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7년
燃 戀 洗 世 연 연 세 세 (그리움을 불태워 세속을 씻는다)
두 비녀에 새겨진 글자의 필체나 크기, 모양도 정밀하게 일치했다. 그렇다면 이건 동일한 사람이 정교하게 지어 새긴 문구임에 틀림없었다. 조영은 넋을 잃고 깊은 사색과 시름에 잠기다가, 태평공주의 선물을 풀어보았다. 선물은 조그마한 상자 안에 담겨 있었는데, 상자는 값비싼 백단목白檀木이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어보고, 조영은 한 번 더 아연실색했다.
‘이 여인들이 무슨 약속이라도 했단 말인가?’
조영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내가 도대체 무언데, 이런 것을 내게 선물한단 말인가?’
조영을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혹시 선물의 의미를 잘못 알고 있나?’
이영월의 선물은 이제 갓 만든 것처럼 찬연한 빛이 번쩍이는 금비녀였다. 조영은 한 동안 비녀를 꺼내 살펴보았다. 그것은 한 마리 용처럼 생긴 비녀였는데, 거기에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令 月 朗 祚 榮 영 월 랑 조 영(상서로운 달이 복과 영화를 빛낸다.)
그 안에 두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다. “영월”은 태평공주의 본명이다.
‘이건 최근에 내게 주려고 만들어 놓았던 것임이 분명하다.’
그는 글자를 살펴보다가, “랑朗”이라는 글자에 이중 의미가 들어 있음을 직감했다. 그와 흡사하게 생긴 문자 “랑郞”으로 이를 치환하면, 전체 문장은 “영월의 낭군 조영”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조영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미시아는 궁에 들어와 자신의 거짓 고백을 조영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몰라 괴로워했다. 하지만, 그 얘길 꺼냈을 때 조영이 따스한 말로 위로하던 게 생각나 한편으로 다소 위안이 되었다. 여미아를 시켜 고조영에게 진상을 알린다면, 모든 오해는 풀릴 터다.
자신의 참담한 사연을 듣고 장탄식을 터뜨리던 조영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환하게 떠올랐다. 금새 미시아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태자전하께서 날 그토록이나···. 내가 드린 옥비녀를 보고 태자전하는 무슨 생각을 하실까?’
그녀의 옥비녀는 어릴 적에 할아버지가 그녀에게 만들어 준 것이다. 그 때 그의 조부 임장청은 이런 말을 했었다.
“시아야, 이걸 잘 간직하고 있다가, 어릴 적에 너와 정혼한 너의 낭군이 나타났을 때 남몰래 전해 드려라.”
어린 미시아가 물었었다.
“저와 정혼한 낭군이 누구예요?”
할아버지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말해줄 수 없구나.”
“에이, 그럼 언제 저의 낭군이 나타나요?”
“그건 나도 모른다.”
“할아버지, 낭군이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 제 앞에 얼굴을 보일지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그가 나의 낭군인줄 알고 이 비녀를 줄 수 있어요?”
미시아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아주 똑똑하게 물었다.
임장청은 손녀딸이 너무나 귀여워 사랑스런 눈빛으로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말이다. 내 예감인데, 너와 정혼한 낭군이 네 앞에 모습을 보이면, 넌 직감으로 알 것이다. ‘아, 저 사람이 바로 어릴 적에 나와 정혼한 낭군이구나’라고.”
“근데, 그 남자가, 보기에 아주 싫은 못생긴 얼굴이면 어떡해요?”
“하하하! 못생겼을까봐 두렵냐?”
어린 미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제께서 너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낯을 아마도 네 맘에 꼭 드는 얼굴로 만들어 주실 거야.”
“정말요?”
“그럼!”
미시아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아직껏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연달아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다시 회상의 파도를 넘는다.
“할아버지, 근데, 저의 낭군에게 이 비녀를 왜 주어야 해요?”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할아버지가 대견스러워했다.
“하하하! 우리 시아는 참 똑똑하구나.”
할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설명했다.
“비녀를 드리는 것은 이런 뜻이란다. 난 당신과 정혼한 당신의 여자예요. 그러니 당신은 이제부터 딴 여자를 절대 찾지 말고, 저만을 사랑해주세요.”
미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근데, 그 남자가 비녀를 받지 않고 거절하면 어떡해요?”
“이것도 내 예감인데, 그는 그걸 거절하지 않을 거다. 만에 하나, 거부하거나 되돌려준다면, 그것은 네가 정혼한 낭군이 아닌 엉뚱한 다른 남자에게 주었을 경우다.”
“피이, 할아버지는. 정혼한 남자가 나타나면 내가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면서요?”
“하지만, 멋진 대장부가 네 얼굴에 보이면, 네 마음이 혹해서 착각할 수도 있어. 너와 정혼한 낭군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럴 경우에는, 그 남자가 반드시 비녀를 돌려줄 거다.”
“이 비녀는 옥으로 된 값비싼 건데, 그가 돌려주지 않고 팔아먹으면 어떡해요?”
어린 미시아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또박또박 물었다.
“으하하하하!”
할아버지 임장청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염려하지 마라. 그가 시장에 내다 팔아먹어도 결국에는 네 손에 다시 들어올 거다.”
할아버지는 미시아에게 절대적 거인이고 영웅이었다. 미시아는 조부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미시아는 처음 조영과 만났을 때, 이 남자야말로 나와 혼약한 바로 그 낭군이라는 직감에 몹시 놀랐었다.
‘태자전하는 그 비녀를 팔아먹을 사람이 아니야.’
미시아는 고소를 지으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혹시 내게 되돌려주는 건 아닐까?’
아닌 게 아니라 고조영은, 그 시각 비녀 세 개를 앞에 놓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 여인들이 장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내가 비녀 세 개를 모조리 임자에게 돌려줘야겠어.’
이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조영은 한결 심사가 후련해졌다.
미시아는 고조영이 혹시 비녀를 돌려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빠져 있다가 문득 조영이 준 편지가 생각났다.
‘이 편지 수신인이 극시아라고 하고서, 태후마마께 전해달라고 했다. 여기엔 필시 무슨 깊은 곡절이 숨어 있을 거다.’
미시아는 편지를 살펴보았다. 봉투는 면밀히 봉함되어 있었다. 편지를 꺼내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애써 참고 조영이 자신에게 준 선물을 펴보았다. 그것은 금색 한지韓紙에 쓰인 한편의 아름다운 시였는데, 아주 웅휘하고 멋지며 장쾌한 필체로 쓰여 있었다.
밤바람 살랑이고 오색등불 우는데
춘정을 못 이겨 시흥을 읊조리다
반짝이는 은물결 달빛에 구슬프고
가슴도 물결인양 임 그려 출렁이네
宵風溢浪鳴色燈 소풍일랑명색등
不御春情啼詩興 불어춘정제시흥
翠淵閃波悲月輝 취연섬파비월휘
心水深戀沸思郞 심수심련불사랑
외로운 일척 가슴 뉘 손이 어루만져
유실幽室 속에 감춘 눈물 적취지에 뿌려줄까
은물결에 달빛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서
임의 가슴 옷깃 속을 빗물 되어 적셔볼까
적취지 선상의 오색 등불 아래서 두 분이 읊었던 시들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미시아 아가씨에게
고조영 배상.
‘이건 내가 읊조리던 시구들인데?’
갑자기 가슴이 설레었다.
이튿날 미시아는 무 태후를 만나자마자 은밀한 자리에서 조영의 편지를 꺼내며 말했다.
“고조영 장군이 제게 편지를 하나 주었습니다. 이건 어처 극시아에게 전해달라는 건데요, 차마 폐하를 속이고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준 편지는 잘 전달했겠지?”
“네. 폐하.”
무 태후가 편지를 열어보니, 거기엔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그것이, 일전에 적취지 연회 때 미시아와 극시아가 함께 지은 시임을, 총명한 무 태후는 곧 기억해냈다. 시문과 별도로 다른 종이에 이런 글이 정갈하게 씌어 있었다.
제게는 아무런 사심도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라며, 차후로는 이런 편지를 보낼 경우, 결코 받지 않을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어처 극시아 마마께
고조영 배상
무 태후는 고조영의 편지를 읽고서 고소를 금할 길 없었다. 극시아의 편지로 고조영을 놀라게 하려던 자신의 술수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이 편지를 분명히 고조영이 썼겠지?”
“네, 폐하.”
“혹시 이걸 나에게 주라고 고조영이 말하지 않았느냐?”
미시아는 일을 숨기려다가 내키지 않아 사실대로 말했다.
“태평공주가 있는 자리에선 극시아에게 전해주라 했으나, 다시 제게 은밀히 폐하께 드리라고 속삭이면서, 편지의 수신인은 극시아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무 태후는 쓴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조회를 마친 무 태후는, 미시아를 시켜 고조영과 어처 극시아를 자신전紫宸殿으로 불렀다. 조영과 극시아가 현장에 나타나자 무 태후는 불문곡직하고 물었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어떤 형벌을 받을 죄에 해당하는지 아는가?”
실내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무 태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극시아, 내 얼굴을 보라.”
극시아가 무 태후를 쳐다보자, 무태후가 물었다.
“이 편지는 너의 친필 서한이 아니냐?”
극시아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무 태후는 곁에 서 있는 미시아를 통해 극시아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를 읽고서 극시아는 속으로 치를 떨었다.
‘저 백여우가 나를 이렇게 속일 줄 몰랐구나.’
그 편지는 무 태후의 명에 따라 극시아가 작성한 것이다. 그 때 무 태후는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늘어놓았었다.
“영주까지 가서도 네가 고조영을 꺾는데 실패했으니, 이젠 어쩔 셈이냐?”
“폐하, 죄송합니다. 제게 기회를 주시면, 최선을 다해 그를 사로잡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천첩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한다면, 천첩은 어찌되는 건가요?”
“어찌 되긴? 염려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저 백여우가 시키는 대로 같은 편지를 두 통 썼더니 오늘 이것으로 빌미를 삼아 나를 아주 죽이려는 건가?’
오기가 치밀어 오른 극시아가 입을 열어 변명했다.
“폐하, 이건 저의 친필 서한임이 확실하옵니다. 하오나, 그건 제가 임의로 쓴 것이 아니옵니다. 단지 폐하께서 시키시는 대로 썼을 뿐입니다.”
“뭐라고? 저런 요망한 계집이 있나! 내가 시켰다?”
무 태후가 노발대발했다.
“내준신에게 국문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고 바른 말을 하겠느냐?”
무 태후는 한참 동안 극시아를 노려보다가 조영에게 고개를 돌렸다.
“고 장군, 이리 가까이 오시오.”
조영이 다가가자 무 태후가 물었다.
“이 편지는 고 장군이 친필로 극시아에게 쓴 서한임이 분명하오?”
“그렇사옵니다.”
“미시아를 통해 그 편지를 내게 준 이유가 뭐요?”
“폐하께서 우리의 결백한 사정을 아시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백한 사정이라?”
“그렇사옵니다.”
“그렇다면, 극시아와 미시아가 적취지 선상에서 지은 시를 이 편지에 수록한 이유가 뭐요? 그것은 나의 시 ‘여의랑’을 빌어 호소한 극시아의 애정을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지난번에 영주로 여행하는 동안 저와 사비우 장군이 수고한 것에 대해, 황공하옵게도 극시아 마마께서 우리 두 사람을 약간의 금일봉으로 치하해 주신 바 있습니다.”
조영은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계속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 금일봉을 받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사료되어, 이를 돌려드리려 했으나, 그것 또한 윗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판단되었습니다. 이 몸은, 대당大唐에서 환대를 받고 있는 후고려의 아들로서, 대당의 어처마마께 어떻게 보답하는 것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까 심사숙고하던 중, 때 마침, 얼마 전 극시아 마마와 미시아 아가씨가 함께 지은 선상시船上詩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되어, 그 시를 친필로 써서 선사한 것입니다.”
조영은 말을 끊었다가 차분하게 이었다.
“일전에 미시아 아가씨가 저희 집에 손님으로 왔을 때, 미시아 아가씨에게도, 같은 시를 한 부 드렸습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나도 고 장군의 순결하고 정직한 마음을 의심하지 않겠소. 하지만 사정을 모르는 남이 이것을 본다면 어찌 판단하겠소?”
(다음 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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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9. 28.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