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제일촌 정감呈坎 마을
그림 1). 정감 마을이 막 떠오른 아침햇빛을 받으며 아직 안개 속에 잠겨 있다.
몇 가지 자료를 본 후 정감(呈坎) 마을에 들어갔을 때 나는 이 마을이야말로 정말 잘 보존된 휘주의 대표적인 마을이라고 생각했다. 마을에는 송대와 원대 건축이 하나씩 있고 스물 세 채의 명대 건물과 백 삼십여 채의 청대건축이 있었다. 송대는 고려초기이고 원대는 고려 후기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중 후기 건축은 손으로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한 마을에 이런 건축이 몰려 있다는 것은 중국에서도 드문 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명대 만해도 조선초기에 해당되고 청대는 조선 후기에 해당되니 이 마을은 가히 중국 건축사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마을에서 며칠 묵으면서 이런 저런 자료를 보고 또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마을은 이미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졌고 수많은 건축물과 기념물들이 사라진 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을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 할 수 있는 입향시조의 사당인 문창사(文昌祠)가 1948년 국공내전 때 불에 타버렸고, 1949년 정부수립 후 마을 주변의 불교사원 도교사원 정자 누각 등이 파괴되었다. 문화대혁명은 과거 역사적인 모든 것을 송두리채 앗아가 버렸는데 마을의 상징적 기념물인 석패방 두 개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옛 다리와 도교사원 두 곳 20개의 사당, 그리고 수백을 헤아리는 민가건축물들이 파괴되었다. 두번째로 들어온 소위 후라씨(後羅氏)의 사당인 문헌사(文獻祠)도 훼손되었다.
1980년대까지는 그래도 명대 건축이 36곳 청대 건축은 300을 넘게 헤아렸는데 지금은 그 수가 절반 수준으로 줄었으니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근 이십년 동안 훼손된 것만 해도 적은 수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남은 것도 마을을 돌아보면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그냥 스러져가는 것들이 적지 않으니 이대로 가면 또 절반을 잃은 것은 시간 문제일 것이다.
그림 2). 원대 건물인 왕지정 소유 건물. 이 곳의 집들은 대체로 이처럼 견고한 성채와 같다.
좁은 출입구를 제외하면 일체의 문이 없고 창문도 겨우 햇볕을 약간 받을 정도의 좁은 틈을 냈을 뿐이다.
방화와 방범이 이유라고 한다.
천칠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나씨 동성마을
정감 마을의 역사는 이미 동한 삼국시대에 여(呂) 김(金) 손(孫) 삼성이 살고 있었다고 하니 천칠백년을 훨씬 넘는다. 당시와 관련된 유적으로 지금까지 여씨집 우물(呂家井) 김씨집 우물(金家井) 손씨거리(孫家巷) 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 마을의 대성을 이루는 성씨는 나씨(羅氏)이다. 나씨가 마을 전체의 약 75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하니 이 마을은 나씨의 동성마을인 셈이다. 휘주지역은 안동처럼 동성마을들이 많다. 나씨가 들어온 것은 당나라 말기라고 하는데 강서성(江西省) 남창(南昌)의 나천질(羅天秩, 號:文昌)과 그의 사촌형 나천진(天眞, 號:秋隱)이 집안을 이끌고 당시의 전란을 피해 이곳에 오면서 이곳은 나씨 마을이 되었고 새로운 역사가 열리게 되었다. 먼저 온 나천질을 전라씨(前羅氏)라 하고 뒤에 온 나천진을 후라씨(後羅氏)라고 부른다. 이들은 마을의 본래 이름이었던 용계(龍溪)를 정감(呈坎)으로 바꾸고 정감라씨가 되었다. 정감라씨는 이후 인구가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정감이 속한 흡현(歙縣)의 팔대성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마을은 사방이 여덟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형상이 마치 팔괘(八卦)의 모양과 흡사하다고 하여 팔괘촌이라고도 하는데 정감(呈坎)이란 팔괘 중에서 특히 감괘(坎卦)의 형상을 띠고 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나씨족보에는 땅이 하늘을 향한 것을 정, 밑으로 움푹 꺼진 것을 감이라 한다고 하고 있어 정확한 의미는 알기 어렵다. 전체적인 지형은 북쪽으로 산을 의지하였고 나머지 삼면은 면적은 넓지 않지만 정감분지라 하는 평야가 붙어 있다. 마을의 북동쪽에서 흘러와 마을 동쪽 부분을 관통하여 남으로 꺾여 흐르는 중천하(衆川河)가 마을을 감싸고 북쪽으로는 중천하의 지류가 산 밑으로 해서 중천하로 합류하여 마을은 삼면이 물로 감싸였고 한쪽이 산으로 막힌 요새같은 지형이다.
장춘산 남록에 주희의 조상이 살던 주촌이 있다. 정감나씨 족보에 주희 시조 주고료(朱古僚) 장군이 주촌에서 낳은 딸을 정감의 전라시조 문창공(나전칠)에게 시집보냈다. 주희는 나씨족보서문에서 그와 나원(羅愿) 두 사람이 주촌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는 정경을 묘사하였으며 아울러 落款에 "같은 마을 아우 주희가 배서함[同里眷弟 朱熹拜序]이라고 썼다. 나씨들은 그들이 주희 집안과 깊은 교분이 있음을 지금도 자랑거리리로 삼고 있다.
주희의 아들 朱在도 또한 라씨족보에 "羅始祖朱氏祖妣墓記"를 남겼다. 주촌에는 옛날 주희가 직접 쓴 "朱村闕里"라는 木牌坊 하나가 있었다. 패방은 일주문처럼 만든 큰 문 형태의 기념물로 나무로 만든 목패방과 돌로 만든 석패방이 있다. 정감촌이 강남제일촌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도 주희가 이곳을 "정감쌍현리 강남제일촌(呈坎双賢里 江南第一村)"라고 부른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림 3). 명대의 삼층 건물인 연익당 마당에서 올려다본 하늘이다. 중국에서는 이 하늘을 천정으로 부른다.
안동지역처럼 폐쇄적인 건물구조를 볼 수 있다.
강한 조상의식과 세계문화유산에의 열망
내가 마을에 들어간 날은 청명 바로 전날이었다. 중국인들은 이곳 사람들은 청명절에 조상 분묘에 제사지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종이돈을 만들거나 종이로 신발이나 옷 등을 만들어 묘지에서 태우고 향을 피우며 흰 종이를 나무에 매달아 묘지에 세워 조상에 예를 갖춘다. 청명절 아침에 산에서 만난 한 남자는 그의 누이동생과 함께 와서 성묘를 했는데 자기의 부인을 함께 하지 않고 여동생과 함께 한 것이 주목되었다. 여동생 역시 결혼하였으므로 자기 시집이 있을 것이나 성묘 때는 친정 부모의 산소에 성묘를 하고 있었다. 이는 출가외인이라는 유교적 관습에서 벗어난 것인데 이곳이 유교적 전통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유교적 관습이 형성되기 이전의 오랜 전통적 관습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마을의 한 집에서 만난 사람은 청명절을 맞이해서 일본에서 이곳까지 온 사람인데 오래전에 유학을 해서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그곳에서 정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명절에 일본에 있는 또 하나의 동생과 함께 귀국하여 성묘를 하는 것을 보니 이 마을 사람들의 조상 숭배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중국인들과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진촬영을 위해 그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정감 마을의 연구가 부족하여 오랜 역사와 빛나는 조상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되지 않음을 말하며 외국에서 와서 이 마을에 관심을 가져준데 감사한다고 했다.
그가 걱정해서가 아니라 정감촌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고 또 많은 문화유적과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여 이미 현재의 상태만으로도 중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수 있는 중요한 마을로 주목받고 있다. 정감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이미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된 굉촌(宏村)과 서체촌(西遞村)이 있어서 휘주지역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오랜 민가와 사당 사묘 등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마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 마을에 들어가 보면 마을은 이미 거대한 기념품 상으로 변해버렸고 마을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생활하고 있고 또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으나 왠지 살아있는 생기를 느끼기 어려운 분위기를 버리기 어렵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는 많은 관광객을 몰고 오는 효과가 있어서 그래도 다른 마을보다는 사람들의 생활이 좀 더 낳은 여건을 가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러한 효과는 다른 마을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하고 싶어 하도록 유도하게 되어 현재 당모촌(唐模村) 등 몇 군데 마을이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 4). 명대 나동서 사당의 뒷쪽 건물인 보륜각. 기둥의 공포가 투각으로 되어 있고 들보에 채색화가 화려하게 남아 있다.
관광 개발 그리고 주민들의 삶
이러한 분위기는 정감촌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 별 넷 수준의 대형 호텔이 막 공사를 시작했고 마을은 주변부터 서서히 변화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이미 어느정도 관광에 눈을 뜬 사람들은 마을 안의 오랜 고건축물들을 매입하고 있으며 그 새로운 주민들은 물론 외지의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 조상들이 남긴 자랑스런 역사를 큰 긍지로 삼고 있으나 외지의 사람들 손에 마을의 중요한 문화유산이 하나 둘 넘어가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마을에서 만난 왕씨성을 가진 한 사람은 마을의 가장 오랜 원대 건축물을 사들였다. 그는 허페이(합비 合肥)에서 온 사람으로 황산지역의 공안국에서 근무했다고 하는데 오년전 거금을 들여 이 집을 사들이고 지금 다시 집을 산 돈보다도 훨씬 많은 돈을 투자하여 앞집을 매입하고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있었다. 집안에는 명나라와 청나라 때의 침상이 있었고 욕실을 건물의 형태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대적으로 깨끗하게 꾸며놓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집이 이전에 어떤 명칭으로 불렸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또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잘 알고 있는 은퇴한 교장선생도 모를 정도로 이웃 주민들과도 그리 가깝게 교류하고 있지는 않는 듯했다. 다만 이곳의 촌장이라든가 또는 고위직 행정관료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정황은 이 마을이 현재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마을 사람들이 이런 사람을 그리 달가와 하지 않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을 깨끗하게 한다거나 관광객들에게 친절히 한다거나 하는데 그리 관심이 없어요. 마을 입장료가 아무리 비싸도 주민들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그냥 관리들의 업적을 만들고 관광개발을 맡은 여유공사(旅遊公司)의 이익만 낼 뿐이니까요."
좁은 골목길이 가축분뇨의 냄새로 코를 찌르고 어떤 곳은 청소가 안되어 발을 딛기가 어렵다는 불평에 어느 주민이 들려준 말이다.
정감 마을에서 안동의 마을들이 생각나는 까닭은
지금 이 마을을 상징하는 것은 중천하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나동서사당(羅東舒祠堂)이다. 명나라 가정년간(嘉靖年間)의 1539년 경에 처음 세워졌으며 건물면적만 해도 3300여 평방미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물이다. 공묘(孔廟)를 모방해서 지었다는 이 사당은 정문의 길이만 26.5미터이고 높이가 4.5미터에 이르니 전체 규모가 얼마나 크겠는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휩쓸고 가면서 모든 사당과 사묘 등의 건물들이 사라졌는데 이 건물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은 당시 이곳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 주민이 말해주었다. 마을 북쪽의 이 사당에서 남쪽 끝에 있는 곡신에 제사하는 장춘사(長春社)의 사이에는 모두 나씨 일족이 거주하는 마을이고 그 사이에 전나씨와 후나씨의 사당 그리고 그 두 문중이 함께 제사하는 합동사당이 있었는데 나동서 사당의 규모에 못지 않음은 사당이 있던 자리를 찾아보면 대강을 알아 볼 수 있다.
나동서당을 지키고 있는 나회정(羅會定) 선생은 문중재산이었던 이 사당이 국가에 귀속된 후 사당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아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는 초라한 노인이 되었지만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자긍심이 외지에서 온 우리 앞에서 꼿곳하게 허리를 펴고 서서 환한 웃음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었으나 이제 서서히 마을이 단순히 관광지로 변화되면서 그 자긍심이 돈 앞에서 무너지게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마을은 점차 바뀔 것이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고 개발 이익이 주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마을은 껍데기만 바뀌고 주민의 생생한 삶이 숨쉬는 마을이 아닌 새로운 자본이 주민을 밀어내고 마을을 잘 화장된 여자 얼굴처럼 바꾸게 되될 것이다. 또 이러한 우려는 중국의 한 마을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안동의 마을들이 똑같이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을 정감촌에서 며칠을 묵으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다.
vb
그림 5). 정감 마을의 노인과 어린이. 이 어린이들이 마을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