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산우회원 5명(김종국 나종만 노승남 양수랑 윤상윤)이 강바람을 쏘이며 순자강(순창에서 남원 곡성으로 흐름) 어귀에 있는 곡성의 청계동 계곡으로 들어갔습니다. 곡성 동학산 동쪽 기슭으로 내려가는 골짜기가 청계동인데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라 나무뿌리와 바위사이로 내려오는 청정하고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니 온몸이 오싹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차가운 물이어서 발이 시려웠기 때문입니다. 배를 채울 먹거리와 편안히 누울 자리만 있다면 그곳이 무릉도원일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계곡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었던 듯 더위가 우리를 괴롭혔습니다.
곡성에서 순자강을 건너 남원시 금지면에 있는 45년 전통짜장의 명가 금생춘(金生春)이라는 식당에서 짬뽕국밥을 시켜 먹었습니다.
다시 곡성으로 와서 옛 곡성역인 기차마을에서 음악분수를 즐겼습니다. 기차마을은 해마다 조금씩 변하는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였습니다.
강바람을 쏘이며 보성강 물줄기를 거슬러 돌아오다가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있는 장동(獐洞, 노루골)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조선 중기 명종~선조연간을 살았던 유학자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 보물 제260호)가 보관된 모현관(慕賢館)이 연지(蓮池)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미암일기(眉巖日記)는 선산유씨인 미암(眉巖)이 해남에서 살다가 이곳에 살던 송씨(宋氏)부인에게 장가와서 살면서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랐다가 명종조에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선조의 등극과 동시 다시 등용되어 이조참판을 마지막으로 죽을 때까지 10년간(선조 원년부터 10년까지) 날마다 쓴 일기인데, 당시 임진 정유 양란으로 승정원일기가 불타버려 선조실록 편찬에 애를 먹던 차에 유희춘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가 선조실록편찬에 결정적 사료(史料)가 되었고 또 일기 하나하나가 역사적으로 조선 중기의 정치史 경제史 사회史 생활史 등을 연구하는 데에도 미시적(微視的) 사료로서의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모현관에는 그 미암일기(眉巖日記)의 원본과 미암집(眉巖集) 판각들이 보관 되어 있는데, 그 옆의 넓은 터에 미암(眉巖) 유물 전시관을 새로 조성해 놓았는데 아직 정리가 안 되어 내년부터는 일반에게 공개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연지(蓮池)에서 부는 연바람을 쏘이며 그곳을 뒤로 하고 돌아왔는데 나중에 그 연지 오른쪽에 연계정(漣溪亭, 미암이 벼슬에서 은퇴하여 처가가 있던 이곳에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던 정자)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방문하는 이들은 이 연계정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네 글자를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먹었습니다. 선산유씨 종부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돌로 된 표지석이었는데 그날 종부에게 물어보고 왔었더라면 그냥 알 수 있었을 터인데 그렇지 않고 돌아와서 아무리 해석하여도 아니되었습니다. 나의 부족한 지식으로 하루 종일 씨름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두 번째 글자는 '길할 길(吉)'과 '웃는 모습 길(口 + 吉)' 등 2가지로 해석할 수도 있었습니다. 즉 '복과 길함이 오는 집' 그리고 '복이 웃으면서 오는 집'으로 해석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