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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관 부지 전경 ▲▲ 위원회의 ▲ 모형도I 출처 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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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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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남준 <라디오 데이> ▶ 니키 드 생 팔 <검은 나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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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순환반전의 고리》중 신영옥 <삼태극의 조화> | |
박래경 선생님은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관으로 미술사가로, 국립현대미술관 성장시절에 우리미술계의 한가운데서 버팀목 같은 역할을 해오셨다. 1986년에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가 1996년에 미술관을 나온 이후에도 계속 대학에서 후학들을 지도하고, 정부의 문화정책과 국공립미술관의 중요 사안들에 대한 자문역을 맡아 전문적 지식과 경험으로 기여하면서, 무엇보다도 우리 미술계의 최연장 큐레이터로 여전히 한국미술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탐구하는 중요 전시를 기획해오고 있다. 선생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만난 날도 지난달 고려대박물관에서 오픈한 《태극-순환반전의 고리》 전시 때문에 부쩍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신 중이어서 간신히 시간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김세중 관장의 노력이 잊혀져 안타깝다”
“국립현대미술관이 86년 재개관하고 학예실이 생기면서, 먼저 큐레이터들이 근무를 시작하고, 3개월 후에 제가 학예관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처음에 미술관에 들어갔을 때는 그 전부터 전문위원으로 있었던 분이 유준상, 김지현 선생님이 있었고요, 새로 구성된 학예연구원들이 큐레이터 1기가 되는데 거기에 이인범, 김현숙, 안소연, 이화익 그리고 지금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김은영 씨가 같이 들어와 있었지요, 그 당시는 정직원으로서 뽑은 것이 아니었고, 임시직처럼 있다가 개관 이후에 별정직 공무원 신분인 학예연구직으로 정식 발령이 나게 됩니다. 미술관이 덕수궁에 있었을 때는 유준상 선생님이나 오광수 선생님이 전문위원으로 계셨었죠.
제가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갔을 때 국립현대미술관을 짓기 위한 건립위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는지 저 역시 그 과정을 한번 명확하게 더듬어보고 싶어서 책을 꼭 쓰려고 하거든요. 무엇보다도 그 당시의 정부 측 행정가며 정책입안자들이 미술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궁금합니다. 그 당시 문화공보부 차원에서 상급관청으로서 국립미술관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이것부터 밝혀보고 싶어요. 먼저 미술관이 건립되던 배경을 살피고 당시 학예직들로부터 큐레이터로서 일하면서 겪고 느낀 얘기들이 많을 텐데 이런 것들을 앞으로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김세중 선생님이 관장으로 계시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을 건립하는데 큰 노력을 하셨는데 그 일에 대해서 공식적인 인정이 없이 흘러오고 있어요. 가능하면 학장으로 계셨던 서울미대 측에 알아보던가 해서 좀 더 찾아봤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당시 관여했던 공무원들로부터 행정자료들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이 건립되던 시절에 우리사회가 생각하는 미술관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 입체적으로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듭니다.
건립백서에는 직제까지 이상적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실질적으로는 반영이 안 되었죠. 지금 사무국하고 학예실 하고 급수가 다릅니다. 국장은 3급이고 실장과 과장은 4급입니다.”
건립 당시 상황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발간한 건립지에서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경복궁미술관에서 개관하고 1973년에 덕수궁으로 이전해 운영되어왔다. 1970년대 국가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미술인구가 증가하면서, 미술계에 국립현대미술관이 지닌 미술문화활동의 중추역할에 대한 인식이 증대되었고, 따라서 보다 확충된 기능과 시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미술계의 이러한 염원이 있어 마침내 1980년 국전 개막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야외조각장을 겸비한 미술관을 건립해보라 지시한다. 이듬해에 미술관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각국 주재 해외공보관을 통해 미술관 건립에 따른 자료를 수집하여 건립방향을 설정하였으며 공간연구소에 용역을 의뢰 우리 실정과 현대미술관의 기능에 맞는 건립 기초자료를 작성하였다.
“그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자문위원으로 있었어요. 전문위원은 상시 계약직이었고 자문위원은 비상임직이었죠. 김윤순 씨(한국미술관 관장)가 팔순 잔치 기념으로 출판한 『비화』라는 책이 있어요. 거기에 내가 자문위원시절에 있었던 얘기가 나와요. 『비화』를 보면 김세중 관장님이 원래 미술관을 건립하겠다는 서류가 통과를 못하고 거절을 당해서 서랍 속에 한동안 들어가 있다가, 김세중 관장님이 국립현대미술관 건립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비를 들여 애를 쓰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국립현대미술관을 새로 짓게 되는 연유가 여기서 부터인데, 그러한 노력이 묻히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미술관을 과천에 제대로 지어서 만들어야겠다고 한 역할은 김세중 관장님이 하신 거죠.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김세중 관장이 재개관을 준비하고 건립을 해오다 돌아가셨고 재개관을 바로 앞두고 이경성 관장이 과천 시기의 초대관장으로 오시게 되었죠. 미리 일한 사람들을 묻어버리는 건 연구 환경이 나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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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전 준비 중에 초대 관장 선임
필자가 80년대 초 미술대학을 다닐 때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존재에 대해서 잘 몰랐었다. 덕수궁에 있는 미술관에서 국전을 한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 그곳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서울의 미술대학생이 모를 정도면 국립미술관으로서의 존재감이 상당히 약했다는 것인데 지금의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위상과 역할은 20여년 사이 가히 엄청난 변화를 갖게 된 것이다.
“덕수궁에 있는 미술관에서 매년 국전을 했었잖아요. 사람들이 국전을 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국립 미술관이나 공립 미술관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인식적 전환의 근거 자체도 조명을 해봐야 되죠. 한마디로 국전을 치루는 공간만으로는 이제 미술관의 기능으로 부족하다는 거죠.
미술인 여러 사람들이 연명해서 건립요청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어떤 사건이나 구체적인 계기는 모르지만, 건립이 시작되기 오래 전부터 그런 운동이 있었다는 얘기죠. 이 부분을 자세히 파악해봐야 할 필요가 있는데, 애초 국립미술관이 서지 않고, 국립현대미술관이 됐거든요. 국립미술관에 대한 논의라던가 나름대로 필요성에 대한 검토 과정 없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간판이 붙었거든요. 이러한 과정을 내가 분명히 밝혀내려고 해요. 당시 문공부에 관리로 있었던 사람, 담당자나 직접 관계있었던 사람에게라도 추적해서 알고 싶은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죠.”
앞서 언급된 건립지에 새로운 국립현대미술관의 목적과 활동을 정리해놓은 걸 보면 건립추진위원회에서 현대미술관을 연구하면서 오늘날의 미술관의 개념이 단순한 작품의 소장이나 전시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고 종합적 문화 활동을 담는 현대적 시설의 미술관이 되어야한다고 밝히고 있다. 공식적으로 건립백서에 그때까지 해왔던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주변에 더 중요한 입체적인 정황들을 파악하려면 추가적으로 자료를 찾아서 밝히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이다.
“네가지 개관전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유준상 선생님이 진행하고 있었죠. 그러던 중에 하루는 자문위원으로 갔을 때인데 당시 문공부 차관 김윤환 씨가 모든 위원들을 모아놓고 점심을 먹으면서, 김세중 관장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개관은 해야 되겠고 급하게 관장을 모셔야 하는데, 문공부에서는 이경성 선생님을 다시 관장으로 모셨으면 좋겠다고 제의를 했어요. 한번 관장을 하셨던 분이고 그 자리 있는 위원들이 반대 할 사람이 없지, 그러한 형식을 통해서 통과가 됐거든요. 그래서 이경성 선생님을 관장으로 개관을 하시게 되었죠.”
86년도에 개관전으로 《한국현대미술의 어제와 오늘》전이 소장품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동시에 《와이즈만 컬렉션전》, 《프랑스 20세기미술전》 《서울 아시아 현대미술전》이 열렸다. 이 세 개의 국제 전시는 다 일본 컨설턴트가 관련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와이즈만 컬렉션전》, 《프랑스 20세기미술》전은 일본의 컨설팅회사에서 유치해서 순회전 형태로 일본을 거쳐 가던 전시를 다시 한국에 가져오면서 개최된 전시들이라 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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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게으름을 좀 피웠다”
“개관을 한 이후에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도 전문위원과 행정관이 함께 일을 해왔지요. 개관후 행정관이 전시과장이어서 전시기획이나 주요사안에 다 관여할 수 있었어요. 학예실이 생겨 학예원이 14명이나 되는데, 그것은 그것대로 기능을 못 발휘하니까 전시과장과 학예실장 역할이 예전의 전문위원 시절 방식으로 계속되었을 수 있지요.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 원래는 자연사박물관건립이 예정되었었는데 그것을 미술관으로 바꾸게 되었고, 국립현대미술관을 신축해서 재개관 하게 됐잖아요. 그 재개관하게 된 출발점이 미술계의 여러 사람들이 자진해 움직여서 서명을 하고 신축 미술관 건립에 대한 소망을 이룬 것 아닙니까? 그렇게 된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목표 달성하는 과정, 즉 신축이 가능하게 되서 부지선정과 건축설계자 공모하고 당선작이 나오고, 준공기간이 결정되고 하는 시간동안 소프트웨어에 대한 정책은 어떻게 계획되고 이루어졌는가 하는 과정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을 위해서 그동안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해 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본격적으로 재개관을 하는 시점에서 미술관의 집만 짓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미술관을 조직하기 위한 리서치나, 연구나 해외기관의 경험이나 사례들을 가져오거나 하는 과정이 있었는지, 컬렉션은 이전에 있던 것을 계속 가지고 간다하더라도 컬렉션정책이라거나 하는 모든 정책적인 차원에서, 미술관의 체계가 어쨌든 과거에는 없었으니까 다 새롭게 시작하면서 그러한 과정들이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꼼꼼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직제든 미술관의 역할이든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죠.”
필자의 당시 기억에는 컬렉션정책이나 미술관의 장기적인 계획에 대한 부분들은 잘 이야기 되지 않았으나, 조직에 관해서는 학예직에서도 관심을 갖고 잘 만들어 봐야겠다는 논의나 노력이 있었다. 그 당시 행정직 쪽에서는 미술관의 청사진을 만들면서 조직을 구상했는데, 정부 조직에 대한 이해도 있고, 조직에 대한 감각이 비상한 사람들이 그런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조직의 틀 자체가 학예직보다는 행정직이 위에서 전체 조직을 컨트롤할 수 있도록 그런 구도로 짰다는 얘기가 있었다. 행정직 쪽이 비대하고, 학예직을 사업기획이 아니라 단순히 연구로 업무를 규정을 하였다. 실제로 학예직이 전시나 사업의 안을 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행정직 쪽에서 사업기획을 구상하고 학예직이 그것에 대한 리서치를 하고, 그런 형식으로 진행되도록 업무분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초창기에 미술관의 전시를 기획하고, 새로 개관하는 미술관이 어떻게 나가야겠다는 방향을 구상하는 모든 일들이 실제적으로 행정직에서 이루어졌다.
“미술관 관장은 2급입니다. 미술관을 2급 관청으로 봤을 때, 사무국장이 3급, 그다음에 실장이나 과장이 모두 4급으로 실장이 과장급이죠. 1실 3과라고 했을 때 1실이 학예실, 3과가 관리과 전시과 섭외교육과 인데, 거기 과장하고 실장이 4급이니까 같은 급이고 그 위에 사무국장이 3급으로, 종속적이 될 수밖에 없죠. 실장하고 관장이 전문성을 가지면 얼마든지 그런 직급을 넘어서 일을 할 수 있는 건데, 실장하고 관장의 관계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게 되면 학예실장이 더 이상 일을 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국립미술관이 국립중앙 박물관보다 낮은 2급 관청이 된 이유는 프랑스를 모델로 해서입니다. 모든 미술관 박물관이 루브르 아래 있다는 사실에 준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행정과장과 학예실장은 직급상 의논 상대이기 때문에 아주 밀접한 관계입니다. 또한 별정직 관장, 별정직 4급 학예실장도 아주 전문적으로 유기적으로 의논하는 상대입니다. 그런데 관장이 사실은 미술관의 업무를 총괄하는 입장에서 행정공무원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부분에서 관장이 본인의 일을 제대로 하려면 공무원과의 관계가 더 좋아야 되는 것이죠. 체계상 관장이 공무원과의 관계를 잘 해야 된단 말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행정관 같은 분들은 전략적으로 이런 구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거죠. 미술관 안에 자기밖에 없을 정도로 돼버리는 거죠.”
미술관들은 해가 갈수록 행정직 수장 역할을 하는 공무원의 힘이 크게 작용을 하고, 학예실과 학예직들은 상대적으로 업무 뒤치다꺼리하는 리서처로 종속되는 듯한 형태로 미술관이 돌아가는 경우가 상당하다. 이런 문제는 다른 공립미술관들에서도 종종 유사한 맥락으로 발생하곤 했다.
“86년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88년 올림픽 준비를 들어가는데 이런 일이 있었어요. 미술관 외부에 누군가가 운영위원이 되어 《한국현대미술》전 계획안을 미술관으로 가지고 왔었어요. 이경성 관장님이 이 전시안을 유준상 실장님을 건너뛰고 학예관이던 저한테 맡으라고 직접 지시를 했었어요. 그런데 난 두 가지가 맘에 들지 않아 게으름을 피웠어요.
하나는 앞서 말한 대로 관장이 실장과 비생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가운데서 나에게 맡겼고 실장을 건너뛰고 나에게 시키시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또 하나는 미술관이 자체적으로 기획을 할 수 있는 인력도 있고 능력이 있었는데, 굳이 밖에서 기획한 전시를 가져와 공간만을 빌려주는 식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일은 행정직 전시과장이 맡게 됐지. 그렇게 그 행정관이 준비하고 진행해서 전시를 개최하고 난 후에 무슨 훈장인가를 받았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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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문화기관과 연계한 국제전
이런 상황에서도 재개관 다음해인 1987년 학예연구관으로서 박래경 선생님이 자체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리서치 해서 《독일 현대조각전》을 개최하게 된다. 이후 89년의 《바우하우스전》, 91년의 《테크놀러지의 예술적 전환전》까지 다수의 독일 관련 해외미술전시로 이어지게 된다. 한 분야에서 중점적으로 전문성을 갖고 전시를 기획하면서 해외미술을 한국에 소개하고 큐레이터로서는 국제교류를 통해서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활기찬 시기였다.
“내가 한해에 한 번씩 독일에 나갔었죠. 그때 상황이 숨통이 막혀서 못살겠더군요. 외국에서 전시를 유치해야 하니까 조사차 나가겠다 해서 늘 일을 가지고 해외에 나갔어요. 결국 그 중 하나가 슈트트가르트에 있는 독일에서 해외관계를 관할하는 반관반민의 부처였던 ‘외국문화관계연구소'' 였어요. 거기서 그 기관 활동의 구성이나 구조를 알아보고 싶었는데 그게 어려우니까, 그때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들을 살펴보고 전체 구조를 알아보는 역(逆)연구를 했어요.
그중 5~6년 간격으로 비슷한 문화를 보고 모아서 연계시키는 전시로 5대양 6대주를 도는데, 그러니까 가장 적은 돈으로 효율적으로 자기들의 자랑거리인 미술품을 컴팩트하게 엮어서 순회전 형식으로 해외에 내보이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런 프로그램 중 하나를 유치해서 독일 문화원, 독일 대사관과 연결해서 전시 한 적이 있어요. 그러면서 국립미술관에서 자기네 민간차원의 것을 가지고 해외 순회를 하면서 영향력을 펼치는 그런 전략을 내가 알게 되었어요.”
영국예술위원회(British Council)가 그런 역할을 하고, 우리나라에는 아직 그런 활동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반관반민으로 운영되던 외국문화관계연구소와 비슷한 형식으로 박래경 선생님이 이탈리아대사관과 관계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르테포베라’ 전시였다. 이탈리아에서 1968년에 일어난 학생운동과 연계되는 사상에 기반하고 과거엔 미술이 될 수 없었던 열악한(poor) 재료들을 가지고 미술을 만드는 사조를 보여주는 《현대 이탈리아미술전》을 1988년에 열게 되었다. 어느 면으로 보거나 세계적으로 던질 수 있는 이탈리아 자국의 당당한 미술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듬해엔 《독일현대회화전》을 기획했다. 그것은 박래경 선생님이 직접 기획을 했던 전시였는데 관장님을 모시고 쾰른에 있는 ''미켈 베르나''라는 유명 갤러리에 가서 그것에 전속계약 돼있는 작가들의 그림을 보고 작품들을 선정할 수 있었다. 애당초 여섯 사람을 하려 했는데, 시그마 폴케와 안젤름 키퍼가 빠지고 네 사람만 전시를 했다. 당시에 알젤름 키퍼가 박래경 선생님에게 한국에서 본인 전시를 하려고 10사람이나 기다리고 있으니 단념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빠지게 됐다고 한다.
뮤지움연구소 체류, 미술관 운영과 경영에 눈 뜨다
“제가 10년 있었는데, 앞에 5년은 이경성 관장님 때이고, 뒤에 5년은 임영방 관장님 때 였는데 지금 이야기한 전시들을 모두 이경성관장님 때 했고, 임영방 관장님 때는 전시를 별로 못했습니다. 휘트니비엔날레 전시처럼 백남준 선생이나 외부사람들과 연계를 통해서 들어왔어요. 그 당시 제가 관여한 전시가 《아, 고구려》전이었어요. 임영방 관장님 오실 무렵 해서 유준상 학예실장님도 나가게 되고 그 자리에 가게 되었지요.
학예실장과 학예관이 4급이고 그 아래 학예사들이 6급인데, 내가 실장 되고 나서 학예관 임명을 안했어요. 그 이후부터는 나 스스로 전시를 한 것이 없고, 그 이후 두 가지를 했는데, 3개월 동안 독일정부장학금(DAAD)를 지급받아 베를린에 있는 뮤지움연구소에 체류 했어요.”
뮤지움연구소는 국립의 성격인데 국립을 비롯해 모든 공공 뮤지움에 대한 연구를 시리즈로 발간했다. 그때 이미 미술관에 오는 관람객들의 분석, 분석 방법, 내용에 대한 조사가 아주 철저히 되고 있었다. 그래서 2개월 반 가량 교육을 받고, 뮤지엄 관련해서 경영이나 운영적인 면까지 관계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사이 베를린에 새 미술관을 짓고 있는 전문가를 소개 받았는데 인상적이었던 것이 음향에 관한 것이었다. 보통 미술관 하면 그냥 전시하는 것만 생각하는데, 미술관 건물의 음향을 세심하게 연구해서 새로 짓는 건물에 확정적으로 결정을 하는데, 그걸 6개월 동안 조사 연구 해 놓고도 계속 하고 있더라고 했다.
“미술관에서 이루어지는 음악회나 공연 때문이 아니고, 전시공간 안에서 발자국 소리라거나 소음이나, 전시작품의 음향 등을 고려해서 만든다는 것인데, 참 전혀 생각지 못한 분야에서 그렇게 오랜 시간 점검을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 미술관에 음향 전문가를 한번 초청하자고 하니 임관장님이 탐탁해 하지 않으셨는데, 그때 우리 미술관에 무슨 문제가 있었어요. 우리도 한번 점검을 하는 게 좋지 않겠냐 설득을 해서 그분을 초청해 며칠 와서 봐주고 간 적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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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워크의 개념도 없었고...
“전시를 기획할 때 6급 학예원 누구하고 조를 짜서 한 적은 없었지요. 기술자는 기술자대로, 전시과 사람들도 같이 하고 하긴 하지만, 학예직 내에서 누구하고 같이 하는 식으로 팀워크를 이루거나 했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가져가면 서로 도와주는데, 업무상 책임 있게 팀워크를 이루어 한 기억은 없어요.”
개별 사업에 대해 팀워크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실 차원에서도 학예업무의 조직체계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대개 관장이 학예사들에게 업무를 직접 지정했다. 학예실 내에서 일을 적절히 분담하고 세세하게 조율하고 하는 것도 실장이 할 일이었지만 그것도 관장이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학예관과 학예사들이 같이 그 안에서 충분히 업무의 분장을 해서 학예팀들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학예사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개별 사업에 대해 팀워크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이기도 했고 실 차원에서도 학예업무의 조직체계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대개 학예사들에게 업무를 지정하는 것도 관장이 직접 하셨다. 학예실 내에서 일을 적절히 분담하고 세세하게 조율하고 하는 것도 실장이 할 일이었지만 그것도 관장님이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관장과 학예실장의 비생산적인 관계가 계속 되었다 하는 것을 한마디로 한다면 관장님이 실장노릇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때도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됐었던 거예요.”
우리나라 국공립미술관의 학예실 시스템의 고질적인 문제는 행정직이 실제적인 권한이나 직급이 학예직보다 높아서 일을 주도해 나가는 점, 관장과 학예실장간에 역할분화가 명확치 않아서 학예업무체계에 혼선이 생기는 점, 그리고 이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관장과 학예실 간에 대립적인 정서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런 조직심리학적 문제들이 혼재된 상황을 심각하게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최근 공립미술관들에서는 경영평가차원에서 조직의 업무시스템을 분석 평가하기도 하여 행정효율을 높이고자 하지만 실제로 미술관과 같은 조직의 본질을 이해하고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직급 상으로도 그렇지만 실제적으로 직급을 넘어서 관장, 실장이 전문성을 가지고 연결이 잘 되었더라면 능히 극복을 할 수 있었던 건데, 안타깝게도 그것이 안 된거죠. 그러니까 관장님이 시키기 쉬운 대로 업무가 나눠져 버리잖아요. 원고는 누구가 쓰고, 영어 잘하는 누구가 뭐 하고, 이런 식으로 정해져 있거든요. 그러면 나머지 학예사들은 리서치나 하고 있고 안 불려나가면 할 것이 없고, 그것 참 이상하게 된 균형이었죠. 업무분장이 서류상에는 이러저러하게 나눠져 있다하지만 실제적으로 생산적으로 움직이게 돼 있지 않은 거죠.
마치 우리나라 근대화가들을 일본 화가들이랑 비교를 해 봐도, 일본에서 서양에 보내 미술을 배워오게 하고 돌아와서는 학교를 지어 교수로서 책임을 지고 일을 시키는데, 우리나라는 화가도 마찬가지고 이런 책임자들이나 인물이 될 사람을 임무를 줘서 리서치 시키고 하는 것을 생각 못했다는 것이 무척 안타까워요. 관장님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처음부터 계획을 해 주었어야 하는데 그런걸 못했지. 공무원들도 적극적으로 학예사들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워오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굉장히 형식적으로 접근을 했죠.
결국은 의식과 인식의 차이가 굉장히 큰다는 얘기죠. 일을 그렇게 시작해서는 제대로 되지 않죠. 전문가여야지만 문제의식도 자꾸 생기고, 큰 행정적인 문제도 그렇고 전망도 그렇고 식견에 따른 일을 할 수가 있죠. 정책자체가 수립이 안 되고 그걸 반영시키는데 대한 방도도 그렇고 이런 게 연속적으로 나가야 되는데, 큐레이터도 문제의식을 고취시키고 해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는 게 참 아쉬워요. 국립현대미술관 40년 역사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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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작품들만 모았어도 ...”
“그 당시 박물관의 직제가 국립박물관은 예술정책국에 들어가 있고, 국립미술관은 예술진흥국에 들어가 있잖아요. ‘현대’미술관이이기 때문에 예술 진흥에 관계가 닿아있다고 본인들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뮤지엄’이라고. 뮤지엄이라는 것에 큰 역점이 없기 때문에 늘 다른 박물관들하고 차별되어 ‘국립현대미술관’이 당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 문제도 상당히 크거든요. 그러니까 상부관청의 생각이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된 맥이 서지 않고 문화예술진흥 차원에서 생각이 협소해지죠.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이나 내셔널 뮤지엄이나 같은 ‘뮤지엄’이라는 인식이 없었죠. 그것이 있고 없고에 따라 견해의 차이가 대단히 크다는 것, 그것에서 오는 결과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버립니다.”
뮤지엄이냐 아니냐를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소장품일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현대미술에 한정되긴 하지만, 소장품이 있기 때문에 그 소장품을 나라의 유산으로서 보존하고 현대미술의 지식을 전파하고 교육하는 책임, 미술관의 본질적인 그런 과제라던가 하는 게 소장품에서부터 시작이 될 것이다.
“박물관도 우리나라 주요 미술품도 가지고 있을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소장품 수집) 시기로 봐서, 현대미술관의 소장품 상한이 20세기 초인가 근대 초기부터 현대까지 기준이 있거든요. 그런데 일부 그 시기 작품들이 국립 박물관에 그대로 있습니다. 같은 국립 기관이고 그대로 이 시기를 지켜준다면 박물관에 있는 어느 작품들이 미술관으로 관리이관을 해야 하는 것인데 국립박물관에서는 내어놓지를 않거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경성 관장님이 평론가로도 활동 하셔서 근대미술도 잘 아시지요. 당시의 현대이고 그리고 작가들도 근대 현대를 연결해서 작가 활동을 했으니까, 근대, 현대, 근현대가 이렇게 연결이 되는데, 그때 국립현대미술관이 설립됐을 때 어떤 기준으로 근대 현대가 연결 된다는 것을 아시면 이경성 관장님이 발 벗고 나서서 수집정책을 정하셨어야 했죠. 작가 명단을 가지고 그 시대 특성이라던가 작가의 특성, 작품의 특성이라던가 마침 어떤 작품이라던가 운동이라던가, 평론가이기 때문에 남보다 더 잘 알 수가 있었죠. 이분이 어떤 작품을 사지 않으신 것을 참 아쉽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에 대해 다 알게 되고, 또 값도 다 올랐고 한데 그 당시에 처음부터 하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에요. 당시에 근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이 다 돌아가시고 없었던 게 아니고 활동을 하고 작업 중이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만 잡았어도 소장품이 굉장히 풍부할 수 있었단 말이죠.”
국립현대미술관은 재개관 후 이경성 관장님 재직시절 영문이름을 Contemporary Art Museum으로 바꾸게 된다. 1987년에 Modern 이냐, Contemporary 냐를 놓고 컨템퍼러리로 결정하고 이름을 바꾸면서 근대를 소홀히 하고 놓쳐버리는 일이 생겼던 것 같다.
“외국 작품으로는 이미 89년도에 《독일현대회화전》 전시 할 때 독일 신표현주의 작업을 두 작품을 큰 것을 샀어요. 그건 이경성 관장님 때인데 외국 작품 수집은 이때 89년 독일 신표현주의 작업을 산 게 거의 처음이었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현장 작업으로 프랑스 작가 끌로드 라이르라는 사람이 개울에 돌을 모자이크처럼 쌓은 큰 설치작품이 있어요. 몇 달간 공사를 해야 하는 프로젝트를 미술관 수집 작품으로 수용했다는 게 획기적인 변화지요. 야외조각장이 시작되는 지점의 개울 뚝방에 설치 작업을 라이르가 직접 와서 했어요.”
이경성 관장님 후에 들어오신 임영방 관장님은 91~96년 재직하면서 프랑스 작품을 많이 수집하셨는데, 소장품의 질적 수준을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외국 작품에는 94년도에 백남준의 <라디오 데이>, 니키 드 생 팔의 <검은 나나>, 조나단 브롭스키의 <노래하는 사람>, 장피에르 레이놀의 <붉은 화분> 같은 것들이 있고, 94년 이후에 구입예산이 크게 증액 되어 실험적인 예술을 구입하려고 노력했다.
사실 재개관 후부터 한참 동안 명시된 소장품정책이 없었다고 보인다. 그냥 당대미술이라는 것에만 포커스가 있는 상태에서 몇 몇 관장님을 지내고 났기 때문에 각 관장님 이름을 딴 컬렉션들이 있을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서 학예사들이 나름대로 소장품을 검토 분석하는 등 소장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 다행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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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한에 따르는 전문성과 윤리의식이 필요하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수집에 권한이 어느 정도 있어서 학예직들이 70%, 관장님이 30% 합니다. 그렇게 기본이 되고 그걸 심의에 상정해서 외부 전문가들과 관장 학예실장으로 구성된 수집심의위원회가 심의를 하잖아요. 보통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심의위원회를 하면 때에 따라 가지각색인데, 대게 위원이 3명이에요. 3명이면 다른 미술관에 비해 적은 수인데 그만큼 학예직에 힘이 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당연히 외부에서 학자들이 참여하는 것은 좋고, 학예사들이 힘이 있다는 건 좋은데, 그 힘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 본인들이 미술사적인 측면이나 여러 연구가 뒷받침 되어서 얼마나 할 수 있고, 또 소신 있게 할 수 있느냐, 또 그에 맞게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도 조금 의문이 들지요. 우선 미술사나 미술이론이나 이런 쪽에서 어떤 한 분야에서 박사정도는 있어야 될 것이고. 박사가 그냥 박사가 아니라 지식의 축적 과정이거든요. 아직까지 그런 부분이 보완이 덜 돼있다고 봐야지요.
거기다가 바깥에 옥션이니 뭐니 하면서 가격 경쟁까지 있고, 또 시장을 분석하고, 동양화 같은 경우는 바깥에 안 나오는 데이터를 가지고 해야 하니까 사람들하고도 연계가 돼서 파악을 해야 되죠.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렇게 움직이면서 정보를 찾아낸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니어서 가만히 앉아서 일만 하면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그래서 또 문제가 되는 것이죠. 일부 학예사들이 그런 것에 많이 관여하다보니 나름대로 학예직 중심으로 수집 권한을 갖고 진행됐는데, 반면에 미술시장과 지나치게 밀착되는 또 다른 부작용이 생기는 거지요.”
해외의 미술관 전문직들에게는 소장품과 관련된 큐레이터의 윤리성이라는 것이 개개인에 체화되어 있어서 미술시장의 딜러와 큐레이터가 지나치게 밀착되는 것에 대해 매우 경계하는 것이 당연한데 국내에는 그런 전문가 윤리의식이 공적인 이슈로 논의되지 않고 뒷 동정과 소문으로 돌고 있는 상황이다. 어떻게 보면 선생님이 근무하시던 재개관 이후 96년까지 10년 사이 전반부 5년은 국내작가들 중심으로 컨템퍼러리아트에서 양적으로 확장하던 시기였고, 후반부 5년은 외국작가들에 관심은 생겼으나 어떤 뚜렷한 방향이나 정책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느 정도 관장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흘러간 정도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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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스러운 시절, 학교를 나와
“대학교 1학년 1학기에 휴전 회담이 있었습니다. 내가 부산에서 피난 중에 입학시험을 봤거든요. 53년에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을 했어요. 57년 봄에 졸업을 하고, 독일에 가게 된 것은 졸업 직전에 서독 정부 장학시험에 합격해서 57년 9월에 가을겨울학기부터 독일 뮌헨대학교(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미술사학과에 입학이 아닌 수학을 하게 됐죠.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왔고 또 독일정부장학금(DAAD)을 받아서 왔으니까, 당시에 미술사 학과에 한스 제틀마이어가 교수가 주임이었는데 저를 받아줬어요. 대학교 학생이 아니고 당시에 석사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박사과정 바로 전(단계의) 과정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1962년 12월 중순에 귀국했습니다. 공부를 끝까지 하려면 10년은 해야 되는데 가정상황 그런 문제가 있어서 조금 일찍 돌아와서 1963년 3월 봄학기부터 서울대 문리과에서 강사생활을 시작하며 계속 다른 학교도 가게 됐어요. 내가 다른 학교에 가는 과정에 숙명여대하고 수도여자사범대가 있었는데 1967년에 전임교수가 돼서 1980년까지 13년 동안 조교수, 부교수로 지냈어요. 그리고 1980년 1월에 수도여자사범대학이 세종대학교로 바뀌던 때에 학교를 나왔어요. 왜냐하면 학생들이 한참 데모하고 혼란한 때에, 학교 이름이 바뀌는데 교수들에게 의논도 없이 학교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 정도였죠. 학생들이나 교수들이나 똑같이 그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 후 80년부터 계속 강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아이가 4녀 1남으로 다섯인데 그동안 강사생활만 하면서 아이들을 길렀죠. 결혼은 독일에 있던 59년에 했고, 첫 딸을 60년에 낳았습니다. 가정생활이 있어서 귀국을 하게 됐었죠.”
선생님은 80년에 세종대학교를 그만두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예술원 논문집에 한꺼번에 논문이 4~5개가 나왔다. 그때부터 항상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이 ''전환기''여서 고대 후기, 르네상스 후기와 마니에리즘이라던가 그런 것이었고 서울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도 주로 르네상스 이후의 마니에리즘을 위주로 했다. 《독일 테크널러지의 예술적 전환》(1991)에서 ‘전환’이라던가, 《한국해학의 현대적 변용》(1996)에서 ‘변용’ 이라던가, 요즘의 《태극-순환반전의 고리》(2010)에서 ‘반전’ 처럼, 정태적인 상태가 아닌 변화의 상태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선생님이 한국문화교류연구회 연구활동으로 앞서 말한 ''한국해학'' 전시와 《우리 모두 잘난 우리들의 상》(2000)처럼 우리 문화를 탐색하는 주제가 강한 전시들을 주로 기획하였다. 서양에 가서 외국 것을 배우면서 우리 것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 하는 관점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말미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되잖아'' 하고 덧붙이신다.
공공미술관과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해서 변변한 논의나 담론 없이 지내오면서 과연 미술계 내에서 학예연구직의 위상이 전문직으로서 어느 정도 정착되고 이 사회의 문화적 토양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었을까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분명 덕수궁에서 국전을 열던 40여 년 전과는 엄청나게 커다란 외형적 내용적 발전을 이루고 미술계의 한 중심에 자리 잡았지만 항시 시대적으로 형성되는 요구에는 미치지 못한 채로 또 다른 새로운 과제를 떠안아야 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재개관 이래로 법인화와 서울관 건립이라는 또다시 새로운 전환을 앞두고 있기에 그간의 지나온 모습을 한 학예연구관의 발자취를 통해 정리해보는 작업이 더없이 귀중하게 생각된다.
* 본문 중 잘못된 부분을 다음과 같이 바로잡습니다.
*《독일현대미술전》은 《독일현대회화전》으로 바로잡습니다. *《독일현대조각전》,《바우하우스전》은 유치한 전시로 바로잡습니다. * 6급 학예관은 6급 학예원으로 바로 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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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은영은 서울대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거쳐 미국 John F. Kennedy 대학에서 박물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경기대 문화관광정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으로 시작하여 최근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팀장까지 다수의 국공사립미술관에서 재직했으며 대학에서 미술관학 분야를 강의해오고 있다. 현재 한국큐레이터협회 이사이자 미술문화정책연구소 부소장이다. eunyki@hot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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