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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우리집 대소사
1. 온가족 태국 여행
2. 집사람 복지관 강사
3. 바석 상석 둘레석
4. 혁성 사망
5. 며느리 선물 랩 다이야
6. 큰아들 식구 시조묘 참배
7. 얼굴 점 시술
8. 휘닉스 스키
9. 둘째 누이 방문.
10. 집사람과 여행
1) 스리랑카 몰디브
2) 일본 규슈 벳부
3) 제주도 마라도
2024년 우리집 대소사
1. 온가족 태국 여행
온 가족 태국 여행
온 가족이래야 캐나다의 큰아들 부부와 손자 손녀 수원에 있는 작은 아들 부부와
손자 합쳐 7명에 우리부부 총 9명에 불과하다.
큰아들은 7년 만에 오늘 오는 것이다.
각처에 있는 온 식구가 모여 해외여행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모든 식구의 의견이 일치해야 하고 건강해야하고 시간이 있어야 하고 경제력
이 있어야 한다.
아이들 때문에 방학기간을 잡을 수박에 없었다.
집사람이 여행경비는 자기가 다 대겠다고 폭탄선언을 하였다.
아들은 한사코 말렸지만 우선 호텔비를 선납했다.
여행스케줄은 작은아들이 큰아들과 협의하며 짜고 작은애는 세부스케줄에 식당까지
선정하는데 능수능란하게 잘 한다.
패키지여행만 다니는 우리 부부는 모처럼 자유여행의 진 맛을 보는 것이다.
타이거 파크 아기 호랑이 앞에서
2024년 7월 28일 혁진이가 귀국하는데 혁범이가 인천 공항까지 가세 형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 우리 집으로 왔다.
우리 집에 모인 온 식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행복한 것은 자식들이 직장을 잘 잡아 각자 가정을 안정하게 이
끌어 부모의 심려를 더러 준 것이 제일 첫 번째다.
다음은 부모가 아직까지 건강하여 자식들에게 페를 끼치지 않고 경제적으로 아들에게 손 벌리지 않
는 것이 두번째라고 하니 자식 며느리 모두 우리 부부가 건강해서
감사하다고 한다.
7/30 - 8/6일 까지 8일간의 태국의 방콕 파타야 여행이다.
내 제네시스와 혁범이 산타페로 온 식구가 분산 탑승하여 공항 단기 주차장에 주차
시켰다.
세계 1위의 공항답게 공항 갈 때마다 변하여 지금은 이-티켓도 필요 없다.
인천공항 에서 방콕행 아시아나를 탑승했다.
우리 부부는 이제 나이가 들어 우리 집 온 식구가 여행을 간다는 것은 다음에는 있
기 힘든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이번 여행이 마지막 출정식 같이 마음에는 비장한 각오로 무장
되어 있다.
태국에서 본 여행이 시작되었다.
자정에 방콕 공항에 도착하여 공항근처 파크나인호텔에서 자고 카오키여우 동물원
에를 갔다.
골프카트를 타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하마 코끼리 기린 코뿔소에게 먹이를 직접
주니 손주들이 즐거워한다.
동물원 규모가 큰데 원숭이는 사육을 하지 않고 방기하여 자기들끼리 나무를 오르
내리며 화장실 근처에 몰려있어 관광객을 놀래게 한다.
원숭이가 반 야생적이라 사람을 공격자세로 취할 때는 겁이 날 정도다.
거북이가 교합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끽끽 소리를 지르며 한다.
진리의 성전(Sanctuary of truth)은 아직 미완성 단계의 성전인데 높이가 105m 사
방 100m 의 거대한 순 목재건물이고 거의 다 조각품이다.
동관은 소승불교 관으로 남방불교에 관한 모든 조각품으로 이루어졌고
서관은 인도의 힌두교관으로 시바 신으로부터 그 많은 신들을 조각하였다.
남관은 크메르의 브라만교로 기둥도 모두 조각되어 있어 경이로울 뿐이다.
북관은 대승불교 관으로 북방불교에 관련된 조각들로 한 번에 불교를 다 본 듯하
다.
인도의 남쪽 스리랑카는 남방불교가 꽃피웠고 인도의 북쪽 중국은 북방불교로 한국
불교도 북방불교 계열이다.
태국은 인도 불교의 영향으로 불교국가 이지만 옆의 캄보디아의 영향을 많이 받아
힌두 브라만의 사상도 먼만치 않게 국민들 뇌리에 박혀있다.
진리의 성전은 국가나 종교 단체에서 건축 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태국 국
민에 녹아 있는 불교와 힌두교를 한군데 중앙 돔에서 하나로 만나도록 한 기발한
발상이다.
아직도 완공하려면 십여 년은 가겠지만 국가적인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멋있게 발돋
움을 할 멋진 작품이다.
진리의 성전 주인인 개인사업가는 갈수록 입장료만으로도 돈박이 날거다.
진리의 성전
저녁은 아들의 배려로 해변의 양식당으로 바닷가에서 석양의 낙조를 보며 식사를
하는 로맨틱한 시간을 온 가족이 맛보게 하려고 계획 했다.
불행이도 날씨가 흐려 불타는 선 셋은 못 보게 되어 아쉬웠다.
런웨이 야시장을 가니 악어고기를 파는 상점이 많아 꼬치로 시식을 한번 해 보았
다.
5성급 파타야 아메리 리조트 호텔에 여장을 푸니 다 모여서 한잔 하잔다.
작은 아들 방에 모두모여 야시장에서 산 안주로 술은 조니워커 부루로 한잔하며 이
야기에 꽃을 피웠다.
모든 식구가 화기애애하게 여행하며 식구 간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즐
겁다고 했다.
옆에 있는 손주들은 핸드폰 게임에 빠져있다.
나와 집사람은 자정이 다되어 우리 방으로 왔는데 자식들은 1시까지 더 대화를 이
어간 모양이다.
7년 만에 만난 형제들이라 얼마나 할 말이 많이 있겠나 이해할만하다.
아침 느즈막에 일어나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놀다가 저녁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
이만으로 구성된 알카자쇼를 보았다.
쇼걸이 남자인데 남자가 저럭케 여자로 변하고 싶나 의문스럽다.
태국은 성 소수자가 개방되어 수십 년 전에 내가 왔을 때도 이 쇼를 보았다.
저녁은 극장 앞의 길거리 식당이지만 한국인 입맛에 맡게 만들어 별칭 태극기 식당
이라는 곳에서 땀 흘리며 태국의 정취를 맛보았다.
4일차에는 파타야 옆의 코란섬으로 가서 해양스포츠인 패러세일링 스노클링 젯트보
트 바나나 씨워킹 까지 하고 해수욕까지 하여 바다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다 했
다.
우리 부부는 손주들 타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고 하니 아들들에게 등 떠밀려 다 타
게 되었다.
5일차에는 모창카페에서 코끼리를 타고 타이거 파크에 가서 호랑이를 만져 보기도
하였다.
호랑이가 성인 호랑이에서 부터 아기 호랑이 까지 여러 마리가 있는데 각 우리마다
관광객이 들어가 호랑이와 사진을 찍고 만져 보고 하는데 맹수인 호랑이가 사육사
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다.
한두 마리면 몰라도 다 큰 호랑이가 맹수의 기질이 있는데 모두 가만히 순하게 있
다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고 멍하니 있는 호랑이에게 측은한 감이 든다.
타이거 파크 측에서는 부인하겠지만 약을 먹이지 않고는 저렇게 멍하니 순하게 있
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 바람에 맹수도 한번 만져 보는 기회가 생기기도 했다.
황금 절벽 사원은 1996년 전 국왕 푸미콘의 즉위 50주년 기념으로 만든 것으로 태
국의 새로운 관광명소다.
바위산의 절벽에 황금선을 암각으로 109m의 불상을 그려 황금이 5톤이나 들어갔다
고 한다.
파타야의 아메리 호텔에서 첵크 아웃하고 방콕시내의 중심에 있는 힐튼 호텔에 짐
을 풀었다.
방콕은 우리 부부가 페캐지로 해외여행갈 때 최초로 간곳이 방콕이다.
지금은 그때같이 여행에 들떠 있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고 설레지도 않는 감정이
많이 삭아든 나이가 됐다.
방콕 시내의 왓아룬 새벽사원을 보며 우리나라는 사원이 기도하는 집 같은데 새벽
사원은 크고 화려하며 첨탑이 올라가 멋있게도 보이는데 이 넓은 곳에 기도하는 데
가 없으니 사원을 짓는 본 뜻이 무언지 아리송하다.
왓포는 거대한 와불상으로 길이가 46m이고 발바닥은 6m로 와불상의 발금은 미얀
마 라오스 우리나라 일본 모두 틀리다.
힐튼호텔의 수영장은 유럽 사람들이 일광욕하기는 좋게 만들었으나 수영장으로는
불만족스럽다.
디너 크루즈로 방콕 중심을 흐르는 차오프라야강을 떠다니는 유람선에서 뷔페를 즐
기며 방콕의 야경을 즐기기 위하여 배의 상갑판 오픈시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기 시작하는데 별안간 스콜이 쏫아져 비를 피하기 위하여 아
래 선실로 몰려 들어갔다.
이번 여행에 처음으로 당하는 호우지만 지금까지 날씨가 우리를 도와준 것 같다.
선실에 들어가 식사를 다시 하며 크루즈의 밴드에 맞춰 여흥을 시작하였다.
손주들이 앞에 나가 가수의 리듬에 따라 춤을 추며 재미있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
다
7일차 마지막 날로 밤 비행기를 타야한다.
연착이라 새벽으로 변경되어 야밤에 공연한 시간만 공항에서 허비 하게 되였다.
밀레니엄 힐튼호텔 옆이 아이콘 샴이라는 대형 쇼핑몰이 있다.
샴은 태국의 옛 명칭이다.
크기가 두바이 몰 못지않게 크며 각국의 명품은 물론 고급식당서 부터 우리나라 광장시장 같이 좌판식당에 식탁이 여기저기 몰려 있고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아무데서나 음식을 사 가지고 식탁이 나는 대로 아무 식탁에서나 먹을 수 있고 식탁을 치우는 건 식탁 앞의 식당이 치우는 것이 아니고 별도로 치우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남방 말린 과일인 망고 두리안 초콜릿 과자 등을 현지인 보다도 많이 샀다.
오죽하면 계산대에서 별도의 가방을 줄 정도였다.
호텔 쇼윈도에 걸려있는 옷을 사니 카드회사에서 확인전화가 왔다.
저녁은 한국주인인 태국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태국마사지 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온 식구가 즐겁게 불평한번 없이 정말로 즐거운 온 가족 여행이었다.
이렇게 즐거운 여행이 되게 한 일등공신은 둘째애 미연이로 혁범이 와이프다.
관광 인프라가 잘 되어 있어 세계의 각국 사람이 태국으로 오는 이유를 알만하다.
태국은 외세의 침략에 한 번도 국가를 뺏긴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알은 지식은 태국이 두 번의 치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한번은 2년 또 한 번은 8일 이란다. 옛날 고리짝에 있었던 일이다.
왓아룬 새벽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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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집사람 복지관 강사
복지관 강사
금년 1월부터 집사람이 압구정 복지관에서 민요 장구 강사를 하게 되였다.
복지관은 노인들의 집합소다.
이 강사를 하는데도 이력서를 내고 자기소개서를 내고 자격 검사를 받아야 한다.
수강 인원은 16명 정원으로 되어 있다.
처음 개설인데도 신청인원이 20여명이니 나름대로 인기종목이다.
십여 년 전부터 민요 공부하러 쫓아다니고 계속해서 장구도 배우고 민요 대회에 나
가서 상도 타오더니 아예 민요 강사까지 하게 되었다.
직장을 고만두고 늙어서 소일거리를 찾는다고 이것저것 하다가 민요까지 하게 된 것이다.
퇴직하고 난 후에 참 한 것도 많다.
바느질 한다고 재봉틀 사가지고 자기 옷도 지어 입고 자랑한다.
지금도 해 입으니 명품 옷이 필요 없다.
명리학을 공부한다고 사주팔자를 보아 길거리에서 돗자리 펴고 사주를 볼만한 실력
은 된다.
태극권을 한다고 대만까지 가서 외국인 금상도 받아왔다.
중국 공원에서 주민들이 군무를 추는 것 같은 것이 태극권의 일종이다.
자기 본업인 간호는 간호부장을 끝으로 쉬다가 대학 강사 요양보호사 강사로 끝이다.
자식이 학교에 다닐 땐 과외비를 아끼려 자기가 학원에 가서 수학을 공부하고 그
수학을 자식에게 가르쳤다.
내가보기에 잘한 것은 김치와 장 담그는 일이다.
시집올 때엔 김치 담그는 법도 모르고 장 담그는 것은 구경도 못한 모양이다.
직장을 고만두고 집에 있으면서 시누이한테 김치 담글 때 도와주며 장 담그는 방법
을 체득한 후엔 콩으로 메주를 쑤고 간장을 담그는데 지금은 된장이 수준급이다.
김치는 칭찬해 줄만큼 잘 담근다.
며느리에게 장 담그고 김치 담그는 법을 전수해 줄 수 있으니 시어머니 자격을 갖
춘 셈이다.
나는 밥 먹을 때 김치 하나만 있으면 불평 없이 잘 먹는다.
집사람이 복지관에 낸 자기 소개서다
자기 소개서
저는 1982년부터 40여년 이상 강남구에서 살아오고 있습니다.
1973년 가톨릭의대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를 취득 하였습니다.
가톨릭 의대 부속병원인 명동성모병원 여의도성모병원과 한강성심병원 간호부장으
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수원 간호대학 외래교수를 5년 강의를 하였습니다.
2012년부터는 경기민요 장구 태극권을 연마하였습니다.
2018년에는 전통국악 교육지도사 경기민요 1급, 장구 1급을 취득하였습니다.
세계문화예술 경연대회에서 민요부문 우수상과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태극권은 1단을 취득하였으며 대만 국제대회에서 외국인 금상을 취득하였습니다.
압구정 데이케어쎈타에서 노래봉사를 3년간 하다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중단되었습
니다.
지금도 복지관에 가서 우리민요와 장구 동아리에서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민요와 장구라면 언제 어디든지 찾아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3. 바석 상석 둘레석
비석 상석 둘레석
수십 년간 고민하고 걱정하던 산소 이전을 마치고 한숨을 놓게 되었다.
청계산 하오고개 칠 부 능선에 부모님 산소가 있었다.
부모님 산수 바로 위에는 고조부모 산소가 있었다.
고조부모와 부모님 산소를 밑으로 이장을 하고 가묘까지 3기를 둘레 석과 상석작업을 하는 것이다.
하오고개 도로에서 산소까지 올라가는데 50여분이나 걸리니 겨울에도 산소에 올라가려면 땀이 난다.
고지대에 산소가 있어 차례 때가 되면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식구들이 오면 남자들만 올라가고 다른 식구들은 밑의 할아버지 묘에서 기다리는 형상이다.
비인현감을 하던 5대조는 밑에 있는데 아들인 통덕랑을 한 고조부는 산꼭대기에 산소를 정 한 것이
납득이 안 된다.
지관이 얼마나 용한 혈 자리를 찾아 정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후대들이 유명인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모님의 묘소가 있던 산 능선 하단에 고조부와 부모 묘를 이장하였다.
도로에서 10여분거리에 있어 어린아이도 올라 갈수 있으니 산소의 트라우마는 사라졌다.
산소를 이장하고 나니 산소관리에 문제가 생겼다.
흙이 마사토라 풀도 자라지 않으니 잔디가 살 리가 없다.
봉분이 빨간 흙으로 덥혀있고 비가오니 봉분 흙이 떠내려가 돌들만 앙상하게 나타났다.
산소의 최소한 체면 치례라도 해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
친척들한테 물어보니 흙을 개비하고 잔디를 심고 죽으면 또 심고를 반복 하는 수밖에 없단다.
궁리 끝에 둘레 석을 치고 그 위에 봉분만 잔디를 심으면 산소로서 면모는 유지할 것 같다.
더 좋은 방법이 없나 하고 공원묘원의 각가지 모양과 평장 둘레석의 사각과 원형 상석을 살펴보고
산에 다니며 다른 집 산소도 눈 여겨 보았으나 명쾌한 해답이 안 나온다.
둘레 석은 산의 지형으로 보아 사각 둘레 석은 맞지 않고 전래대로 원형 둘레 석을 선택하였다.
둘레 석 위의 봉분은 잔디를 심고 밑의 제단은 잔디가 죽으면 인조잔디라도 깔면 될 것 같다.
상석은 요즈음 추세가 상당히 작아져서 전의 부모님 상석크기로 하였다.
비석은 부모님의 전에 세웠던 비석글씨에 빠져있는 조카 둘을 삽입하였다.
고조부 비석은 족보를 보며 신경을 써서 작업을 하였다.
옛날족보는 딸의 이름은 없고 사위이름만 있다.
또 제사일 만 있고 생졸연대는 없다.
상의하고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생각하며 비석 글자서 부터 산역까지 일을 하려니 신경이 곤두선다.
둘레 석과 잔디를 심는 본 작업을 하려니까 이장한 산소 막바지가 고바이가 심하여 그 무거운 석물을
어떻게 옮기나 고민이 생겼다.
도로에서 산소 올라가기 전 도랑을 넘어야 하는데 도로는 포클레인으로 도로를 만든다 하여도
경사도가 있는 막바지는 사륜구동 지프차도 어림없는 난제다.
전문 장묘 이장하는 팀장에게 물으니 사륜구동은 안되고 02 포클레인으로 길을 고른 후에 한대는
산소에서 석물작업을 하고 한대는 석물을 운반해서 올라오면 된다고 한다.
2024년 6월 5일 아침 일찍부터 석물 작업을 시작하였다.
전국을 다니며 산역을 한 인부들이라 자기 일을 알아서 잘들 한다.
둘레 석을 완공하고 봉분위에 잔디를 깔고 바닥에는 잔디를 듬성듬성 깐다.
두 빠렛트의 잔디면 굉장히 많은데 3기를 까는 데는 모자라는 모양이다.
고조부 산소를 거의 다 마칠 즈음 집사람과 막내아들 혁범이 부부가 인부들의 도시락을 구입하여
올라와 식당에 가지 않고 산에서 점심을 해결하여 많은 시간 절약을 하게 되었다.
고조부묘를 완성하고 부모님 묘소도 끝내고 마지막 가묘를 완성하였다.
가묘는 비석이 없고 둘레서 상석만 하였다.
가묘를 하는데 아끼던 잔디가 남아 올라가는 길에까지 깔았다.
석물 작업을 하는데 조카들이 하나도 와서 돌아보지도 않는다.
쾌심하게 생각이 들지만 조상 숭모사상이 결핍되어가는 요즈음 세상에 참고 넘어가자.
지금은 화장하고 납골당에 안치하는 추세이니 사회의 흐름을 어째랴.
넥타이 매고 선조들 시향제에 참석하는 내가 존경스러운 노인이 아니라 골동품이 되어가고 있는 세태다.
산역을 한다고 하면 온 집안이 난리를 떨고 선조에게 결례를 하지 않나 하고 신경 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천 여만 원을 나 혼자 부담하며 협조하는 사람 없이 칭찬하나 들어보지도 못하고 나 홀로
이장 작업을 끝냈지만 씁쓸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억지로 깔은 잔디나 잘 자랐으면 좋겠다.
3기의 묘에 석물을 다 설치하고 전체를 둘러보니 예상보다 잘 정돈 되어 마음은 흡족하다.
고조부모 묘
부모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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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조카 혁성 사망
장조카 혁성 사망
우리 집은 7남매에 3형제로 내가 막내고 큰형의 큰 아들이 혁성이다.
이 장조카인 혁성이가 2024년 2월 24일 12시 05분 영면하여 서울 분당병원 영안실에 안치하고 2월 26일 발인이다.
혁성이는 음력 1956년 8월 15일생이니 환갑이 지나 69세이니 적은 나이는 아니다.
혁성이는 팔원 추석에 나고 혁창이는 도사공 시향제날 나고 정희는 정월 초하룻날 나는 삼남매의 탄생일이 특이하여 생일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장조카인 혁성이를 어려서 부터 초등학교 다닐 때 나는 무척 귀여워했고 우리 집을 이끌어갈 희망을 갖고 있었다.
혁성이가 다섯 살 때에 나의 독일 펜팔이 네고부럭을 보내와서 혁성이 장난감으로 주었다.
당시 이 네고부럭을 나도 처음 보는 외국 장난감이었고 아이들은 서로 갖고 싶어 할 만큼 신비로웠다.
혁성이가 학교 다닐 때에도 내가 군 제대를 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학비를 대 주어 고등학교를 졸업 하였다.
혁성이가 졸업할 때 내가 혁성이에게 사립대학은 등록금이 비싸 내 힘으로는 힘드니 국립학교인 서울대를 가면 등록금도 싸니 어떤 방법이라도 내가 해 주겠다고 하였다.
혁성이는 대학교를 계속 낙방하다 결국은 포기를 하였다.
뒤에 들리는 말은 나를 무척 원망하였다는 것이다.
당시에 내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알지를 못하고 자기 생각만 한 것이다.
이때 동네 할머니가 자식도 아닌 조카를 그렇게 키워주면 커서 원망이나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하여 나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 하였다.
이런 혁성이가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작은 아버지인 나를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 보다 못하게 보는 것 같다.
동네 어른이 나보고 효자라고 하니 혁성이가 무슨 하며 흥 하더란다.
판교가 개발될 때 우리 집인 낙생면 하산운리 102 번지의 집 과 대지 밭이 수용되어 보상금이 나오는데 동네에서는 보상을 받느니 보상이 적어 안 받느니 하고 있을 때 나 한 테는 말 한마디 없이 혁성이가 제일먼저 보상금을 청구하여 받아 같다.
이 밭이 우리 식구들이 내가 부모에게 한 푼도 못 받았으니 네 몫이다 라고 한 땅이다.
혁성이 말은 이 보상금 가지고 삼백억 정도 만들어 식구들에게 자선사업가 같이 얼마씩 나누어줄 계산이었다고 한다.
혁성이가 분당에 부동산을 구입해 가지고 기획 부동산을 차려 한몫 보려다 순식간에 모두 날리고 빈 털털이가 되었다.
윗대에서 만든 남은 재산이 모두 날라 간 것이다.
지금 판교가 천지개벽을 하여 판교에 내가 살던 집이 어디쯤인지 어림짐작도 못한다.
혁성이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고 장례식장엘 갔다.
여태껏 소식이 두절되어 모르고 있다가 손자가 수원시에 또 한 손자는 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이 손자들이 큰 형수인 혁성이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내가 혁성이 한태 보상금 받은 문제를 제기하며 해결방안을 찾으라고 요구하니 조속한 기일 내에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았던 손자들이다.
후에 혁성이가 나에게 해결해 주겠다고 각서까지 써 주었다.
장례식장에 혁창이 정희가 나한테 와서 작은 아버지 한테 정말 미안하다고 한다.
나는 너희 형제들이 한 행동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고 배신감을 갖는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였으나 실제로 들어야 할 손자며느리나 손자들은 못 들었다.
혁성이가 죽기전에 만나 대화를 하며 용서를 빌고 모든 문제를 풀었으면 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는데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문객은 사촌들이 하나도 오지 않고 친척들도 보이지 않는다.
동네사람도 안보이고 손자의 문상객이 눈에 띤다.
부의금으로 백만 원을 주고 씁쓸한 기분으로 장례식장을 나왔다.
5. 며느리 선물 랩 다이야
며느리 선물 랩 다이아
집사람이 나에게 랩 다이아를 아느냐고 묻는다.
천연다이아가 아니고 공장 실험실에서 만든 다이아로 천연다이아와 구별이 안 되고 전문 감정가가
구별해야 할 정도로 정교하다고 한다.
요즈음은 결혼할 때 이 랩 다이아로 예물을 하는 것이 대세란다.
가격은 천연다이아의 10분의 1이라고 한다.
집사람이 처제와 종로3가 금은방을 드나들며 옛날엔 5부 다이아를 보더니 지금은 캐럿으로 바뀌었다.
둘이 2캐럿 3 캐럿을 주문하고 있다.
집 사람이 나에게 이번여름에 큰애도 캐나다에서 오니 두 며느리에게 다이아 반지를 선물하면 어떠냐고 물어온다.
당연이 며느리들이 좋아 할 거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다이어 반지를 해 주었다고 동네방네 크게 소문이 나면 시어머니 성과도 올라갈 거라고 했다.
집사람이 금은방에 가서 2캐럿짜리 2개를 추가로 주문을 하니 금은방은 신이 났다.
집사람이 다이아 반지 세 개를 사는데 1천여만 원이나 들어갔으니 큰마음 먹은 거다.
집 사람이 손에 다이아 반지를 낀 것을 보니 큼지막하고 번쩍거리는 것이 샘을 낼만 하다.
씨리얼 넘버가 있는 다이아 보증서와 케이스를 들고 자랑을 한다.
수원에 있는 작은 며느리가 먼저 다이아 반지를 받고 큰 며느리는 캐나다에서 귀국하자마자 건네주니 모두 기뻐한다.
우리 집사람이 큰일 한번 했다.
6. 큰아들 식구 시조묘 참배
큰아들 식구 시조묘 참배
큰아들이 큰맘 먹고 캐나다에서 온 식구를 데리고 여름 방학에 귀국하여 서울 우리 집에 도착 하였다.
작은 아들과 협의하여 온 가족이 태국 여행을 마치고 집에 와서는 아이들에게 조상을 알아야 된다며 조상의 산소를 가서 보겠단다.
요즈음 세상에 기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온 가족 9명이 청계산 하오고개 5대조 묘부터 참배를 하였다.
금년에 비석 상석 둘레석을 공사한 증조부나 부모묘도 참배를 하였다.
할아버지 묘를 참배한 후에 작은 아들 세 식구와 집사람은 집으로 가고 나와 큰아들 네 식구는 혁범이 산타페를 몰고 음성으로 향하였다.
음성군 관광지도에 양촌 권근 아들 손자 삼대 묘가 있다.
조선 초에 최고의 문필과 유명한 입학도설의 문충공 권근과 세종때 용비어천가를 지은 아들 권제 문경공, 정난공신의 손자 권람의 삼대 묘가 잘 정돈되어 있다.
손주에게 음성의 권근 삼대 묘에서 왕이 내린 부조묘를 설명하고 흑요석으로 새겨진 천상열차분야지도도 설명하여 주었다.
권람의 아들 묘소 옆에 있는 충견묘도 설명하니 흥미로워 한다.
음성에서 안동 시조 묘로 출발을 하였다.
안동의 관광지도에 능동 재사와 시조 권행의 신도비가 나와 있다.
신라 김행이 왕건에 사성되어 권행이 되어서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다.
큰아들 식구가 권씨의 시조 묘에 참배하고는 매우 흡족해 하는 모습이 좋게 보인다.
시조 묘에서 안동시내에 있는 태사묘로 갔다.
태사묘는 김 권 장씨의 3태사 묘로 태사는 왕건이 내린 최고의 벼슬이다.
늦게 삼태사 사당에 도착하는 바람에 문이 닫쳐서 들어가지 못하고 태사로 에서 외관을 보고 나는 서울로 큰아들 식구는 부산으로 출발을 하였다.
큰아들은 내일 부산을 구경하고 싸이의 공연을 본 후에 모래 무주 태권도장을 보고 천안 독립기념관을 보고 귀경할 예정이다.
손자 손녀가 모두 태권도 유단자다.
자식이 조상 묘를 찾아보니 내 마음도 흐뭇하다.
7. 얼굴 점 시술
얼굴 점
얼굴에 까만 점이 서너 개 보이더니 요 몇 년 새에 좁쌀알 만한 까만 점부터 쌀알만 한 점
이 여러개 생겼다.
얼굴 전체로 봐선 노인네 얼굴로는 점이 그런대로 봐줄만한 상태이다.
집사람이 얼굴에 점을 빼자고 하여 큰 점 몇 개만 빼고 그런대로 지내가려고 점을 빼자고
하였다.
신경도 안 쓰고 병원에 예약한 것도 잊어버리고 있는데 집사람이 내일이 점빼는 예약 날자
란다.
1월 11일 강남뷰티피부과 병원에 오전에 갔다.
나이들은 여인들이 대기실에 앉아 있고 남자는 별로 없다.
나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점빼는 날짜를 잡아주는 줄 알았더니 바로 시술을 하겠단다.
얼굴을 살피더니 점이 굉장히 많다고 한다.
나는 점이 별로 없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사의 눈은 틀린가 보다.
집사람이 압구정 복지관에서 추천하여 왔다고 하니 2십 만원에 해 주겠단다.
4십 만원은 받아야 되는데 특별히 봐주는 거란다.
얼굴을 마취한다고 얼굴 전체에 크림 같은 약을 바르고 반시간 동안 기다리라고 한다.
병실에서 시술을 하는데 얼굴이 따끔따끔한 게 통증이 제법 온다.
얼굴에 있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만 점까지 빼느냐고 온 얼굴을 레이저로 쏘고 있
다.
반시간이 지나 시술을 마치고 얼굴을 보니 온 얼굴이 새까맣다.
보이지도 않는 점을 레이저로 쏘니 콩알만 하게 까맣게 변해 있는데 얼굴 전체가 까만 우박
을 맞은것 처럼 까만 것이 내가 보기에도 흉측스럽다.
이런 얼굴로는 어데 다니기가 곤란한 얼굴이다.
시술 다음날이 고등학교 등산 동아리 시산제 날이다.
대장인 내가 빠질 수는 없어 마스크를 쓰고 털모자를 쓰고 나타났다.
그런저런 지나 가다가 식사시간에 오늘 수고들 했다고 한마디 하고 않아 식사를 하기 위하
여 마스크를 벗었다.
친구들이 나의 까마죽죽한 얼굴을 보고는 마스크로 가릴만한 얼굴이라고 수긍을 한다.
대장이 늙어서 연애를 하는 모양이란다.
애인에게 잘 보이려고 얼굴에 점을 뺐다는 것이다.
년 초에 각종 신년회 참석은 강 건너 간것 같다,
시술 후 4일째 되는 날부터 얼굴에 까만 점이 떨어지기 시작하며 남은 까만 딱지는 조금
솟아올라 곧 떨어질 예고를 한다.
시술 후 일주일이 되니 보기 싫은 까만 딱지는 다 떨어져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얼굴도 하야진것 같다.
얼굴은 꺼칠꺼칠하지만 며칠 후면 다 사라질 것 같다.
이삼개월 간다고 하여 고민했는데 얼굴에서 해방된 것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 졌다,
집사람은 자기 말 듣기 잘했지 하며 자기 말 들어 손해 볼 것 없다고 한다.
8. 휘닉스 스키
휘닉스 스키
2월 7일 용평 휘닉스 스키장에 하루일정으로 스키를 타러 갔다.
혁범이가 휘닉스 리프트 1일 렌탈권 2매를 가지고 왔다.
MBA 후배 김순웅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같이 가기로 하였다.
새벽 5시에 기상을 하여 잠실 종합운동장 앞에서 6시40분에 용평으로 출발을 하였다.
9시 부터 용평 스키장에서 김 사장과 신나게 아침스키를 즐겼다.
날씨는 약간 눈발이 내리는데 스키타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다.
문제는 새벽에 나오느라고 아침식사 해결을 못하고 용평에서라도 해결을 해야 하는데 개장시간에 맞추어 스키타려고 리프트에 오른 것이다.
점심이 다 되어 가니 허기가 지고 다리에 힘이 빠진다.
물 한잔 못하고 운동을 하고 있으니 노쇠한 몸이 신호를 계속 보낸다.
오후 5시가 마감이라 조금이라도 더 탈 욕심에 1시가 다 되어서 식당엘 갔다.
스키 실력이 비슷한 김 사장도 허기가 진 것은 마찬가지인데 집에서 아침을 먹고 왔단다.
이번 겨울 시즌에 처음 타는 스키라 처음엔 몸을 푸느냐고 중급에서 놀았는데 체력이 고갈되니 최고급 슬로프에 가는 것이 부담이 된다.
점심에 충분하게 쉬고 슬로프에 올라가서 마지막 5시까지 타고 귀경 버스에 올랐다.
김 사장도 스키 타다 중간에 쉬는 스타일이 아니고 겨울에 체력단련으로 스키 씨즌권을 구매하여 겨울을 즐기는 자기 체력에 관심이 많은 건강중심 형이다.
피곤한 몸을 버스에서 졸면서 귀경하였지만 오늘 하루 잘 놀고 스키를 잘 탔다.
내 일생에 마지막 스키를 잘 즐긴 것 같다.
스키를 탄 사진을 카톡에 올리니 친구나 후배들이 대단하다고 댓글이 쏟아진다.
9. 둘째 누이 방문
둘째 누이집 방문
추석 전날인 9월 16일 우리 부부가 막내 누이를 대동하고 배 한 박스를 들고 둘째 누이 잠원동 집을 방문 하였다.
둘째 누이가 막내 누이도 못 알아보고 나도 못 알아본다.
몸은 건강하고 밥도 잘 먹으면서 지금은 딸도 못 알아보는 상태다.
전에 볼 때만 해도 집사람보고 누구냐고 물으니 오찬이 댁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나도 몰라보니 산송장이나 마찬가지다.
한 세기 넘어 살았으니 참 오래도 살았는데 치매에 걸려 간병인만 알아보는 상황이다.
나는 중학교 때는 큰 누이 집에서 고등학교 때는 둘째와 막내 누이 셋이서 살았다.
대학교부터 군대 갈 때까지는 둘째 누이 집에서 살아 둘째 누이와는 인연이 깊다.
아들인 봉규가 결혼하기위해 겨울에 강원도 예비 신부집 까지 찾아가고 봉규가 카이스트 다닐 때 폐암으로 사망선고를 받고는 용인 재산문제를 나에게 부탁까지 했다.
나는 둘째 누이집 문제를 열심히 도와주었고 누이도 스스럼없이 나에게 물어보고 부탁도 하였다.
딸 경난이도 대학교 다닐 때 신가다 샘풀 옷을 여러 벌 주며 대학 등록금도 신경을 써준 일이 있다.
둘째 누이와는 조카사위와 부동산 문제로 소원해 지기 시작 하여 경조사 때만 왕래를 하게 되었다.
동기간도 못 알아보고 딸도 못 알아보는데 계속 찾아본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도 아파트에서 간병인을 두고 혼자 편안하게 걱정 없이 살으니 노후가 행복한 삶이다.
10. 집사람과 여행
1) 스리랑카 몰디브
스리랑카 몰디브
초겨울에 남쪽나라 스리랑카에서 일주일 여행을 하고 몰디브에서 3일간 해수욕을 하고 귀
국하려고 하나여행사와 가가트립을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하나투어에서는 여행객 모집이 안 되어 취소 통보가 왔고 가가에서는 두 명도 가능하며 현
지에는 한국어를 하는 가이드가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한다.
우리 나이가 많은 것을 알고 천개의 계단을 오를 수 있느냐, 세 시간 왕복 걸을 수 있느냐고 확인을 한다.
스리랑카는 인도 남쪽에 있는 섬나라이고 옛날에는 세일론 섬이라고 했다.
몰디브는 우리나라에서 신혼 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이다.
우리 노부부가 도착하여 방에 들어가니 해피 허니문 이라고 열대 나뭇잎으로 침대 위에다 새겨 놓
았다.
2024. 11/18 - 11/26 일정으로 인천공항에서 8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스리랑카 콜롬보 공
항에 내리니 우리나라보다 시차가 3시간 늦다.
현지 가이드를 만나 공항 옆에 있는 도시 네곰보 호텔에 짐을 풀었다.
담블라 석굴사원을 갔다.
바위산을 깎아 만든 사원으로 네 개의 사원이 있는데 사원마다 석굴 앞에 집을 지어놓고 하
얗게 칠을 하여 석굴을 판 흔적이나 석굴을 파는데 고생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게 만들
었다.
기원전 1세기에 발라감바 왕이 수도 아누라다푸라에서 피신하여 담블라에서 14년간 스님들
의 보호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 타밀족을 물리칠 수 있어 왕이 그 보답으로 석굴 사원을 조
성하였다.
스리랑카는 겨울이 우기라 오후에 한때 매일 비가 내리는데 여행사에서는 비가 안 오니 우
산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고 한다.
신발 맡기는 곳에 나오니 비가 쏟아져 끝일 때 까지 기다렸다.
오후에는 히리와더나 마을로 가서 현지 고유 식사를 만드는 과정을 보며 바로 만든 식사로
점심을 하였다.
소 두 마리가 끄는 우마차에 타고 저수지 까지 가서 노를 젓는 배까지 탔다.
마차타고 시골마을을 구경하는 것이다.
11/20일 호텔에서 동이 트기전 새벽 5시에 출발하여 시기리야 요새를 갔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시기리야요새는 바위 요새로 1200개의 계단을 올라가
야 되는 바위산 정상에 있다.
이 바위산이 사자모양이라 사자 바위라고도 한다.
왕이 쫓겨 와서 바위산 꼭대기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집 사람이 1200개의 계단을 무리 없이 오르는 것을 보니 태극권 때문에 체력이 많이 회복
된 것 같다.
스리랑카 제2의 도시 캔디로 갔다.
인공 호수를 도는데 비가 쏟아져 카페에서 차 한 잔하며 저녁에 민속극장 시작할 때 까지
기다려서 보았는데 처음 접하는 민속 음악이라 낯설어 감동을 받지는 못하였다.
불치사는 스리랑카에서 제일 신성한 사원으로 부처의 왼쪽 송솟니가 봉안되어있는 곳이다.
일반인에게는 일 년에 한번 축제 때에 공개되는데 평시에도 오전 기도 시에는 많은 사람들
이 몰린다.
스리랑카는 불교국으로 불교에서 소승불교의 원산지로 불자들이 많은 순례를 온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는 북방에는 중국이 대승불교 남방에는 스리랑카가 소승불교다.
우리나라는 중국에서 들어온 대승불교다.
캔디에서 누와라엘리로 가는데 도시가 다 800메타 고지에 있고 산이 많아 계곡과 경치가
좋다.
옛날부터 찾는 관광객이 많아 산 계곡에 소규모 호텔과 식당이 많다.
산이 많으니 평야의 농토는 별로 보이지 않으나 겨울이 없으니 나무가 우거져 푸르고 삼모
작이 가능한 기후다.
2천메타 고지에 오르니 차밭이 펼쳐져 있는데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다.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것이 실론티 인데 여기가 원산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높은 산꼭대기에 커다란 차 공장이 자리 잡고 있다.
여러 종류의 차를 시음해 봤는데 차에 익숙하지 않아서 인지 좋다 나쁘다 감별할 능력이 없
다.
11/23일 또 새벽 5시에 호텔에서 출발하여 얄라 국립공원으로 갔다.
스리랑카에서 두 번째로 큰 국립공원으로 지프차로 사파리 투어를 하는데 새나 코끼리 물소
들을 보는 것이다.
야생하며 살아가는 동물을 본다는 의미지 동물을 제대로 보려면 동물원에서 보는 것만 못하
다.
사파리가 끝나고 스리랑카 남쪽도시 갈레에서 점심을 하였다.
점심 후에 해변을 산책하는데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카리브 해에서 잠시 짬을 내어 해수욕을 하고 얼른 나온 기억이 나서 갈레에서도 잠시 해수
욕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나 체력에 한계를 느끼고 내일이면 몰디브를 갈 것이라 참았
다.
갈레에서 스리랑카 서쪽해안을 따라 콜롬보로 북상을 하는데 해변을 끼고 마을이 계속 연결
되어 있다.
11/24일 새벽 5시에 네곰보의 호텔에서 첵크 아웃하고 스리랑카의 콜롬보 공항에 도착하여
7시 반에 몰디브의 말레행 비행기를 탑승 했다.
여기까지가 스리랑카 여행이고 패키지 여행으로 왔는데 여행객이 우리 부부 둘 뿐이라 스리
랑카 현지 가이드 한명하고 자유여행 같이 황제여행을 하게 되었다.
가이드는 키도 크고 잘 생겼는데 한국어가 서툰지 보통 가이드처럼 쉬지 않고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관광지에 도착하면 여기가 어딥니다 하면 끝이다.
운전은 잘 하는데 스리랑카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우리로서는 답답하고 스리랑카에
대하여 배우고 가는 게 없어 서운한 감이 든다.
공항 입구에서 현지 가이드는 출국 수속도 해주지 않고 돌아가 버리고 우리 부부만 남았
다.
지금부터는 집에 돌아 갈 때 까지 영어가 짧은 우리 부부가 홀로 돌아다녀야 한다.
몰디브의 말레 공항에 도착하여 캐리어를 끌고 나오니 선착장이 붙어 있다.
작은 섬이 많은 나라인지 각 섬 가는 카운트가 줄지어 있는 풍경이 새롭다.
구라마티 리조트에 가는 카운트에 가니 한 시간 후에 스피드 보트가 출발하니 승선하란다.
스피드 보트가 어떤 건가 했더니 조그만 여객선을 스피드 보트라고 한다.
공항겸 선착장에서 한 시간 을 가니 구라마티 리조트 호텔이다.
구라마티 리조트는 섬 전체가 리조트로 이루어 져 있어 섬 주민은 하나도 없다.
리조트 리셉션에서 안내원이 리조트 시설을 영어로 설명을 해 주는데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어 쩔쩔매니 안내원이 바뀌어 스마트폰 번역기로 결정적인 필요한 설명을 해 준다.
해외에 나가면 한국인이 그렇게 많이 몰려다니는데 이번 여행에는 한사람도 만나지 못해 이
번같이 필요한때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풀 보드( Full Board ) 패키지라는데 풀 보드라는 뜻을 모르갰다.
이 리조트 안에 있는 모든 시설과 식당을 마음대로 이용한다는 뜻 같다.
이 섬 리조트 안에 뷔페 식당이 3개 수영장이 3개 외 편의 시설이 많이 있는데 자유롭게
사용하라는 것이다.
몰디브는 천여 개의 섬이 있고 200여개의 섬에만 사람이 살고 인구는 34만여 명이고 해수
면 제일 높은 곳이 2메타라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사라질 위기지만 가서 보니 태평하다.
국교는 이슬람이라 입국할 때 술을 못가지고 들어가는데 리조트에서는 술을 자유자재로 먹
고 판다.
우리는 섬 중앙에 배정을 방을 받았는데 주택이다. 월 풀 까지 있다.
섬 길이가 2키로 정도라 워킹하기도 좋고 해수욕을 하다 수영장에 가서 놀기도 하고 하루
종일 맘대로 놀다보니 모처럼 자유스러운 휴식을 즐길 수 있었다.
우리 부부가 겨울인 한국에서 몰디브 까지 와서 해수욕을 즐기니 상팔자가 된 것 같다.
귀국하면서 고생하는 것은 별도로 기술을 한다.
첨부된 파일 1개▼
Check out 에서 Home in 까지
(첵크 아웃에서 홈인 까지)
스리랑카를 일주일 투어를 하고 몰디브에서 3일간 해수욕을 하고 귀국할 때의 이야기다.
2024년 11월 26일 아침 9시에 몰디브의 구라마티 리조트에서 첵크 아웃하고 배로 한 시간
걸려 말레 공항에 도착하였다.
몰디브의 말레 공항은 항구와 같이 있어 배에서 내리면 바로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다.
말레에서 스리랑카의 콜롬보 공항에 오후 3시 반에 출발을 하는데 오전 11시 넘어 출국 심
사대를 통과하였다.
비행티켓을 받으러 들어가는데 제지를 한다.
너머 일찍 들어와 비행사가 오픈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다.
좁은 공간에 캐리어를 앞에 놓고 의자에 앉자 멀쩡히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이후에
불안한 사건들이 예고되는 듯 했다.
말레공항은 캐리어가 30Kg이 가능하며 심사가 까다롭지 않아 관광객을 위한 나라답다.
비행기는 말레에서 콜롬보로 정시에 출발을 하였다.
우리부부는 말레에서 탑승하고 콜롬보공항에서 트랜스퍼 하여 인천 공항으로 오는 경로다.
정상적으로 말레에서 온 비행기는 콜롬보 공항 상공 위에서 빙빙 돌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두 시간이나 더 비행하며 다른 공항에 착륙하고는 한 시간이 넘게 기내에서 기다리게
하더니 내리란다,
콜롬보 공항에 비가 많이 내려 착륙을 못하고 다른 비행장으로 온 것이다.
콜롬보에서 트랜스퍼 하는 시간이 두 시간 밖에 되지 않아 시간상으로는 우리가 예약한 비
행기는 이미 콜롬보에서 인천공항 으로 출발한 시간이다.
여기 공항에서 콜롬보 공항까지 버스로 3시간 이상 걸린단다.
나는 승무원에게 여기가 콜롬보 공항이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나는 콜롬보 공항에서 트랜스퍼 하여 인천공항으로 가는 데 어떻게 하느냐 고 물으니 비행
사에서 알아서 해 주겠단다.
참으로 난처하기 짝이 없다.
영어가 짧아 승무원이 무어라고 설명을 하면 알아들을 수가 없어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는 승무원이 하라는 대로 하는 수 외에는 없다.
비행기에 탑재해 있는 내 캐리어가 어떻게 인천에 갈지 궁금해 죽겠다.
콜롬보에서 내리기만 하는 승객은 공항버스로 콜롬보로 먼저 출발을 하고 트랜스퍼 하는 우
리만 남았는데 다행히 우리나라 젊은 부부가 있는데 영어를 할 줄 알아 마음이 놓였다.
저녁 9시가 되니 트랜스퍼 승객을 데리고 탑승구로 가서 티켓검사까지 하여 다른 비행기로
콜롬보로 가는 줄 알고 안심했는데 공항 안에서 공항버스를 태운다.
이때 우리가 믿었던 영어를 하는 우리나라 젊은 부부가 버스를 안타고 다른 데로 가니 황당
해 졌다.
우리를 태운 공항버스는 자정이 넘어서 콜롬보 공항에 도착 하였다.
콜롬보 공항 승무원이 6시에 인천출발 안내판이 뜰 테니 새벽 5시 반까지 여기서 기다리라
고 한다.
공항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우라는 것이다.
그나마 비행기라도 잡아 준다고 하니 감지덕지다.
정상적이면 이 시간에 우리가 인천 공항에 도착하는 시간이다.
어제 9시에 체크아웃하고 잠도 못자고 끌려 다니며 여기까지 오니 체력이 고갈상태다.
여기 콜롬보에서 인천공항까지 8시간 반이 비행시간인데 또 비행기에서 쪼들릴 생각을 하
니 몸이 뒤틀린다.
아침에 콜롬보에서 비행기를 타니 우리가 처음 타려고 예약했던 비행기다.
그럼 이 비행기도 우리를 기다리고 마냥 있었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천공항에 27일 오후 7시 반 도착해서 또 한 시간을 기내에서 대기시키다가 9시 반에 공
항에서 내리게 되었다.
인천공항 대기는 인천에 금년 첫눈이 폭설이 내려 인천공항이 혼잡해서인 것 같다.
캐리어를 찾아 마지막 공항 기차를 타고 김포에서 내려 터미널 가는 전철을 타는데 동작역
이 막차 란다.
동작역에 내리니 28일 새벽 1시가 되었다.
반포 쪽을 향해서 1번 출구로 나오니 한강 쪽이다,
깜작 놀라 1번 출구로 다시 들어가려고 가니 그새에 전철로 들어가는 모든 문을 잠가버려
들어갈 수가 없다.
여기서 부터 짜증과 여태껏 기분 좋게 다녀온 스리랑카 여행이나 몰디브 휴식을 한꺼번에
망치는 기분이 되었다.
1번 출구를 나오니 동서남북을 구별할 수가 없고 안내판도 없다.
그 흔한 아파트도 안보이니 방향을 가름 할 수가 없지 대로도 안보이고 88도로에 전철육교
자전거 도로만 보이지 택시를 타기위한 대로를 찾을 수가 없다.
인터넷 길 찾기를 해도 어설퍼 집사람이 아들에게 전화까지 하고 난리법석이다,
거기에다 눈이 내리는데 함박눈이 앞이 보이질 않을 정도로 내린다.
여름옷에다 잠바만 걸첬는데 다행히 눈은 오지만 쌀쌀 하지는 않아 다행이다.
더퍼놓고 인도로 한참을 걸으니 나타나는 데가 국립묘지에서 오면 반포와 방배동으로 가는
네거리다.
전철로 한 정거장이다,
눈은 쏟아지는데 네거리에서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어도 그냥 지나간다.
한두 대도 아니고 택시가 태울 생각을 안 한다.
두시가 넘어 노인이 모는 택시를 잡고 여행 빽을 실으려니 트렁크가 LPG 통이 있어 억지로
의자에 싣고 집에 올수가 있었다.
택시 기사가 눈이 많이 오고 자기는 집에 가려다 우리를 태웠다며 이 시간에 택시들은 위험
하고 손님도 없어 택시잡기 어려울 거라고 한다.
두둑이 택시비를 주고 집에 들어오니 28일 새벽 3시반 이다.
잡시 눈을 부치다 말고 일어나 집 앞의 눈을 치우니 팔다리가 후들후들하여 몸조리부터 해
야겠다.
스리랑카와 한국은 시차가 3시간 반 밖에 안 돼 시차적응에 큰 문제가 없어 다행 이라고
생각 했더니 예상외의 비와 눈 때문에 귀국하는데 고생을 하여 몸이 더 축나게 생겼다.
2) 일본 규슈 벳부
일본 벳부 여행
긴린 호수
겨울 때를 벗기기 위하여 일본 남부 벳부 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마음의 평온을 찾기로
하였다.
건설 경기가 안 좋아 장비가 주기장에 들어가고 겨울이라 언제 작업이 시작될지 감도 잡히
지 않아 혼자 속만 태우고 있는 중이다.
해결책도 없이 속앓이 한다고 풀어지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평온이나 찾으려고 온천을 택한
것이다.
벳부는 사십 여 년 전에 군대 동기생 부부들과 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기억만 아련히 남아 있을 뿐이다.
모바일 폰도 없고 흑백 필름 사진 시대라 핸드폰 사진같이 쉽게 사진을 찍는 시대가 아니라
기록이 시원치 않다.
이번에는 패키지여행이라 여유롭게 쉬다 오는 것이 아니라 3일간 강행군을 하는 것이다.
2024.2.20 - 2.22 하나투어 19명.
07시 40분 후쿠오카행 비행기 인데 05시 10분에 인천공항 미팅 장소로 오라고 한다.
04시 10분 신사역에서 리무진 첫차를 타고 인천공항 미팅장소에 간신히 도착했다.
새벽도 오기전인 밤 3시부터 집에서 부시럭댔으니 잠도 못자고 일본 도착 09시 부터 가이
드에 끌려 다니는 것이다.
학문과 문화의 신을 모신다는 다자이후 텐만구(天滿宮)에 갔다.
여기는 벌써 매화꽃이 피었다.
시인이며 철학자인 스가와라노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본전은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
어 있다.
입구에는 모찌나 과자를 파는 상점이 즐비하며 관광객이 매우 많은데 일본인 한국인이다.
그렇게 많이 보이던 중국관광객이 보이지를 않는다.
본전 옆에는 문신을 상징하는 비석이나 전각이 있고 도리 옆에는 우상 신도 있다.
입구에서 본전을 가는데 연못의 반달 다리를 건너가는데 환상적으로 잘 만들었다.
정원도 넓은데 규슈 국립박물관까지 있다.
박물관은 에스카레이터로 한참을 올라가는데 올라가서는 널찍하게 박물관 자리를 잡았다‘
지형을 살려서 박물관은 잘 지었는데 방문자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점심에 일본 도시락인 마쿠노우찌 변또를 먹고 명물 과자도 맛보았다.
텐만구(천만궁)
에도시대 규슈의 정치 문하 경제의 중심지인 히타에 가서 에도시대에 지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일본가옥 거리를 보며 전통의 주조장에 가서 사케 술 한 병을 쌌다.
일본에서 유명한 벳부 온천을 가니 전에 왔을 때 산 중턱에 여기저기 온천수가 있는 기억이 있었다.
이제는 이 온천수가 있는 구역 구역을 개인이 분할하여 건물을 지어 입장료를 받는다.
이중에서 지옥온천에 들어가 온천물에 발을 담가보며 관광객한테 체험을 핑계로 돈을 벌려
고 머리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기왕 머리를 쓰는 김에 체험 장을 아주 크고 넓고 화려하게 꾸며 그럼 그렇지 하고 감탄하
게 재구성하면 더욱 좋겠다.
생소한 유황재배지가 움막같이 지어 여러 동이 있다
기념품점에는 유황온천에서 채취한 광물로 만든 화장품에서 비누 등 여러 종류를 판매하는
데 너머 비싸다.
숙박은 온천 리조트를 잡았는데 온천장이 우리나라 조그만 목욕탕 수준이다.
온천욕 한다고 일본까지 와서 이런 목욕탕에 오니 서운한 감이 든다.
인구 3만 명 박에 안 되는 시골의 유후인 온천마을은 추천할만한 온천 도시다.
아침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긴린 호수는 뒷배경과 함께 보니 환상적이다.
작은 마을의 좁은 골목을 일본인답게 아기자기하게 꾸미고 기념품점 카페가 즐비하며 여기
저기 사진 찍기 좋게 꾸며 관광객들을 즐겁게 한다.
아소산 대관봉에 오르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즉시 하산하며 대신 제방집에 들렸다.
관광객을 위해 재개통된 미나미 협곡열차를 탔다.
낭만이 가득한 협곡을 구경하려다 폭우로 연착한 기차를 지루하게 기다리며 시간만 낭비 하였다.
우신상
규슈의 제일 큰 도시 후쿠오카의 힐튼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운하로 연결한 캐널 시티는 바다를 메워 각 구역을 운하로 연결하여 건물을 짓고 주차장을
확보한 것을 보면 바다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것 같다.
캐널시티에 세계적인 패션 명품점이 들어 있고 음식점 문화공간 각 지방을 대표하는 라면식
당도 모아 놓아 먹걸이나 분수까지 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 복합 공간이다.
저녁을 먹기 위하여 집사람과 삼층 식당가에 들어가서 키오스크로 주문을 하였다.
일본어로 메뉴가 되어 있어 늙은이가 쩔쩔매고 이리저리 누르고 있는데 옆 좌석에서 한국어
도 있어요 하고 한국 청년이 알려준다.
식당을 둘러보니 한국 청년이 반이나 된다.
젊은 한국 청년이 자유여행으로 도꾜뿐만 아니라 규슈지방까지 이렇게 많이 왔으니 일본은
신이 났다.
1200년이 넘는 동장사는 규모도 크고 국가 중요 문화재인 천수관음 입상이 있다.
시내에 있는 절인데 관광객이 적어 조용하다.
집사람은 절에 대하여는 호의적이라 열심히 구경하며 종도 울린다.
입장료를 내는 2층에는 일본에서 최대 규모의 높이가 16m가 넘는 목조 좌상이 있다.
극락도와 지옥도가 있는데 지옥도를 보는 데는 캄캄한 지역을 한참이나 지나가니 무서움이
엄습한다.
다 보고 나오는데 안내하는 보살이 부른다.
입장료가 50엔인데 500엔을 냈다고 거슬러 준다.
일화를 사용하는데 익숙지 않아 신경을 써도 착오를 냈지만 우리가 나올 때 까지 기다렸다
가 우리를 찾아 거슬러 주는 보살이 마냥 고맙고 일본의 인상을 좋게 보는 결과도 됐다.
오후에 공항에 가서 티켓 팅을 하니 4시간이나 연착을 한단다.
아소에서 폭우로 기차가 연착을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제 밤에 폭설이 내려 아침 비행기
가 모두 이륙을 못하여 언제 올지 모른단다.
인천공항에서 일본 손님을 싣고 일본에 와서 우리를 싣고 다시 인천공항으로 가야 되는데
출발지에서 이륙을 못하니 연쇄적으로 연착이 되는 것이다.
오후 6시 반 도착이 밤 10시 반에 도착하여 급히 캐리어를 찾고 인천공항에서 마지막 전철
을 탔다.
우리나라 공항은 그렇게 많은 귀국자들을 물 흐름 같이 통관하여 세계최고의 공항이라는 것
을 입증 시켜주었다.
집에 도착하니 새벽 2시가 되어 짐을 풀었다,
쉬러가는 여행이 아니라 강행군을 하다 보니 피곤이 겹치는데 다행히 시차가 없어 몸의 회
복을 빠르게 하였다.
3) 제주도 마라도
제주 마라도 투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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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남단 마라도
제주 마라도 투어
한 밤중에 TV 에서 마라도가 포함된 제주도 투어광고가 방영되었다.
금액이 얼마나 싼지 3박4일에 178,000원이란다.
패키지 여행사가 선물상점에 끌고 간다고 하여도 비행기 표 호텔비 식대 등 아무리 생각해
도 매우 싸다.
싼게 비지떡이란 말도 있지만 예전에 한번 간적이 있어 부부동반 예약을 하고 기다렸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를 간다고 하니까 마라도에 필이 꽃쳤다.
2024년 6/15 - 6/18일 3박4일간 여행인데 가는 날은 저녁에 도착하고 오는 날은 아침에
출발하여 만 이틀을 제주 여행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동남아 가는데 사오일 고생하는 것 보다 알짜배기로 국내 여행하는 것 같다.
제주에 도착하니 여행객이 버스 18대란다.
사람이 많은데 제주 가이드도 놀라고 우리도 놀랐다.
요즈음 제주 관광객이 줄어 신경을 쓰는데 우리같이 예정도 안했던 제주관광을 별안간 온
사람들이다.
전국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팀으로 온 사람들이 많고 궁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제주에 도착하여 저녁에 우리 부부가 외식을 하러 도두해안 회집으로 갔다.
스끼다시를 다 먹고 끝난 줄 알고 비싸기만 하고 이게 뭐야 하는데 본 회가 나온다.
회를 먹고 탕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제주시에서 서쪽 해안을 끼고 여행이 시작되었다.
귤 상황버섯 재배지를 보며 마라도 여객선을 탔다.
우리나라 최남단이라는 호재로 관광객을 모으는 마라도에 도착하여 “짜장면 시키신분” 으로
유명한 마라도의 짜장면을 먹었다.
거의 평지인 마라도를 한 시간이면 한바퀴 돌수가 있고 주민은 몇 명 안되도 학교 절 교회
천주교 등대 등 있을 건 다 있다.
관광객을 위한 식당이 의외로 많다.
송악산 둘레길을 걷고 다음날은 제주의 동쪽 해안으로 돌아 내륙으로 들어가서 잠시 말도
타보고 민속촌에서 굼뱅이도 비싼 가격에 샀다.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제주 여행을 하였다.
식사는 기본에 개인별로 추가하여 말고기도 먹어보고 전복죽에 회도 먹어보아 여행에 식사
는 만족 할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