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계생과 용차를 마시다 - 인문학을 훔쳐보다.
사흘 전에 계생과 함께 암자 주위의 돌보지 않는 차나무의 찻잎을 땄다.
예전에 명에 동지사로 연경에 갔다가 남경까지 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마신 맛과 향이 너무 좋아
제다법을 배워 온 용차를 이번에 계향과 함께 만들었다. 폭포 위 개울에 걸쳐있는 너럭바위에 찻잎을 펼쳐
시들리고 채반에 비비고 따끈한 방안에서 말리고 다시 비비기를 반복하다
둥근 대나무 석작에 차를 담아 숯불에 건조하였다.
계생은 용차 두 잔에 벌써 다선삼매에 들었는지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숨을 고른다.
손수 만든 차의 맛이 너무 좋아 변산의 차가 해동 제일차라 하고 싶지만 나를 자랑하는 것 같고
스님들이 만들어 공양하고 보시하는 노고를 생각하여 순천차에 이어 버금차라 적는다.
부안의 남서쪽으로 변산이 있고 산의 남쪽으로 우반동이란 골짜기가 있다.
왕년에 사명을 받아 호남을 왕래할 적에 우반의 경치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는데 틈을 내지 못해 유람하지 못했다.
나는 본시 상자평의 뜻을 갖고 있는데 매양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 상자평 본명은 상장 후한 인으로 은거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음 자녀를 모두 결혼시킨 후
오악에 들어 간 후 행적이 묘연해 졌다는 고사가 있다.
공주목사를 파직 당한 후 남쪽으로 돌아가 우반에 집을 짓고 살 결심을 하였다.
부안의 진사 김 등이 부친이 지어 놓은 암자가 있는데 이곳을 수리하여 머물기를 간청하여
고달부와 이 씨 형제와 함께 말을 타고 그 곳을 가 보았다.
해변을 따라 좁은 길이 나있고 따라 골짜기에 들어서니 시내의 물소리가 옥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수풀사이를 흘러내린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를 못가 산이 열리고 육지가 펼쳐졌다.
좌우로 가파른 봉우리는 봉황과 난새가 나는 듯 높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동쪽 산기슭은 늙은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세 사람과 함께 거처할 곳으로 가니 동서로 언덕 셋이 있고 가운데가 반반하게 감아 돌며
남쪽은 드넓은 대해가 바라보이는데 금수도가 바다 가운데 있다.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가 있는데 승려 몇 명이 수도하고 있다.
동쪽 계곡을 거슬러 오래된 당산나무를 지나 정사암이 있다. 바위 언덕에 지어 놓았는데
앞을 굽어보면 맑은 못이 보이고 푸른 절벽에 날리는 폭포는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다.
가을꽃이 피어나고 붉은 단풍도 절벽에 걸려 반쯤 물들어
석양 산봉우리와 함께 거꾸로 물에 비추니 시와 노래가 절로 나온다.
마치 미혹한 세상을 벗어나 안기선문과 함께 삼도를 거니는 듯하다.
주) 안기 안기생 포박자라 하며 진시황으로 하여 동남동녀 3000명을 동해의 봉래산으로 불로초를 찾아 나서게 만들었던 신선이다.
다행이 건강할 때 관직에서 물러나 오랜 계획을 이루고 은둔처까지 마련하여 몸이 편케 되었으니
하늘의 보살핌 역시 풍성하다 여긴다.
관직이 어찌 물건이란 말인가 사람보다 우선하여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내버려 두고 의주까지 도망을 쳤던 조정과 사대부가 자신들의 과오를 여자들에게 삼종지도와
당나라의 낡은 법을 불러낸 칠거지악 등을 강요하며 무너진 왕권과 남존여비 사상을 세우기에
혈안이 된 유생들의 광분에 맞선 교산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고을 원 덕현 심 사또가 암자가 피폐하고 돌보는 이가 없음에 승려 세 사람을 모집하여 쌀과 소금을 주고
목재를 베어 수리하게 하고 관역을 바꿔 거기에 머물면서 지킬 책무를 주었다. 암자는 이로써 복구되어 기거하게 되었다.
회상을 마치자 계생도 삼매에서 빠져 나오며 빙긋 웃는다.
오래전 전운사로 호남을 바삐 돌아다닐 때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누다
동진강 나루를 건널 일이 있으면 갯벌 밭을 기어가라 했었다.
몇 년 후 여름날 김제 군수 부친의 칠순잔치에 소집되어 갈 적에 동기만을 데리고 거문고를 안기고 걸어 길을 나서
점심 무렵에 옷은 흙강아지 머리는 진흙에 산발하고 얼굴은 땀범벅에 시궁창냄새를 풍기며
신발도 한 짝이 달아난 거지꼴로 잔치 마당에 들어서자 내심 자기 부친의 수청 기생으로 계생을 낙점했던 군수는
술잔을 내동댕이치며 쫒아내서 무난하게 다시 부안으로 돌아 온 일화를 얘기 해 준다.
이 후 계생의 용모파기는 남자 몸통에 눈은 째지고 코는 주먹코에 광대가 올랐다고 글을 남기고 소문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