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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학광장 원문보기 글쓴이: 초리 손월빈
잉태
빨간 도색으로 치장한 예쁘장한 승용차 차 한 대가 빌딩 숲이 우거진 도심을 무심히 지나쳐 서울이라고 하기엔 좀 거리를 둔 외곽의 신축 빌딩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상큼 내려서는 연지에게선 유혹의 덫이라도 놓으려는 양 달콤함을 산뜻 뿌리고 나온 농익은 과일 향이 은은하게 주위를 물들이고 있었다.
연지는 눈앞에 위용스럽게 버티고 있는 빌딩 일부가 자기소유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300평 규모의 5층 건물 지하에는 수영장과 헬스장이 갖춰져 있었고 1층엔 녹음실, 사무실, 촬영에 쓰일 각종 장비가 보관되어 풍족함을 과시했다. 2층은 식당과 편의점, 휴게실을 비롯해 원룸 형식의 직원 숙소가 마련되어 멀리까지 물건을 사러 나가지 않아도 될 만큼 불편하지 않았다. 3층은 총 5칸으로 큼직큼직 나누어져 안무와 밴드 연습실, 공개 오디션장으로 쓰였다. 마지막 4층은 측근들만이 드나드는 공간으로 각종 파티와 은밀한 거래들이 이루어지곤 하였다. 100평 남짓한 중앙부를 하늘로 시원하게 개방하여 아기자기한 정원이 꾸며져 있었고 그 주위로 서너 개의 이동식 원룸과 무대, 음향시설, 대량의 음식을 준비할 수 있는 부대시설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연지의 눈에 그곳은 하늘 아래 펼쳐진 파라다이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은 연지가 전략과 포섭술에 능한 병돈과 손을 잡으면서 단기간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그녀가 급히 자신의 안락한 숙소로 달려온 것도 깜짝 놀랄 이벤트를 선보이겠다는 병돈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나비처럼 날아들 연애기획사 사무실에선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이 신랄한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깃구깃 구겨진 와이셔츠에 초췌한 모습의 도천이 상반된 모습의 병돈에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처음에 예탁해 놓기로 약속했던 공탁금부터 돌려주십시오.”
그의 말에 병돈이 비웃음을 실실 흘려가며 여유자작 받아쳤다.
“공탁금? 꿈같은 소리 하고 있네. 지금까지 회사에서 당신한테 투자한 돈을 생각해 봐. 그나마 내가 소개해주는 지방 공연도 없으면 당신, 근근이 생활이나 할 수 있겠어?”
“나야말로 당신이 틀어쥔 그 독점권 때문에 옴짝달싹도 못하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인지 모르겠소.”
“이것 보세요. 김도천 씨, 당신이 지금 내 앞에서 독점권 운운할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계약 후 지금까지 히트 친 곡이 하나도 없잖아.”
그의 말에 극도로 흥분한 도천이 발끈해서 일어섰다.
“뭐요?”
병돈은 계속해서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며칠씩 틀어박혀서 야심작이라고 써가지고 오는 곡마다 걸핏하면 심의에 걸려 회사 망신이나 시키고 말이야.”
도천이 가만히 사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그와 함께한 지난 5년을 돌이켜 보건대 자신에게 남은 거라고는 달랑 몸뚱어리 하나뿐이었다. 카페를 운영하며 단란하기만 했던 가정도 그의 불안정한 생활로 파탄이 나버렸다. 자신의 노래를 듣고 천재성을 운운하던 사람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지금은 오로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쳐버린 철면피만이 코앞에 앉아 구린내를 풍풍 풍겨대며 속을 긁어대고 있었다. 도천은 그간에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문득 5년 전 그날이 생각났다. 도천이 운영하던 카페는 넓은 홀에 중앙은 원탁 테이블이 십여 개 자리한 그런대로 개성이 넘치는 곳이었다. 원탁테이블의 끝나는 지점에는 춤을 출 만한 공간과 라이브 무대가 아담하게 설치되어 즉흥적으로 분위기가 무르익곤 했었다. 홀 양쪽 벽면으론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을 설치해 은밀한 밀어의 공간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입구의 왼쪽엔 계산대와 일자로 연계된 바가 있었고 그 뒤쪽으로 들어가면 주방을 낀 살림집이 나왔다.
카페 내에는 언제나 도천이 작곡한 노래가 은은히 흘러나왔다. 그는 카페를 운영하는 것을 뺀 모든 시간을 작곡에 매달렸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음악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선뜻 카페를 차렸는지도 몰랐다. 그의 음악이 미치는 영향이란 것이 때론 사람을 흐느적거리게 했고 펑펑 울게도 하였으며 미친 광란의 몸짓을 선보이게도 하는 것이었다.
운명의 그날 카페에는 소나기를 퍼붓는 듯 짜릿하고 시원한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때 훤칠하고 수려한 외모의 사내가 약간 통통하고 요염한 갈색 머리의 여자를 동반하고 카페에 들어섰다. 도천이 보기에 사내는 젊은 시절로 되돌아온 제임스 본드를 연상케 할 정도로 완벽한 매력을 갖춘 듯했다. 사내의 옆에 찰싹 달라붙은 여자는 요즘 한창 뜨기 시작한 여가수 도화를 꼭 빼닮았다. 도천의 시선을 받으며 두 사람은 연인들이 즐겨 앉는 밀어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앉았다. 사내의 귀는 실내로 들어설 때부터 음악에 사로잡혀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여자는 그것을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참으로 요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색기가 똑똑 떨어지는 목소리로 주문했다.
“저, 여기 오랜 시간 대화를 주고받을만한 술 있나요? 썸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더 좋겠는데...”
그녀는 사내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손을 뻗어 매만지며 말하였다. 그러나 사내는 꿀처럼 달콤한 여자의 유혹에도 눈길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가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퉁기며 열심히 반주를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메뉴판을 들고 우두커니 서 있는 도천의 존재를 의식하고는 구원자를 만난 듯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 사장님, 이 노래 말인데요. 처음 듣는 곡인데 꽤 매력이 있네요. 판을 좀 구할 수 있을까요?”
곡 얘기가 나오자 사내의 심중을 눈치 챈 여자는 옆구리에 몸을 밀착시켜 비벼대며 아양을 떨었다.
“오빠는 어디 가나 한쪽 귀는 음악에 팔았다니까. 왜? 구미 당기는 곡이라도 있어?”
사내는 여전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도천에겐 여자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고 천박하게 느껴졌다. 도천은 진즉에 그가 음악에 심취해 있는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농익은 여자를 곁에 두고 손가락 장단을 맞출 리가 없지 않은가. 곡을 따라가는 손놀림으로 보아 오늘은 대화상대를 제대로 만난 듯싶었다.
“음악을 하시는 분들인가 보군요?”
“예, 그렇습니다만, 기존 음악의 식상함에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죠. 지금 곡처럼 쇼킹하고 강렬한 메타포가 될 수 있는 음악 말이에요.”
병돈의 찬사에 도천이 의욕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 음악이 마음에 드신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노래에는 좀 소질이 없어서 잘 소화해내지 못했는데....”
그의 말에 깜짝 놀란 병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감격의 악수를 청했다.
“아니, 그럼 사장님께서 직접 이 곡을 만드셨다는 말씀입니까? 굉장히 천재적이십니다. 마치 우주의 혜성들이 모두 돌진해오는 듯 웅장함과 폭발 직전의 흥분을 다스리는 것처럼 인내의 쓴잔을 권하다 끝내 터트려 버리는 쾌감과 방사 후의 허탈에 이르기까지 당신은 곡 하나로 제 마음을 쥐락펴락하며 끝내 이렇게 고백하게 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잘 좀 부탁합니다.”
뛸 듯이 기뻐하는 병돈의 행동에 그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의 모습을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번 먹어본 고기 맛에 푹 빠져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형국으로 달구어진 몸으로 모든 기가 몰렸으니 다른 것은 모두 심드렁해 보일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모든 관심사를 자신에게로 유도하기 바빴을 지도 몰랐다.
그들의 계약은 순조롭게 이루어졌으나 병돈이 데리고 있는 가수 중에는 그의 노래를 소화해낼 만한 사람이 없었다. 고요하다가도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헐떡이는 거친 숨소리조차도 음악으로 승화시켜야만 불러낼 수 있는 노래가 대부분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병돈 또한 여간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음악은 있으나 부를 사람이 없어 난감 지경에 빠진 꼴이라니. 임자만 나타나면 완전 대박감인데 말이야. 무턱대고 사람은 데려다 놓고, 얼굴 안서네. 얼굴이 안 서.’
노래의 임자가 나타나질 않자 그들은 직접 찾아 나서기로 의기투합했다. 전국의 오디션장을 수소문한 결과 그들은 이십 대 중반의 가수 지망생이었던 연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에게선 꾸밀 줄 모르는 수수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녀는 풋사과향이 감도는 검은 머릿결과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아담한 몸집의 소유자였다. 오디션을 보는 중간 중간 붉어진 뺨을 식히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귀염성까지 갖추었다.
그녀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시적인 목소리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병돈은 그녀의 흔들리는 음정에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도천은 달랐다. 그녀의 소리를 접한 눈과 귀는 번쩍 뜨였을 뿐만 아니라 가슴은 사정없이 쿵쾅거렸다. 긴장으로 말미암아 다소 떨리고 거친 음성이었지만 성량이 풍부하여 잘만 훈련하면 가요계의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는 병돈의 반대로 기획사의 투자를 받아낼 수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도천에게는 기회로 느껴졌다. 그의 음악을 향한 열정은 자신의 노래를 불러줄 가수를 직접 길러낼 기대감으로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병돈은 이미 도천의 눈빛에서 연지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그렇다면 자신이 애써 공들이지 않아도 도천이 그녀를 놓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이제 그는 심리전에서 획득할 승률을 기대하며 느긋이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열심히 만들어 보라고, 나중에 선택받는 자가 그대는 아닐지라도.’
그의 예상대로 도천은 연지에게 열성으로 매달렸다. 간혹 녹음실 근처를 서성이다 보면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다 못해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연지의 목소리는 호소력과 기품을 더해갔다. 도천과 병돈은 그녀에게 중독자처럼 빠져들었다.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 도천의 훈련은 마지막 도달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숭고해야 할 마지막 순간에 도천의 아내 은실은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이혼을 요구해왔다.
은실은 벌써 몇 달째 카페와 가정사는 나 몰라라 팽개쳐둔 채 여자에 푹 빠져 지내는 남편이 영 마땅치 않았다. 한편으론 부부로 십여 년 넘게 살아오면서 여자라곤 자기밖에 몰랐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은실은 어떻게든 말려볼 요량으로 억지를 부려 카페에 붙들어 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마음이 떠난 남자는 잡을 수가 없다더니 그녀가 다잡을수록 풀빵구리처럼 드나들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더 눈꼴시었다. 참다못한 은실은 죽도 밥도 안 되느니 차라리 놓아주고 자식이라도 제대로 키우자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그를 잡아 놓는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당신,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살겠다면 이혼해 줘요. 이제 아이들과 저도 기다리는 데 지쳤다고요.”
도천은 자신이 가정에 소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혼을 당할 만큼 잘못한 것 또한 없다고 생각했다.
“여보, 조금만 더 기다려줘. 이제 막바지에 와 있다고.”
“흥! 막바지 좋아하네. 어떤 년한테 다 빼다 받혀서 더 줄 것도 없겠지만 위자료로는 카페 하나면 충분해요. 더는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요.”
아내의 얼토당토않은 분노 앞에 도천은 진심으로 호소했다.
“여보, 제발 날 좀 이해해 줘. 내 노래를 불러줄 사람을 찾는 게 평생 꿈이었다고.”
그러나 돌아오는 아내의 반응 싸늘하기만 했다.
“흥! 그럼 그 꿈같은 여자랑 잘 해봐요. 난 내 직감을 믿어요.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기필코 당신과 이혼을 해야겠어요.”
“참 더러운 직감이군. 내 꼭 성공해서 보여주리다.”
이혼을 받아들여야 하는 도천의 얼굴로 우울의 그림자 한 자락이 드리워졌다. 그렇다고 듣는 사람마다 미치고 환장할 연지의 재능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쓸쓸히 고독을 씹으며 한 평 남짓한 고시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쓸쓸한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돌아서는 등을 본 은실도 쓸쓸했고 아버지의 부재를 알아갈 아이들도 쓸쓸했으며 진실을 외면한 세상도 쓸쓸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완벽에 가까운 연지가 있었다. 이제 그녀가 자신의 노래만 불러준다면 만인은 그들을 우러를 것이고 형편도 금방 좋아져 가정도 되찾을 것이라 여기며 감히 일취월장을 꿈꾸어 보는 것이었다.
“연지야, 이제 세상에 나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처음엔 좀 힘들더라도 탄탄한 실력을 쌓았으니 너라면 금방 일어설 수 있을 거야.”
도천의 말에 연지는 더럭 겁부터 났다.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뒷배가 허술하면 삼류로 끝나는 것이 그녀가 터득한 이곳의 생리였다. 지도를 받는 동안 그가 유부남인 줄 알면서도 다가서는 맘을 어쩌지 못해 홀로 가슴앓이도 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무슨 조화 속인지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던 마음은 그의 이혼과 함께 차분히 가라앉아버렸다. 이제 연지에겐 오로지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버릴 일류를 향한 꿈만이 존재했다.
핏덩이 때부터 자신과 함께 할머니를 짓눌러 온 부모의 빚,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빚을 얻어 작은 가게를 시작하려 했으나 사기를 당해 고스란히 빚만 떠안게 되었다고 했다. 빚에 쫓겨 병원도 드나들 수 없었고 그저 할머니 손에 의지해 끼니만 연명하다 자신을 낳고는 그날로 할머니 손에 떠밀려 집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 뒤로 종종 무소식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연지의 생각엔 빚 독촉을 피하려는 할머니의 처세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커갈수록 계단처럼 높이 쌓여만 갈 것 같던 빚이 차츰 숨통을 풀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 앞에 그들이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필시 그럴만한 사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무작정 도천을 의지하며 피를 토하고 살이 깎이는 혹독한 훈련을 참아낸 연지였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억울한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님 사정도 그렇고, 아무도 선뜻 투자를 하려고 들지 않잖아요. 이 난관을 뚫고 나갈 방법은 없을까요?”
도천의 궁핍한 생활을 잘 알고 있던 연지는 입버릇처럼 내세우던 영원한 의리를 저버리는 것만이 자신이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의식하며 작정하고 물었다. 도천은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병돈에게 연지를 선보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서기도 전에 벌써 연지와 병돈 사이에는 물밑 교류가 이루어진 상태였다.
‘이제 꿈을 향해 앞만 보고 가는 거야. 어차피 선생님도 같은 기획사 소속이잖아. 내가 잘 되면 다 잘되는 거지. 성공하고 나서 은혜를 갚으면 되는 거야.’
도천의 맹목적인 노력으로 풍부한 음색을 고루 갖춘 그녀는 병돈이 어떠한 곡을 들고 와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그렇게 연지를 독차지하려던 병돈의 계략은 기가 막히게 먹혀들었다.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 연지는 해성처럼 급격히 떠올랐다. 그녀도 드디어 핑크빛 환상의 날갯짓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별들의 공간에 들어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가 부른 노래는 전부 도천의 곡이 아니었다. 그것 또한 도천을 제거하려는 병돈의 술책이었으니 그가 궁지에 몰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을 밟듯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 봇물이 터지는 날이면 앞산도 울고 뒷산도 울고 그녀와 연관된 모든 것이 홍수가 휩쓸고 간 마을과 진배없이 침울한 분위기에 잠길 것이었다. 선조들 말씀에 산과 사내의 눈물은 태산 같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했으니 병돈은 그도 그렇게 무너져 내려주길 바랬다.
“그의 재능을 버리긴 아깝지만 두 사람 다 키웠다간 내가 죽게 되는 게 이곳의 생리지. 한곳밖에 못 보는 너는 모든 걸 잃고 더 큰 시야를 가진 나는 모든 걸 획득하는 이것이 바로 게임의 원리이고 성공의 지름길이야.”
기획사의 후광으로 연지는 부르는 곡마다 히트 행진을 계속해 나갔다. 그녀가 무르익어 갈수록 도천의 행색은 점점 초라하게 변모했다. 꿈같은 상황이 계속되자 그녀는 스승인 도천을 마주하는 것이 점점 껄끄럽게 느껴졌다.
‘어차피 그의 노래로 히트치는 건 아니잖아. 괜히 친한 척하다가 사장님 눈 밖에라도 나면 나도 끝장이야.’
그렇게 도천을 회피하며 멀어져갔던 그녀가 하필이면 종지부를 찍는 최악의 순간에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는 방송을 막 마친 듯 속옷이 보일 듯 말듯 하늘거리는 미니스커트에 어깨를 훤히 드러낸 도발적인 차림을 하고 있었다. 도천은 그런 연지의 모습을 망연자실 넋 놓고 바라보았다.
‘연지가 저렇게까지 변하다니.....’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도천이 연지를 훈련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변하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했었다. 도천은 맑고 순수하기만 한 연지에게서 언뜻언뜻 여자 냄새가 풍길 때마다 들고 일어서는 본능을 잠재우려 얼마나 짐승 같은 자신을 타박했던가. 그 시절을 돌이켜보니 지켜주려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지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차라리 사랑을 취했더라면 또 다른 결과를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그의 얼굴에 슬그머니 자조의 웃음이 밀고 나왔다.
연지가 변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으며 도천의 옆을 지나친 그녀가 누가 보든 말든 두 팔을 벌려 환영하는 병돈의 무릎에 사뿐히 걸터앉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도천의 눈에만 그리 보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병돈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언뜻 스쳐 지난 도천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저 가벼운 포옹으로 인사를 하려던 의도와는 다르게 병돈은 떨어지려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를 너 보란 듯이 두 팔로 휘감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도천의 정면에 걸린 대형 거울엔 병돈의 이기적인 욕구에 휩싸인 표정과 손놀림이 조금은 과장되게 비쳐졌다.
‘깨어질까 두려워 손조차 댈 수 없었던 연지, 이제 그녀는 어디에도 없구나. 볼썽사나운 문어새끼한테 걸려들어 옴짝달싹 못하고 날카로운 촉수에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것도 모르고 놀아나다니... 환경에 따라 양심도 변한다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도천은 그녀가 타락의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을 날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조차 구차하게 느껴졌다. 미세하게 떨리는 연지의 목소리가 또다시 그의 귓전을 때려왔다.
“오빠 나 왜 불렀어?”
“응, 너 오늘 스케줄 비웠지? 저녁이나 같이하면서 다음 일정 잡도록 하자.”
병돈의 말에 연지의 얼굴엔 종전의 떨림은 사라지고 대번에 화색이 돌며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좋은 곡 나온 거 있구나. 그러면 그렇지? 호호호, 이번 뮤직비디오는 어디로 찍으러 갈까? 하와이? 괌? 그쪽 바다가 굉장히 아름답다고 하던데....”
연지는 또 다른 세계로의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지만 그들의 행태를 지켜보던 도천은 비위가 상하다 못해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그것은 세상을 향한 환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장님, 저와 하던 얘기마저 끝내시죠. 이제는 제가 이곳에 몸담고 싶지 않군요. 처음에 맺었던 계약대로 공탁금 오천만 원 돌려주십시오.”
막 꿈의 나래를 펼치려던 연지는 곧 터져버릴 것 같은 분노의 목소리를 확인하곤 화들짝 놀랐다.
“허, 오천만 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계약서를 똑바로 살펴보긴 한 건가? 지금까지 자네가 까먹은 돈이 얼만 줄이나 알아? 도리어 내가 배상을 청구할 판이라고.”
병돈은 그런 얼토당토않은 수작은 애저녁에 집어치우라는 듯 싸늘하게 내뱉으며 탁자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무모하게 달려드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일단 목표물을 입에 넣었다 하면 무조건 삼키고야 마는 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어, 난데 지금 은행에 가서 도천씨 이름으로 된 거 몽땅 털어가지고 들어와. 그래 한 푼도 남김없이.”
차갑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병돈은 이제 됐느냐는 식으로 도천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다시 연지의 몸을 제멋대로 주무르며 그를 자극하는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다.
‘흥, 재주부린 놈 따로 있고 돈 버는 놈 따로 있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일세. 허, 불쌍하고도 불쌍한 인간이여. 너는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겠지만 내게는 한낱 슬픈 몸짓 지나지 않으니 훗날 네가 치루 게 될 통한의 고통에 살마저 떨려온다. 연지야, 정녕 그 좋은 목소리로도 수작을 부리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웠단 말이냐?’
도천의 안쓰럽게 바라보는 체념의 눈빛은 직선으로 날아가 연지에게 붙박였다. 그의 눈빛과 마주친 연지의 얼굴은 바닥에 떨어져 당혹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병돈과 자신이 제아무리 스스럼없는 사이로 발전했어도 도천 앞에서 가슴을 농락하는 행위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 연지는 오늘따라 발정 난 짐승을 방불케 하는 병돈의 행동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교미 붙던 개도 인기척엔 몸을 사리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도대체 사장이란 인간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곤 눈곱만치도 없잖아.’
어찌 처신을 해야 할지 몰라 몸 둘 바를 모르던 연지는 슬며시 눈을 흘기며 병돈의 가슴을 밀어냈다. 이에 병돈이 낯짝도 두껍게 두 손을 펼쳐들며 뭐 어떠냐는 식의 몸짓을 취해 보였다.
‘개새끼!’
속에선 욕지거리가 들쑤시며 튀어 올랐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연지의 입에서는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을 뿐이었다.
“오빠, 나 잠깐 밖에 나가 있을게.”
“응, 그래 나도 금방 끝내고 나갈 테니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연지는 오던 모양 그대로 엉덩이를 살랑이며 밖으로 나갔다. 종잇장같이 가련한 연지가 나간 문으로 사약을 대령하는 집행관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여직원이 은행명이 또렷이 박힌 봉투를 들고 들어섰다.
“저어, 사장님 이게 전부인데요.”
“그래 알았으니 나가봐. 그리고 연지 마실 것 챙기는 거 잊지 마. 귀하게 대하란 말이야.”
병돈은 직원에게서 봉투를 받아든 즉시 테이블 위로 툭 던져놓으며 쓴소리를 내뱉었다.
“이제 정신 좀 차리고 노래다운 노래 좀 만들어 봐. 현실을 직시하란 말이야. 당신 노래는 음악시장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어. 그걸 알아야 돼. 아무도 소화해 낼 수 없는 음악은 쓰레기에 불과해. 이건 예탁금에서 오 년 동안 당신 치다꺼리하고 남은 돈이야. 그동안 회사가 입은 손해를 생각하면 한 푼도 내주고 싶지 않지만 도의상 주는 거니까 받아둬. 세상은 당신 생각처럼 그리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야. 알아들었으면 이제 얼마든지 가보라고. 독점권이니 뭐니 운운하지 말고 자유롭게 훨훨, 나도 바쁜 몸이라 먼저 일어나야겠어.”
병돈은 볼 장 다 봤으니 이제 좀 꺼져 주시죠! 라는 식으로 시원스레 휘파람을 불며 자리를 떠났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거머리처럼 끈질기게 달라붙는 것이 사람의 속성이었다. 멀어져가는 뒤통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도천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더러운 놈의 세상, 저놈이 날 맘껏 농락했군그래. 미쳤던 건 나뿐이었단 말이지?”
도천은 정면에서 자신의 치욕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던 거울을 쏘아보며 중얼대더니 탁자 위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를 힘껏 던졌다.
“쾅! 와장창.”
대형 거울이 깨지면서 소음이 발생하자 여직원은 그리 예사로운 일도 아니라는 듯 청소도구를 들고 나타나 투덜거렸다.
“으이고, 지겨워!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왜 굳이 이곳만을 고집해 거울을 설치하는지 저 자식의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전의를 상실한 도천은 그녀의 말을 되새기다 쓴웃음을 짓고는 봉투를 집어 아무렇게나 바지춤에 구겨 넣었다. 비탄과 절망의 심정으로 문을 나서는 패배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여직원이 안 됐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요. 구차하지만 어쩌겠어요. 그거라도 챙겨야지.”
맥 빠진 걸음걸이로 빌딩을 빠져나온 도천의 발길은 어느덧 전처가 운영하는 카페로 들어섰다. 그나마 자신이 정신 못 차리고 나댈 때 아이들과 살 궁리를 해놓은 아내가 새삼 기특하게 여겨졌다.
“까르르...,”
“하하..., 김 마담이 정말 그랬단 말이야.”
어디선가 아내와 사내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천은 손님과 스스럼없이 농을 주고받는 아내의 밝은 웃음소리를 듣자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아내의 웃음소리를 들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 웃음마저 악다구니로 바꾸어 놓을 자격이 자신에겐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구겨져 있던 봉투를 꺼내 황급히 적어 넣었다.
‘당신은 나 없이도 행복한 웃음을 웃을 수 있구나. 나 없이도... 그 밝은 웃음으로 아이들도 잘 길러주길 바란다. 당신의 선택이 항상 최선이기를 바라는 바보 같던 당신의 남자, 도천.’
펜을 내려놓은 그는 조심스럽게 금고번호를 돌렸다. 다행히 아내는 아직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은 상태였다. 그곳에 봉투를 넣은 그는 만 원권 몇 장을 집히는 대로 주머니에 구겨 넣고 쫓기는 사람처럼 카페를 빠져나왔다. 도천은 거센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의 지난 행적을 말끔히 쓸어가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작정 열차에 올랐다.
‘그래 바람이 휘몰아치는 성난 파도를 마지막으로 그려내고 삶을 마감하리라. 누군가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불후의 명작으로 남을 만큼 내 모든 것을 던져 단단히 새기고 나는 기꺼이 바다에 묻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