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란 문자 그대로 중국 고대의 귀중한 문장을 말하는데 진보(珍寶)란 참된 보배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고문진보라는 명칭은 고대 유명한 시문(時文)을 정선(精選)하여 수록한 책이라는 뜻이다.
고문진보를 중국에서 편찬 연대를 살펴보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방본(坊本) 서문에 지정 병오 맹하 우강후학 정본사문 서(至正 丙午 孟夏 旴江後學 鄭本士文 敍)라고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원나라 순종(順宗) 지정 병오 곧 공민왕 15년(1366) 4월 정본의 서문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서문에는 편자에 대해서 조금도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임이정(林以正)이란 사람이 이 책을 항간에서 얻어 교정을 하고 주석을 붙인 것을 그 제자인 여모(余某)가 정본에 서문을 쓰도록 청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야은(壄隱)선생이 고려시대 밀직사(密直司) 제학(提學)으로 임명되어 공민왕 15년(1366) 3월부터 6월까지 중국의 외교특사로 다녀오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고문진보를 최초로 구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고려사 권 41.8 공민왕 세가편)
우리나라에서 고문진보(古文眞寶)의 간행사(刊行史)
제1차 간행(공민왕 16년 1367)
야은(壄隱)선생이 중국에서 귀국한 다음해인 공민왕 16년(1367) 7월 경상도 도순문사(都巡問使)에 임명되고(고려사 권 41.16 공민왕 세가편) 당시 중국에서 가져온 고문진보를 합포(合浦 : 지금마산)에서 간행하였으나 그때 간행한 고문진보(古문眞寶0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다.
제2차 간행(세종 2년 1420)
조선시대 야은선생의 손자가 되는 전예(田藝)가 공주향교의 교수로 재직 시 야은선생이 간행한 고문진보를 유생들의 교육자료로 이용하던 때에 충청도 관찰사 강회중(姜淮仲)이 새로 부임하여 공주향교를 시찰하던 중에 전예가 이용하는 고문진보 내용이 너무 훌륭하여 고문진보 입수경위와 고문진보가 너무 낡아서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아 안타까워 옥천군수 이호(李護)에게 다시 인쇄를 하게 되는데 책의 명칭이 “善本大字諸儒箋解 古文眞寶(선본대자제유전해 고문진보)"라 칭하였으며 이 책을 일명 전예본(田藝本)이라고도 한다.
이 책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 또는 성암(誠岩)고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이곳에 모아졌음으로 인하여 보존상태가 불량하여 많은 부분이 낙장이 되고 소실되어 그 전체를 고증하기 불가능하다.
제3차 간행(성종 3년 1472)
함안군수 진주진 병마동첨 절제사 김종직(金宗直)이 중국 명나라 한림시강(翰林侍講)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오면서 가지고온 고문진보를 김종직이 상설고문진보 대전(詳說古文眞寶 大全)이란 명칭으로 인행(印行)한 것이다.
야은(壄隱)선생의 합포본(合浦本)보다 일백여년 후이며 또한 전예보다 52년 후의 일이다.
제4차 간행 (숙종 2년 1676)
태인(泰仁)에서 전이채(田以采)가 간행하였다.
이 때 나온 고문진보의 명칭을 상설고문진보대전이라고 하였다.
이 책은 태인 현감 내옹(耐翁)이라는 사람의 간기(刊記)를 보면 내옹이 태인현의 현감이 되어 임지에 도착해보니 전이채는 아전(衙前)인데 야은의 후손으로 야은선생의 고문진보가 훼손되어 부전(不傳)이 염려되어 모선(慕先)의 정성에서 태인 문중 친척들이 성금을 모아 전집(前集) 12卷 후집 10권 도합 22卷 8冊으로 간행한 것이 바로 이 고문진보이다.
본 후집 10권의 태인 현감 내옹(耐翁)의 글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고문진보(古文眞寶)는 우리나라에서 전야은(田壄隱)이 처음 간행하였으며 뒤에 계속 간행한 것은 불과 두 번에 그칠 뿐 아니라 지금 까지 몇 백 년 동안에 판이 망가지고 글자의 획이 빠뜨려져서 세상에 간행될 수 없게 되었다. 아전 전이채는 야은의 후손으로 이 책이 훼손되어 후세에 전할 수 없게 된 것을 개탄하여 드디어 마침내 여러 족친들과 더불어 뜻을 모아 잘 베끼고 다시 인쇄를 하게 되었다.
서리(書吏)로서 고문진보의 보배됨을 알고 야은의 남은 공을 본 받아 천명해서 몇 달이 안 되어 책을 찍어내는 수고로움을 끝내었으니 찍어낸 인본(印本)이 한번 나옴에 또 다시 세상에 오래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난해에 마침 이곳 수령(현감)이 되어 가지고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어 그 일을 기록하여 후인들 가운데 이 책을 읽는 이로 하여금 이사람 田以采가 옛 야은(壄隱) 발자취를 이을 수 있게 된 것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註
이 고문진보는 서울대학 규장각 도서관에 깨끗한 상태로 소장되어 있으며 이 책은 본 필자가 복사본으로 하여 8冊을 5冊으로 엮어 책으로 내 놓았다.
田以采에 대한 연구 자료
야은파 한노공(壄隱派 漢老公)의 삼자 정용랑장 여(三子 精勇郞將 畬)의 둘 째 아들 충남계 孫 16世 應錫의 5대손에서 21세손 계열의 以字 行列 이름자가 以貞으로부터 시작하여 11명의 이름이 보인다. 전이채는 족보에 누락되어 확인이 불가능 하며 단 21세 以字 行列의 포함 인물 이라고 추리할 뿐이다.
부산대학교 유탁일(柳鐸一) 교수논문
호남지방 간행본 연구(1981.12.1~1983.3.2)
손기조(孫基祖), 田以采, 박치유(朴致維) 간행본 부산대학 人文論叢 23
유탁일 교수는 상기 논문을 쓰면서 전이채는 衙前인데 능문(能文)의 학자이며 내옹(耐翁)의 간기(刊記)에 의하면 담양전씨 야은(潭陽田氏 壄隱)의 후손이 분명한데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유탁일 교수는 직접 태인의 전씨 세거지(世居地)를 찾아보니 전씨는 얼마 살지 않고 전이채에 대해 아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어 포기하려 생각하다 전씨족보에서 찾던 과정에서 1747년 정묘보(丁卯普) 전운상 간행본을 보게 되었으며 여기에도 전이채의 상계(上系)와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운상공(雲祥公)은 전이채에 대한 상계와 후손들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나 부지기선(不知其先)이라 할 수 없이 별도로 4卷 42에 전이채 투 여중(田以采 投 犁重)이라는 글만 남기게 되었다. 전이채는 아들이 없어 려중을 양자로 들이거나 아니면 양자로 들어가기로 계획한 것으로 추리할 뿐이다.
담양전씨 중에 오직 운상공만이 전이채는 태인 지방에 아전(衙前)이지만 能文의 학자로서 고문진보를 간행하고 또한 여러 문집을 간행한 학자로 지방 유력인과 교유로 신분상승을 꾀하고 문화적 욕구가 강한 인재라 그 행위가 가상하여 그 이름을 족보에 남기려고 운상공이 노력하였으나 확인을 못하고 그 이름만 별도로 기록하여 놓은 것인데 이후 족보를 속간하면서 삭제되어 그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있다.
이후 어느 누구도 전이채를 찾으려고 노력한 사람은 없었으며 오직 사학자 유탁일 교수와 천혜봉(千惠鳳) 교수가 1974년 역사학보 61집에서 전이채를 찾으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한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전이채 고문진보 간행사
전이채가 담양전씨 중에 조선시대 최초로 인쇄본을 간행하였으며 전이채본 고문진보는 1678년 인행(印行)하였음으로 담양전씨 창간족보가 1700년 경진년(庚辰年) 이니 이보다 24년전이니 조선시대 최초의 인쇄본이다 세 번째가 야은선생일고가 1738년에 간행이니 62년 전의 일이다.
전이채가 간행한 서책 목록
상설고문진보대전(詳說古文眞寶大全)
사요취선(史要聚選)
대명율시(大明律詩)
소왕사기(素王事紀)
농가집성(農家集成)
공자통기(孔子通紀)
효경대의(孝經大義)
명심보감초(明心寶鑑抄)
신간구황촬요(新刊救荒撮要)
사문류취초(事文類聚抄)
증산염락풍아(增刪慊洛風雅)
신간소왕사기(新刊素王事記)
동자습(童子習)
이모든 서책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보존
田壽錦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