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상(구상준) 시인 소개
1919년 9월 16일 ~ 2004년 5월 11일
1946년 동인지 시집 응향(凝香) 시 '밤', '여명도(黎明圖)' 발표
니혼대학교 종교학
1999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1993년 제38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언어로 만든 새』『말의 사막에서』등 다수의 시집을 냈으며,
한국 시인협회장을 지냈다.
~~~~~~~~~~~~~~~~~~~~~~~
원죄의 되풀이
천체의 어느 별은
그 빛이 우리 눈에 띄기까지
백억 광년이 걸린다지 않는가.
저렇듯 무한대한 공간 속의
저렇듯 무한량한 시간 속의
한 점이요, 한 찰나인 너희가
마치 신 위의 신처럼 군림하여
세상 만물과 만사를 헤아리고
너희 뜻대로 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너희는 아담과 이브가 범한
그 원죄를 되풀이하다가
이 지구마저 잃을까 두렵구나.
창세기를 되읽고 되새기라!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사상사
~~~~~~~~~~~~~~~~~
새해
내가 새로와지지 않으면
새해를 새해로 맞을 수 없다.
내가 새로와져서 인사를 하면
이웃도 새로와진 얼굴을 하고
새로운 내가 되어 거리를 가면
거리도 새로운 모습을 한다.
지난날의 쓰라림과 괴로움은
오늘의 괴로움과 쓰라림이 아니요
내일도 기쁨과 슬픔이 수놓겠지만
그것은 생활의 律調일 따름이다.
흰 눈같이 맑아진 내 意識은
理性의 햇발을 받아 번쩍이고
내 深呼吸한 가슴엔 사랑이
뜨거운 새 피로 용솟음친다.
꿈은 나의 忠直과 一致하여
나의 줄기찬 勞動은 고독을 쫓고
하늘을 우러러 소박한 믿음을 가져
祈禱는 나의 日課의 처음과 끝이다.
이제 새로운 내가
서슴없이 맞는 새해
나의 生涯, 최고의 성실로서
꽃피울 새해여!
~~~~~~~~~~~~~~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조화(造化) 속에서
울밑 장독대를 빙 둘러
채송화가 피어 있다.
희고 연연한 몸매에
색색의 꽃술을 달고
저마다 간드러진 태를 짓고
서로 어깨를 떠밀기도 하고
얼굴을 비비기도 하며 피어 있다.
하늘엔 수박달이 높이 걸리고
이슬이 젖어드는 이슥한 밤인데
막내딸 가슴의 브로우치만큼씩한
죄그만 나비들이 찾아 들어
꽃술 위를 하늘하늘 날고 있다.
노랑,
빨강,
분홍,
연두,
보라,
자주,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를 옮겨 나르는 나비들!
이른 봄부터 밤마저 새워가며
그 수도 없이 날던 나비 떼들!
알록달록 채송화의 꽃물을 들이기에
저 미물(微物)들이 여러 천년을 거듭하는
억만(億萬)의 역사(役事)를 하였겠구나.
헛간 뒤 감나무의 진무른 홍시도
입추(立秋)전까지는 입이 부르트게 떫었으며
저 뒷동산의 밤송이도
가시를 곤두세워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만
알을 익혀 하강(下降)의 기름칠을 하고는
입을 제 스스로 벌렸다.
오오, 만물은 저마다
현신(現身)과 내일의 의미를 알고
서로가 서로를 지성(至誠)으로 도와
저렇듯 어울리며 사는데
사람인 나 홀로 이 밤
울타리에 썩어가는 말뚝이듯
아무것도 모르며 섰는가?
~~~~~~~~~~~~~~~~~~~~
눈 내리는 강
강에 눈이 내린다.
내 가슴에 한가닥 온기만 남기고
가버리는 꿈결 속의 여인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순수한 아름다움은
이렇듯 단명한 것인가?
어떠한 진실을 고하려고
흰 눈은 소리도 없이 내려서
순식간에 물로 변신하는가?
나의 안에서 피고 스러진
억만의 사념들은
어디로 가서 무엇이 되었을까?
멀리서 기항지 잃은
뱃고동이 들린다.
~~~~~~~~~~~~~~~~~~
유언 (遺言)
살아서는 못 누린
호사스런 葬禮일랑
아예 마련치 말라.
가마귀 떼 우짖어
날으는 어느 아침에
내 시체를 메어다
행길 마루에 버리고
오가는 길손들이
서낭당처럼
조약돌 한 개씩만
풀매케 하라.
墓碑도
碑銘도 다 싫고
어느 실없은 입설을 빌리어
"시시후의 손주 한 마리 이 땅에 귀향 살아 할비의 苦行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헛되이 죽었느니라"
부지런한 사람들에게
간곡히 전하여
모름지기 뒷날을
경계케 하라.
具常詩 全集 / 서문당
~~~~~~~~~~~~~~~~~~~
강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둥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無常)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安穩)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 게 이미 파문(波紋)이듯이
강은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
임종고백
나는 한평생, 내가 나를
속이며 살아왔다.
이는 내가 나를 마주하는 게
무엇보다도 두려워서였다.
나의 한 치 마음 안에
천 길 벼랑처럼 드리운 수렁
그 바닥에 꿈틀거리는
흉물 같은 내 마음을
나는 마치 고소공포증
폐쇄공포증 환자처럼
눈을 감거나 돌리고 살아왔다.
실상 나의 知覺만으로도
내가 외면으로 지녀 온
양심, 인정, 명분, 협동이나
보험에나 들듯한 신앙생활도
모두가 진심과 진정이 결한
삶의 편의를 위한 겉치레로서
그 카멜레온과 같은 위장술에
스스로가 도취마저 하여 왔다.
더구나 평생 시를 쓴답시고
綺語* 조작에만 몰두했으니
아주 죄를 일삼고 살아왔달까!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나는
저승의 관문, 신령한 거울 앞에서
저런 추악망측한 나의 참 모습과
마주해야 하니 이 일을 어쩌랴!
하느님, 맙소사!
~~~~~~~~~~~~~~~~~~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삶과 꿈의 앤솔러지 / 좋은시 2002
~~~~~~~~~~~~~~~~~~~~~~~~~
인류의 맹점盲點에서
시방 세계는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그 칠흑 속 지구의 이곳 저곳에서는
구급을 호소하는 비상경보가 들려 온다.
온 세상이 문명의 利器로 차 있고
자유에 취한 사상들이 서로 다투어
매미와 개구리들처럼 요란을 떨지만
세계는 마치 나침반이 고장난 배처럼
중심도 방향도 잃고 흔들리고 있다.
한편 이 속에서도 태평을 누린달까?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는 무리들이
사기와 도박과 승부와 향략에 취해서
이 전율할 밤을 한껏 탐닉하고 있다.
내가 이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들에게 새 十誡命은 무엇일까?
아니, 새것이 있을 리가 없고
바로 그 十誡命을 누가 어떻게
던져야 하는가?
여기에 이르면 판단 정지!
오직 全能과 무한량한 자비에
맡기고 빌 뿐이다.
인류의 盲點에서 / 문학과사상사
~~~~~~~~~~~~~~~~~~~~~~~
가장 사나운 짐승
내가 다섯 해나 살다가 온
하와이 호놀룰루 시의 동물원,
철책과 철망 속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짐승과 새들이
길러지고 있었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 구경거리의 마지막 코스
"가장 사나운 짐승"이라는
팻말이 붙은 한 우리 속에는
대문짝만한 큰 거울이 놓여 있어
들여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찔끔 놀라게 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때마다
거울에다 얼굴도 마음도 비춰 보면서
스스로가 사납고도 고약한 짐승이
되지나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과지성사
~~~~~~~~~~~~~~~~~~~~~
나의 詩 . 2
나는 그대들에게
나의 마음의 사연들을
습관처럼 털어놓곤 한다.
하지만 그대들은 내 입술에서
행복한 말이 흘러나올 때
결코 나를 부러워하지 말라.
실상 그때 나의 가슴속은
모진 아픔과 쓰라림에 차서
애타는 갈망과 탄식만이 있느니
또한 그대들은 내 입술에서
불행한 말이 흘러나올 때
결코 나를 가엾이 여기지 말라.
그때 이미 나의 가슴속은
아픔과 쓰라림이 말끔히 가시고
안도의 한숨과 평정 속에 있느니
나의 거짓 사연에
그대들은 속지 말라.
그리고 정녕 속 깊은 사연은
아직 한 번도 내지 못하였음을
이제사 그대들에게 고백하노라.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사상사
~~~~~~~~~~~~~~~~~~~~~~~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大地가 숨쉰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강이 흐른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달과 별이 속삭인다.
그리고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우리 땀과 사랑이 永生한다.
造化 속에서 / 미래사
~~~~~~~~~~~~~~~~~~~~~~~~
신록을 바라보며
한 겨우내 세상 무대 뒤 땅 밑에서
움츠리고 살던 초목들이
아무런 요란도 수선도 떨지 않으며
저마다 새로운 봄치장을 하고서
화사한 햇발을 온몸에 받으며
서로가 풍미를 발산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푸른 새옷이
명동 양장점이나
이태원 외인상가나
또는 남대문시장에서
팔고 산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저들에게
봄의 새 단장을 시키고
눈부신 아름다움을 선사한
조화옹의 그 신령한 힘과 섭리에는
눈 멀어 감사할 줄도 섬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저절로"라고 무심히 여긴다.
그러면서도 그분에게
제 눈에만 보이고
제 욕심만 채우는
이적을 보여 주기 바라고
흥부의 박 같은 복이
굴러들어 오기만 빈다.
주여! 우리를 측은히 여기소서!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사상사
~~~~~~~~~~~~~~~~~~~~~~~
마음의 눈을 뜨니
이제사 나는 눈을 뜬다.
마음의 눈을 뜬다.
달라진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제까지 그 모습, 그대로의 만물이
그 실용적 이름에서 벗어나
저마다 총총한 별처럼 빛나서
새롭고 신기하고 오묘하기 그지없다.
무심히 보아 오던 마당의 나무,
넘보듯 스치던 잔디의 풀,
아니 발길에 차이는 조약돌 하나까지
한량없는 감동과 감격을 자아낸다.
저들은 저마다 나를 마주 반기며
티없는 미소를 보내기도 하고
신령한 밀어를 속삭이기도 하고
손을 흔들어 함성을 지르기도 한다.
한편, 한길을 오가는 사람들이
새삼 소중하고 더없이 미쁜 것은
그 은혜로움을 일일이 쳐들 바 없지만
저들의 일손과 땀과 그 정성으로
나의 목숨부터가 부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너무나도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물의 그 始源의 빛에 눈을 뜬 나,
이제 세상 모든 것이 기적이요,
신비 아닌 것이 하나도 없으며
더구나 저 영원 속에서 나와 저들의
그 완성될 모습을 떠올리면 황홀해진다.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사상사
~~~~~~~~~~~~~~~~~~~~~~
나는 알고 또한 믿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오뇌와 고통의 망에서도
벗어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과 허망의 잔을
피할 수 없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이 욕망과 고통의 허망 속에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
황금 송아지를 몰아내야
"세상 사물의 본질적인 것은
肉眼으론 안 보여!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지"
생 택쥐페리의 명작 <어린 왕자>의
마지막 대목, 여우의 갈파다.
저 여우의 지혜대로 사물의 본질,
즉, 事理나 道理에 속하는 것은
心眼으로 깨우치고 헤아려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모두는
바로 이 마음의 눈이 멀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삶 속에서
필요하고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 모두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뿐이요,
삶의 보람과 기쁨으로 삼는 것도
관능적이고 찰나적인 것뿐이다.
이렇듯 마음의 눈이 먼 우리에겐
건물과 교량의 금간 것은 보이지만
허물어지고 넘어질 것은 안 보이고
가스관이 안 잠기고 터진 것은 보이지만
새어 나오고 폭발할 것은 안 보이고
어버이와 자식 사이 이웃과 겨레끼리도
서로가 자신의 利害만이 보인다.
그리고 마치 자유의 福地를
찾아 나섰던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인간 삶의 바탕인 마음의 필수품들을
낡은 지팡이나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황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들 있다.
이 현상을 치유할 처방은 무엇이냐?고
저 시나이 산에서 내려온 모세가
하느님에게 받은 십계명 판으로
그 황금송아지를 내리쳐 부쉈듯
우리도 각자가 마음의 눈을 떠서
오늘의 삶의 허깨비인 황금송아지를
한시 바삐 쳐부수고 몰아내야 한다.
인류의 맹점에서 / 1998, 문학사상사
~~~~~~~~~~~~~~~~~~~~~~~~~
홀로와 더불어 / 구 상
나는 홀로다.
너와는 넘지 못할 담벽이 있고
너와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고
너와는 헤아릴 바 없는 거리가 있다.
나는 더불어다.
나의 옷에 너희의 일손이 담겨 있고
나의 먹이에 너희의 땀이 배어 있고
나의 거처에 너희의 정성이 스며 있다.
이렇듯 나는 홀로서
또한 더불어서 산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의 삶에
그 평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홀로와 더불어 / 2002, 현대시
~~~~~~~~~~~~~~~~~~~~~~~
어느 친구 / 구 상
주일(일요일)마다 명동성당에 가면
초입 언덕에 구걸상자를 앞에 놓고
뇌성마비로 전신이 뒤틀린
그 친구가 앉아 있다.
그가 거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지는
한 5년 되었을까?
나하고는 그 언제부터인지
아주 낯익고 친숙해져서
내가 언덕을 오를 양이면
멀리서부터 혀꼬부라진 소리를
지르곤 한다.
그런데 그 친구 이즈막에 와서는
더욱더 우리 우정에 적극성을 띠어
지난 주에는 주스 한 병을 건네주더니
오늘은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다가,
그 비틀어진 팔과 꼬인 손으로 내주었다.
그 극진한 우정에 和答할 바를 몰라
나는 마치 무안이나 당한 사람처럼
휭하니 성당엘 들어와 앉는다.
이윽고 나는 장궤틀*에 무릎을 꿇고
두 손에 장미를 받들고 기도한다.
하느님! 당신의 영원한 동산에서는
저와 내가 허물을 벗은 털벌레처럼
나비가 되어 함께 날게 하소서!
* 장궤틀 - 성당에 놓인, 무릎을 꿇는 기도대.
인류의 맹점에서 / 문학사상사
~~~~~~~~~~~~~~~~~~~~~~~~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
풀꽃과 더불어 / 구상
아파트 베란다
난초가 죽고 난 화분에
잡초가 제풀에 돋아서
흰 고물 같은 꽃을 피웠다.
저 미미한 풀 한 포기가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여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여
한 떨기 꽃을 피웠다는 사실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하기 그지 없다.
하기사 나란 존재가 역시
영원 속의 이 시간을 차지하며
무한 속의 이 공간을 차지하며
저 풀꽃과 마주한다는 사실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오묘하기 그지 없다.
곰곰 그 일들을 생각하다 나는
그만 나란 존재에서 벗어나
그 풀꽃과 더불어
영원과 무한의 한 표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부분으로
영원과 무한의 한 사랑으로
여기 여기 존재한다.
~~~~~~~~~~~~~~~~~~~~
기도 / 구상
땅이 꺼지는 이 요란 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사귐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허깨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이제 다가오는 불 장마 속에서
'노아'의 배를 타게 하옵소서.
그러나 저기 꽃잎 모양 스러져 가는
어린 양들과 한 가지로 있게 하옵소서.
~~~~~~~~~~~~~~~~~~~~~~~~
마음의 구멍 / 구상
내 마음 저 깊이 어디
한 구멍이 뚫려 있어
저 허공과
아니 저 무한과
저 영원과 맞닿아서
공空이라고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는
그 곳으로부터
신기한 바람이 불어 온다.
신비한 울림이 울려 온다.
신령한 말씀이 들려 온다.
나는 어린애가 되어
말 이전의 말로
이에 응답할 제
온 세상 모든 것이
제자리서 제 모습을 하고
총총한 별이 되어 빛을 뿜으며
~~~~~~~~~~~~~~~~~~~~
거듭남 / 구상
저 성현들이 쳐드신 바
어린이 마음을
지각(知覺) 이전의 상태로
너희는 오해하지들 마라!
그런 미숙(未熟)의 유치란
본능적 충동에 사로잡히거나
독선과 편협을 일삼게 되느니,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린이 마음이란
진리를 깨우침으로써
자기가 자신에게 이김으로써
이른바 '거듭남'에서 오는
순진이요, 단순이요,
소박한 것이다.
~~~~~~~~~~~~~~~~~~~~
네 마음에다 / 구 상
요즘 멀쩡한 사람들 헛소리에
너나없이 놀아날까 두렵다.
길은 장님에게 물어라.
해답은 벙어리에게 들으라.
시비는 귀머거리에게서 밝히라.
진실은 바보에게서 구하라.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길은 네 마음에다 물어라.
해답은 네 마음에서 들으라.
시비는 네 마음에서 밝히라.
진실은 네 마음에다 구하라
~~~~~~~~~~~~~~~~~~~~~
잡초송 雜草頌
희랍신화(希臘神話)의 혀 안 돌아가는
남녀신(男女神)의 이름을
죽죽 따로 외는 이들이
백결(百結)선생이나 수로부인(水路夫人),
서산대사(西山大師)나 사임당(師任堂)을 모르듯이
클레오파트라, 로미오와 줄리에트,
마릴린 몬로, BB의 사랑이나
브로드웨이, 할리우드의 치정(痴情)엔
횡한 아가씨들이
저의 집 식모살이
고달픈 사정도 모르듯이
튜울립, 칸나, 글라디올러스,
시크라멘, 히아신스는
낯색을 고쳐 반기면서
우리는 넘보아도
삼생(三生)에 무관(無關)한 듯
이름마저도 모른다.
그 왜, 시골 그대들의 어버이들이
전해가지고 붙여오던
바우, 돌쇠, 똘만이,
개똥이, 쇠똥이, 억쇠,
칠성이, 곰, 만수,
이쁜이, 곱단이, 떡발이,
삐뚤이, 순이, 달,
서분이, 꽃분이,
이런 정답고 구수한 이름들 함께
우리 이름도 한번 들어보겠는가.
민들레, 냉이, 달래, 비듬,
떡쑥, 토끼풀, 할미꽃,
범부채, 초롱꽃, 쐐기풀,
이런 것이야 누구나 알지만
홀아비꽃대, 염주괴불주머니, 광대수염,
개부랄풀, 벼룩이자리, 개구리밥,
도깨비쇠고삐, 퉁퉁마디, 무아재비,
며느리배꼽, 개미탑, 큰달맞이꽃,
처녀이끼, 도둑놈갈구리, 도깨비바늘,
거지덩풀, 애기똥풀, 미치광이,
이렇듯 재미있고 천연(天然)스런
이름들을 들어보기나 했는가?
땅속 줄기에다
홀아비 사추리의 무성한 것 같은
꽃수술을 달았으니
홀아비꽃대요,
퉁겨운 줄기에
꽃주머니가 양쪽으로 달렸으니
염주괴불주머니요,
홍자색(紅紫色) 입술 꽃부리로
아래턱이 세 갈라진 데다
두 장의 수염 같은 수술꽃이 달렸기에
광대수염이요,
온몸에 짧은 털이 나고
잎은 뭉툭한 톱니를 가진데다
불그레한 두 장의 꽃이
마치 덜렁덜렁 달린 무엇 같기에
개불알이요,
잎은 둥근알 꼴
온몸엔 가는 털이 끼어서
벼룩이가 붙은 꽃 같기에
벼룩이자리요,
겨울 연못에도
눈을 맞으며 떠 있기에
개구리밥이요,
덩이 줄기에다
길이 1미터나 되는 큰 잎이
광택을 내고 있어 `그로테스크'하기에
도깨비쇠고삐요,
바닷가에
큰 마디가 줄기마다 달린
퉁퉁마디,
역시 바닷가에 살지만
굵은 무 같은데
거기다 수염이 달려
무아재비,
고운 여인 알몸의
꽃 속이 피어서
며느리배꼽,
이삭꽃이
불개미떼가 붙은 것같이
황갈색(黃褐色)으로 피기 때문에
개미탑,
큰달맞이꽃은
온몸에 부드러운 융털이 있고
여름밤에 노랑꽃이
크게 피어 어울리며
처녀이끼는
제주도(濟州道) 나무와 바위에
실꼴[絲形]로 흐느적거리고
잎과 홀씨주머니가 알을 품은 것 같다.
이름마저 흉측한 도둑놈갈구리는
부스스한 열매가 한번 옷에 붙으면
떨어질 줄 모르고
도깨비바늘도 역시
바늘 같은 열매가 달라붙으며
거지덩굴은
더러운 손자국, 발자국처럼 지저분하고
애기똥풀은
노란 진물이 나오고
미치광이는
흙탕 같은 온몸에 잎과 꽃이
어둡고 어지럽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며느리미씨개, 참소리쟁이,
갓버섯, 벌레잡기, 오랑캐, 끈끈이주걱,
팔손이나무 등
우리 친구들 이름과 그들의 특징을
주워 섬기자면 한이 없다.
옛부터 일러오기를
하늘이 녹(祿)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없는 풀을 싹트지 않는다
하지 않았는가!
사람들이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길섶이나 밭두렁이나 산비탈에
어느 누구의 신세도 안 빌고
자연으로 싹터서 자연의 구실을 하다
자연히 스러지는 우리들의 본명(本命)!
그대 시인(詩人)이란 것들마저
함부로 잡초(雜草)라 부르고
소외(疎外)하는가!
구상연작시집 / 시문학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