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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튤립특강(5): 성도의 견인(Perserverance of the Saints)|
조찬휘 추천 0 조회 16 10.04.06 16: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삼일교회튤립특강(5)/2008년11월26일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요한복음10장28-29절

 

삼위일체 중에서 세 번째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능력과 무한한 지혜를 가지시고,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세 번째라는 것은, 어떤 본질상의 차이나 등급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역과 활동의 순서와 위치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것을 통달하신 분으로 계시된 것을 보면, 우리가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 분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살폈던 우리의 구원의 역사에 대하여서는 ‘저항할 수 없는’, 혹은 ‘불가항력적’인 성령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살폈습니다. 성령 하나님에 대한 너무나도 기본적인 계시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성령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을 성경에서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기본적인 것에 집중하겠습니다만, 이것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지난 주의 것을 요약하자면, 성령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의 역사는, 우리의 저항을 넘어서서, 그 저항을 무너뜨리면서 역사하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우리 인생들은 저항합니다. 저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항을 극복하고 우리를 감화시키셔서 2천년전의 십자가의 구속을 21세기를 살아가는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일어나는 것이 효과적인 부르심이고, 중생의 역사입니다. 디도서3장4,5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기에 보면,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중생의 씻음을 함께 두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바로 중생, 거듭남과 밀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거듭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요한복음1장12절이 분명하게 이것을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났는데, 그 난 것이 헛되게 될 수 있습니까? 한 번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중생하게 되면, 영원히 살게 되는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된다 -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명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명제는, 너무나 오해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번 구원받으면 자동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됩니다. 그 오해가 주일학교에서 부르는 ‘구원열차 타고서’라는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한 번 열차티켓을 사게 되면, 그래서 차에 오르게 되면, 그 열차 안에서 무슨 짓을 해도 그냥 그 종착역까지 갑니다. 우리가 구원의 티켓을 어떻게든 얻게 되면, 이젠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해입니다. 이런 오해들 때문에, 반대편 극단에 이르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반대편 극단에 서있는 사람들은, 한 번 구원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1)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한 번 구원해 놓으셨다고 하더라도, 그 구원을 취소시키시는 이상한 분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2)또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전적인 은혜로 해놓으시고는, 그 구원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그 구원받은 사람의 의지나 계속되는 선행에 근거하도록 해서, 결국은, 구원이란 것은, 인간에게 달린 것으로 오해케 합니다.


먼저, 성경구절을 살펴봅시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엡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1:4,5,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 이 모든 구절들이 한 번 받은 구원의 완벽함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어떤 구절들을 보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구절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예를 들면, 로마서11장20-22절을 보십시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 이 구절은, 언뜻 보면, 한 번 구원받은 사람들이 ‘찍혀 내어버림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의 ‘너’는, ‘이방인’들을 말합니다. 이방인 모두 하나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인 면에서의 이방인 전체를 말합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하지만, 유대인 한 명 한 명 모두를 말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만일 한 명 한 명 모두라고 한다면, 모든 유대인들이 ‘원가지’로서 찍혀버렸다고 해야 합니다. 모세도 유대인입니다. 아브라함도 유대인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입니다. 모두 원가지입니다. 찍혀버렸습니까? 그렇게 말한다면, 어처구니 없는 망발이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라도 찍혀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두고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너’ 곧 이방인들도 찍혀 버릴 수 있다는 말이 제대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모든 이방인들, 한 명 한 명 모두를 포함한 이방인이 아닙니다. 이방인들 중에서 믿음을 가진 것 같이 보여서, 외형적인 교회에 편입되었지만, 떨어지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교회였던 로마교회의 교인들 가운데서도 그렇게 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같은 구절들이 결코 한 번 구원받은 자가 구원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문맥을 살펴서 잘 해석하면 한 번 구원받은 자들은 반드시 그 구원을 끝가지 유지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 구원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견인’이라고 합니다. ‘견인’이라는 말은, 견디고 인내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견디고 인내합니까? 구원받은 성도가 아직 부족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족한 것을 알면서도 그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성도의 부족한 것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견인’교리의 핵심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부족한 것을 참고 견뎌주십니다. 이때에 성도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계속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입니까? 자동적으로 구원이 성취된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중생은, 그 본성이 변한 것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본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기술하고 있는 책이 제가 번역한 스테판 차녹의 ‘거듭남의 본질’이라는 책입니다. 본성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그 안에서부터 내적인 즐거움과 자원하는 영이 역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때로는 연약함이 있고, 옛습관이 작용할 때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 안에서는 새로운 능력이 작용합니다. 그런 능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신기한 능력으로 경건과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느니라’(벧전1:5). 성령께서 새로운 마음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 마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 부족함과 연약함을 극복해 가면서 성화되어가도록 격려해주십니다. 보다 완전하여 내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해 갈 때까지 참고 견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시고, 완성시켜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견인해주시는 것입니다. 혹간에 오해하는 것이 성도들이 열심을 품지 않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연약함은 인간의 옛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이 교리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5대교리, 튤립교리의 정신은, 바로 로마서11장, 개혁주의신학과 신앙의 위대한 선언이 담긴, 로마서11장 마지막절인, 33-36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이 시리즈 강의를 마치면서 우리의 구원의 문제를 묵상하면서도 주님께 영광과 찬양을 계속해서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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