서를 새끼, 암고래, 숫고래로 순으로 하였다. 이는 깊은 애정을 지닌 동물임을 뜻한다.
또한 작살에 찔린 후 잠수를 깊이 하면 배들이 당길 정도의 힘을 구사함으로써 어떤 경외심을 갖게 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모비 딕>의 경우 그 수명이 오래된 노련한 고래였기 때문에 <에이허브> 쪽에서 먼저 포획하려 도발해 왔을 때 자구책으로 강력히 반발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포획에 실패하였을 때 그놈 참 운 좋은 녀석이군 그러고 말일이었다. 그럼에도 <에이허브>는 그 녀석에게만 깊은 원한을 품은 채 같이 승선한 모든 이들까지 희생시킬 수 있는 모험을 계속해 나간다.
그러면서 이러한 원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 놈은 나를 뿌리치고 나에게 마구 덤벼들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악한 결심을 품고 사나운 힘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엇보다도 나는 밉다. 흰 고래가 그 사악한 자의 사신(使臣)이든, 그 장본인이든 어쨌든 그 놈을 죽여 없애서 원한을 풀 작정이다.”
이렇게 한 동물에게 원한을 품는 것에 대해 항해사 스타벅은 말한다. “말 못하는 짐승을 상대로 복수를 하다니요? 선장은 맹목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있소! 이건 미친 짓이오! 신을 모독하는 일이 아닐까요.”스타벅은 대대로 내려오는 퀘이커 교도였다. 그는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 이 위험한 바다에서 고래를 잡는 것이지, 고래가 살아가기 위해서 내가 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아주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아울러 이 백경이 표상하는 것과 관련하여 매플 목사의 설교를 언급치 않을 수 없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혹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대체로 가혹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시기보다 무조건 명령하시는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한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 불복해야 합니다. 그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배로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나라, 즉 이 지상의 지도자만이 다스리는 나라로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세계의 끝까지 도망하려했고 그런 요나를 하나님은 바다 밑-‘지옥의 뱃속’-에 빠뜨렸습니다.”
성서에는 요나가 큰 물고기에 삼킴을 당했다가 3일 후에 토해지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멜빌은 백경의 표상과 관련하여 다시스(스페인-당시의 땅끝)로 도망가고 있던 요나를 삼켰다가 본래 하나님의 명령인 니느웨로 가도록 만든 그 큰 물고기를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그 큰 물고기는 신이 인간사에 역사하시는 한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런데 매플 목사의 설교 메시지를 분석해 보면 고래잡이들의 가슴에서 맹목적 희망을 빼앗고 내일에 대한 걱정과 예측되는 재앙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는 데에만 방점을 둔다.
이런 매플 목사의 입장은 당시의 미국 사회를 지탱해주는 한 축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즉 은행장, 공장장 등과 함께 목사 역시 자본주의를 지탱해가는 총아의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고통을 감내하며 자본가들의 수익제고에 협조할 수 있도록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나 할까? 이는 <이스마엘>로서는 잠자코 수긍할 수만은 없는 그런 메시지였다.
일견 이 소설을 읽다보면 <에이허브>로 상징되는 청교도적인 투지와 선이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악의 권화(權化)로서의 <모비 딕>을 추격해서 죽이는 모습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인간의 광기가 신적인 것에 도전하여 패배하고 마는 모습으로도 읽힌다.
작가는 <이쉬마엘>을 통하여 자신의 말을 하고 있고, <이쉬마엘>이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결말에서 우리는 후자에 가까운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할 것이다. 더욱이 상어도 아닌 고래를 쫓는 <에이허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서술함으로써, 그 무모한 광기야말로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현대에 와서 미국의 대통령인 보수 기독교인 <부시>는 북한을 비롯한 몇몇 나라를 '악의 축'이라고 규정하였다. 그 거대한 강국 미국에 비하면 정말 보잘 것 없는 나라들임에도 쳐부수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은 건국 후 서부로, 서부로 그 영토를 넓혀 가면서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몰살시켜가면서 연방합중국이 되었다. 이후 역사 역시 자신들의 구도에 따르지 않는 나라들에 대해 가차 없이 공격을 가한 후 그 전리품으로 덩치를 불려왔다고 할 수 있다. 백경에서 <피커드호>는 미국을 상징하며, <에이허브>는 그 지도자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런 밑바닥에는 잘못된 기독교정신이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절대적 신앙을 내세우며 이를 강요한 후 그 신앙을 갖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약한 상대마저 악의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그것이다.
현대에 와서 미국이야말로 예수님을 처형한 로마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들만이 예수의 제자이고 그 상대편은 사탄인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셈법은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도그마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독교권 중심으로 인간구원을 독점하면서 이러한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든 이방세력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을 불태우는 것이다.
그 대상이 아무리 왜소하고 약한 존재라 하더라도 죽어도 싼 악의 화신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쳐부수어 초토화시키면서 새디즘적 만족까지 느낀다. 그리고 그 편에 서는 이들끼리 안도감을 가진다. 위와 같은 미국의 자기중심적 패권의식은 자신들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믿고 있다는 선민의식을 바탕으로 행사되고 있음을 부정키 어려운 것이다.
물론 세계 역사에 있어 기독교정신이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타난 것만은 아니다. 기독교 정신이 세계에 끼친 긍정적인 측면의 박애,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도 공헌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러나 성서를 깊은 성찰 없이 겉핥기로 읽을 경우 예수께서 주신 교훈을 잘못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 잘못된 패권의식에 젖게 되거나 그에 편승하게 되는 것이다.
미국에도 수많은 지성들이 있어 위와 같은 잘못된 우월의식에 대하여 반성적 비판을 가한다. 그 중 하나가 이 멜빌의 ‘백경’이라고 판단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미국의 우월의식이 허위이며, 그들의 패권적 행위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는 이들의 편에 서겠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나라의 기독교인들도 단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가 대통령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입장에 편승하거나, 그들의 악행에 의하여 희생당하는 비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당해도 싸다’는 입장을 갖는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소설 백경에서 <이쉬마엘>로 표상되는 비주류의 인간, 혹은 고통을 부르짖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이쉬마엘>이라는 그 이름의 뜻에 이미 나타나고 있지만, 이들의 호소에 응답하실 뿐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그들의 편에 서시며 박해를 가하는 측을 응징하겠다는 것이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찌라. 나의 노가 맹렬하므로 내가 칼로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 아내는 과부가 되고 너희 자녀는 고아가 되리라(출22:21-24)
오래 전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킨 하나님은 바로 그들이 오히려 박해자가 되어있는 현대에 있어 전혀 그들의 편이 아니다. 쉽게, 쉽게 그들이 ‘God Blessed You’를 입에 담고 살고 있겠지만, 그렇게 이방세력을 탄압하고 있는 이들을 결코 축복하실 리가 없는 것이다.
출애급기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선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실과 무관하게 단지 고통 받는 이들의 편에 서시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이고 아니고의 문제를 떠나 고통당하는 이의 편을 들어주시겠다는 것이야말로 전 인류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입장이신 것이다.
소설 백경이 씌어지고 난 10년 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난다. 물론 노예해방 문제가 쟁점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남과 북의 경제적 상황이 달랐던 데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공업에 의존하는 북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노동력이 절실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필요에 의해서 흑인으로 주종을 이루던 노예들이 해방되었지만, 전쟁 그 자체는 엄청난 비극이었다. 그 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며, 같은 국민 간에 얼마나 많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겠는가.
남북이 아직 통일되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혹시 기독교 신앙을 이유로 ‘무찌르자 공산당’이라는 전쟁슬로건이 아직까지 먹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일이다.
물론 우리 역사에 있어 공산당이 기독교를 배척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기원하여야만 하는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민족의 반목과 질시를 부추기고, 기독교를 배척한 이들이니 당해도 싸다는 입장에 선다면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근래 국가보안법 철폐 반대집회에 보수기독교 단체가 대거 참여하였다. 그런데 이런 역할이야말로 백경에서의 <에이허브>가 추구했던 것과 동일선상의 것이 아닐까?
신에 대한 믿음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같은 신앙을 갖지 못한 이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박멸해야한다는 이론적 근거로 삼는 것이야말로 비성서적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가 박해받을 때 여러 신자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런 타는 목마름으로 신에 의지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님은 응답하셨다. 반면 군림하고 있는 이들이 약한 인간들을 신의 이름으로 괴롭히는 행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보복하신다는 것이 성서의 확고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반성적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에 소설 백경은 집필 당시 별로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세기가 바뀐 후에야 부활하여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소설이 씌어진 지 거의 70년이 지난 1919년에야 평론가 <래이먼드 위버 Reymond M Weaber>에 의하여 재평가를 받게 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위버는 멜빌을 바리새적인 위선적 도덕률이 지배하던 당대 미국 사회에서의 <이스마엘>적 사생아 의식의 탐구자로, 소외당한 비극적 상상력의 소유자로 그렸다.
이러한 소외의 배경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조악한 물신주의가 있다고 보는 평자도 있었다. 이즈음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게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소설 ‘백경’은 남북으로 분열된 시절 이스라엘 왕의 이름을 따 온 것이라든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운동에 어떤 시사점을 주었다는 것, 그리고 미국이 오늘날까지 가장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면서 진주해 있다는 점에서 우리 한반도의 운명과 무관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이 주고 있는 메세지는 기독교인의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 있는 우리의 경우 과연 미국을 비롯한 서양 패권주의에 대한 바람직한 대응방향을 정립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인간 사회의 모든 영역을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따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 섭리와 전혀 다른 지점에서 <에이허브>와 같은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지를 따져보아야 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