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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는 오순도순 밖에서는 서글서글』이웃 문신수 선생
남해 출신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학비가 세워진다. 남해 서상에 위치하고 있는 스포츠파크 조각공원에 자연석에 음각으로 세겨진 문학비는 남해군과 남해문학회에서 이웃 문신수 선생의 문학활동을 기리기 위해 2003년5월 17일 11시30분에 군내 기관 단체장을 비롯하여 문학인들이 모인 가운데서 제막을 하게 된다.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약력과 활동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출생과 사회활동
남해군 서면 작장리 784번지! 3간짜리 스레트지붕으로 된 옛집이 있다. 구조상 보면 옛날 흙벽 초가집으로 된 것을 새마을운동 때 지붕만 개량한 것 같고 앞면은 샷시 유리문으로 바람을 막아준다. 방향이 남향이라 추울 때는 문을 닫고 창문으로 흘려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면, 좋은 글귀가 머리 속을 스쳐 갈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그런 아담한 집이다. 문신수선생은 평생을 이곳에서 지냈다.
이웃 문신수 선생은 1928년 1월 12일(음력)에 이 곳에서 부친 남평문씨 두열과 모친 밀양박씨 소아 사이 2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자 작장마을에서 거리가 약 10리정도 되는 서면 서상리 성명초등학교 입학하여 하루도 빠지지 않고 걸어서 학교를 다녀 졸업을 했다. 졸업 후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19세때인 1947년에 경상남도 초등교원양성소를 수료하고 곧바로 교직에 몸을 담게되었다.
첫 발령지는 1947년 12월 1일자로 서면에 있는 중현공립초등학교 교사로 임용되었다. 1947년에 교직에 몸담게 된 것이 1994년 8월 31일 정년퇴임 하기까지 47년동안 수만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졸업을 시켰다. 제자 중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은 55세에서 60세정도가 될 것이고 나이가 제일 적은 사람은 16세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선생은 교직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고현초등학교 교사시절인 1961년 자유문학에 단편소설 「백타원」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하게 되었고 1997년 창작집으로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을 발간하였다. 이후에도 계속 작품활동을 하였으나 36년동안 12작품을 발표 발간하였다.
교직생활과 작품활동을 하는 중에서도 문학을 재인식시키고자 교직에서는 물론 사회각 단체에서 활동을 하였다. 특히, 남해에는 「남해문학회」라는 문학단체가 있다. 1982년 3월 5일에 문신수선생과 이상범선생은 문학회 창설에 뜻을 가진 후 1983년 4월 23일에 발기회를 갖고 초대회장에 문신수선생이 선임되었고 1998년 5월 제6대 회장까지 역임하였다.
이렇게 여러 방향과 각 부문에서 지극한 정성을 들이니 노력한 결과만큼 각 기관과 각 단체에서 수상을 하게되었고 경남 탄생 100주년 기념 때에 『자랑스런 경남도민 100인상』을 수상하였다.
한 사람이 여러 가지의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질 수는 없다. 문신수 선생은 오로지 문학에 매달려 일생을 보내신 거성이다.
필자 본인은 선생에 대하여 글을 쓰고자 서면 작장에 있는 자택을 방문하였다. 사모님께서 아주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날씨는 약간 싸늘하였으나 마당에 들어서자 훈훈함을 느꼈다. 그리고 마루에 올라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가운데 방에 가서 분향하고 명복을 빌었다. 그런 후 사모님과 이런 저런 얘기를 논하고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였다.
말씀하시기를 특별한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에 살고 있는 큰아들 영철이 한테 전화 연락을 했다고 하였다. 조금 후에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바꿔주기에 이웃 문신수선생님의 일생을 정리해서 남해리뷰 월간지에 싣는다고 하니 큰아들 역시 특별한 것은 없고 경남문학 2002 가을호에 선생의 연보가 실려 있으니 보내준다고 하였다.
참고자료가 될 것 같아 보내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늘 사용하시던 서재를 둘러보았다. 깨끗하게 정리정돈이 되어 있어 한눈에 찾고자 하는 서적들이나 자료를 금방 찾을 수 있도록 잘 정리되어 있었다.
나의 눈에 보이는 것은 일반서적보다 선생께서 직접 쓰신 원고와 자료집 등이다. 선생은 종류별로 또는 분야별로 자료를 만들었는데 표지를 만들어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초안을 잡은 착상록(着想錄) 3권, 아마 수백명의 주례사를 했을법한 기본안과 결혼 당사자들의 사진이 담겨있는 주례록(主禮錄) 2권, 무엇인가 구상한 구상록(構想錄) 1권, 그리고 남해의 암각문자 서불과차(徐 過此) 연구자료집 3권 등이 있었다.
서재를 둘러보고 필요하면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인사하고 문밖을 나섰다.
이웃 문신수 선생의 슬하에는 1남 4녀를 두었다. 장녀에 일심, 차녀에 영심, 장남에 영철, 삼녀에 정숙, 사녀에 영숙이다. 문신수 선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사람이 너무 오래 살면 안 좋아 나는 때를 맞추어 이 세상을 떠나는구나"말씀하시고 2002년 5월 11일 74세의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웃 문신수선생 연보
ㆍ1928년 1월 12일(음력) 서면 작장리 784번지에서 부 남평문씨 두열, 모 밀양박씨 소아 사 이에서 2남 1년 중 장남으로 출생
ㆍ성명초등학교 졸업
ㆍ1947년 경상남도 초등교원양성소 수료
ㆍ1949년 11월 서면 중리마을 진양 정씨 희엽 여사와 혼인
ㆍ슬하에 1남 4녀를 둠(장녀 일심, 차녀 영심, 장남 영철, 삼녀 정숙, 사녀 영숙)
교단연보
ㆍ1947년12월 1일 ∼ 1949년 8월30일 중현공립초등학교 교사로 임용
ㆍ1949년 8월31일 ∼ 1961년 3월30일 남상초등학교
ㆍ1961년 3월31일 ∼ 1963년 2월27일 고현초등학교
ㆍ1963년 2월28일 ∼ 1965년 2월28일 남상초등학교
ㆍ1965년 3월 1일 ∼ 1967년 9월20일 남명초등학교
ㆍ1967년 9월21일 ∼ 1968년 2월28일 삼동초등학교
ㆍ1968년 3월 1일 ∼ 1968년11월15일 도마초등학교
ㆍ1968년11월16일 ∼ 1969년 6월20일 남상초등학교
ㆍ1969년 6월21일 ∼ 1971년 2월28일 남명초등학교 교감(교감승진)
ㆍ1971년 3월 1일 ∼ 1976년 2월28일 남해초등학교 교감
ㆍ1976년 3월 1일 ∼ 1977년 8월31일 남상초등학교 교감
ㆍ1977년 9월 1일 ∼ 1978년 2월28일 해양초등학교 교감
ㆍ1978년 3월 1일 ∼ 1984년 2월28일 남해교육청 장학사
ㆍ1984년 3월 1일 ∼ 1985년 8월31일 덕신초등학교 교장(교장승진)
ㆍ1985년 9월 1일 ∼ 1990년 8월31일 남상초등학교 교장
ㆍ1990년 9월 1일 ∼ 1992년 7월31일 대서초등학교 교장
ㆍ1992년 8월 1일 ∼ 1994년 8월31일 남해초등학교 교장
ㆍ1994년 8월31일 정년퇴임. 국민훈장 동백장 표창.
작품연보
ㆍ1961년 『자유문학』에 단편소설 「백타원」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등단
ㆍ1972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일편단심」발표
ㆍ1977년 범우사를 통해 창작집『부부합창』발간
ㆍ1983년 『아동문예』에 단편동화「미숙이네 개 영리」발표
ㆍ1987년 시문학사를 통해 수상집『2인 수상집』발간
ㆍ1988년 아동문예사를 통해 동화집『아름다운 음악소리』발간
ㆍ1988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발표
ㆍ1991년 윤진문화사를 통해 동화집『단방귀 이야기』발간
ㆍ1993년 『경남문학』에 수필 「굽은 싸리채」발표
ㆍ1994년 중원사를 통해 동화집『바통지팡이』발간
ㆍ1997년 범우사를 통해 창작집『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발간
☞주요활동
ㆍ한국문인협회 회원
ㆍ한국소설가협회 회원 / 경남소설가회 회장 역임
ㆍ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ㆍ경남문인협회 회원
ㆍ경남아동문학회 회원
ㆍ남해문학회장 역임
ㆍ1990년 남해신문 창간호부터 논설위원으로 '논단'집필. '세상살이 토막살이' 연재
☞수상경력
ㆍ『자유문학』신인상 당선. 단편소설「백타원」
ㆍ경상남도문화상 문학 부문 수상
ㆍ평화문학상 수상『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
ㆍ경남아동문학상 수상
ㆍ남해군민대상 문화부문 수상
ㆍ경남탄생100주년 기념 '자랑스런 경남도민 100인상'수상
ㆍ경남문학상 수상
ㆍ한국소설가협회 공로상 수상
ㆍ남해신문사 공로패 수상
ㆍ국민훈장 동백장 표창
☞『백타원』으로 자유문학을 통해 등단
1961년 7월 자유문학 제3회 신인상에 단편소설 『백타원(白楕圓)』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신인상에 당선된 백타원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불구자의 불행한 생활을 그린 것으로 페이소스가 풍긴다는 평을 받은바 있다. 백타원이란 하얀 타원이라는 말로 운동장의 트랙 라인을 뜻한다.
필수는 징용으로 끌러가 일본 고베의 군수 공장에서 B29의 폭격에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필수는 광복이 되어 고국에 돌아와 장가를 들려하나 그에게 시집 올 처녀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한번 출가했던 사팔뜨기 헌각시와 결혼하여 명오를 낳았다. 6.25가 일어난 그해 여름 공산군 점령 당시에 콩밭을 매다가 폭격에 사팔뜨기 마누라는 어이없이 죽는다. 그후 후처를 아무리 찾아도 올 사람이 없었다. 중매에 힘쓰던 고모가 아들을 하나 둔 전사자 과부를 데리고 왔으나 여자는 만난 그 날 저녁 필수를 차버리고 간다.
홧김에 술을 마신 필수는 자기의 병신으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놀림과 몰매를 맞아 이마가 터진 아들 명오의 빰을 갈겨버린다. 졸업생 마라톤에 일등을 하여 제 키 만한 양철 대야를 상으로 탄 일이 있는 필수이지만, 병신이 된 후 운동회 구경이라곤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명오의 소청에 못 이겨 부자(父子)경기에 안 나설 수가 없었다. 아비 아들 손을 잡고 출발을 했으나 트랙 라인에 발을 헛디뎌 푹 쓰러지고 만다.
운동장에서는 폭소가 터진다. 그러나 필수는 쓰러지면서도 아들의 등을 밀어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와 6.25사이의 민족적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평화문학상 수상
1989년 12월 18일 이웃 문신수선생은 평화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의 작품인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이다. 제목을 보아서는 무슨 말인지 언 듯 이해하기가 어렵다. 선생께서 풀이한 내용을 보면, 첫째로 나쁜 것도 손질을 잘하면 좋게된다. 둘째로 나쁘면 빛이 안 나서 솜씨가 아깝다. 셋째로 나쁜 바탕에 정공(精工)을 가하여 보아야 어울리지 않는다. 이와같이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의 보편적인 뜻은 좋지 못한 재료라도 손질만 잘하면 최상의 것이 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의 작품은 문신수 선생께서 초등학교 교사시절에 가르친 제자와의 대화이다. 제자 김상균(金相均)은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고려 양복점을 운영한다. 스승과 제자 중 제자는 지난 학교시절을 회상하면서 본인의 사업운영과 철학 등이 뚜렷하고 본인의 의사를 주장하고 전달하는데 확실하였다. 이러한 제자를 볼 때 스승은 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김상균은 어느날 곤히 잠들고 있는 한밤중에 문신수선생에게 시외전화를 건다. 내용 중에 김상균은 「저는 많은 스승 가운데서 오로지 선생님만 생각해왔고 가장 존경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쩌다 마음에 걸리는 건 선생님의 차별교육입니다.」
"뭐? 차별교육?"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까지 차별교육을 해 본 적이 없는 문신수선생이다.
다시 김상균은 「그건 선생님 성격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생님 성격이야 얼마나 공명정대하십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가 잊지 못하고 있질 않습니까?」김상균의 말은 자꾸 어어진다. 김상균은 6학년 때를 회상하면서 과외수업를 받지 못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5학년까지 줄곧 최우등을 해 왔고 반장을 해 왔지만, 6학년 때의 과외수업으로 2등을 하게되었고 반장도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차별교육이라고 했다. 교육제도의 모순이었을까? 당시 과외수업은 수업료를 받았을까? 어느 학생은 부유하기 때문에 과외수업을 받고 어느 학생은 가난해서 과외수업을 받지 못했을까? 심야의 충격으로 40년간 스승의 길이라는 것을 반성해 보고 많은 제자들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 작품에도 문신수선생의 교육관이 나타나고 있다.
『교육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제 가르친 학생에게 평생 책임을 져야 한다. 가르쳐 준 학생이 어떤 사람으로 되어가는가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세상이 잘 되어 나가는 경우에는 교육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 책임이 없는 대신 공로도 없다. 그러나 하나의 범죄자가 생겼을 때에는 그를 가르쳤던 사람이 누구였더냐 하는 비난이 당장 교육자에게로 돌아온다.
교육자는 언제나 그 때 그 정신 그 기상으로 몸을 바로 세워 제자들에게 옳고 그름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어 있어야 한다.
최소한, 저질ㆍ무능ㆍ무심ㆍ사욕ㆍ안일 등 속물로 타락된 꼴을 보여 제자들에게 실망을 주어서는 안된다.』이러한 교육관을 실천할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고려양복점 김상균 제자는 문신수 선생에게 일침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김상균은 문신수 선생을 『공명정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그후 김상균은 스승에게 스승은 제자에게 서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제자 김상균은 문신수 선생에게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의 글귀를 써주면 향나무 판자에 새겨서 사업장에 걸어둘 생각임을 말했다. 문신수선생은 붓글씨 연습을 한 후 그 중에서 글체가 조금 나은 것을 골라 설명문과 같이 보냈다.
부산 서쪽 번화한 거리를 걸어가면 길 위 편에 아담한 양복점이 있다.
고려양복점! 문을 열고 들어서면 키가 크지 않은 평범하게 생긴 주인 김상균과 『석새 베에 열새 바느질』현판이 웃으면서 반긴다.
☞안에서는 오손도손 밖에서는 서글서글
선생의 일대기를 어찌 글로 표현을 다 하겠습니까? 발표한 작품들의 내용과 사회의 공적 등 모두 기록하지 못하고 몇 분들의 글을 인용하여 글을 올리고자 한다. 김태두님의 『사막에 꽃피운 사보텐』에서 선생은 남해에서 태어나 한 번도 외지로 나가지 않은 순수한 향토 문학가이시며 교육자이시다. 한 마디로 향토사랑, 문학사랑으로 올곧은 일생을 살고 가셨다.............평소에는 온화한 성품으로 잘 웃으시고 경험담을 재미나게 말씀하시는 선생은 언뜻 보기에는 낙천적이며 태평스런 삶을 살아가시는 듯하나 한마디로 외유내강 그 표현이다.
『아들, 딸 며느리 제자에게 거리낌없이 읽힐 수 있는 글을 써야한다. 인생을 가르치는 교재가 되고 지혜에 눈을 뜨게하는 작품 읽어서 위안을 받고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내용. 시대를 증언하고 인도하며 후세에도 오래 읽을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이와 같은 포부와 욕망이 늘 나를 채찍질했다.』
그리고 김태두님이 문신수선생을 표현하기를
『글을 쓴다는 사람은 괴벽을 가지고 있어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인화 면에서도 문제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선생은 모범적인 교육자로서 칭송이 자자하다는 데에 주목을 했고 다음에는 문화 예술이 도외시되는 우리 향토 환경 속에서 자생적으로 문예의 꽃을 피웠다는 것은 향토사적인 의의를 가진 중요한 일이다.』사실을 압축하여 표현한 것 같다.
선생께서 즐겨 쓰셨던 '안에서는 오순도순 밖에서는 서글서글' 각박해진 오늘의 사회에서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일까? 정말 서글서글하고 오순도순 하면서 생활한다면 바로 이곳이 천국이 아닐까?
남해문학회 이상범회장은 『선생께서는 우리들에게 무언으로 남겨 놓으신 교훈은 '안에서는 오순도순 밖에서는 서글서글'이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항상 가정에서는 따뜻한 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살아야하고 밖에서는 남들에게 상냥하게 대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남겨 놓으신 정신적인 삶의 목표와 문화유산인 남해문학회는 선생님께서 쌓으신 그 공적과 같이 영원히 빛날 수 있도록 남해문학회 회원 모두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웃 문신수 선생의 문학정신과 향토애는 제자들에게 또는 후배들에게 계속 이어져 갈 것입니다. 화전문화재 행사 때마다 학생들의 작품을 일일이 밤을 세워가며 직접 써 노랗게 물든 남해읍 은행나무에 매달렸던 시화전! 다음 시화전에는 이웃선생이 쓴 시화전은 볼 수 없지 않을까? 미련을 남기면서 이웃 문신수선생을 소개하였다. 미흡한 점은 널리 이해 바란다.
이웃 문신수 선생에 대한 일대기를 월간 남해리뷰 2002년 11월∼12월 합본호에 실었다. 그러나 문학비 제막에 즈음하여 다시 옮겨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