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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황산석의 만남 / 朴籌丙
정약용(丁若鏞)은 갓 마흔에, 서교 탄압의 과정에서 야기된 책롱사건(冊籠事件)에 연루되어 경상도 장기현(長鬐縣)으로 정배되었다. 장기에 도착한 날이 순조 원년(辛酉, 1801) 음력(이하 음력) 삼월 초아흐레였다. 그때 장기 사람들은 그를 ‘천주쟁이’라고 가까이 하길 꺼렸다. “처음에는 작은 소리로 소곤거리더니 나중에는 요란스레 떼를 지어 떠든다.”고 정약용은 토로했다.(「惜志賦」) 조정은 바야흐로 노론 시파를 제거한 노론 벽파가 정적 남인을 몰아내는 판국이었고 서교에 관계된 사람은 마구 잡아들이던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해 시월에 황사영(黃嗣永)의 백서사건(帛書事件)이 터지자 정약용은 다시 도성으로 압송되어 추국을 받았다. 정약용은 이 사건과 무관함이 밝혀졌으나 동짓달에 강진으로 정배되었다. 강진에 도착한 날은 음력 11월 22일이거나 23일로 알려져 있다. 정약용을 강진으로 이배하여 일벌백계의 본때를 보임으로써 호남에 남아 있는 서교에 대한 근심을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였다.
강진 사람들의 태도는 장기 사람들보다 더 심했던 모양이다.「상례사전서」에서 정약용은 이런 말을 했다.
강진은 옛날 백제의 남쪽 변방으로 땅이 낮고 비열한 풍속이 특이했다. 이때에 이곳 백성들이 유배된 사람 보기를 마치 큰 독(毒)과 같이 해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문을 부수고 담장을 허물고 달아났다. 한 노파가 나를 가련하게 여겨 머무르게 해 주었다. 이후에 나는 창문을 막아 버리고 밤낮 혼자 외로이 처해서 더불어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흔연히 스스로 경하하기를, ‘내가 여가를 얻었도다.’(余得暇矣)라고 하고…….
정약용은 엄동설한에 살 맞은 궁조(窮鳥)가 되어 이리저리 박해를 당하다가 어렵게 깃들인 곳이 밥도 팔고 술도 파는 한 노파의 집이었다. 이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고도 했는데 이태 뒤인 계해 년(순조 3년, 1803) 동짓날(11월 10일, 辛丑)부터는 정약용은 자신이 거쳐하는 방을 사의재(四宜齋)라고 했다.(「四宜齋記」)(1)
정약용은 주막집에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고독을 기꺼이 여가로 받아들이고 밤낮으로 오직 공부에만 몰입하게 되었지만 외롭고 억울한 심정이야 정약용이라고 달랐겠나.
북풍이 나를 날리는 눈처럼 휘몰아쳐
남으로 강진의 매반가(賣飯家)에 닿았다
요행히 낮은 산이 바다 경치를 가렸고
좋게도 장차 대숲이 세월을 짓겠네
옷은 장기(瘴氣) 때문에 겨울인데 덜 입고
술은 수심이 많아 밤에 다시 더한다
한 가지가 겨우 잡념을 사라지게 하나니
동백이 이미 납일 전에 꽃을 토했다네
北風吹我如飛雪
南抵康津賣飯家
幸有殘山遮海色
好將叢竹作年華
衣緣地瘴冬還減
酒爲愁多夜更加
一事纔能消客慮
山茶已吐臘前花 ⎯⎯「客中書懷」
조금 자리가 잡히자 정약용은 모학(募學)도 했던 모양이다. 강진에 온 그 이듬해(순조 2년, 壬戌, 1802) 10월 10일, 열다섯 살 소년 하나가 정약용이 거처하고 있는 주막집에 조심스레 얼굴을 내밀고 정약용에게 절을 올렸다. 그가 바로 황산석(黃山石, 戊申生, 1788〜1863?)이다. 산석은 아명이다. 뒷날 관명을 상(裳), 호를 치원(卮園)이라 했다.
산석의 비범함을 첫눈에 간파한 정약용은 산석에게 문사(文史)를 공부하도록 권했다. 경학 공부를 권하지 않고 문사를 권한 것은 우선 문리를 터득시키고자 함이었겠지만 정약용의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석이 머뭇머뭇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얼굴빛으로 사양해 아뢰길, 자신은 세 가지 병통이 있다고 했다. 둔하고,(鈍) 막혔고,(滯) 어근버근하다(戛)고 했다. 2) 열다섯 살 아이가 자신의 병통을 알고 있다니 경이롭지 아니한가. 정약용은, 이에 대해 그 세 가지 병통은 병통이 아니라 진짜 병통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귀에 쏙 들어가도록 설파했다.
공부하는 사람한테 큰 병통이 셋이 있는데 너는 그것이 없다. 하나는 암기에 민첩함이니 그 폐단은 소홀함이요, 둘은 글짓기에 민첩함이니 그 폐단은 부박함이요, 셋은 이해가 빠름이니 그 폐단은 거친 것이다. 무릇 둔하다가 뚫리면 그 구멍이 넓고 막혔다가 소통되면 그 흐름이 세차고 어근바근하다가 갈리면 그 빛이 광택이 난다. 어떻게 천착하느냐? 부지런해야 한다. 어떻게 소통시키느냐? 부지런해야 한다. 어떻게 연마하느냐? 부지런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부지런해지느냐? 마음을 확고히 다잡아야 한다.(秉心確)
이것이 이른바 정약용의 삼근계(三勤戒)이다. 황상이 지은 「임술기」(壬戌記)(1862)에 나온다. 속수(束脩)한 지 7일 만에 스승으로부터 이 계를 글로 받고 산석은 크게 감동하여 공부에 빠져들게 됐다. 줄탁동시(啐啄同時)였다고나 할까.
어느덧 산석의 시작(詩作)은 춘초일지(春草一枝)가 변화천장(變化千丈)이 되었다. 정약용의 가르침을 받은 지 불과 4년 만에 그의 시는 흑산도에 적거 중인 정약용의 중형 손암 정약전을 깜짝 놀라게 했다. 손암은 정약용에게 보낸 한 서찰에서 이렇게 말했다.
황상이 지금 나이가 몇이지? 월출산 아래에서 이런 문장이 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黃裳今年幾何 不意月出山下 出此文章)……(황상이) 내게로 오려고 한다니 사람을 놀라게 한다만 뭍사람은 섬사람과 달라 아주 긴한 일이 아니면 가벼이 큰 바다를 건널 수가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서 귀한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지 얼굴을 대하는 데 있겠나? 옛날 현인의 경우도 어찌 꼭 얼굴을 본 뒤에야 그를 사랑했을까? 이 말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의 마음을 안정시킴이 어떨까? 마땅히 그를 더욱 게으르지 않도록 부지런히 가르쳐 그로 하여금 재주를 이루게 하는 것이 어떨까?
인재가 드물어 지금 세상에는 이 같은 사람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단연코 마땅히 천만번 사랑하고 보호하여 주어야 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 처지가 한미하니 이름이 나면 세도가로부터 곤경을 당할까 염려되는군. 사람됨은 어떠냐? 재주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근후(謹厚)하지 못한 법인데 그의 문사를 살펴보건대 조금도 경일(輕逸)한 태도가 없는지라 또한 사람됨을 알만하다. 자회자중(自悔自重)하여 대인군자가 되기를 기하여 권면함이 어떠하겠나? ⎯⎯순조 6, 丙寅, 1806, 3월 10일. (3)
고 어린 것이 큰 바다를 건너 흑산도로 들어가려 하다니 황상의 열정은 놀라웠다. 스승으로부터 종종 손암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스승을 두고도 다시 손암한테로 마음이 쏠렸던 모양이다.
한편 정약용은 계해 년(정약용 42세, 순조 3년, 1803) 늦은 봄부터 무진 년(정약용 47세, 순조 8년, 1808) 가을에 걸쳐 네 번을 고치고 다섯 번을 써서 『주역사전』(周易四箋)을 이루게 될 때까지는 밤이나 낮이나 누워서나 앉아서나 오로지 『주역』하나에만 전심치지했다.
을축 년(1805) 봄부터 정약용은 『주역사전』을축본(乙丑本)을 고쳐 쓰고 있었는데 고성사의 보은산방(寶恩山房)에 와서도 계속했다. 그런 스승 곁을 떠나지 않고 황상은 스승의 수발을 들고 있었다. 그 해 겨울에 황상은 정약용의 차남 정학유(丁學游)와 같이 정약용한테 『주역』을 배웠다. 이 무렵 산석이 산석이라는 아명 대신에 ‘裳’(상)이란 이름을 쓴 것은 아마도 『주역』의 한 효사(坤卦 六五)인 ‘黃裳’에서 딴 것이 아닌가 싶다. 어느 날 황상은, “밟는 길이 탄탄하니 유인(幽人)이라야 곧고 길하리라.”(履道坦坦幽人貞吉)라는 이괘(履卦) 구이(九二)에서 마음이 동하여 영탄해 마지않았다. 정약용은「황상유인첩에 제함」(題黃裳幽人帖)이란 글에서 이 효사(爻辭)를 이렇게 해석했다.
간산(艮山)의 아래 진림(震林)의 사이에, 손(巽)으로써 은둔하여 천명을 우러러 순응한다. 혹은 간산에 과일을 심고 혹은 진림에 채소를 심는다. 큰 길을 밟아 탄탄하다. 천작(天爵:하늘이 내린 덕성)을 즐기며 화락하게 산다. (4)
이것은 은사의 넉넉함이요, 유인의 일이니 길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하늘은 매우 청복(淸福)을 아껴서 왕후장상(王侯將相)의 귀나 도주(陶朱:越의 范蠡의 별명) 의돈(猗頓:춘추시대 魯의 대부호)의 부는 썩은 흙처럼 흩어져 있지만 이(履)괘 구이(九二)의 길(吉)을 얻은 사람은 아직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다. 옛사람의 기록에, 장차 전원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고 하였는데, 장차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은 분명 나아간 것은 아니다. 탐진의 황상이 그 세목을 물어 왔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글에서 간산(艮山)이라 함은 산이 간괘(艮卦☶)의 물상(物象)이 됨을 뜻하고, 진림(震林)이며 큰길은 수풀이며 큰길이 진괘(震卦☳)의 물상이 됨을 뜻하고, ‘손(巽)으로써 은둔하여 천명을 우러러 순응한다.’라고 함은 은둔, 천명, 순응이 손괘(巽卦☴)의 의리(義理)가 됨을 뜻한다. 장차 전원으로 나아가려고 한 옛사람의 기록이라고 함은 명말의 황주성(黃周星)이 지은「취장원기」(就將園記)를 뜻한다. 작자가 장차 나아가려고 한 전원의 모습을 그린 글이다. 정약용이 이 글을 황상에게 보여 주자 황상은 이 글에 감명을 받아 자신도 은둔의 뜻을 담은 글을 지어 스승께 올리면서 장차 전원으로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 세목을 물었던 모양이다. 이에 정약용은 황상의 그러한 절개를 가상히 여기고 그 뜻을 칭찬하면서(丁學游:「贈卮園三十六韻書」) 은거에 걸맞은 이상적인 주거 공간의 조경과 유한(幽閒) 소쇄(瀟灑)한 기거동정(起居動靜)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전개해서 황상에게 주었다. 이 글이「황상유인첩에 제함」이란 글인데 글이 너무 길어서 여기에 옮겨 적기에 적절치 않거니와 요컨대 황주성의 「취장원기」가 그러하듯이 일종의 무릉도원을 그려 놓았다고나 할까. 정약용의 치밀한 성품과 정약용 자신이 품고 있는 일민(逸民)에의 동경이 잘 드러난 글이라 하겠다. 뒷날 다산초당을 꾸민 것 또한 이 글과 같은 정신의 발로였지 싶다.
겨울을 나자 같이 『주역』을 읽던 정학유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정약용은 이듬해 보은산방에서 내려와 이청(李田靑, 字는 鶴來/琴招, 號는 靑田. 1792〜1861)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황상은 홀로 산방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하루는 황상이 산방에서 스승께 시를 보냈는데 이를 살펴본 정약용은, ‘꺾어지고 기이하게 굽은’ 황상의 시풍이 자신의 기호와 어쩌면 그렇게도 깊이 들어맞느냐고 기뻐하며 황상을 제자로 얻은 것이 행운이라고 마냥 좋아했다. 두 사람의 시가 주로 사회시란 관점에서도 같다. 「애절양」(哀絶陽)「승발송행」(僧拔松行)같은 황상의 시는 제목까지도 정약용의 시와 똑같다. 황상의 시 한 수를 옮겨 본다.
좋은 관직이 어이 즐겁지 않으랴
노래하고 피리 불며 붉은 치마에 취하네
둥근 탁자엔 온갖 진미가 벌여 있는데
종이 배가 고픈들 사또가 어찌 피곤할까 보냐
好官何不樂
歌管醉紅裙
圓案羅珍味
奴飢主何瘽⎯⎯「聞太守新到」抄
황상이 정약용의 문하에 든 지 7년이 되던 해(1808, 戊辰) 봄에 정약용이 읍내의 이청의 집에서 귤동의 다산(만덕사 서쪽에 있는 처사 尹博의 山亭, 尹博은 정약용의 外族)으로 거처를 옮기는 바람에(1805년 겨울 동천여사에서 보은산방〈 고성사〉으로, 1806년 가을 이청의 집으로 옮겼다.) 황상은 정약용의 문하에서 멀어지게 됐다. 정학유의 말에 의하면 이 무렵 황상의 부친이 병을 오래 앓은 데다 살림은 가난하고 동생은 어려서 자신이 생계를 책임져야 할 처지였고 결혼까지 하여 여가가 없었다고 한다.(丁學游:「贈卮園三十六韻書」) 그러나 읍내에서는 학동이 주로 신분이 비천한 집안의 자손들이었는데 다산초당으로 옮기고부터는 해남윤씨를 주축으로 한 양반가의 자손들이어서 그들은 아전 출신 읍중 학동에 대해 배타적이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타협을 모르는 고지식한 황상으로서는 그들과는 비위가 거슬려 함께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 황상의 속내였을 것 같다. 읍중의 여섯 제자 가운데 오직 약삭빠르고 친화력이 뛰어난 이청만이 여기에 합쳤다.
41세의 정약용과 15세의 산석이 사제의 연을 맺은 지 17년 만에 정약용은 해배되어 고향 마재의 소내로 돌아갔다.(57세, 순조 18년〈1818〉戊寅, 9월)
정약용이 떠나자 황상은 정신적 지주를 잃고 마음을 잡지 못했다. 마침내 집과 전포(田圃)는 아우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처자를 이끌고 돈연히 천개산(天盖山:지금의 天台山)으로 들어갔다. 형편이 곤궁하여 미루어 왔던 전원의 꿈을 이제야 실현하려 한 것이다. 띠를 얽어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여 새 밭을 만들었다. 뽕나무를 심고 대나무를 심었다. 샘물을 끌어 소통시키고 돌을 심었다(藝石). 자취를 숨긴 지 10년 만에 대략 작은 포치(布置)를 만들게 됐다.(丁學游:「贈卮園三十六韻書」)
너무 멀어서 엄두를 못 냈을까, 무심해서였을까, 속이 깊어서였을까, 스승한테 삐치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세 가지 병통이 있다던 그의 말대로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해서였을까. 황상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스승에게 일차 문안도 않고 일편 음신(音信)도 띄우지 않았다. 정약용이 떠난 지 10년 만에 초기에 함께 책을 폈던 그의 사촌 동생 연암(硯菴) 황지초(黃之楚)가 마재로 선생을 찾았을 뿐이다.(戊子, 1828, 11월) 이때 동생 편에 정약용은 이런 서찰을 황상에게 보냈다.
서로 작별한 지 벌써 십 년이 지났다. 너의 서찰을 기다리지만 서찰이 이승에서는 막힐 것 같다. 마침 연암이 돌아간다기에 마음이 더욱 슬프고 한스러워 따로 몇 자 적는다.
올해 들어 기력이 전과 같지 않고 그 고생스럽기는 전과 같다. 밭을 갈아도 주림이 그 가운데 있다는 성현의 가르침이 아마도 맞지 않느냐? 너는 틀림없이 학래(鶴來)와 석종(石宗)의 행동거지를 듣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한 길로 종신토록 힘쓰며 기꺼이 사슴과 멧돼지와 더불어 노닐더라도 또한 도를 품고 세상을 경륜하는 온축이 없다면 또한 족히 스스로 변하겠느냐? 나의 상황은 연암이 잘 알 것이니 지금 가거든 물어보면 자세히 알 것이다. 준엽(俊燁)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안석(安石)은 아직 서객(書客)으로 있다 하니 하나는 슬프고 하나는 안쓰럽구나! 내가 조석으로 아프다. 부고를 듣는 날에는 군이 모름지기 연암과 함께 산중에서 한 차례 울고는 이야기하며 그치도록 하여라. 무자년 동짓달 열이틀 열수(洌叟) 쓰노라. (5)
이 서찰에서 석종은 김종(金石宗)의 자(字)이고 학래는 이청의 자이다. 학래와 석종의 짓거리를 듣고 웃었을 거라고 한 걸 보면 두 사람이 스승 정약용에 대해 행티를 부리고 등을 돌린 사건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스승이 해배되면 스승의 끈으로 과거에 붙어 출세할 거라고 철석 같이 믿었다가 스승이 그럴 처지가 못 되자 스승을 비난하고 배반하게 된 것 같거니와 이 두 사람뿐만 아니라 정약용의 제자들은 닭 좇던 개 울 처다 보기가 되자 모두가 그로부터 하나둘 멀어져갔다. 정약용의 문도 가운데 경학에는 이청이요, 시문에는 황상이라 할 만큼 이청은 황상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던 정약용의 수제자로서 어려서부터 두뇌가 아주 뛰어났다. 1805년, 하루는 정약용이 열네 살 어린 이청을 이렇게 떠봤다. “대(大)자와 양(羊)자가 합치면 달(羍)자가 되는데 어째서 달(羍)의 뜻을 작은 양(小羊)이라 하느냐?” 스승의 질문이 떨어지자마자, “범(凡)자와 조(鳥)자가 합하면 봉(鳳)자가 되니까 봉을 신령한 새라 일컫습니다.”라고 답하여 스승을 감탄케 했다.(「題李琴招詩卷」) 정약용이 1806년 가을부터 1808년 봄까지 거의 2년 동안 읍내 목리에 있는 이청의 집에 머물기도 하였거니와 이청은 스승이 해배될 때까지 오랜 세월을 스승의 그림자처럼 따랐다. 마침내 스승에 대한 섭섭함이 분노로 변했던 거다. 이청이 스승으로부터 등을 돌린 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식객 노릇을 하다가 일흔이 넘도록 과거에 낙방하자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정약용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상당수의 제자들이 부급종사(負笈從師)했다가 돌아간 자도 있고 눌러앉은 자도 있었는데 이청은 스승 곁에 남았던 자다. 이청과 석종의 사건을 상(裳) 너 또한 소문을 들었을 테지 라고 정약용은 말한 거다. 정약용은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제자들은 모두 이해를 따져 다 떠나가는데 오직 황상 하나만이 명리에 뜻이 없고 물외에 자적하여 우직하게도 전일에 스승이 일러 준 대로 유인(幽人)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정약용으로서는 더없이 미더웠을 것이다. 그런 제자가 안쓰러워 정약용은, 한 길로 종신토록 힘쓰며 사슴과 멧돼지와 더불어 노닐더라도 세상을 경륜하는 온축을 쌓아야,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는 처지일지라도 스스로 인간적인 향상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 것이다. 공부의 끈을 놓지 말라는 당부였다.
절절한 그리움이 행간마다 서려 있는 스승의 서찰을 받고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황상은 묵묵히 있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황상은 너무나 둔하고 매정한 사람으로 보일 거다. 정약용이 그에게 누군가. 황상의 무심을 꾸짖는다 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도리어, 스승에 대한 그의 깊은 경모와 드레진 인품, 그리고 요즘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사제지간의 돈독한 믿음에 대하여 진한 향수를 느낀다.
스승의 서찰을 받고도 다시 8년이 지난 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49세의 초로가 되어서야 황상은 스승의 생전에 마지막이 되겠다 싶은 생각으로 두릉(斗陵) 곧 마재의 소내로 스승을 찾아갔다. 스승을 떠나보낸 지 18년 만이었다. 스승의 회혼일(回婚日/결혼:15세, 영조 52년, 丙申, 1776)인 2월 22일에 맞춰 며칠 앞당겨 갔지만 75세 고비늙은 정약용은 신양이 매우 침중해서 회혼 잔치를 벌일 수가 없었다. 다만 18년 만에 사제가 만나 서로 손을 맞잡고 스승도 울고 제자도 울었다. 며칠 스승의 병구완을 들다가 스승과 제자가 눈물로 작별할 때 정약용은 『규장전운』(奎章全韻) 한 권, 중국 붓 한 자루, 중국 먹 한 개, 부채 한 자루, 담뱃대와 그 부속품(煙杯一具), 노비(路費) 두 냥을 황상에게 주었다. (6) 작별한 지 며칠이 되지 않아 정약용은 운명했다.(향년 75세) 이때가 헌종 2년(丙申, 1836) 2월 22일이었으니 공교하게도 정약용이 결혼한 날짜와 일치한다. 도중에서 스승의 부음을 접한 황상은 곧장 되짚어 돌아가 스승의 영전에 예를 올리고 상복을 입은 채 강진으로 갔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뒤 헌종 11년(乙巳, 1845) 3월에 58세의 황상은 스승이 준 쥘부채를 쥐고 18일 동안 줄곧 걸어서 두릉(斗陵)으로 갔다. 발에는 굳은살이 박이었고 얼굴은 검었다. 뜻밖에 황상을 맞은 정약용의 두 아들 정학연 정학유는 너무 반가워 어쩔 줄을 몰랐다. 세 사람은 서로 손을 잡았다. 등잔 아래 정좌(鼎坐)하여 옛 얘기를 했다. 지난 세월은 참으로 꿈과 같았다. 늙은 정학연은 떨리는 손으로 황상의 부채에 시를 써 주었고 정학유와 황상이 그 시에 차운했다. 세 사람은 양가의 아름다운 인연을 자손 대대로 이어나가자고 굳게 다짐하고 이것을 글로 남겼다. 이것이「정황계」(丁黃契)이다.(丁學淵:「丁黃契帖」/「丁黃契帖序」)
이때부터 이들 사이에는 남북 천리 길에 시문이 오고 갔다. 마침내 정학연의 소개로 황상은 추사 김정희의 지우를 받게 되고 그로부터 “지금 세상에 이런 시작(詩作)은 없다.”(今世無此作)라는 찬탄을 받게까지 이르렀다. 정학연이 황상에게 보낸 서찰의 별지를 보면 황상을 그리는 추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시편에 관련된 것입니다. 추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제주도에 있을 때 한 사람이 시 한 수를 보여주었는데 다산의 고제(高弟)인 줄 불문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물었더니 황 모(某)라 하더군요. 그 시를 음미해 보니 ‘두보의 골수에 한유의 뼈’(杜髓而韓骨)였습니다. 다산의 제자들을 두루 헤아려 보아도 이청 이하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대적할 자가 없었습니다. 또 들으니 황 모는 시문이 한당(漢唐)에 가까이 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됨이 당세의 고사(高士)라 할만 해서 비록 옛날의 은일(隱逸)도 이에 더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에 (해배되어) 육지로 나와 그를 방문했더니 상경했다더군요. 그래서 시름없이 바라보며 돌아왔는데 지금 서울에 오니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네요. 제비와 기러기가 서로 어긋나는 것 같아서(燕鴻相違) 혀를 차며 난감해할 뿐입니다.”
그 사이에 추사와는 두 차례 만났는데 번번이 칭찬해 마지않았습니다.⎯⎯ 丁學淵:「酉山書別紙」
헌종 14년(戊申, 1848) 12월 6일에 추사가 제주도에서 해배되어 이듬해 1월에 서울로 돌아왔던 그 무렵의 일이었다. 이때 추사는 64세, 황상은 62세였다. 황상은 다시 상경하여 추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학연 정학유 등 정약용 일가의 인사들 외에 추사와 그의 아우 김명희(金命喜), 권돈인(權敦仁), 초의선사(草衣禪師), 허련(許練) 등 추사의 일문(一門)과도 한동안 어울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정약전이 우려했던 바와는 달리 이름이 난 뒤에도 세도가로부터 곤경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이 무렵 황상은 이런 시를 남겼다. “나 과천에 있으면 두릉이 그립고, 두릉에 가면 과천의 등불이 생각난다.”(我在果川憶斗陵 斗陵還憶果川燈⎯「斗陵憶果川」) 과천에는 김정희의 과지초당(瓜地草堂)이 있고 두릉에는 정약용의 여유당(與猶堂)이 있다.
황상의 작시(作詩)가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재질과 사승(師承)에 원인이 있었겠지만 그의 끈기가 남달랐기 때문이었으리라.
황상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한결같이 독서를 하면서 스승이 생전에 가르쳐 준 대로 중요한 대목을 베껴 쓰는, 이른바 초서(鈔書)하는 버릇을 잊지 않았다. 이런 그를 주위에서는 더러 조롱조로, 다 늙어 무슨 청승이냐고 빈정거렸는데 이에 대하여 황상은 일사필연 과골삼천(日事筆硯 踝骨三穿)이란 말로 응수했다.
정(丁) 부자께서는 20년 적거 중에도 ‘날마다 붓과 벼루를 사용하여 복사뼈가 세 번이나 파였다오.’(日事筆硯 踝骨三穿) 나에게 ‘삼근계’를 주시고 늘 하시는 말씀이 ‘내가 부지런해서 이것을 얻었다.’라고 하셨지요. 몸으로 가르치고 말씀으로 주신 것이 어제인 듯 가까워 눈과 귀에 머물러 있는데 관에 뚜껑을 덮기 전에야 지성스럽고 핍절(逼切)한 가르침을 어찌 등질 수가 있겠소.⎯⎯「與褱州三老」
내가 정약용의 역학으로 무슨 논문이랍시고 데데한 글 한 편을 쓰느라 끙끙거리고 있던 무렵이었다. 정약용의 읍중(邑中) 여섯 제자들이며 다산초당 열여덟 제자들(茶信契 18 제자)을 찾아 한창 상우(尙友)하고 있던 어느 봄날, 황상의『치원유고』(卮園遺稿)를 뒤적거리다가 「회주 삼로에게 드림」(與褱州三老)이란 글에서 ‘복사뼈가 세 번 파였다.’는 ‘踝骨三穿’ 네 글자를 대하자 나는 숨이 턱 막혔다. 정약용의 저술에는 여러 제자들이 동원되어 자료를 챙기고, 받아쓰고, 교정을 보고, 제본을 하는 등 말하자면 분업적으로 치다꺼리를 했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정약용의 창조적 노고를 어찌 이런 것들에 비하랴! 그예 과골삼천이 되었던 모양이지만 그냥 과골삼천이 아니었다. 그는 장기에 가고 몇 달 안 되어 중풍에 걸렸는데 강진에 오고 10년쯤 되어서는 거의 폐인이 되어 버렸다고 정약용 스스로 토로했다. 그러한 과골삼천이었다.
과골삼천의 스승도 스승이거니와 제자 황상은 「임술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때 열다섯 살이었다. 아이였고 관례도 치르지 않았다. (삼근의 가르침을) 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겨 감히 잃을까 염려하였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61년 간 읽기를 폐하고 쟁기를 잡았을 때에도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붓과 먹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비록 이룩한 것은 없으나 뚫어서 어근버근함을 소통하기를 삼가 지키고 또한 ‘병심확’(秉心確) 세 글자를 능히 받들어 이었다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나이가 일흔다섯이라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어찌 가히 마구 달려 도를 어지럽힐 수 있으랴! 지금 이후로도 스승이 주신 것을 잃지 않기를 분명히 한다. 자식들에게도 저버리지 않고 행하게 하겠다. 이에 임술기를 적는다.
열다섯 살 황산석이 정약용의 문하에 든 지 61년째, 스승이 세상을 뜬 지 27년째로 접어들었는데도 옛날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고 받들어 이어가는 황상의 만년의 절개가 눈물겹고 아름답다. 하지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황상이 스스로 말했듯이 그의 문집을 아무리 들춰보아도 그의 기록이「임술기」를 쓴 그 이듬해(1863)까지만 나타나 있을 뿐이니 아마도 그 해에 이승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향년 76세)
나는 강진이 아직 관광지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옛날에 그 곳에 두어 번 간 적이 있었는데 주마간산 격이었다. 다음에 가거들랑 만사를 제쳐놓고 우선 정약용이 거처했던 그 주막집의 집터부터 찾을 것이다. 고독한 적객(謫客) 정약용과 불우한 열다섯 살 소년 황산석이 만나는 장면을 그려 보면서 오래도록 서성거릴 것이다. 그리고 한잔할 것이다. 내친김에 황상의 발자취를 찾아 천개산으로 들어가 볼까 하지만 들리는 소리로는 천개산이 큰 저수지로 가려졌다고 한다. 그가 은거했던 백적동(白磧洞)의 집이며 만년에 그 집 근처에 따로 지었다던 일속산방(一粟山房)은 집터라도 남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젊은 날 이 산속 저 산속에 당호도 문패도 없는 두 채의 오두막을 지었다. 무슨 공부를 이루었는가. 세상에 나가 무슨 일을 했는가. 어떤 스승을 만났는가. 어떤 제자를 두었는가. 그리고 누구를 사랑했는가. 무엇이 남는가.⎯⎯오평생(誤評生), 호호백발이 되었다. 어영부영 세월만 보내다가 이리 되고 말았다.
황상의 시 한 수를 읊조려 본다.
내 평생을 내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남도 웃겠고 나 역시 우습다
백년 시름에 나 홀로 빠져 있다한들
조정에 무슨 손상이 되겠나
我生我自算
人笑我亦笑
百年愁獨洽
何傷於廊廟⎯⎯「自歎」抄
정약용도 황상도 가신 지 오래지만 어이하여 여향(餘香)은 이리도 표일한가. 오늘따라 나는 조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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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四宜 : 思宜澹(사의담) 생각은 마땅히 맑게 / 貌宜莊(모의장) 용모는 마땅히 장중하게 /言宜訒(언의인) : 말은 마땅히 어눌하게 / 動宜重(동의중) : 행동은 마땅리 무겁게 //
(2) 戛(알) : 창 , 긴 창, 법도 등 여러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어근버근하다'라는 뜻. 예: 戛戛乎其難哉.
(3) 원문 : 정민, 『삶을 바꾼 만남』, 서울:문학동네, 2011. 주석 51 참조.
(4) ‘艮山’ ‘震林’ ‘巽’ ‘큰 길’ 등은 모두 履卦의 之卦(變卦/變體)인 无妄의 互體(互卦)에서 취한 物象이다. 다만 ‘巽’은 本卦 履의 互體에서도 取象할 수 있다. 變卦에서 取象하여 易을 해석하기로는 정약용보다 宋代의 역학자 都絜이 앞섰지만 정약용은 都絜의 저서를 구해 보지 못해 안타까워했었다(丁若鏞,『易學緖言』「茶山問答」 참조. 馬端臨, 『文獻通考』, 北京: 中華書局, 1999, p. 1526 참조.). 都絜의 대표적 저술로는 『易變體義』가 있다. 정약용은 ‘推移’ ‘物象’ ‘互體’ ‘爻變’을 易有四義라 했다. 여기서는 ‘推移’의 법은 쓰지 않고 있다. 『周易四箋』을 완성하기 전이라서 그렇지 싶다.
(5) 원문 : 정민 전게서, 주석 78 참조.
(6) 정민 전게서 PP. 405~40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