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대장은 정곡을 찔렸는지, 아무 대답도 못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마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럼, 어찌 알고 왔단 말이에요? 어젯밤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고 문도 열어주지 않더니 이제야 나타나 무슨 도깨비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있는 거요?”
설이매가 심한 말로 수비대장을 다그쳤다.
“마마. 모든 게 저의 불찰이옵니다. 중부여후 나리께 명을 받은 것은 없사옵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동북부여후 나리의 갑작스런 부음을 듣자옵고 이렇게 달려왔사옵니다.”
그가 얼굴을 들어 설이매를 쳐다보며 말했다. 설이매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에게 내뱉었다.
“해모수 공의 고향 웅심산성으로 시신을 옮겨가 거기서 장례를 치를 거예요. 시신을 거기까지 모시고, 또 내일 중으로 사방에 부고장을 보낸 후, 우리가 웅심산성까지 가는 기간과 조문객들이 오는 시간을 헤아려, 한 달 후 정월 말일에 발인할 겁니다. 가서 폐하와 중부여후, 대신들에게 그렇게 전해 주세요. 정식 부고장은 아침에 보낼 거예요.”
그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마마, 명심하겠사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쭈어 봐도 괜찮을는지요? 소인이 고루과문하고 워낙 둔하여······.”
“‘국서 청진공주부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는 건가요?”
설이매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반문했다.
“국서 청진공주부군”이란, 임금의 사위로서 청진공주 즉 설이매의 남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해모수와 설이매는 혼인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장당경 수비대장이 의아해 물어본 것이다.
“나는 이미 해모수와 마음으로 혼인한 몸입니다. 해모수는 죽었지만 난 해모수의 아내예요.”
수비대장이 놀란 표정으로 설이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라기는 기진과 기비, 묘고미향, 그리고 장막 뒤에서 엿듣고 있던 해모수도 마찬가지였다.
설이매가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이번 장례식은 동북부여 국장國葬으로 치를 겁니다. 그리고 맏형이신 중부여후께서 남자 상주喪主가 되셔야 할 겁니다.”
설이매는 중부여후 해로운의 장례 참예가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주지시킨 후 조문객을 보냈다.
장당경 수비대장 일행이 떠난 후 기비가 설이매에게 물었다.
“중부여후가 과연 장례식에 올까요?”
기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마 전에 던졌던 동일한 질문을 다시 꺼내며 말을 이었다.
“체면이나 명예도 중요하지만, 목숨보다 더 중하지는 않으니까요. 그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고 나타날 만큼 담력이 있는지······.”
“그가 비겁하게 장례식에 오지 않으면, 결국은 자기 죄를 자인하는 셈이에요. 만천하에 자신이 악인임을 선포하는 행위죠.”
“그런 욕을 먹더라도 목숨을 보존하려 할 것 같군요.”
“그가 오지 않는다면, 우린 더욱 유리해요. 그가 백성들에게 신망을 완전히 잃게 만들면, 해모수 말고 누가 득을 보겠어요?”
설이매 되물었다. 기비와 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묘고미향은 속으로 설이매가 참으로 당찬 여장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이매 공주의 목소리가 다시 그녀의 귀에 파고들었다.
“그가 오지 않는 쪽이 오히려 더 나을지도 몰라요. 그가 오면 그와의 숙명적인 대결을 한바탕 치러야 할 테니까요.”
말을 끊고 잠시 생각에 잠기던 설이매가 혼자 중얼거렸다.
“이번 기회에 그들을 일망타진할 수만 있다면······.”
설이매가 일행을 둘러보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가 오느냐 오지 않느냐는 차후의 문제이고 우선 발등의 불부터 꺼야 합니다.”
묘고미향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웅심산성에서 장례를 치른다고 공포했으므로 저들은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기 전, 우리를 처치하려고 할 겁니다. 어떻게 저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무사히 목적지에 다다르느냐가 문젭니다.”
“우리 오만 군사를 아예 거느리고 웅심산성까지 갈까요?”
기비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건 한겨울 혹한에 군사들을 너무 괴롭히는 처사입니다. 그리고 해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보급로도 문제가 됩니다. 다른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해성海城은 번조선의 영향력 하에 들어간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장당경과의 거리가 육백 여리 밖에 되지 않았다.
삼칠성주의 대답에 설이매가 의견을 개진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겉으로 허장성세를 펼치고 안으로 은밀하게 공작을 꾸미는 거예요.”
“······?”
“우선 여기 번조선의 군사들 가운데 날랜 기마군 이천 기를 빌렸으면 해요. 그리고 지금 즉시, 동북조선의 고도 백악산아사달에 파발마를 보내 관을 맞이하는 출영군사 오백 기만 보내달라고 내 이름으로 부탁해야겠어요.”
“아, 관을 그들의 손으로 보내고 우린 딴 길로 가자는 거죠?”
기비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물었다.
“맞아요. 천 명의 마병을 거느린 믿을 만한 장수에게 빈 관을 맡겨 제일대第一隊로 최단거리 대로를 이용해 웅심산성으로 가게 하고, 나머지 마병 천기대는 제이대第二隊로 남쪽 산악지역을 통과해서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해야 합니다.”
묘고미향이 의미깊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우리는 변장하고 제삼대第三隊가 되어 제일대 뒤를 따르면 되겠군요.”
“역시 성주님은 지혜가 깊고 탁월하군요. 만에 하나 제일대가 저들의 군사들에게 막혀 싸움이 벌어질 경우 우린 그 사이에 유유히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렇게 복잡하게 일을 벌일 필요가 뭐 있소?”
느닷없는 목소리에 장내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보니, 휘장 뒤에서 듣고 있던 해모수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아이구, 당신은 지금 누가 찾아올지 모르는데, 어서 들어가세요.”
설이매가 나무랐다. 해모수가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마마, 염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난 혼자 갈 터이니 여러분은 나와 따로 오시기 바랍니다. 일대 이대 삼대 나눌 필요 없이 군사들 십여기만 데리고 웅심산성으로 가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혼자 웅심산성으로 가겠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할 것 같습니다.”
“어떻게 당신 혼자 가는 게 안전해요? 그리고 군사 십여 기만 데리고 가다가, 저들이 우리를 포위해 강제로 관 뚜껑이라도 열어보는 날에는······.”
“최악의 경우에는 제가 잡혀 죽기 밖에 더하겠어요? 인명은 재천인데, 천제님께서 나를 죽이지 않고 살리신 것을 보면, 내가 살아서 이 나라 백성에게 득이 될 경우, 앞으로도 내 길을 지켜주시지 않겠소?”
“그거야 옳은 말씀이지만, 우리가 할 도리는 다 해야 돼요. 그리고 어떻게 죽음을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어요?”
설이매가 해모수에게 핀잔을 주었다. 해모수가 정색을 하고 되받았다.
“난 지금까지 죽고 사는 일을 도외시하고 정로를 걸으며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저들을 속여서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쥐새끼 같이 숨어서 다니는 게 뭐가 그리 유쾌한 일이겠소? 그리고 우리가 몸을 은닉해 다닐 만한 나쁜 일을 저들에게 저지른 적이 있소? 광명정대한 길로 떳떳하게 갑시다.”
해모수는 의연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제가 죽음을 가장한 것부터 잘못된 것 같소. 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되는데, 후회가 됩니다.”
“흥! 당신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요. 선비는 평소 정로를 택하지만, 위험에 닥쳤을 때에는 감추어진 길을 걸을 줄도 알아야 해요. 그게 광명정대하지 못하다면, 숨어 사는 강산의 은자들은 모두 광명정대를 저버린 자들인가요?”
“그런 뜻은 아니오. 다만,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 죄송스러워서 그러는 거요. 그러니 나 혼자 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당신 혼자 안전하게 가면 우리의 안전은 누가 보장해요?”
“그거야 하나님이 보장하시고 또 여러분 자신이 지켜야 되지 않겠소? 정 마음에 걸린다면, 방금 내놓은 계책대로 삼대로 나뉘어 오시오. 난 홀로 갈 터이니.”
웬일인지 해모수는 한사코 혼자 행동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것은, 설이매가 자신의 아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데 대해 불쾌감을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때 곁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두 시녀 백선의와 청아련이 조심스럽게 해모수에게 말했다.
“나리, 저희들이 나리를 모시고 가면 안 될까요?”
“너희가 나와 동행하면 너무 불편하지 않겠느냐?”
“아니에요. 저희들은 나리와 함께 다니는 것이 가장 편해요.”
백선의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청아련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저흴 버리고 홀로 다니지 마세요. 저흰 생사를 나리와 함께하기로 했어요.”
“흥! 잘들 놀고 있구먼.”
설이매가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홀로 동북부여후와 함께 갈 터이니 너희들은 제삼대에 합류해서 오는 게 좋겠다.”
그러자 해모수가 가로막고 나섰다.
“아닙니다. 공주마마, 그렇게 하지 마세요. 차라리 제가 염려된다면, 백선의와 청아련, 그리고 실례가 되지 않을 경우, 기진 공주님의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저는 이 세 분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해모수는 설이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할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기진은 설이매가 가장 경계하는 연적戀敵이 아니던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해모수가 기진을 들먹인 것은, 설이매 공주의 지나친 간섭이 좀 거북했기 때문이리라.
기진 공주는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을 붉히고 앉아 있다. 그 때 삼칠성주가 엉클어진 분위기를 수습했다.
“해모수의 뜻이 정 그렇다면, 해모수 홀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대신 해모수는 안전을 위해 저들이 손을 쓰기 전 가장 먼저, 변장한 몸으로 지금 즉시 웅심산성을 향해 출발해야 할 거예요.”
“아닙니다, 어머니. 저는 가장 나중에 출발할 겁니다.”
해모수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설이매가 감정이 격해졌는지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당신은 제멋대로군요.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해모수는 속으로 ‘그건 내가 할 소리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참고 빙긋이 미소만 지었다.
해모수 일행은 날이 새오자 즉시 장막을 거두었다. 해모수, 묘고미향, 설이매, 기비, 기진, 연은소, 백선의, 청아련 여덟 사람은 나름대로 변장하고 말과 마차에 올랐다. 설이매의 의견대로 제일대 일천 명의 마병과 관을 최단거리 왕의 대로로 보낸 후 제이대 천기대를 남쪽 우회 길로 가게 했다. 설이매와 삼칠성주 일행 일곱 명은 제삼대가 되어 제일대 뒤를 은밀하게 따랐다.
해모수는 마지막까지 홀로 남아 있다가, 군사들이 나 떠난 벌판을 휘둘러본 후 필마에 몸을 싣고 임금이 하사하신 천광검天光劍을 허리에 찬 채, 어디론가 바람같이 사라져갔다.
(다음 장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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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3. 17.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