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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3일 비대면 강의 자료
[50] 無厭足王大光王(무염족왕대광왕)
18) 多羅幢城(다라당성) 無厭足王(무염족왕)
짐짓 살벌한 방편으로 환술같이 잘 교화합니다.
무염족왕은 손과 발을 끊기도 하고 귀와 코를 베기도 하고,
눈을 뽑고 머리도 자르며, 살가죽을 벗기고 몸을 오리며,
끓는 물에 삶고 타는 불에 지지며, 높은 산에 끌고 올라가서 떨어뜨리기도 하여서
고통이 한량이 없으니 부르짖고 통곡하는 형상이 衆合大地獄(중합대지옥)과 같았다.
선재동자가 무염족왕을 보고는,
‘나는 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려고 보살의 행을 구하고 보살의 도를 닦는데
이 왕이 선한 법은 하나도 없고,
‘저 악독한 사람한테 뭘 배우겠노?’
큰 죄업을 지으며, 중생을 핍박하여 생명을 빼앗으면서도 장래의 길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떻게 여기서 법을 구하며 대비심을 내어 중생을 구호하겠는가?’ 라고 의심하였다.
이럴 때 온 하늘도 찬탄하고, 귀신도 찬탄하고,
사람도 찬탄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옵니다.
선재야 그런 소리하지 마라. 이 사람 진짜 선지식이다.
중생들은 이렇게 보여줘야 믿기에
목 자르고 살가죽을 벗기는 것은 피치 못해서 하는 극약 처방입니다.
선재가 왕에게 보살도를 물으니
‘나는 보살의 환(幻)과 같은 해탈을 얻었으나
나의 국토에는 중생들이 10악을 많이 지으므로 다른 방편으로는 악업을 멈출 수가 없다.’
저 남방 묘광성 대광왕을 찾아가라 합니다.
☛ 18) 무염족왕은 제7 무착행이다.
19) 묘광성(妙光城) 대광왕
선재가 일심으로 무염족왕의 환지(幻智) 법문을 생각하며 묘광성에 들어가니
묘광왕은 칠보궁전에서 온갖 물건을 가져다 보시 법회를 베풀고 있었다.
대왕이 선재를 보고 말했다.
‘나는 대자당행(大慈幢行)을 닦아서 이 법으로 왕이 되어
중생에게 이익 안락을 얻었다. 하고,
대광삼매에 들어 갖가지 신통을 보여준 뒤
’진짜 삼매의 굴속에서 자비의 구름을 일으키는 것을 보려면
남방 안주성 부동우바이를 찾아가라 합니다.
☛ 19) 대광왕은 제8 난득행이다.
妙光城(묘광성) 大光王(대광왕)은
인정스럽고 예의 바르게 원하는 것들을 나눠주고,
무염족왕은 짐짓 살벌한 방편으로 환술같이 잘 교화합니다.
그러니까 일부러 살벌한 방편을 짓든지,
인자한 방편을 짓든지 거기에 속지 말고,
거기의 뜻만 취해서 자기 갈 길로 가면 됩니다.
선지식을 만났을 때 중요한 것은 선지식에게 있는 것도 있지만,
나의 중심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51] 不動優婆徧行外(부동우바변행외)
부동우바이와 변행외도를 친견했네
20) 安住王都(안주왕도) 不動優婆夷(부동우바이)
미워하고 사랑하는 생각 없이 정법을 배우는 부동우바이는
童女(동녀)로 집에서 부모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량없는 그의 친족들에게
묘한 법을 말한다는 말을 듣고,
부동우바이의 집에 가서 집 안으로 들어서니,
그 집에서는 금빛 광명이 두루 비쳤다.
이 광명을 받는 이는 몸과 뜻이 청량하고 향긋해진다.
선재동자는 광명이 몸에 비치매 곧 500가지의 삼매의 문을 얻었다.
산승이 초발심 시간에 했는데 반복합니다.
見我形者得解脫(견아형자득해탈)
聞我名者免三途(문아명자면삼도)
도로에서 운전하다 상대가 화를 내면
‘나를 바라보고 해탈을 얻으시라’ 하고요.
‘이 소리를 들으면 삼악도를 면하느니라.’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금빛 광명이 나오고,
맞장구를 치면 똥 광명이 나오고 구린내가 납니다.
앞에서 무염족왕과 대광왕이나 부동 우바이는
“사랑도 놓고 미움도 놓고”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하라.
“사랑도 놓고 미움도 놓고” 원조는 육조 혜는스님입니다.
☛ 20) 不動優婆夷(부동우바이) 제9 선법행이다.
21) 無量都薩羅城(무량도살라성) 遍行外道(변행외도)
삿된 외도의 고집과 견해를 잘 조복한다.
외도(外道)는 범어 ‘트르타카(tithaka)’로 이교도를 말한다.
후에는 사법(邪法)이라 칭하고, 불교는 수론(數論), 요가(瑜伽), 승론(勝論), 정리(正理),
성론(聲論), 베단다(吠檀多)를 6사외도라 한다.
선재가 도상라성에 이르니 황혼이 되어 점포와 촌락이 모두 문을 닫았다.
선득산(善得山)에서 밝은 빛이 나오는 것을 보고 찾아가 변행외도를 만나니
일만 범천왕이 법문을 듣고 있었다.
변행외도가 말했다.
‘나는 일체처에 이르는 보살행에 안주하여 널리 세간을 관찰하는 삼매를 얻어
무의(無依), 무작(無作)한 신통력을 얻어 중생을 교화하고 있으나
저 남쪽 광대국에 가서 우바라화 장자를 만나라 하였다.’
☛ 21) 변행외도는 제10 진실행이다.
[52] 優鉢羅華長者人(우바라화장자인)
22) 廣大國(광대국) 優鉢羅華長者人(우발라화장자)
육향장자 무아의 지혜로 향을 만들어 악업을 순화합니다.
육향이라고 하는 것은 향을 만드는 장자다.
그 사람 이름은 鉢鉢羅華(우발라화)로 靑蓮花(청연화)입니다.
황연화. 노란 연꽃은 구물두화. 흰 연꽃 백련은 분다리카.
홍련은 파두매화. 옴마니반메훔 할 때
반메훔 = 파드메. 그것이 홍련입니다.
우발라화장자가 말하기를
나는 모든 향을 잘 분별하여 알며,
모든 향을 조화하여 만드는 법을 아는데
병을 다스리는 향. 나쁜 짓을 끊는 향. 환희심을 내게 하는 향.
번뇌를 늘게 하는 향. 줄게 하는 향. 번뇌를 없애는 향.
유위법에 애착을 내게 하는 향.
유위법에 싫은 생각을 내게 하는 향.
모든 교만과 방일을 버리는 향.
마음을 내어 염불하는 향, 법문을 이해하는 향.
성인이 받아쓰는 향.
어떤 향은 몸에 바르면 불구덩이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향중에서 가장 좋은 향이 선타바향 이라고 있습니다.
도솔천의 先陀婆香(선타바향)은 일생보처 보살이 앉은 앞에서 한 개만 피우면
큰 향 구름을 일으켜서 법계를 뒤덮고 모든 공양거리를 비 내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 공양합니다.
我今持此一炷香(아금지차일주향) 내가 이 한 개피의 향을 사루어서
變成無盡香雲蓋(변성무진향운개) 변성(變成) = 변해서 이루어져라.
무진향운개(無盡香雲蓋) = 다함없는 향 구름이 일어나라.
奉獻三寶前(봉헌삼보전) = 삼보에게 받들어 올립니다.
모든 공양거리를 쏟아내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에게 공양하며
善變化天(선변화천) 化樂天(화락천)의 奪意香(탈의향)은
한 개를 피우면 이레 동안에 모든 장엄거리를 비 내리고요.
영산화상에 피웠던 향 한 개가 지금 구룡사까지 와있습니다.
한 사람의 한 생각ㆍ한 생각 향이 분명히 와있거든요.
500아라한들이 이제까지 전하고 전한 얘기들이 바로 이것입니다.
☛ 22) 우발라화장자는 십회향 제1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이다.
[53] 婆施羅船無上勝(바시라선무상승)
바시라선사와 무상승장자
23) 樓閣大城(누각대성) 婆施羅船師(바시라선사)
바다의 험한 뱃길을 잘 알아서 편히 인도합니다.
선사(船師)는 배에 도통한 선생님입니다.
우리는 뱃사공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지혜의 바다에서 보배의 섬으로 모든 중생을 실어 나르는 선생님입니다.
이 뱃사공은 바다의 편한 길을 다 알아서
실제는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서,
지혜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믿음으로 들어가서
부처님의 바다는 방편과 지혜로 건너간다.
모든 애욕의 바다를 말리고
지혜의 광명으로 삼세 바다를 비추며
모든 중생의 고통의 바다를 끝나게 하며,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라고 합니다.
진리는 참 쉽고 그냥 그대로입니다.
바다에 들어가면 미시시피강도 바다요,
한강도 바다요, 낙동강도 바다요, 두만강도 바다다.
모든 강은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강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우리도 지금 생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멸이 끝나고 나서 적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생멸의 내 존재는 없어지고
그대로 부처님이라는 바다에 하나가 됩니다.
願共法界諸衆生(원공법계제중생)
同入彌陀大願海(동입미타대원해)
共駕白牛遊直道(공가백우유직도)하노라.
원컨대는,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원의 바다에 함께 들어가서
함께 흰 소, 바라밀을 타고 直道 = 정직한 길에 노닐어보자.
☛ 바시라선사는 10회향중 제2 불괴회향이다.
24) 可樂城(가락성) 24 無上勝長者(무상승장자)
세상 잡된 일을 끊고 보살행의 신통력을 폄.
선재가 가락성 대장엄당 무림에서 이르러
백천거사들과 갖가지 인간사를 처단하고 있는 무상승장자를 만나니
‘나는 일체처에 보살행문을 배워서 신통력으로 중생의 비법과 논쟁, 전투, 원한을
쉬게 하는 재주는 있으나 그 이상은 모르니 수나국 사자빈신 비구니를 만나라 하였다.’
☛ 무상승장자는 10회향중 제3 등일체제불회향이다.
[54] 獅子嚬伸婆須密(사자빈신바수밀)
사자빈신비구니와 바수밀다녀
25) 수나국 가릉가림성 師子頻申比丘尼(사자빈신비구니)
여래와 중생에 대해서 분별심을 여의었다.
잘 난사람ㆍ못 난사람 가리지 않겠지요.
이때 선재동자는 일광 동산의 갖가지 장엄을 두루 살펴보았다.
냇물과 샘과 못은 모두 칠보로 장엄하였고,
흑전단 앙금이 가운데 쌓이고, 상품 금모래가 밑에 깔렸으며,
팔공덕수가 가득 찼다.
그 위에 우발라꽃과 파드메꽃과 구물두꽃과 분다리꽃이 덮였다.
우발라 = 청련. 파드메 = 홍련. 구물두 = 황련. 분다리 꽃 = 백련.
빨간 색ㆍ파란 색ㆍ노란 색은 “3원색”입니다.
칼라 사진이 이 3가지 색으로 강도를 조절해서 만들어집니다.
흑백사진은 명암의 2가지로 만드는데,
흑백의 논리 보다는 3이 좋습니다.
나와 너와 우리가 함께하는
자리 나도 좋고, 이타 너도 좋고, 우리 다함께 좋은 거...
☛ 사빈신비구니는 10회향중 제4 지일체처회향이다.
26) 險難國(험난국) 寶莊嚴城(보장엄성) 婆須蜜多(바수밀다녀)
쳐다만 봐도 탐욕이 사라지는 해탈을 보임
그 집을 살펴보니 크고 훌륭하여,
보배 담과 보배나무와 보배 해자가 있었다.
해자는 도적이 못 오게 성밖에 파놓은 물구덩이.
해자가 각각 열 겹으로 둘러있고,
그 해자에는 향수가 가득하고 금모래가 깔렸으며,
하늘의 보배 꽃과 우발라 꽃과 파드메 꽃과 구물두 꽃과
분다리 꽃들이 물 위에 가득 피었다.
바수밀다의 용모는 단정하고 모습이 원만하며 살갗은 금빛이요,
눈매와 머리카락이 검푸르러 길지도 짧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아서 욕계 사람이나 천상으로서는 비길 수 없었다.
음성이 미묘하여 범천보다도 뛰어나며,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말을 모두 구족하여 알지 못함이 없었으며,
글자와 문장을 잘 알고 언론이 능란하며,
환술과 같은 지혜를 얻어 방편의 문에 들어갔고,
보배영락과 장엄거리로 몸을 단정하고
여의주로 관을 만들어 머리에 썼다.
영락없는 기생입니다.
그때 바수밀다 여인의 몸에서 광대한 광명을 놓아,
또한 애욕에 얽매여 나에게 오거든,
내가 그에게 법을 말하면, 그가 법을 듣고는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집착 없는 경계의 삼매를 얻었다.
잠깐만 나를 보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환희삼매를 얻으며,
잠깐만 나와 말하여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걸림 없는 음성삼매를 얻으며,
잠깐만 내 손목을 잡으면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두루 가는 삼매를 얻으며,
내 자리에 잠깐만 올라와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해탈한 광명삼매를 얻으며,
잠깐만 나를 살펴보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고요하게 장엄한 삼매를 얻으며,
잠깐만 나의 활개 뻗는 것을 보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외도를 굴복시키는 삼매를 얻으며,
내가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기만 하여도 윙크만 보아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의 부처 경계에 광명삼매를 얻으며,
나를 끌어안으면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거두어 주고 항상 떠나지 않는 삼매를 얻으며,
나의 입술을 한 번만 맞추면, 키스만 해도 탐욕이 없어지고
보살이 모든 중생의 복덕을 늘게 하는 삼매를 얻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바수밀다녀에게 가까이 하는 중생들은
모두 탐욕을 여의는 경계에 머물러
보살의 온갖 지혜가 앞에 나타나는
걸림 없는 해탈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 바수밀다녀는 10회향중 제5 무진공덕장회향이다.
[55] 鞞瑟胝羅居士人(비슬지라거사인)
27) 善度城(선도성) 鞞瑟詆羅居士(비슬지라거사)
혼자만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을 제도한다.
비슬지라 거사는 매일 전단 자리에 앉아 부처님 탑에 공양을 하고 있다가 선재를 보고,
‘나는 열반에 들지 않는 해탈문을 얻어서 제불 성현들의 열반 경계를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불법 중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에 대해서는 보타락가산 관자재보살이
더 잘 알고 계시니 찾아가라.’ 하면서
다음의 노래를 불렀다.
바다 높은 성에 성현이 많으시니
청정한 보배산에 갖가지 꽃도 많네
깊은 못 맑은 샘 중생을 이익하니
그 방편 어서 배워 공덕행 이룩하라.
나 혼자만 먹고 살지 않고 모든 중생을 제도합니다.
☛ 비실지라 거사는 10회향 중 제6 일체평등선근 회향이다.
[56] 觀自在尊與正趣(관자재존여정취)
관자재보살과 정취보살
28) 보타낙가산 관자재보살
드디어 스물여덟 번째 보타낙가산의 관자재보살입니다.
一葉紅蓮在海中(일엽홍련재해중)
碧波深處現神通(벽파심처현신통)
昨夜寶陀觀自在(작야보타관자재)
今日降赴道場中(금일강부도량중)
한 송이 홍련이 저 바다 가운데 떠 있는데
푸른 파도 위나 바닷속 깊은 곳이나 신통으로 나투신다.
관음보살이 어젯밤에는 보타낙가산에 계셨는데,
오늘은 이 도량에 오셨도다.
일념에 모든 삼매를 알며 대비심을 행하는 것이 관자재보살이라.
관자재보살과 정취보살의 등장은 바수밀다 만나고 잘못하면
세속의 쾌락으로 빠질 것 같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서 제대로 보살행을 행하라고 등장합니다.
☛ 관자재보살은 10회향 중 제7 등수순일체중생 회향이다.
29) 東方(동방) 正趣菩薩(정취보살)
법과 재물을 널리 베풀어 속히 건지고 조복함
선재가 정취보살 앞에 절하니
‘나는 동방묘장세계보승생불의 법문을 듣고 보문속질행(普門速疾行) 해탈을 얻었으나
보살의 지혜 경계는 다 알 수 없으니 그 공덕을 알려면 남방 타자발지성중에 가서
대천신을 만나라.’하였다.
☛ 정취보살은 10회향 중 제8 진여상 회향이다.
[57] 大天安住主地神(대천안주주지신)
대천신과 안주주지신을 친견합니다.
30) 墮羅鉢底城(타라발저성) 大天神(대천신)
선재가 대천신께 보살행을 물으니
대천신이 사해의 물을 움켜쥐었다가 자기의 얼굴을 씻고
금색 꽃으로 선재에게 뿌리며 말하기를
‘나는 운망해탈(雲網解脫)을 얻어 갖가지 장엄구로 중생에게 보시하는 재주는 있어도
중생의 번뇌의 불을 끄고 애욕의 물을 말리며 견취당(見取幢)을 꺾고 아견산(我見山)을
파하는 것은 마가다국 보리장중 안주신에게 가서 물으라고.’ 하였다.
대천신은 산더미 같은 칠보와 꽃과 향을 구름처럼 보시합니다.
☛ 대천신은 10회향 중 제9 무박무착해탈 회향이다.
31) 摩竭提國(마갈제국) 菩提場(보리장) 安住主地神(안주주지신)
주지신은 모든 아만을 깨뜨리는 지혜를 얻으신 분입니다.
선재가 주지신에게 가니 벽안지신과 같이 있다가 발로 땅을 누르니
백천억아승지 보살의 아승지 보장이 나타났다.
‘이는 내가 과거에 선근을 심은 과보의 복력이니 자재수용하라.’하고
‘나는 과거 장엄겁 중 월당세계에 나아가 묘안부처님을 뵙고 가히 파괴할 수 없는
지혜를 얻었지만, 부처님의 깊고 깊은 지혜에 들어가 몸과 마음을 부처님같이 하여
부처님 행을 이루는 것은 가비라성 바산바연주야신에게 물으라.’하였다.
☛ 주지신은 10회향 중 제10 입법계무량 회향이다.
[58] 婆珊婆演主夜神(바산바연주야신)
32) 마갈제국 가비라성 바산바연주야신.
바산바연주야신은 중생의 어둠을 없애는 법광명을 얻은 분입니다.
바산바연주야신 십지(十地) 선지식입니다.
여기 부터는 10지 보살입니다.
주야신부터는 長行(장행)과, 긴 문장과 게송으로,
짧은 노래 글로써 구체적인 설법형식을 취하는 것이
앞의 부분과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입니다.
문장이 나오고ㆍ게송이 나오고, 작문이 나오고ㆍ
내용의 분량이 한 사람ㆍ한 사람 등장해도 굉장히 많습니다.
왜냐, 10지 보살이 상징하는 것은 진정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선재가 찾아가니 다음의 시를 읊습니다.
나의 정법(淨法)은 우치암(愚痴暗)을 깨뜨리고
광대한 자비를 행하여 중생고를 멸해 놓고
가는 곳마다 즐겁게 부처님 법 닦는다네.
주야신은 無明惑業(무명혹업)에 사로잡혀 생사의 밤을 헤매는
중생을 구제하는 중생의 밤을 주관하는 선지식을 의미하므로,
10지 선지식을 주야신(主夜神)에 배대하였습니다.
☛ 바산바연주야신은 10지 중 제1 환희지에 해당한다.
[59] 普德淨光主夜神(보덕정광주야신)
33) 마갈제국 보리장 보덕정광주야신.
보덕정광주야신은 선정의 즐거움으로 착한 업을 증장시킵니다.
선재가 찾아가니 10가지 법다운 삼매를 설명하면서
‘나는 적정선정락보유삼매(寂靜禪定樂普游)를 얻어 3세 일체불과 청정국토와
중회(衆會)의 신통을 다 알지만 일체 여래의 경계와 지원(智源)은 보리수 오른쪽에 계신
희목관찰중생신에게 물으라.’ 했다.
☛ 보덕정광주야신은 10지 중 제2 이구지에 해당한다.
[60] 喜目觀察衆生神(희목관찰중생신)
34) 마갈제국 보리장 희목관찰중생(주야)신
기쁜 눈으로 중생을 관찰하는 주야신.
10바라밀 법력으로 다 즐겁게 합니다.
☛ 희목관찰중생 주야신은 10지 중 제3 발광지이다.
[61] 普救衆生妙德神(보구중생묘덕신)
널리 중생을 구제하는 묘덕신.
35) 마갈제국 보리장 보구중생묘덕주야신.
갖가지 지혜의 몸을 얻어 때와 장소를 딱 맞춰서 교화함.
☛ 보구중생묘덕 주야신은 10지 중 제4 염혜지이다.
[62] 寂靜音海主夜神(적정음해주야신)
고요한 바다 같은 음성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주야신.
36) 마갈제국 보리장 적정음해주야신.
근기를 살펴 메아리가 따르듯이 교화합니다.
☛ 적정음해 주야신은 10지 중 제5 난승지이다.
[63] 守護一切主夜神(수호일체주야신)
중생들 마음의 성을 수호하도록 교육하는 주야신.
37) 마갈제국 보리장 수호일체성주야신.
긴 밤 홀로 깨어 마음의 성을 지킵니다.
☛ 수호일체 주야신은 10지 중 제6 현전지이다.
[64] 開敷樹花主夜神(개부수화주야신)
모든 나무와 꽃을 피게 하는 주야신입니다.
38) 마갈제국 보리장 개부일체수화주야신.
번뇌의 가시덤불의 숲을 헤치고 광명삼매로 꽃을 피움.
☛ 개부수화 주야신은 10지 중 제7 원행지이다.
[65] 大願精進力救護(대원정진력구호)
대원정진력구호일체중생주야신
이름 굉장히 깁니다.
대원정진력으로 일체중생을 구호하시는 주야신입니다.
39) 마갈제국 보리장 대원정진력구호일체중생신.
과거세에 무수한 바라밀다를 행하여 교화중생영생선근해탈문으로
쉼 없는 교화로써 해탈 방편을 설합니다.
☛ 대원정진력구호 주야신은 10지 중 제8 부동지이다.
[66] 妙德圓滿瞿婆女(묘덕원만구바녀)
묘덕원만 람비니림신과 석녀구파를 친견합니다.
40) 남비니원의 묘덕원만(妙德圓滿)
묘덕원만은 람비니림신입니다.
곳곳마다 공평하게 비추는 태양처럼 원만합니다.
☛ 묘덕원만 주야신은 10지 중 제9 선혜지이다.
41) 迦毘羅城(가비라성) 釋氏女瞿波(석씨녀구파)
구바녀는 석씨 문중의 “석녀구파”입니다.
구바녀가 선재를 맞이하며
‘잘 왔도다 대장부여, 대지혜 용맹을 얻었도다.
이제 그대는 여래의 무상과(無上果)를 얻을 것이다.’
‘나는 3세 법계중의 모든 일을 다 알지만 보살들의 한량없는 방편은
마야부인께 물어보라.’ 합니다.
일념을 억겁으로 삼아서 만법을 통달합니다.
☛ 구바녀는 10지 중 제10 법운지이다.
여기까지가 10지 보살이 끝나고, 마야부인부터는
等覺(등각) 선지식이라고 도표에 되어있습니다.
청량국사가 그렇게 과판을 했습니다.
--- 7월 23일 비대면 화엄경약찬게 강의 여기까지---
이어서 보너스로
설잠스님의 법성게를 禪의 입장에서 살펴봅니다.
설잠스님 매월당 김시습의 법성게 선해(禪解)
1, 서문
최초 화엄경은 부처님이 우주 만물의 깨달음을 언제 어디서나 상설(常說)과
변설(徧說)로 말이나 문자가 없는 화엄경을 해인삼매에서 빛으로 설하였는데
어떤 보살이 그것을 성문화(成文化)하여 간략하게 39품의 60, 80권 경으로 만들었다.
의상(義湘, 625~702) 스님이 그 60권 화엄경을 보시고
글이 너무 번거롭게 생각하고 가장 중요한 뜻을 간추려 210글자로 압축했다.
그리고 이해를 더 쉽게 하려고 210글자에
그림을 더하여 도표로 나타낸 것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다.
그림은 어린아이들의 순박한 장난 같기도 하고,
또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다른 별의 비행접시(U.F.O) 외계인의 그림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그림과 210자의 글자 속에는
깨달은 사람이 본 우주 삼라만상의 바른 이치가 고스란히 표현되어 있다.
이 심오하고 불가사의한 부적(符籍)을 세상에서 나름대로 해석하며 내려오다가
조선에서 뛰어난 천재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설잠(雪岑)스님이
드디어 그 부적의 비밀을 선사의 안목으로 풀었다.
산승이 법성게의 가장 즐겨 소개하는 구절이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다.
이 두 구절만으로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깨우침을 주는지 모른다.
우리는 순간순간마다 엄청난 보배를 만나는데 내 그릇이 작아서 만분의 1도 담지 못한다.
설잠(雪岑)스님의 일승법계도주(一乘法界圖註)를 공부하면서
학인들과 함께하며 각자 나름대로 견해를 대입하시길 바랍니다.
늘 우리 곁을 옹호하는 화엄성중에게 감사하며
대자연이 펼쳐진 화장장엄세계에서 행복한 삶을 공유합시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3설 3배)
삼도봉 비룡산 삼장원 指梵 德峙 拜
2, 해제
1> 화엄경(華嚴經)
화엄경은 본래의 이름이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다.
크고 바르고 넓은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이 이타적인 보살행으로 세상을 곱고 향기로운
꽃과 같이 살기 좋은 곳으로 평화롭고 아름답게 장엄하는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화엄경의 큰 뜻[大旨]이다.
먼저 바른 깨달음[正覺]의 눈에 비친 세상과 인생을 밝히고,
다음으로는 보살행으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교화하자는 내용이다.
부처님이나 보살이 깨달음의 안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은 본래 그대로 온통
원만하고 원융무애하며 완전무결하여 아무런 장애와 거리낄 것이 없는 곳이다.
그것을 한마디로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세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화엄경은 어떤 법을 설하든지 시간도 공간도 사물도 보살수행도 중생제도도
모두가 하나하나가 걸림이 없고 장애가 없이 원융무애하게 펼쳐 보인다.
청량스님이 화엄경을 간략하게 소개한 글을 보자.
“화엄경의 설법은 깊고 멀고 아득하며,
너무나 미세해서 숨어 버린 듯이 작은 문제들까지도 나누고 쪼개어 분석하였고,
마음의 문제와 그 외의 다른 경계들을 남김없이 환하게 밝혔으며,
일체 존재의 모든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고,
그 본성을 철저히 다 밝혔으며,
모든 일의 원인과 결과까지를 속속들이 드러냈으며,
태평양 바닷물이 하늘가득 넘실대듯이 하여 넓고 크게 모든 것을 다 갖춘 가르침은
오직 대방광불화엄경뿐이로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화엄경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의 글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글 속에서 화엄경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법계도(法界圖)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란 신라의 의상(義湘,625~702)스님이 화엄경을
깊이 공부하고 나서 210개의 글자와 여러 개의 네모가 난 그림을 그려서 화엄경에서
밝힌 법계연기(法界緣起)의 사상을 서술한 그림 시[圖詩]를 말한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하여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끝나는 7언(言) 30구(句)의
게송(偈頌)으로 법계연기사상의 요체를 서술하였는데,
중앙에서부터 시작하여 54번을 굴절시킨 후
다시 중앙에서 끝나는 비대칭(非對稱)의 도형이다.
법계도의 형태는 원래 흰색 바탕에 검은색의 글씨로 게송을 적고,
붉은색의 선이 게송의 진행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이는 각기 흰색은 물질세계인 기세간(器世間)과
검은색은 수행의 주체인 중생세간(衆生世間),
붉은색은 깨달음의 세계인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을 상징한다.
이같이 깨달음의 경지에 나타난 우주 전체를 드러냈다.
법계도는 바다에 삼라만상이 도장을 찍은 듯이 다 나타난다는
“해인도(海印圖)”라고도 한다.
법계도의 형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을 취한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하나의 진리인 것을 상징한 것이고,
많은 굴곡을 둔 것은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가르침의 방편이 달라지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또 첫 글자인 “법(法)”과 끝 글자인 “불(佛)”의 두 글자는
각기 수행 방편의 원인과 결과를 나타낸 것으로서
이 두 글자를 중앙에 둔 것은
인과의 본성이 중도임을 보인 것이다.
법계도의 게송은 진리의 실재를 서술한 “자리행(自利行)”과
진리의 공덕을 서술한 “이타행(利他行)”과
진리를 증득하는 과정을 서술한 “수행”의 3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자리행”에서는
공간적으로 하나의 티끌과 전 우주가 [一微塵中含十方],
시간적으로 한순간이 영원과 상통 [一念卽是無量劫]
“이타행”에서는 진리를 깨달은 부처님의 공덕이 중생들에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온다는 뜻[雨寶益生滿虛空]을 노래하였다.
“수행”에서는 수행자가 진리를 깨닫는 순간 중생은 본래부터 부처님인 것을 알게 되는,
[舊來不動名爲佛]고 하였다.
이 법계도는 의상스님이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 2대 조사인 지엄(智儼, 600~668)
스님에게 수학할 때인 668년에 창작되었는데 화엄의 진리를 서술한 책을 불사른 후 타지 않고 남은 210개의 글자를 가지고 게송을 짓고 법계도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게송의 많은 부분이 지엄스님의 사상에 기초하고 있지만,
중국 화엄학과 달리
“수행”을 중요시하는 의상스님의 사상이 잘 표현되고 있으며,
의상스님은 이 법계도를 매우 중요시하여 제자들에게
법을 전해주는 인가의 표시로 수여하기도 하였다.
의상스님의 문도들이 법계도를 연구한 내용은
화엄일승법계도기총수록(華嚴一乘法界圖記叢髓錄)에 있으며,
고려 초의 균여(均如,923~973)스님은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를 찬술하고,
조선 전기의 설잠(雪岑)스님 김시습(金時習)은
화엄일승법계도주(華嚴一乘法界圖註)를 찬술하여
“법계도”의 사상을 설명하였다.
청량스님이 간단하게 설명한 법계(法界)라는 뜻을 살펴보면,
“가고 또 오는 것이 끝이 없으나 움직이고 고요함은 그 근원이 하나이다.
온갖 아름답고 미묘한 것을 다 포함하고 있으나 넉넉한 여유가 있고,
언어와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法界)뿐이로다.”라고 하였다.
3> 의상(義湘, 625~702)스님
의상스님은 신라 스님이다.
속성은 김 씨며 29세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다.
당나라의 불교가 흥성함을 듣고 650년 원효(元曉)스님과 함께 중국에 가려고
요동까지 가서 원효스님은 무덤 사이에서 자다가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유심(唯心)의
도리를 깨달아 돌아오고 의상스님은 당나라에 가서 처음 양주에 있다가 662년 종남산
지상사 지엄(智儼,600~668)스님에게서 현수(賢首,643~712)스님과 함께
화엄경(華嚴經)을 연구하였다.
그 무렵 당나라에서는 신라의 사신 김흠순(金欽純)을 옥에 가두고 신라를 침범하려 하자 스님이 670년 본국에 돌아와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신인종(神印宗)의 명랑(明朗)법사를 청하여 기원하게 하여
무사하였다고 한다.
676년에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였고,
현수스님이 화엄수현기(華嚴搜玄記)를 짓고 부본(副本)을 보내면서
편지를 보낸 것이 지금까지 유전하고 있다.
또 화엄종의 10찰(刹)을 짓고 화엄경을 크게 전파하였다.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와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抄記)와
대화엄십문간법관(大華嚴十門看法觀)과 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 등이 있다.
성덕왕(聖德王, ?~737) 1년 세수 78세로 입적하였으며
해동 화엄종의 초조(初祖)로 자리매김 한다.
도제로는 오진(悟眞)스님, 지통(智通)스님, 표훈(表訓)스님, 진정(眞定)스님,
진장(眞藏)스님, 도융(道融)스님, 양원(良圓)스님, 상원(相源)스님, 능인(能仁)스님,
의적(義寂)스님 등이 유명하여 기록으로 남아있다.
4> 설잠(雪岑, 1435~1493)스님
본관은 강릉 김씨(金氏)며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서
자(字)는 열경(悅卿)이며 호는 매월당(梅月堂) · 동봉(東峰) · 벽산청은(碧山淸隱) ·
췌세옹(贅世翁)등으로 부른다.
출가 후 법명은 설잠(雪岑)스님이다.
수양대군의 단종(端宗)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死六臣)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
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 한다.
설잠스님은 조선 5백년에서 제일가는 천재로 꼽힌다.
5살 때 이미 시문(詩文)에 뛰어나서 세종대왕의 무릎에 앉아 놀았으며,
성장해서는 생육신의 신분으로 출가하여 비구가 되어 고고(孤高)하게 일생을 마친
특별한 삶을 사신 분이다.
1493년 충청도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였다.
설잠스님의 시문(詩文)과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특히 선문(禪文)에 능통하여 법성게를 모두 선사의 안목으로 해석한
화엄일승법계도주(華嚴一乘法界圖註)를 남겼는데
늦게나마 이렇게 소개할 수 있어서 큰 다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법성게 주해에서 스님의 견해와 안목을 살펴보기로 하고
스님의 시(詩)를 소개하여 그의 문학성을 느껴보기로 한다.
반륜신월상림초(半輪新月上林梢)
산사혼종제일고(山寺昏鍾第一鼓)
청영점이풍로하(淸影漸移風露下)
일정양기투창요(一庭凉氣透窓凹)
새로 돋은 반달이 나무 가지 위에 뜨니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3, 법계도(法界圖)의 서문
大華嚴法界圖註 并序 淸寒比蒭 雪岑撰
대화엄법계도주 병서 청한비추 설잠찬
대화엄(大華嚴) 법계도(法界圖)의 주해와 서문
청한비추(淸寒比蒭) 설잠(雪岑) 찬(撰)
☀ 의상스님이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보인 법계연기의 세계를
다시 게송과 그림으로 나타낸 것을 설잠스님이 풀고 서문을 쓴 글이다.
청한(淸寒)이란
맑고 깨끗하여 탐욕이 없으며, 가난하고 쓸쓸하다는 뜻이다.
비추(比蒭)란 비구(比丘)를 말한다.
비구(比丘)란 범어로 필추(苾芻), 픽추(煏芻), 비호(比呼), 걸사(乞士), 포마(怖魔),
파악(破惡), 제근(除饉), 근사남(勤事男)이라 한다.
출가하여 걸식으로 생활하는 250계를 받아 지니는 남자 스님이다.
걸사(乞士)는 항상 밥을 빌어 깨끗하게 생활하는 것이니,
위로는 법을 빌어 지혜의 목숨을 돕고,
아래로는 밥을 빌어 몸을 기른다는 뜻이다.
포마(怖魔)는 비구는 마왕과 마군들을 두렵게 한다는 뜻이다.
파악(破惡)은 계(戒), 정(定), 혜(慧) 3학(學)을 닦아서
견혹(見惑), 사혹(思惑)을 끊는다는 뜻이다.
제근(除饉)은 계행(戒行)이란 좋은 복전(福田)이 있어
능이 물자를 내어 인과의 흉년을 제한다는 뜻이다.
근사남(勤事男)은 계율의 행에 노력하여 부지런하다는 뜻이다.
夫大華嚴의 華藏法界者는 以虛空으로 爲體하고 以法界로 爲用하며
부대화엄의 화장법계자는 이허공으로 위체하고 이법계로 위용하며
以遍一切處로 爲佛하고 以緣起法體로 爲衆會하야 說圓滿修多羅
이편일체처로 위불하고 이연기법체로 위중회하야 설원만수다라 하니라
저 대화엄(大華嚴)의 화장법계(華藏法界)라는 것은 허공으로 본체를 삼고,
법계(法界)로 작용을 삼으며, 일체 처소에 두루함을 부처님으로 삼고,
연기법(緣起法)의 자체로써 대중들의 모임을 삼아서 원만한 경을 설한 것이다.
☀ 여기에서 “대화엄”이란 경문이 아무리 많더라도 문자로 된 경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저 드넓은 우주법계와 은하계와 일체 삼라만상과 미세한 세포들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유정무정과 그것들이 펼쳐내는 온갖 작용들까지를 다 포함하여
“대화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화엄에 화장장엄법계가 있는데 화장장엄법계는 저 허공으로써 본체를 삼고
허공과 함께 펼쳐진 만유제법인 법계로써 그 작용을 삼는다.
법계란 무엇인가? 청량스님은 이렇게 밝혔다.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일이 끝이 없으나 움직이고 고요함은 그 근원이 하나로다.
온갖 미묘함을 다 함유하고 있으나 여유가 있고,
말과 생각을 초월하여 멀리 벗어난 것은 오직 법계(法界)뿐이로다.”라고 하였다.
또 대화엄에서의 부처님이란 저 드넓은 우주법계와 은하계와 일체 삼라만상 그 어디에도 두루 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의 본 성품으로 부처님을 삼는다.
물론 그 속에는 2천 6백여 년 전에 인도 땅에서 출현하셨던 역사적인 부처님과 법당 안에 계시는 등상불이나 사람 사람들의 가슴 안에 모시고 있는 부처님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또 화엄경을 설할 때 모여온 그 많은 법회 청중들은 누구누구인가.
이 또한 “대화엄”의 입장에서 보면 경전에서 설한 무수한 보살들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존재의 연기법(緣起法)의 자체로써 대중들의 모임을 삼는다.
한편 경전에서 설한 무수한 보살들이 연기법의 작용을 상징 한다.
연기법이란 우리가 사는 이 지구와 우주와 은하계와 일체 삼라만상과 미세한 세포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이, 다 같이 연관 관계를 맺고 더불어 같이 한다는 존재 원리다.
즉 일체 존재의 존재 원리인 연기법이 곧 화엄 법회의 법회 청중들이다.
위와 같은 화장법계와 모든 곳에 두루한 부처님과 연기법으로써 법회 청중을 삼아 조금도 결함이 없이 원만하고 완전무결한 경전을 설하게 된 것이다.
실은 특별히 설하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현재 그대로인 것을 두고 깨달음의 눈으로 보아서 “원만한 경전을 설한다.”라고 한 것이다.
敎에 所謂刹說塵說과 佛說菩薩說과 三世一時說이 是也요
교에 소위찰설진설과 불설보살설과 삼세일시설이 시야요
화엄경의 가르침[敎]에서 이른바 “국토가 설하고, 티끌이 설하며, 부처님이 설하고,
보살이 설하며, 과거 현재 미래가 일시에 설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 화엄경에는 법을 설하는 분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보살들과 온갖 선지식들이 등장하여 설하고 있지만,
광명을 놓으면 그 광명이 설하기도 하고,
광명에 나타난 온갖 사물들이 설하기도 하고,
나무나 새들이 설하기도 하고,
누각이 설하기도 하고,
경전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다 설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자로 된 경전의 내용이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우주적 대화엄”의 입장에서 보면,
국토와 국토가 그대로 설법을 하고,
먼지와 먼지가 그 모습 그대로 설법을 하고,
별들은 별들대로 설법을 하고,
청산은 청산대로 녹수는 녹수대로 이미 그대로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에만 설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언제 어디서나 일시에 다 설하고 있다.
그래서 화엄경의 진정한 설법은
시간적으로는 항상 설한다고 하여 상설(常說)이라 하고,
공간적으로는 어디서나 설한다고 하여 변설(徧說)이라 한다.
法界圖者는 以一海印圖로 圓攝無邊之敎海하니 圖中에
법계도자는 이일해인도로 원섭무변지교해하니 도중에
所謂一中一切多中一과 一卽一切多即一이 是也라
소위일중일체다중일과 일즉일체다즉일이 시야라
법계도(法界圖)라는 것은 하나의 해인도(海印圖)로써 무궁하고 무변한 가르침의 바다를 원만하게 포섭한 것이다.
법계도 가운데 이른바 “하나 가운데 일체며 많은 가운데 하나다.”라고 한 것과
“하나가 곧 일체며 많은 것이 곧 하나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 법계도를 해인도라고도 부른다.
이 법계도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어서 사찰에서나 세속에서나 매우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비록 단순한 그림 한 장이지만 팔만장경을 다 포함하고 있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다시
또 이 그림이 남김없이 다 포함하고 있다.
마치 작은 먼지 하나 가운데 세계와 우주법계의 모든 정보를 다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마치 요즘 컴퓨터나 스마트 폰의 손톱만한 작은 칩 하나에 수 만권의 책과 수만
종류의 음악과 수만 편의 영화 등을 다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세포 하나 속에 그 사람의 모든 정보를 다 지니고 있어서
세포 하나로 똑같이 복제가 가능하다.
그래서 산승은 칩을 볼 때마다 법계도를 연상하게 된다.
생긴 모양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치를 화엄경에서는 2천 6백여 년 전에 이미
“하나 가운데 일체를 지녔으므로 일체가 곧 하나다.”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또 미생물들은 없는 듯이 보이지만
모든 공간에 꽉 차 있는 것을 오늘날 현미경으로 다 본다.
또 부처님은 “하나의 물방울 안에 8만 4천 마리의 벌레가 있다고 하였으니
[吾觀一滴水 八萬四千虫]” 이 또한 얼마나 밝은 깨달음의 현미경인가.
東土에 義湘法師가 始製此圖는 表三世間十法界의 莊嚴無盡之義하
동토에 의상법사가 시제차도는 표삼세간십법계의 장엄무진지의하
야 以牗㝠蒙이어늘
야 이용명몽이어늘 (墉담용)
동토(東土)의 의상법사가 처음 이 그림을 만든 것은 삼세간(三世間)과 십법계(十法界)의
장엄하고 다함이 없는 뜻을 나타내어 몽매(蒙昧)한 사람을 인도(引導)한 것이다.
☀ 신라의 의상법사가 우리가 살고 있는 국토,
즉 기세간(器世間)과 일체중생들이 사는 중생세간(衆生世間)과 모든 부처님들이 사는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과 또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 · 성문 · 연각 ·
보살 · 부처님까지의 십법계(十法界)를 잘 나타내어 무지몽매한 중생들을 깨우친 것은
이 그림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그래서 돌아가신 사람들을 천도할 때 수차에 걸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또한 온갖 염불로써 깨우쳐드리고, 유족들이 망자(亡者)를 대신해서 복을 지어드리다가도 최후 마지막 49재에 이르러 전송할 때는 반드시 이 법성도를 돌며 법성게를 독송하여
천도해 드린다. 즉 돌아가신 분을 천도해 드리는데 가장 단위가 높은 법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 높은 법은 없기 때문이다.
專門舊學이 重演流布하야 辨記錄鈔가 遍滿世間하니 誕生王子나
전문구학이 중연류포하야 변기녹초가 편만세간하니 탄생왕자나
已爲庶人矣로다
이위서인의로다
전문(專門)의 구학(舊學)이 거듭 부연(敷演)하고 유포하여 변기(辨記)와 녹초(錄抄)가 세간에 두루 가득하게 되었으니, 왕자(王子)로 탄생하였으나 이미 서인(庶人)이 된 것이다.
☀ 이 법성도와 법성게를 풀이하고 설명하고 강설한 글들이 설잠스님 때까지만 해도
세상에는 가득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한글로 풀이한 책들만 하더라도 수십 종이 되며,
또 불교를 언급하는 사람치고 이 법성게를 설명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참으로 어렵고도 귀한 것인데 너도 나도 아무나 그리고 아무렇게나 설명하다 보니
본래의 뜻을 흐려놓은 것이 예컨대 처음에는 왕자로 태어났으나 이제는 이미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서민이 되고 만 것과 같은 격이 되어 버렸다.
原夫華藏之界는 本無些子限量하고 華嚴之佛도 亦無些子說法이라
원부화엄지계는 본무사자한량하고 화엄지불도 역무사자설법이라
但居無事田地하야 弄他無事活計而已로대
단거무사전지하야 농타무사활계이이로대
대저 화장세계를 궁구해 보면 본래 조그마한 한계나 한량도 없고,
화엄경의 부처님도 또한 조그마한 설법도 없다.
단지 일 없는 땅에 머물러 저 일 없는 살림살이를 농락할 따름이다.
☀ 진정한 화장장엄세계란 한 생각마저 다 사라진 경지이다.
무슨 그 휘황찬란한 경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그 많고 많은 세계들은 무엇인가. 본래 아무런 일도 없는 본래의 자리에서 실없이 펼쳐 보이며,
흥겨워서 멋대로 솜씨 있게 마음대로 그려 보이는 일들일 뿐이다.
또 화엄경의 부처님도 본래 한마디의 말도 설할 것이 없건만 설할 것이 없는 데서 마음껏 설하여 즐거움을 주고 감동을 주어 대중들로 하여금 울고 웃게 한 것일 뿐이다.
화엄경을 읽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이와 같은 안목과 이와 같은 자세와 이와 같은 견해로 읽어서 그 어떤 화장장엄세계를 보거나 그 어떤 횡설수설을 읽더라도 이끌리지 말 것이며, 집착하지 말 것이며, 미혹하지 말아야 하리라.
只緣一眞淨界를 俄然晦昧할새 遂有一念하야 分彼分我하니
지연일진정계를 아연회매할새 수유일염하야 분피분아하니
彼我旣立에 取捨便起하고 才有取捨之心에 便成十法之界라
피아기립에 취사변기하고 재유취사지심에 변성십법지계라
다만 하나인 진실한 청정법계[一眞淨界]를 문득 미혹하게 된 탓으로 드디어
한 생각이 있게 되어 상대를 나누고
나를 나누게 되니 상대와 내가 이미 대립함에 취하고 버림이 바로 일어나고
겨우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있자마자
곧바로 열 가지의 법계(法界)가 성립된 것이다.
☀ 망상에 사로잡힌 미혹한 중생들은 부처와 중생이 본래로 평등하게 갖춘 일진법계(一眞法界)를 알지 못하여 나와 너를 분별하고 주관과 객관을 나누어서 나는 취하고 너는 버리며 주관은 취하고 객관은 법리는 못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나아가서 너와 내가 나눠지므로 네 가지 성인의 경지인 부처님과 보살과 연각과 성문과,
또 여섯 가지 범부의 경지인 지옥과 아귀와 축생과 인간과 천신과 아수라가 생겨나서 이리 분별하고 저리 취하고 버리는 일로 중생들의 살림살이를 삼게 되었다.
어찌하랴. 이미 우리는 이와 같은 진흙탕 물속에서 그것이 사람이 사는 일이라고 여기며 더욱 깊이 빠져들고 있는 것을.
於無事中에 瞥然生事하야 不動之佛이 動於無動之際하고
어무사중에 별연생사하야 부동지불이 동어무동지제하고
圓融之法이 㭊於不二之內하니
원융지법이 㭊어불이지내하니
일이 없는 가운데서 별안간 일을 만들어 움직이지 않는 부처가
움직임이 없는 경계에서 움직이고,
원융한 법이 둘이 아닌 가운데서 쪼개졌도다.
☀ 모든 인생사는 본래 일이 없는데서 문득 일을 만들어 예로부터 움직이지 않고도 본래
부처이건만 움직임이 없는 경계를 움직이게 하고, 원융하여 둘이 없고 분별이 없는데서
분별을 일으켜서 둘로 셋으로 넷으로 끝없이 나눠져서
이와 같은 세상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則衆生之佛은 依業識以出世하고 佛之衆生은 昧惠身而取捨하야
즉중생지불은 의업식이출세하고 불지중생은 매혜신이취사하야
轉轉相迷하야 至于今日이라
전전상미하야 지우금일이라
중생인 부처는 업식(業識)에 의지하여 세상에 나오고, 부처인 중생은 지혜의 몸을
망각하고 취사(取捨)하여 갈수록 길을 잘못 들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것은 본래 하나에서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할 뿐이다.
왜 두 가지 이름을 사용하게 되는가.
흔히 업식으로 세상을 활보하면 그것을 중생이라 하고,
하는 일마다 지혜와 자비로 불쌍한 생명을 향한 자비행을 하면 그것을 부처님이라 한다.
그러나 업식으로 세상을 활보하더라도 오롯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처가 아니고서야 어찌 업식을 작동할 수 있겠는가.
업식을 작동할 수 있는 그가 곧 부처님이다.
所謂瞎狗가 吠蘆叢에 盲人이 唱賊虎하니라
소위할구가 폐노총에 맹인이 창적호하니라
이른바 눈먼 개가 갈대숲에 대고 짖으니 맹인(盲人)은 호랑이나 도적이라고 소리치도다.
☀ 눈이 어두운 개나 눈이 먼 사람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 사람이 본래로부터 지니고 있는 완전무결한 진여불성의 참 나를 망각하고 오온과
육근으로 자기 자신의 전부라고 여기고 살아가는 어리석고 몽매한 중생들이다.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
“그때 여래께서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혜의 눈으로 법계에 있는 일체중생들을 두루 살펴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기하고 신기하여라.
이 모든 중생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어리석고 미혹하여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구나.
내가 마땅히 성스러운 길[聖道]로써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망상과 집착을 영원히
떠나고 스스로 자신의 몸 안에서 여래의 광대한 지혜가 부처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보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此大雄은 不得已而說하고 賢哲은 不得已而判하야
차대웅은 부득이이설하고 현철은 부득이이판하야
而大部三十九品과 小圖三十句가 所以出也니라
이대부삼십구품과 소도삼십구가 소이출야니라
이것이 세존은 마지못해 설하고 현철(賢哲)은 마지못해 구별[判]하여
대부(大部)인 39품(品)과 작은 그림과 30구(句)가 나오게 되었다.
☀ 진여불성의 참 나를 망각하고 오온과 육근으로 자기 자신의 전부라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세존께서는 설하지 않아도 될 일이나 부득이
그 자리를 드러내려고 39품이라는 큰 화엄경을 설하시고,
다시 의상조사는 작은 그림과 30구절의 게송을 지어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라 하여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다.
30구절의 게송은 앞으로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해진다.
화엄경 39품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39품의 이름만이라도 거듭거듭 읽어서 익숙하게 하기위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제1회 법보리도량에서의 6품은
1, 세주묘엄품 2, 여래현상품 3, 보현삼매품 4, 세계성취품
5, 화장세계품 6, 비로자나품
제2회 보광명전에서의 6품은
7, 여래명호품 8, 사성제품 9, 광명각품 10, 보살문명품 11, 정행품 12, 현수품
제3회 도리천궁에서의 6품은
13, 승수미산정품 14, 수미정상게찬품 15, 십주품 16, 범행품
17, 발심공덕품 18, 명법품.
제4회 야마천궁에서의 4품은
19, 승야마천궁품 20, 야마궁중게찬품 21, 십행품 22, 십무진장품.
제5회 도솔천궁에서의 3품은
23, 승도솔천궁품 24, 도솔궁중게찬품 25, 십회향품.
제6회 타화자재천궁에서의 1품은 26, 십지품.
제7회 보광명전에서의 11품은
27, 십정품 28, 십통품 29, 십인품 30, 아승지품 31, 여래수량품 32, 보살주처품 33, 불부사의법품 34, 여래십신상해품
35, 여래수호광명공덕품 36, 보현행품 37, 여래출현품.
제8회 보광명전에서의 1품은 38, 이세간품.
제9회 급고독원에서의 1품은 39, 입법계품이다.
然이나 言者는 心之發也요 心者는 言之宗也니 譬如太和之氣가
연이나 언자는 심지발야요 심자는 언지종야니 비여태화지기가
本無形聲이나 假形器하야 而激發인댄 則爲律侶하야 圓融之法도
본무형성이나 가형기하야 이격발인댄 칙위율려하야 원융지법도
本無名相이나 假言句하야 而演說하면 則爲經論이라
본무명상이나 가언구하야 이연설하면 즉위경논이라
그러나 말이란 마음의 드러남이요. 마음이란 말의 근원[宗]이니,
비유하자면 태화(太和)의 기운이 본래 형상과 소리가 없으나 형기(刑器)를 빌려서
격발(激發)시키면 율려(律呂)가 됨과 같이
원융한 법도 본래 이름과 형상이 없으나 말과 글을 빌려서 연설하면 경론이 되는 것이다.
☀ 모든 말은 마음의 표현이다.
실로 어떤 말과 어떤 행위도 다 같이 마음의 표현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음은 말과 행위의 근본 뿌리다.
마음이라는 뿌리에서 돋은 싹과 열매가 사람의 말과 행위이므로
그 싹과 열매를 보고 그 뿌리를 안다.
태화(太和)의 기운이란 주역의 대화(大和)란 말과 같이 음양 조화의 기운이며
우주 생성의 힘이다.
예컨대 처음 우주에는 아득한 먼지만 가득하여 어떤 형상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 먼지들이 하나씩 만나면서 중력의기운이 형성되어 다시 또 먼지를 끌어들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리인 육율(六律)과 육여(六呂)인 소리가 있게 되었으니
즉 눈의 대상과 귀의 대상이 있게 된 까닭이다.
그래서 그 먼지는 차츰차츰 커지면서 태양이 되고, 지구가 되고, 화성과 금성과 토성
등등 온갖 별들이 형성되게 된 근본 사연이다.
그 지구가 처음에는 불덩어리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연기(緣起)하면서 진화해 왔다.
불법이란 세상의 온갖 존재 원리를 밝히는 가르침이다.
세상의 온갖 존재 원리는 본래 원융하고 무애하여 시비와 선악이 없었는데 사람들의
이해득실과 분별 망상으로 말미암아 성인들의 할 일이 생기게 되어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원융한 법도 본래 이름과 형상이 없으나 말과 글을 빌려서 연설하면
경론(經論)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非律侶면 無以像太和하고 非經論이면 無以闡圓融하니 則經論者도비률려면 무이상태화하고 비경논이면 무이천원융하니 즉경논자도
亦是圓融法性之風䂓며 而三世諸佛之大意也어니와 奈何正法已遠에역시원융법성지풍䂓며 이삼세제불지대의야어니와 내하정법이원에
佛敎澆漓리오
불교요리리오
율려(律呂)가 아니면 태화(太和)를 모양 지을 수 없고 경론(經論)이 아니면
원융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니,
경론(經論)이란 것도 또한 원융한 법성(法性)을 풍자한 법규[風規]며
삼세 모든 부처님의 대의(大意)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정법이 이미 멀어졌음에 부처님의 교법이 희미하게[澆漓] 되었음을.
☀ 육율(六律)과 육여(六呂)인 소리가 아니면 음양 조화의 기운이며 우주 생성의 힘인
태화(太和)를 설명할 수가 없고,
경전과 논설이 아니면 원융한 본래의 이치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경전과 논설들은 모두가 원융한 법성(法性)을 풍자한 법규[風規]가 되며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이 출현하여 중생들을 깨우치고자 하신 큰 뜻이 된다.
그러나 성인이 가신 때가 멀어짐에 정법의 시대도 지나가고 사사로운 견해들이 홍수를
이루어 어느 것이 정법이며 어느 것이 사법인지 그 분별이 흐리멍텅하게 되어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叅佛乘者가 指敎網하야 爲葛藤하고 討佛語者가 斥單傳하야
참불승자가 지교망하야 위갈등하고 토불어자가 척단전하야
爲壁觀하며
위벽관하며
불승(佛乘)을 참구하는 사람은 교망(敎網)을 가리켜 갈등(葛藤)이라고 하고, 불어(佛語)를 찾는 사람은 단전(單傳)을 배척하여 벽관(壁觀)이라고 한다.
☀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가르치신 전통적인 경학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의 경전은
중생들의 수준과 근기를 따라 설하시다 보니 참으로 다종다양하다.
간단하게 두 가지로만 분류한다면 하나는 최상승의 가르침으로서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는 교설을 불승(佛乘)이라 하였다.
그 외에는 수행을 하더라도 모두 부처님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고 아라한의 경지에만
이른다고 가르치거나, 아니면 오랜 세월을 수행하여 점차적으로 단계를 밟아 올라가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는 다양한 교설을 전계하는 가르침의 교망(敎網)이 있다.
그래서 사람이 본래로 부처님이라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교설들을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복잡하고 어렵기만 한 내용이라고 지적한다.
한편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건너와서 불교를 가르치면서 기존의 불교와는 전혀 다른
선불교(禪佛敎)를 전하였는데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전한다고 하여 단전(單傳)의 불교,
또는 벽을 바라보고 명상에 잠긴 불교라고 하여 벽관(壁觀)의 불교하고 하였다.
그래서 단전 불교의 전통을 세우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한 제자는 제1조가 가섭이며, 제2조가 아난이며, 제3조가 상나화수 등으로 이어져서 달마는 28조에 이르고,
달마를 중국에서는 초조(初祖)가 되므로 그의 제자 혜가(慧可)를 제2조, 승찬(僧璨)을
제3조 등으로 계산하여 혜능(慧能)대사를 제6조로 하여 육조대사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선불교 전통의 법맥이다.
그런데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가르치신 전통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은 수많은 중생을 교화하려는 대승적 보살행이 없는 단전(單傳)의 불교를 벽만 바라보고 명상에만 잠겨있다고 하여 그들을 벽만 바라보는 벽관외도(壁觀)라고 비판하였다.
有道理而礙於事者와 有達事而昧於理者가 遂使圓融無二之法으로
유도리이애어사자와 유달사이매어리자가 수사원융무이지법으로
變爲固滯守一之物하니라
변위고체수일지물하니라
이치에 통하나 현상[事]에 막힌 사람과 현상[事]에 밝되 이치에 어두운 사람이 있어서 드디어 원융하여 둘이 없는 법으로 하여금 변하여 꽉 막혀 하나만 지키는 중생이 되었다.
☀ 위대한 불법을 치우치지 않고 원만하게 잘 알아서 세상에 크게 펼쳐 무수한 중생들을
교화하려면 일불승의 이치도 수용하고,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의 복잡다단한
가르침도 수용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보살들의 가르침도 수용하고, 선불교도
수용하여야 한다. 그래서 차별한 일체법과 일체법의 근본인 진여자성이 원융하여 둘이
없는 이치를 자유자재하게 활용하게 된다.
만약 하나인 진여의 이치만 알고 천차만별한 사상(事象)을 모른다면 꽉 막혀 집착만
일삼는 사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迺至乾竺에 分河하고 震且에 異宗하야는 則平等之慈가
내지건축에 분하하고 진차에 이종하야는 즉평등지자가
自相矛盾하니 良可悲夫ᅟᅵᆫ저
자상모순하니 양가비부ᅟᅵᆫ저
이에 인도에서는 유파가 나뉘고 중국에서는 종파를 달리하여 평등한 자비가 서로서로
창과 방패가 되었으니 참으로 슬퍼할만 하도다.
☀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자마자 기존의 가르침에서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제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상수제자인 가섭존자를 필두로 하여 5백 명의 제자들이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른 견해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그동안의 말씀들을 송출(誦出)하여
제1차 결집을 하여 법을 세우고 기준을 세웠다.
그러나 다시 1백년, 2백년, 3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새로운 견해와 주장들이 등장하여 상좌부와 대중부를 중심으로 20여개의 유파(流派)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 후 불멸 5백년 경부터는 수많은 보살들이 출현하면서 부처님의 근본정신을 보완하려는 대승불교운동이 전개되어 대승과 소승의 격렬한 다툼이 일어났다.
이것이 인도에서 유파가 나눠진 대강의 내용이다.
다시 불교가 중국으로 넘어 오면서 또다시 수많은 주의주장에 따라 다양한 종파불교가
등장하여 각각 다른 견해를 세우면서 부처님의 근본정신인 지혜와 자비를 망각하고
서로서로 비판과 공격을 일삼는 슬픈 일이 일부 있게 되었다.
羅代에 義相法師가 製作此圖하니 其來가 尙矣라 全家宿德이
나대에 의상법사가 제작차도하니 기래가 상의라 전가숙덕이
各以敎網으로 臆解하대 支離蔓莚하야 遂成卷袠하니
각이교망으로 억해하대 지리만연하야 수성권질하니
신라시대에 의상법사(625~702)가 이 그림을 만듦에 그 유래가 오래인지라 전가(全家)의 숙덕(宿德)들이 각자의 교망(敎網)으로 억측으로 이해[臆解]하되 이리저리 넝쿨을 뻗치는 식으로 풀이하여 드디어 권(卷)을 만들고 질(袠)을 이루었더라.
☀ 의상스님은 서기 625년에서 702까지 계셨던 스님이다.
그리고 설잠스님은 서기 1435~ 1493년까지 사셨으니 법성도가 세상에 출현하고 8백여
년이나 되는 동안 수많은 선지식과 학인들이 그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주석을 한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리고 설잠스님으로부터 다시 또 6백여 년이 지났으니
그 사이에 이 법성도를 풀이하고 설명한 글이 또 얼마나 많았는가.
실로 스님의 말씀대로 “각자의 교망(敎網)으로 억측으로 이해하되 이리저리 넝쿨을
뻗치는 식으로 풀이하여 드디어 권(卷)을 만들고 질(袠)을 이루었더라.”라고 하였으나
아마도 지금까지의 그 해석이 수백 종류가 있다.
余가 一覽에 執卷하고 歎曰 淸淨法界에 豈有如此其多言乎리오
여가 일람에 집권하고 탄왈 청정법계에 기유여차기다언호리오
若固如是인댄 湘師가 豈向微塵偈品中에 撮其樞要하고
약고여시인댄 상사가 기향미진게품중에 촬기추요하고
簡出二百一十字하야 莊嚴一乘法界圖乎리오
간출이백일십자하야 장엄일승법계도호리오
내가 한 번 살펴보고 나서 책을 쥔 채 탄식하기를,
“청정한 법계에 어찌 이와 같이 많은 말이 있으리오.
만약 진실로 이와 같은 것일진댄 의상법사가 어찌 미진수의 게송과 품류[偈品] 가운데서
그 근본이 되는 요점만을 모아서 210글자를 간추려내어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를 장엄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 설잠스님은 “청정법계”라고 하였고,
화엄경은 “미진수와 같은 게송과 품”으로 나타냈으며,
의상법사는 그것을 다시 210글자로 압축하여 표현하였다.
혹자는 “마음”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혹자는 “한 물건”이라 하였고,
또 혹자는 “할”을 하였고, 또 혹자는 “둥근 원”을 그려보였으며,
또 어떤 이는 “주먹”으로, 또는 “손가락”으로, “침묵”으로, “주장자” 등으로 표현하였다.
굳이 어떤 형식을 빌려 표현하지 않아도 이미 모든 사람들은 어디서나 한 순간도 그것을 떠나서 존재한 적이 없다.
늘 그것으로 존재한다.
만약 한 순간이라도 그것을 떠나 있다면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然이나 以湘師의 一圈으로 觀之한대 向二百一十字하야
연이나 이상사의 일권으로 관지한대 향이백일십자하야
究其宗旨하면 則不過法性而已오 究其法性하면
구기종지하면 칙불과법성이이오 구기법성하면
則不過隨緣而已니 忽有明眼衲僧이어든 出來道하라
즉불과수연이이니 홀유명안납승이어든 출래도하라
그러나 의상법사의 한 우리[一圈]로써 관찰하건대 210자를 향하여
그 종지(宗旨)를 궁구하면 곧 법성(法性)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요.
그 법성(法性)을 궁구하면 곧 수연(隨緣)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니,
혹 눈이 밝은 납승(衲僧)이 있거든 나와서 일러보라.
☀ 법계도를 살펴보면 마치 양떼들을 모아놓은 우리와 같다.
하나의 우리 안에 210글자가 놓여있는데 가장 중앙의 법성(法性)으로부터 시작하여
불(佛)에 이르기까지 질서정연하게 펼쳐지면서 10조 9만 5천 48자가 설하고 있는
심심미묘한 우주법계와 화장장엄의 이치들을 그 210글자가 다 설파하고 있다.
210글자를 다시 그 중요한 취지만을 간추리면 법성(法性)과 수연(隨緣)에 지나지 않는다.
법(法)이란 일체 차별 현상들이고,
성(性)이란 그 일체 차별현상들의 통일된 하나의 본질이다.
그것이 인연을 따라[隨緣] 천변만화하면서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이와 같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설잠 나는 이같이 설하였다마는 만약 또 어떤 눈 밝은 납자가 있어서 이와 다른 설명을
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말해보라.
자기의 입을 가지고 멋대로 말하는데 누가 말리랴.
조선 5백년 중에 제일가는 천재의 기개가 하늘을 찌르는 도다.
說玄說妙하며 說心說性은 敎有明文이어니와 如何是湘法師가
설현설묘하며 설심설성은 교유명문이어니와 여하시상법사가
未吐一字前消息고 余가 自代云하대 成化丙申臈에
미토일자전소식고 여가 자대운하대 성화병신랍에
說于綠苔軒南窓下라하노라
설우녹태헌남창하라하노라
현(玄)을 설하고 묘(妙)를 설하며, 심(心)을 설하고 성(性)을 설함은 경교(經敎)에 명문(明文)이 있거니와 어떤 것이 바로 의상법사가 한 글자도 내뱉기 이전의 소식인가. 내가 스스로 대신하여 이르기를,
“성화(成化) 병신년(丙申年) 12월[臈]에 녹태헌(綠苔軒)의 남창(南窓)아래서 설하였다.”고 하리라.
☀ 설잠스님의 일승법계도의 글이 거의 모두가 선사가 선의 이치를 논하는 형식이지만
특히 이 단락의 글은 전형적인 선법문이다.
선문 고칙(古則)에 관한 착어(着語)의 형식인 염(拈), 송(頌), 대(代), 별(別), 징(徵) 가운데 대(代)에 해당하는 형식을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스스로 대신하여 이르기를.”이라고 하였다.
의상법사가 210자를 통해서 법성(法性)을 밝힌 화엄의 도리를 설한 내용이란 일체 존재의 유현하고 미묘한 이치를 설한 내용이며,
사람의 일심과 자성의 궁극적 경지를 밝힌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설명은
의상법사가 아니라도 이미 벌써 경전이나 논문이나 어록들 속에 너무나도 많이 나와 있다.
그중에서 의상법사의 일승법계도의 글이 아무리 천하에 제일가는 명문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이요 말이다.
그와 같은 이론이나 말을 떠나서 한 글자도 내뱉기 이전의 소식을 보여줄 수는 없는가?
의상법사의 살아있는 진면목을 드러내 보라.
이렇게 거량을 했으나 의상법사는 8백여 년 전에 이미 가시고 없다.
누가 대신 거량하겠는가.
설잠스님이 스스로 대답할 수밖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여기 이 사람일세.”
실로 순수한 선법문의 형식을 취하여 서문을 쓰고 다시 선법문의 형식을 빌려 법성게를
주해하였다.
성화(成化) 병신년(丙申年)은 서기 1476년이다.
4, 대중에게 보이다.
示衆云하대 建法幢하야 立宗旨는 錦上添華어니와
시중운하대 건법당하야 입종지는 금상첨화어니와
脫籠頭하고 卸角駄라사 太平時節이로다
탈농두하고 사각태라사 태평시절이로다
대중들에게 보여 이르되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宗旨)를 세움은 금상첨화(錦上添花)이거니와 조롱(鳥籠-새장)을 벗어나고 짐바리를 내려놓아야 태평한 시절이로다.”
☞ 각태(角駄): 쇠뿔에 짐을 싣는다는 뜻으로, 몸과 마음을 자유롭지 못하게 얽어매는
‘망상(妄想)’이나 ‘미집(迷執)’을 이르는 말.
☀ 설잠스님은 서문을 써서 마치고 법성게를 설명하기 전에 문득 대중들을 향해서
법어를 한 말씀 내렸다.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기 자신의 삶과도 연관이 되는 말씀이며,
또 다른 세속적으로 출세한 사람들을 향해서 일갈을 던진 말씀이기도 하다.
예컨대 세속에서 높은 관리가 되거나 출가하여도 큰 절을 차지하여 대중들을 많이
거느리고 자신의 사상을 크게 드날릴 수 있다면 세상에 떨치는 명성도 자자하고 추앙도
받고 하여 외형적으로는 얼마나 근사하고 보기에도 좋겠는가.
그야말로 출세한 사람이라.
요즘도 승속을 막론하고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그러나 그들이 남이 보는 것과 같이 마음이 늘 자유롭고 편안할까?
어쩌면 여기저기 걸리고, 이일과 저 일과 이 사람과 저 사람에
걸려서 마음은 늘 답답하고 불안할 것이다.
마치 주인이 모이를 줘서 먹고 사는 데는 걱정 없지만,
새가 새집 속에 갇혀 있다면 그것이 무슨 좋은 일이겠는가.
또 소나 말도 주인이 주는 사료를 먹는 대신 언제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새는 때때로 굶는 일이 있더라도 자유롭게 넓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천 번 만 번
나은 일이리라.
소나 말도 차라리 야생이 되어 굶기도 하고 먹기도 하다가 천수를 다하는 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의 바람직한 길이리라.
그놈의 부귀와 공명에 올가미가 걸려서 시궁창에 빠져 허덕일 소냐.
그것이 어찌 사람이 사는 길이겠는가.
若論頓也ㄴ댄 不留朕迹하니 千聖도 亦摸索不着이요
약논돈야ㄴ댄 불류짐적하니 천성도 역모색불착이요
若論漸也인댄 返常合道니 閙市裏에 七縱八橫이요
약논점야인댄 반상합도니 료시리에 칠종팔횡이요
만약 돈(頓)을 논할진댄 자취가 남아있지 아니하여
1천 성인이라도 더듬어 찾지 못하는 것이오.
만약 점(漸)을 논할진댄 평상의 이치에 돌아가[返常]
세상의 도리에 합하니[合道] 시끄러운 저자 안에서[閙市裏]
멋대로 노닐며 횡설수설할 것이니라[七縱八橫].
☀ 불교는 수행을 주장하는 것이 큰 특징이다.
그런데 수행에는 크게 2가지 이론이 있다.
선불교의 한꺼번에 모든 단계를 다 성취한다는 돈법(頓法)이고,
또 하나는 점차적으로 단계를 하나하나 밟아서 닦아 올라간다는 점법(漸法)이다.
돈오돈수(頓悟頓修)니 돈오점수(頓悟漸修)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돈법이란 모든 중생이 본래 깨달은 존재며 본래 부처님인 존재로서 점차적인
단계를 밟아 올라갈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또 점법이란 중생이 본래 부처님이라 하더라도 진정한 부처님이 되기까지는 십신과
십주와 십행과 십회향과 십지와 등각과 묘각이라는 단계를 닦아 올라가야 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돈법에서는 세상의 어느 사람도 전혀 말이 필요 없지만,
점법은 시시비비의 온갖 설명이 횡설수설하게 된다는 뜻이다.
若論圓也ㄴ댄 箇箇가 立在轉處하야 全機作用하대 不存執則이요
약논원야ㄴ댄 개개가 입재전처하야 전기작용하대 불존집측이요
若論別也ㄴ댄 頭頭가 有人之劔하며 處處에 藏陷虎之機라
약논별야ㄴ댄 두두가 유인지검하며 처처에 장함호지기라
만약 원(圓)을 논할진댄 개개가 전변(轉變)하는 곳에 서서
모든 기능(機能)이 작용하되 궤칙(軌則)을 두지 않는 것이오.
또 별(別)을 논할진댄 두두(頭頭)가 다 살인(殺人)의 검(劍)을 가지며
처처가 다 호랑이를 파묻는 기계를 감춘 것이다.
☀ 선불교에서 돈법과 점법을 이야기하는 한편
또 교가(敎家)에서는 특히 천태사교에서 장교(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로 상세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서는 원융한[圓] 교설과 각각 차별한[別] 교설을 뜻한다.
到這裏하야는 諸天이 捧花에 無路요 外道가 潜窺에 無門이니
도저리하야는 제천이 봉화에 무로요 외도가 잠규에 무문이니
終日嘿하대 而未甞嘿하고 終日說하대 而未甞說하야 毘耶城裏에
종일묵하대 이미상묵하고 종일설하대 이미상설하야 비야성리에
其聲如雷하고 普光殿前에 有耳如聾이어니와
기성여뇌하고 보광전전에 유이여농이어니와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천신이 꽃을 바칠 길이 없고
외도(外道)가 가만히 엿볼 문이 없으니,
종일 침묵하되 침묵한 적이 없고, 종일 설법하되 설법한 적이 없어 비야리성(毘耶城)
안에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며 보광전(普光殿) 앞에 귀 있어도 귀먹은 것 같았느니라.
☀ 모든 것에서 벗어난 진정한 대 자유의 경지란 어떤 것일까.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행할 곳이 소멸해버린,
즉 모든 것이지만 그 모든 것으로 지칭할 수 없는 그 자리이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는 온갖 천신들이 꽃을 바치고자 하나
꽃을 바칠 길이 없고,
그 자리 이외의 길을 가는 사람은 조금도 엿볼만한 틈이 없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은 종일토록 침묵해도 침묵한 것이 아니며,
종일토록 말을 해도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예컨대 유마(維摩) 거사가 비야리성에서 침묵으로써 불이법문을
우레처럼 소리쳤으나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으며,
보광전 앞에서 대승 보살들이 화엄의 도리를 천지가 진동하도록
설했으나 성문과 연각은 아름다운 법회가 열렸다는 소문만 들었지 정작 법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맹인과 같고 귀머거리 같았다.
只如頓中有漸하며 漸中有頓하고 圓中有別하며 別中有圓은
지여돈중유점하며 점중유돈하고 원중유별하며 별중유원은
圓陁陁하며 阿轆轆地하야 大用이 現前일새 殺活이 自由하니
원타타하며 아록록지하야 대용이 현전일새 살활이 자유하니
丈六이 莖草요 莖草가 丈六이라 信手拈來에 無有不是니
장육이 경초요 경초가 장육이라 신수념래에 무유불시니
是什麽境界오 看取新羅義相和尙의 法界圖一圈하라 ○
시십마경계오 간취신라의상화상의 법계도일권하라 ○
가령 돈오(頓悟) 속에 점수(漸修)가 있고 점수 가운데 돈오가 있으며
원융(圓融)한 가운데 차별(差別)이 있고 차별 속에 원융이 있음은,
둥글고 둥글어[圓陁陁] 걸림 없이 바퀴처럼 굴러가서[阿轆轆地]
큰 작용이 앞에 나타나 부정[殺]과 긍정[活]이 자유자재하니
부처님의 크신 몸이 작은 풀잎이요 작은 풀잎이 부처의 큰 몸이라.
손이 닿는 대로 집어내어도 맞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어떤 경계이던가.
신라 의상화상의 법계도(法界圖) 한 우리[一圈]를 잘 보아라.
“〇”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다.
☀ 예컨대 씨앗 속에는 이미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으며 잎을 맺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다 갖춰져 있다.
씨앗의 입장에서 보면 돈법 아닌 것이 없고,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잎을 맺는
그 입장으론 점법 아닌 것이 없다.
원융과 차별의 이치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일체 세상 이치가 이와 같으며 불법의 심오한 이치도 그렇다.
이같이 본다면 흘러가는 자연현상들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들도 그대로 완전무결하여 더이상 고칠 것이 없으며 손댈 것이 없다.
의상스님의 법계도와 법성게는 그렇게 원만하고 완전무결한 일체 존재의 됨됨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또 설잠스님의 “〇” 일원상이 그것을 말없이 나타내는 도리이다.
역시 전형적인 선법문의 격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일원상(一圓相)에는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글이 있다.
고불미생전(古佛未生前) 응연일상원(凝然一相圓)
석가유미회(釋迦猶未會)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
옛 부처님 나기 전에, 응연하게 한 모양이 둥글었네.
석가모니 부처님도 알지 못하거늘, 가섭이 어찌 전하리오.
5, 대화엄(大華嚴)의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大華嚴一乘法界圖 대화엄일승법계도
向上의 一路는 千聖도 不傳이니 旣是不傳底消息인댄
향상의 일로는 천성도 부전이니 기시부전저소식인댄
祗這法界一圖는 從何而出고 只如縱橫屈曲과 字點斑文이 是圖耶아
지저법계일도는 종하이출고 지여종횡굴곡과 자점반문이 시도야아
白紙一幅에 說玄說黃이 是圖耶아 湘法師가 擬心動念하야
백지일폭에 설현설황이 시도야아 상법사가 의심동념하야
垂慈利物이 是圖耶아 只如朕兆未萠과 名器未形이 早是圖耶아
수자이물이 시도야아 지여짐조미맹과 명기미형이 조시도야아
(良久云) 領取鉤頭意하고 莫認定盤星하라
(양구운) 영취구두의하고 막인정반성하라
대화엄(大華嚴)의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깨달음보다 더 나아간[向上] 한 길은 일천 성인도 전하지 못하니
이미 전하지 못하는 소식이라면
이러한 법계(法界)의 한 그림은 무엇에서 나온 것인가?
종횡으로 구불구불하고 글자와 점이 얼룩덜룩한 것이 이 그림인가?
백지 한 폭에 검은 것을 설하고 누런 것을 설한 것이 이 그림인가?
의상법사가 마음을 쓰고 생각을 움직여 자비심을 드리워서 만물을 이롭게 함이
이 그림인가?
조짐이 아직 싹트지 않고 그릇이 미처 형상을 이루지 아니하였을 적에 벌써 이 그림인가?
잠자코 있다가 이르되 “낚시 바늘을 드리운 뜻을 알아차리고 정반성(定盤星-저울대 눈금)의 표식을 오인하지 말라.”
☀ 앞에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는데 가섭이 어찌 전하리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의상스님은 법계도와 법성게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즉 그 소식은 처음부터 일천 성인들도 전하지 못하는 소식이다.
그래서 석가도 모르는 소식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선가(禪家)에서는 석가는 가섭에게 전하고,
가섭은 또 아난에게 전하고 하여 달마에게 까지 전하여 졌으며,
다시 혜가에게 전하고 등등,
그것을 전했다는 말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
그것은 아마도 고기를 잡기 위해서 바늘을 드리운 소식이리라.
東土義湘述世尊이 七處九會에 爲頓機人하야 說頓部가
동토의상술세존이 칠처구회에 위돈기인하야 설돈부가
已是錯了也어든 義相法師가 向淸平世界에 爲什麽鑿空摸影하야
이시착료야어든 의상법사가 향청평세계에 위십마착공모영하야
不識好惡하고 說這般閑話오 到這裏하야는 安着一字가 肉上剜瘡이요
불식호악하고 설저반한화오 도저리하야는 안착일자가 육상완창이요
減着一字가 眼中着屑이니 於最淸淨法界上에 且喜沒交涉이라
감착일자가 안중착설이니 어최청정법계상에 차희몰교섭이라
동토(東土) 의상(義湘)의 저술
세존(世尊)께서 7곳에서 9차례의 법회를 열어 돈기(頓機)의 사람을 위하여
돈부(頓部)를 설한 것이 벌써 잘못되었거늘,
의상법사는 청정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향하여,
무엇 때문에 허공을 뚫고 그림자를 더듬어가며,
좋고 나쁜 것도 모르면서 이같이 부질없는 이야기를 설하는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글자 한 자도 가져다 붙인다는 것이
멀쩡한 생살에 긁어서 상처를 냄이요,
한 글자를 빼낸다는 것이, 눈 안에 가루를 묻히는 것이니,
가장 청정한 법계와는 어쨌거나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다.
☀ 세존께서 6년의 고행 끝에 니련선 강에서 목욕하고,
마지막으로 보리수 아래에 앉아 7일간의 깊은 선정에 들어
온갖 마군을 항복 받고 나서 드디어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그리고는 그 정각의 내용을 남김없이 쏟아 낸 것이 화엄경이다.
화엄경은 7장소 9번의 법회를 열어 39품의 방대한 설법을 하였다.
그 내용은 듣는 사람들의 근기와 수준을 맞춰가면서 알맞게
설한 것이 아니라 돈기(頓機)의 사람,
즉 대심범부(大心凡夫)들을 위해서 최고의 경지를 설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입장으로는 크게 틀린 일이다.
그런데도 다시 의상법사는 청정본연하고 태평무사한 세계를 향하여 어지럽게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이러한 경우라면 설사 글자 하나만을 놓는다 하더라도 멀쩡한 생살 위에 긁어서
상처를 내는 일이고,
한 글자를 뺀다는 것은 눈 안에 금가루를 뿌리는 일이다.
금가루가 귀한 것이기는 하나 밝은 눈에 큰 병을 불러올 뿐이다.
청정법계 위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왜 그런 일을 하는가?
반드시 의도하는 바가 있으리라.
雖然이나 法은 本法無法하대 無法法도 亦法이니 今付無法時에
수연이나 법은 본법무법하대 무법법도 역법이니 금부무법시에
法法이 何曾法고
법법이 하증법고
비록 그러나, 법은 본래 없는 법을 법 삼되
없는 법이란 법도 또한 법이니
이제 없는 법을 부촉할 적에
이런 법과 저런 법이 언제 법인 적이 있었으랴.
☀ 이 게송은 조당집과 전등록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전하신
게송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에서 법이라는 말을 매우 소중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고정되게 이런 것이 “법”이다. 라고 지칭할 만한 법은 없다.
다만 없는 법을 법이라고 가정하여 이름할 뿐이다.
伊麽인댄 則將山河大地와 草木叢林을 一一拈來하야 作一切法도
이마인댄 즉장산하대지와 초목총림을 일일념래하야 작일체법도
亦得이요. 將語默動靜과 縱橫妙用을 一一覷破하야 作不是法도
역득이요. 장어묵동정과 종횡묘용을 일일처파하야 작불시법도
亦得이니 奈爲如此오
역득이니 내위여차오
그렇다면 산하대지와 초목총림을 하나하나 집어내어 일체법이라고 하여도
또한 옳은 것이요,
어묵동정과 종횡묘용을 하나하나 간파(看破)하여 이것이 법이 아니라고 하여도
또한 옳은 것이니,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 먼지와 작은 세포에서부터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와 저 드넓은 우주에 꽉 차 있는 무한한 은하계의 수많은 별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법이라 해도 맞고,
또 그것들을 법이 아니라 해도 맞는 말이다.
왜 그렇게 모순된 말을 하는가? 그 까닭은 아래에 설명하였다.
我爲法王이라 於法에 自在하야 拈放이 在我하고
아위법왕이라 어법에 자재하야 념방이 재아하고
與奪이 臨時ᅟᅵᆯ새 將此一圖하야 作一法界로다 咄하다
여탈이 임시ᅟᅵᆯ새 장차일도하야 작일법계로다 돌하다
내가 법왕(法王)이 되어, 법에 자재하여, 잡고 놓음이 내게 있고,
주고 빼앗음을 때에 맞추니, 이 한 그림을 가져다가
하나의 진리의 세계[一法界]라고 하는 것이다. “돌(咄).”
☀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법의 왕이라 법에 자유자재해서 그것들을 법이라 하든지 법이 아니라 하든지 모든 결정은 각자에게 있다.
주든지 빼앗든지 그것도 또한 각자가 마음대로 그때그때 따라서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상스님은 이와 같은 그림 한 장을 그려놓고 하나의 법계(法界)라고 하였다. 어떤가?
거기에 다시 또 무슨 사량 분별을 붙이는가?
자 나는 “돌(咄)”이다.
“돌(咄)”이란 앞에 있었던 그 어떤 훌륭한 법문도 다 부정하여 쓸어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다른 사람의 견해를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의미로 이 “돌(咄)”을 남발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7월 23일 여기까지 === 다음 주 30일은 대면수업입니다.
지금까지 대면강의 때 공부한 설잠스님의 법성게를 공부하였고
다음에 이어서 게속 연재하겠습니다.
좀 더 신경써서 보고, 이해가 안가면
대면 수업에 한번 오셔서 밥먹으면 다 알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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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 지으셨습니다
삼복더위에 건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