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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소시집 리뷰
시적 혁명, 사유의 반란
권성훈(시인, 문학평론가)
1.
시는 혁명이다. 시적 혁명은 기존 언어에 대한 반란을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이전의 물질적 세계의 현상들을 전복시키는 실권을 통해 한 편의 시가 생성되는 것. 그것도 최소한의 언어적 조합만으로 특징적 사유를 구성하고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서 사물을 규정한다. 세계의 얽매임을 물질과 동일화시키면서 기왕의 언어를 벗어나는 시편은 세계를 혁명적 언어로 창조하는 것. 이러한 시적 혁명은 역지사지가 통하지 않는 데서 기획되며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다. 특히 지배자가 피지배자에 대한 불균형을 지속적으로 파급시키고 정의가 조달되지 않을 때 피지배자가 지배자를 강제하며 전복시키기 위해 혁명이 작동되듯이. 시도 일상적 언어 또는 과학적 언어가 가진 이성적인 발화방식이 통하지 않을 때 내적인 내전을 거치면서 등장한다.
거기에 한 사회의 지배적 가치가 억압적일 때 사회체제의 본질에서 멀어질 때 다른 사회체제로의 이행을 위해 조직적으로 혁명이 발생하는 것처럼. 마치 혁명적 시편도 가치가 부재한 현실에 집중하거나 초월하면서 나타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그것은 주체적인 의미에서 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단순한 교체가 아니라 현 체제에 관계하는 권력 효과의 해체를 의미하며 역사를 창조적으로 변화시킨다. 김완 시인은 “분노하고 저항하지 않으면 예속된 삶을 산다/법전만을 들고는 이상 사회 건설을/꿈꾸거나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광주의 큰 별이 되다」), 이 같은 「혁명을 위해」 노혜경 시인은 “시를 쓰자, 모든 혁명은/아직 오지 않은 날들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부조리로 공정성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유린 될 때 모순이 생겨나며, 권력은 모순을 통제하기 위해 억압을 작동시킨다.
그러나 법은 대다수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오히려 이 법을 사용하는 권력은 ‘법전’을 통해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현실에서 ‘법전’ 만으로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거나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데 무용할 수 있다. 혁명이란 분노와 저항을 통해 지배자를 교체하는 데만 집중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체제는 물론 구조 자체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피지배자들이 바라는 혁명은 핵심 과업으로서 존재하며 혁명을 위해서라면 “대중의 가슴에 불 지르는” 노래로 오늘을 살고, “전위의 피를 끓게 하는” 시로 파급될 수 있는 것. 그것은 역사적으로 “어제의 시는 오늘의 노래가 되고/오늘의 시는 또 내일의 노래가 되리니”라는 믿음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김완 시인과 노혜경 시인의 시편에서 세계에 대한 주체의 변증법적 전환을 위한 지배와 존재자 사이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혁명적 시편들이 지배적이다. 그것도 타자로부터 출발한 현재에서 자기로 귀환하는데 시는 존재자에 대한 반란의 언어로 치른 대가로서의 기록인 것. 여기서 시인은 자신에게 머물면서도 타자와 세계에 몰두한다. 이러한 몰두의 방식으로서 이들의 시편들은 현재 유해 한 세계에 관여하며 제한된 것들을 해체하거나 해제하면서 존재적 당위성을 가지게 한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언제나 자유롭지만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얽매임이다. 현재의 물질적 성격은 과거가 짓누른다거나 자신의 미래로 인해 불안해한다거나 하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현재의 물질적 성격은 현재가 현재인 한 현재와 결부된다. 현재는 존재의 무한한 흐름에 균열(찍음)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현재는 지금에서 출현하는 것으로, 미래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상태로 흐른다. 또한 현재는 자기 자신에 관여하는데 그것은 전환된 물질성으로 현시되며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할 때 현실에서 불만족이 일어난다. 혁명적 시편 역시 현실의 불만족을 견인하는 것으로 지금의 출현으로부터 현출된다.
2.
이 불만족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바로 반란과 내전과 같은 사회적 현상으로 치환되는데 성공과 좌절에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혁명과 반역의 길항에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시를 쓰는 것도 부재한 것에 대한 잉여의 결핍을 채우려고 하는 현상으로서 언어에 대한 반란이며 내적인 것에 대한 내전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아이러니하게도 벗어나려고 하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자아의 자기로의 복귀를 시를 통해 승인하면서. 구원이란 하늘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듯이 시 또한 초월적 공간에서 생기지 않는다. 일상적 삶 속에서 발화되는 시는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고 가능한 현실의 부조리를 분명히 꿰뚫어 보고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가운데 김완의 시편에서 관찰되는 생명은 혁명의 구심점이 되고, 노혜정의 시편에서 투사되는 죽음이 혁명의 중심축이 되고 있다. 김완의 생명과 노혜정의 죽음에서 혁명은 이미 이 세계에 도달해 있는 것으로 현실에 대한 반란과 내전과 같이 불안한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촉발된다.
동안거에 들어간 불갑산 아래 겨울 호수에서 보았다
결가부좌로 묵상에 잠겨 있는 눈 덮인 겨울 산
적막을 품고 있는 눈꽃들의 눈부신 화엄(華嚴)을 보았다
간간이 사선으로 날리던 눈발이 수직으로 내려앉아
형체 없이 스러지는 호수에는 작은 새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지의 생명들 모두 숨죽이며 자발적 위리안치 중이었다
서해 바다로 눈보라가 몰려가는지 중천에 뜬 해가
제 모습을 잃고 비틀거리는 한낮 연사흘 내내
나뭇가지에 쌓인 눈 무게를 못 이겨 적막을 깨운다
뽀드득 눈 밟는 소리에 스스로 놀라는 발자국을 따라간다
하늘에서 만들어져 지상에 머물다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찰나의 생(生) 가여운 눈이여 집에도 길 위에도 나는 없었다
적막이 적막을 물어 나르는 산중에 막막한 생(生)의 그림자여
중천의 해가 드러났다 사라지는 아득한 그곳에 눈보라 칠 때
외로움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언젠가는 나로 돌아가리라
김완, 「적막에게 묻다」 전문
적막은 고요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침묵이며 소리에 대한 반란으로부터 비롯된다. 이에 침묵은 적막으로 ‘말하는 것’과 실제로 ‘의미하는 것’ 사이를 횡단하지만, 본질을 알지 못하는 이상 침묵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그 사이 적막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탐색하며 긴장과 이완을 끊임없이 이어가게 만든다. 마치 “동안거에 들어간 불갑산 아래 겨울 호수”처럼 혹은 “결가부좌로 묵상에 잠겨 있는 눈 덮인 겨울산”처럼. 그러나 겨울 호수의 표면은 얼음에 덮어서 그 아래 얼지 않는 물과 눈 덮인 겨울산은 적막으로 있는 것과 같다.
이 적막은 침묵하지만 “대지의 생명들 모두 숨죽이”는 것을 통해 생명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지만 겨울에 억압된 생명은 봄이라는 반란을 간직하면서 ‘찰라의 생’을 지나간다. 그것도 시인은 “적막이 적막을 물어 나르는 산중에”서 ‘생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산이 높을수록 생의 그림자가 길 듯이 대지의 생명을 많이 축척 한 산일수록 깊고 험한 반면에 “외로움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고독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시인은 산의 적막을 통해 생명을 간직한 봄의 반란을 시적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침묵에 대한 본질에 대한 탐구로까지 확장된다.
그것은「길 위의 노래」에서도 “불갑사 누각의 숲에서 다음 생(生)에 당신에게 전해줄 말들을 찾다가 출구를 잃어버렸다 살면서 길을 잃은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는 말, 언제나 길을 잃어야 길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호수로 가는 오르막, 얼었던 땅이 녹아 질척거리는데 바람도 없이 홀로 비틀거리며 마음속 길을 찾는 사내”를 통해 시적 반란으로 탐사할 수 있다. ‘출구’가 없다는 것은, 억압된 것의 다른 말이며 길을 잃은 것은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게다가 “사찰의 범종 소리 경전 삼아 동안거에 들었던 뭍 생명들 묵언 정진”이야말로 겨우내 생명이 침묵하는 가운데 봄을 맞이하는 계절의 시적 혁신을 지지해 준다.
예를 들면, 사랑한다.
달린다 먹는다 웃는다 같은 말들과 사랑한다라는 말은 발생부위가 다른 언어.사랑이란 더불어 멸망할 종족에 대한 감정. 같이 죽을 수 있다면 안심되는 존재들에 대한 감정. 같이 죽고 싶은 존재들에 대한 감정.
그러니 나에게 잠꼬대로라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하물며 취한 핑계로, 정치적 당신임을 핑계로, 시인인 당신임을 핑계로, 함부로 주문을 걸지 마라. 사랑한다는 고백은, 피에 굶주린 나에게 드라큐라의 이빨을 가져다 주는 주문.
아무 데로 도망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스믈스믈 기어나오는 송곳니를 달래며 나는 너를 죽이고 싶다
기억은 섬처럼 남고 이따금 별처럼 사라진다
섬광을 남기며 화악 사라진다. 우주에 먼지를 뿌려놓고. 무언가 있었다는 기억만.
그러니까 그것은
불분명한 말
추상적 말인 그것은
썩어가는 거짓말
노혜경, 「숲은 바람에 실어 말하고 늪은 혼자 삭아간다」 전문
‘숲’은 상생하는 것이지만 ‘늪’은 상극으로서 서서히 빠지며 벗어나지 못할 때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 숲과 같은 경우 서로의 삶을 갱생하고 화합하지만 늪의 경우는 서로가 서서히 죽음을 향해 파고드는 것과 같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늪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감정이 생산적이지 못하고 서로의 늪이 될 때 서로의 욕망 속에서 요동치는 욕구를 반영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사랑을 달리 말하자면 “달린다 먹는다 웃는다 같은 말들과 사랑한다라는 말은 발생 부위가 다른 언어. 사랑이란 더불어 멸망할 종족에 대한 감정. 같이 죽을 수 있다면 안심되는 존재들에 대한 감정. 같이 죽고 싶은 존재들에 대한 감정”과 같이 이러한 존재들의 감정은 죽음을 동반하면서 더 깊이 빠져들며 소멸한다.
이 죽음은 삶에 대한 반향으로서 “나에게 잠꼬대로라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하물며 취한 핑계로, 정치적 당신임을 핑계로, 시인인 당신임을 핑계로, 함부로 주문을 걸지 마라. 사랑한다는 고백은, 피에 굶주린 나에게 드라큐라의 이빨을 가져다주는 주문”으로 파악된다. 그렇지만 시인의 주문은 ‘썩어가는 거짓말을 거부하며 「촛불의 이름은 무엇인가」같이 혁명의 촛불을 소환한다. 이른바 촛불은 타는 것에 있지 않고 꺼지지 않는 정신에 있는 것처럼. 사실상 “기미만세운동은 3.1운동에/반이승만학생의거는 4.19에/광주민중항쟁은 그나마 민주화운동이 되었다가/5월 광주가 되어버렸다/87년 6월 시민항쟁은 그냥 87/의미는 숫자로” 변화는 것은, 오래된 과거가 아닌 새로운 과거로서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숫자가 이름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워지지 않는 역사를 기억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꺼져간 촛불의 숫자만큼 희생된 영혼들의 추모가 헛되지 말아야 할 것을, 이름 없는 촛불을 통해 이름 없이 죽어간 숭고한 영혼을 위무한다.
3.
김완의 ‘산’과 ‘길’은 겨울의 적막으로부터 생명성을, 노혜경의 ‘늪’과 ‘촛불’은 감정의 주문으로부터 죽음을 불러오면서 시적 혁명이 된다. 이를 통해 ‘일지중지’된 것들의 ‘침묵’을 읽게 하고 ‘말줄임표’와 같은 의 비언어로 분리된 대화에 우리도 참여하게 된다. 이것은 시적 대상에게 발화하는 것보다 생생한 효과를 가지면서 “알 수 없는 은유로 가득 찬 시들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는”(김완, 「어느 하루」)는 것보다 ‘황홀’하게 다가온다. 또한 “돌처럼, 돌과 돌 사이로 흐르는 침묵처럼 조용”(노혜경, 「잠든 방을 위해」)한 ‘장엄한 시간’의 사유를 견인하고 있다.
산이 높아 오래 구름에 덮어 있는
겨울 운장산(雲長山)을 간다
애써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산
낮에는 햇살에 녹고 밤에는 찬바람에 어는
거칠고 사나운 겨울 산속을 헤치고 간다
뒤돌아보면 그렇게 저 먼 길을 지나왔다
우리 인생길처럼 드디어 그곳에 올라선다
천지사방 황량하나 더 깊이 있는 겨울 산
끝나지 않은 길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직은 봄의 소란을 그리워하고 있는데
오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가슴 떨리는
혁명 보다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내 삶에 스며드는 일상의 황홀을 꿈꾼다
바람 세찬 생소한 겨울 산에 오르는 일은
스스로를 오롯이 내려놓기 위한 것일 터
진안은 마이산, 구봉산, 운장산이 있다
산이 높아 오래 구름에 덮여 있다는
운장산 그 가보지 않은 겨울산을 간다
김완, 「겨울 운장산」 전문
산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베일에 가려진 신비로운 것들이 많다는 의미다. ‘구름에 덮어 있는’있는 ‘겨울 운장산’도 그것을 말해주며 시인은 “애써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과정에 있다. “낮에는 햇살에 녹고 밤에는 찬바람에 어는/거칠고 사나운 겨울 산속을” 가는데 시인의 인생을 발견한다. 바로 “뒤돌아보면 그렇게 저 먼 길을 지나” 오면서 삶이라는 정상에 올라섰지만 “천지사방 황량하나 더 깊이 있는 겨울 산”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겨울 산’은 비언어와 같은 침묵으로 서 있으며 ‘봄의 소란을 그리워하고’ 있는 가운데 “혁명 보다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는” 겨울 산과 시인의 인생이라는 언어의 행간에서 시적 혁명의 생명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람 세찬’ 겨울 전경을 바람이라는 보이지 않는 비언어를 통해 출현시키는데 그동안 ‘가보지 않은 겨울산’에서 새로운 생명에 대한 시적 반란을 맞이한다.
2016년 초겨울 그러니까 전국농민회총연맹이 트랙터를 몰고 올라왔을 때
전두환 반란군들에게는 열렸던 한강다리는 완강한 ‘시민교통불편안됨’ 저지선이었다
광장은 그들에겐 닫혔는데
논에서 밭에서 그들이 촛불을 들면
갑자기 촛불 시민의 일원이 되는 기적
깨어있는 시민이 갑자기 잠든 기적
오로지 탄핵 한 가지 목소리만 남는 기적
모택동이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건
노동자와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삼아서라고 한다
촛불 시민에도 노동자와 농민이 있을까
깃발 내려 라는 사나운 목소리의 여운이 쟁쟁
나는 비겁하게도 아무 깃발을 들자고 외치며
민주노총 깃발 내려 전농 깃발 내려에는 저항하지 않고
아고라 깃발 동네 사람들 깃발들이 아름답다고만 했다
죽어서 비로소 광장에 선 그 농민은
언제부터 촛불 시민인가
노혜경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오」 전문
이 시는 혁명을 도모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과 반란을 주도했던 ‘전두환 군사세력’을 ‘한강다리’에서 마주 보게 한다. 시대와 상황이 다르지만 같은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거리와 차이를 통해 무의미해 보이는 상호작용 이면에서 역설적인 침묵이 연출된다. 또한 그것은 ‘한강의 기적’이 현재로부터 나온 ‘춧불 시민’이 만들어낸 기적임을 강조하면서. “깨어있는 시민이 갑자기 잠든 기적”이 되고, “오로지 탄핵 한 가지 목소리만 남는 기적”으로서 구축된다. 촛불 시민과 같이 적극적 비폭력을 통해 부정되고 모순된 중심 권력의 교체를 염원한다. 이런 점에서 촛불 시위는 침묵의 혁명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이 시대가 비폭력 침묵시위로 발전하게 된 것은 백남기 농민과 같이 죽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른바 시위장에서 깃발이 대체된 촛불에는 누군가의 죽음이 끼어들며 저항과 폭력에서 저항과 비폭력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촛불을 앞세운 침묵은 혁명으로 성장하는데 희생된 죽음이 불꽃을 일으킨 것으로 파악된다. 이 또한 촛불이라는 이름 없는 이름이 가진 비언어적 사유를 통해 미묘한 인간의 감정을 일깨워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유한 혁명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4.
김완 시인과 노혜경 시인의 시편은 언어의 반란을 통해 시적 혁명을 추구한다. 그 과정에서 이전 세계의 모순과 불합리성에 대한 현상들을 전복시키면서 새로운 특징적 사유를 구성해 나간다. 통제할 수 없는 시인들의 가진 상상력의 영역에서 규정된 언어는 세계의 억압과 통제할 수 없는 얽매임 속에서 나온다. 그것도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실에서 지금으로 빠져나오는 실존과 다르지 않다. 이 실존은 근원적인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것으로 기존의 언어가 탈언어화 된 것. 그럼으로써 세계를 변혁하려는 혁명적 시어로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김완 시편에서 물질화되는 자연의 침묵을 통해 주체의 생명성에 대한 변혁을, 노혜경 시편에서 사물화되는 침묵의 반역을 통해 확대된 숭고한 주체의 죽음을 마주하게 한다. 이것은 이들의 시편에서 지배와 피지배에 대한 단순한 교체를 넘어 최소한 우리의 역사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재생산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시편들은 역지사지가 통과하지 못하고 제어된 사회를 향한 비언어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구축하기 위한 새로운 의식이 가담하고 있는 이들의 시편들은 사회의 불균형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각인시켜준다.
거기에 김완 시인은 자아 성찰과 타자의 연민이라는 세계 통찰을 수용하고 있으며, 노혜경 시인은 시대적 사건을 모티브하며 확대된 현실의 현존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계통합을 현출한다. 이들은 부재한 감정의 결핍을 언어로 조달시키면서 현실을 강제해 나간다. 이로써 현시되는 두 시인의 시적 발화방식의 결말은 바로 내적인 내전을 거친 후 성공한 시적 혁명의 시작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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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훈
2002년 『문학과 의식』 시, 2013년 『작가세계』 평론 신인상 당선. 시집 『밤은 밤을 열면서』 외 2권과 저서 『시 치료의 이론과 실제』, 『폭력적 타자와 분열하는 주체들』, 『정신분석 시인의 얼굴』, 『현대시 미학 산책』, 『현대시조의 도그마 너머』 등이 있다. 경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