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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뵈온 것이 지난 9월 24일 저녁 무렵, 안암동 고려대 병원에서였습니다.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문병이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때 간 것도 자의(自意)가 아니었지요. 선생님께서 "일본불교에 관한 책을 일본불교사연구소에 물려주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번 봤으면 좋겠다는 뜻을 안숙경 보살님을 통해서 전해왔기에 간 것입니다. "문제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저 자신에게도 주입하고 있었고,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수술 이후 경과가 좋아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책을 주겠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안숙경 보살님을 통해서 전해 듣고서는, "아하, 이 분이 이생의 인연을 정리하려고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정말로 저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시고 가셨습니다. 정말 제가 그런 상황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을 화두로 던져주신 것이지요. 선생님께서는 하나하나 주변정리를 하시고 계신 것같은데, 그렇게 주변정리를 해야 하는가? 그리고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정말로 최후의 순간까지도 살려고 투쟁해야 하는가? 이 물음을 던져주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께서 주변을 정리하고 생을 마감하는 준비를 하는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고 나면 책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 책으로 공부해서 좋은 글 좀 쓰고 나서 죽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책 받기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지요. 그러고서는 내년 봄에 할 제5차 학술세미나에서 "묘에(明惠)스님의 꿈이야기에 대해서" 논문을 발표해 달라고, 발표자로 섭외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작은 수첩을 끄집어 내서는, "2011년 4월 2일, 明惠 꿈"이라고 적어넣었습니다. 발표를 수락한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의 기세에 눌려서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저로서는 생(生)에 대한 의지를 그렇게라도 해서 불어넣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선생님, 그런 한편으로 저는 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음을 이제 고백합니다. 가시게 된다면 편안한 마음으로 저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로 가십사 하고 말입니다. 마침 우리 역경부 스터디 그룹에서 번역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의 "나무아미타불" 중에서 '삼부경' 파트를 윤문하였는데, 그 부분을 제가 프린트해서 드린 것이지요. 읽어보셧는지요? 저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바랐습니다.
선생님, 어제 본각스님께서 회장으로 계신 불교학연구회에서 '일본불교의 기원, 토착화, 영향"이라는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했습니다. 선생님의 은사 기무라 기요타카(木村淸孝)선생님도 오셨습니다. 제가 원영상 선생님 발표에 논평을 하였습니다. 그 모두에 저는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불교학연구회에서 2년전에만 이런 주제의 세미나를 하였던들 제가 주제넘게 '일본불교사연구소'를 한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본각스님께서 웃으시더군요.
그렇게 "일본불교를 제대로 연구하고 공부하자"는 깃발을 올렸을 때, 일본불교의 전문가가 아닌 저로서는 사실 만용도 그런 만용이 없었지요. 전문적인 지식의 준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재정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재정은 또 그렇다치더라도, 적어도 함께 이 일을 해나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말 고인이 말씀하신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이 없었습니다(四顧無人)." 김천학 선생님과 원영상 선생님이 학위를 따시고 귀국하셨지만, 각기 금강대와 동국대의 연구교수로 매여있어서 본격적인 동참은 어려웠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학위를 못 하시고 오신 때문인지, 오히려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이어서 "우리가 함께 일본불교사연구소를 일구어보자"고 의기투합하였지요.
정말로 선생님께서는 좋아하셨습니다. 몇번이고 "이 일본불교사연구소는 나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같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서는 제가 "인물로 보는 일본불교사"를, 선생님께서는 "묘에의 꿈이야기"를 강의하기로 계획하였지요. 묘에스님은 평생 꾼 꿈을 다 기록하신 '유메노키(夢記)'라는 저술을 남기셨고, 선생님께서는 그 책의 번역과 연구를 추진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꿈'이라면 매우 좋아하는 주제입니다. 제 첫 시집 제목이 "꿈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도 묘에스님의 영향이 있습니다만,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우리 삶 그 자체가 꿈이라는 것을 인식한 뒤에라야 비로소 불교가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09년 늦여름,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강의를 중심으로 한 "한일문화교류아카데미" 개원 준비를 한창 하던 어느날 저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인사동 "귀천(歸天)"에서 선생님께서는 병이 찾아왔노라 말씀하셨지요. 그때 역시 저는 "노 플라블럼", "다이조부"라고 힘주어 말씀드렸지요. 병은 의사가 다 알지 못한다. 병원에서 죽는다 해도 안 죽는다. 안 죽을 수 있다. 스스로 병에 질 때만이 죽는 것이다. --- 선생님께서는 "김호성 선생님 이야기를 들으니 힘이 난다"고 하였지요.
같이 4호선을 타고 오면서, 선생님께서는 심인자(沈仁慈)선생님 이야기를 하셨지요. 선생님, 저 역시도 심인자 선생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심인자 선생님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나중에 제가 일본불교에 관심을 갖고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유학가서 일본불교를 전공한 1호 박사가 심인자 선생님이었는데, 불행히도 학위취득 후 얼마지나지 않아서 작고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필, 그것도 같은 병입니까! 선생님께서는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요?
선생님, 수술 이후 다시 건강을 찾으시는가 했는데, 다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암동 병원에서 돌아나오면서도 이렇게 빨리는 아니라 생각하였습니다. 10월 8일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지요. "논문 발표 못 한다"고 하셨지요. 그때도 저는 용기를 불어넣는 말씀을 드렸지요. 죽을 수는 없다. 하루라도 더 살아라, 고 말입니다.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10월 29일, 안숙경 보살을 통해서 "지난 10월 22일 이연숙 선생님이 작고하셨다"는 부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빨리, 는 아니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금년은 넘기지 않을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마침 저희는 그 전날, 이 시대의 가장 빼어난 여성불교학자인 안옥선(安玉善) 선생님께서 가셨다는 부고를 받은 터라, 저희의 충격과 슬픔은 더하였습니다. 그래 시가 한 편 나왔습니다.
누가 또
죽었다는 전갈인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파발마여
봉화여
죽는다는 것은
다시 어디를 가더라도
다시는 그 사람
만날 수 없고
찾을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안을 수도 없다
는 소식이네
죽었다, 는 소식은
우리에게
찰나찰나 깨어있어라
찰나찰나 죽음을 준비하라
염라대왕의 사자가 바로 문 앞에 이르렀다
외치는 소리라네
누가 또
죽었다네
그러므로, 그렇게
그대 죽으리
나도 죽으리
안옥선 선생님과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시 "부고(訃告)"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삶, 죽음을 준비하는 삶이 되라고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연숙 선생님, 극락에 조금만 계시다가 다시 오세요. 아미타부처님 가르침을 들으시고 부처 이루신 뒤, 어서 빨리 사바세계로 돌아오세요. 못다 하신 묘에스님 꿈이야기 다시 들려주셔야지요. 그래서 모든 이웃들이 우리 삶이 다 꿈임을 깨우치게 하소서.
"이룬 것이 없다. 학위도 못하고 ---" 이런 회한(悔恨)은 하지 마세요. 결과도 물론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 결과를 비록 이루지 못했더라도 어떤 결과를 바라고서 도전하고 뛰어들고 노력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찬탄받아야 할 삶이라고 저는 믿기 때문입니다.
심인자 선생님이나 선생님이나 더 오래 우리 곁에 살아있을 수 있었다면, 그래서 일본불교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더라면, 우리 불교는 또 달라졌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더 슬픕니다. 부디 이 생에 못다 부른 노래에 대한 회한은 내려놓으시고, 평안하시길 빕니다. 부족하지만 이제 그 노래는 살아있는 길벗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심인자 선생님 뵙게 되면 우리 일본불교사연구소 이야기도 하시면서, 함께 행복하소서. 아, 선생님께서 추모논문집을 만들어 드렸던 김지견(金知見) 선생님도 만나뵈올 수 있겠네요. "아, 오백 생의 인연일세" 그러시면서, 선생님을 격려해 주실 것입니다.
선생님,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께 바치는 제 노래 한 곡 들으시고 편히 쉬소서.
영양사 그만두고 불교학 하잤더니
학위논문 쓰는중에 병마가 웬말인가
묘에스님 꿈이야기 하시지도 못하더니
사는것이 꿈이라 몸으로 보이시네
나무아미타불
불기 2554(2010)년 11월 14일
김호성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