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은총
여호수아 24장 14 ~ 18절
14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여러분은 이제 주를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만 섬기시오. 15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나와 나의 집안은 주를 섬길 것이오." 16 백성들이 대답하였다. "주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일은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17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그리고 주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지몽매(無知蒙昧)
정보를 받아들이고 판단할 때 일어나는 주관적 왜곡 현상을 인지 편향이라고 합니다. 경험이나 선입견, 사회 문화 환경적 배경 등으로 발생하는 인지 편향 중 하나로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dffect)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과잉 자신감과 우월감으로 자신의 실력을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는 반면, 능력이 있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실력을 과소평가하여 열등감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잘못된 판단을 내려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지만, 능력이 없어서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를 잘 설명하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 학사가 되면 난 무엇이든 다 안다. 석사가 되면 내가 모르는 것도 많다. 박사가 되면 난 아무것도 모른다. 교수는 난 진짜 뭣도 모르는데 내가 말하면 다들 믿는다. ] 흔히 말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지도자에게서 이러한 현상을 너무 빈번하고 쉽게 확인하게 되어 몹시 안타깝습니다.
퀴어 축제 축복식 이후 재판을 준비하시는 담임목사님께 가장 자주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동성애를 반대하는 저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모를까요? 아마 여러 가지 비본질적 이유로 본질을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식이 없고 사리에 어둡다는 것을 ‘무지몽매’ (無知蒙昧) 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지몽매 네 글자 중 蒙(몽)은 ‘숨기다’, ‘덮어씌우다’, ‘덮어 가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잘 알지 못하면서 알량한 지식으로 본질을 어둠으로 덮고 씌워서 전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스클레로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 열두바구니가 남았다는 내용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일어난 놀라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면서 저분과 함께라면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시의 형편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으로 암흑의 시절이었습니다. 먹사니즘적으로도 대단히 힘들었고 천지개벽을 열망하는 민심이 들끓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간접적으로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며 새로운 길을 기대하게 된 것입니다. 뜨거운 열망을 갖게 된 군중들은 예수님을 삶의 문제를 해결해 줄 인물로, 새로운 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들 안에서는 아마 세상을 확 뒤집어 보자는 요청이 쇄도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무력 혁명을 꿈꾸는 이도 있었습니다. 군중을 피해 가셨던 예수님을 좇아 가버나움까지 찾아온 사람들과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을 양식을 얻으려고 일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요6:27)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을 것이요,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요6:54~56)
앞에 말씀은 불특정 다수의 군중에게 하신 말씀이고 뒤에 말씀은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옥신각신하다가 자신들이 품었던 기대를 충족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흩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는 어땠을까요?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제자들도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렵다는 단어는 헬라어“스클레로스”(σκληρός)의 번역입니다. 이는‘난해한’,‘기괴한’,‘황당한’,‘귀에 거슬리는’,‘불쾌한’이라는 뜻입니다. 말 자체가 어려워서 알아들을 수 없다거나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에 자신이 동의할 수 없기에 알아들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무지몽매했던 것입니다.
질문의 목적
결국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났고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떠난 이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 천국 복음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와 욕망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남은 열두 제자에게 예수께서 이렇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하시니(요6:67)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에게처럼 우리에게 ”너희도 떠나가려느냐“라고 물으시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군중 모두가 오병이어 사건의 때에는 환호했고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의기양양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앞에서 그들은 한계를 드러냈고 이제 남은 이들조차 변변치 못합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 선 제자와 군중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십자가 사건은 닥쳐옵니다. 지금이 그때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시대를 종교개혁 시대 이상으로 어둡다고 이야기합니다. 교회는 자정 능력을 잃었고 사회가 교회를 판단해야 합니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절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회를 떠나야 한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의 질문에 우리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요?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6:68)
기억
본문 15절에서 여호수아가 죽음을 대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별설교를 하는 중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가려느냐?’라고 하신 것처럼 강력한 결단이 요청되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것과 저것 중에 무엇을 선택할지 즉각적으로 결정하라고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들이든지, 여러분이 어떤 신들을 섬길 것인지를 오늘 선택하시오.
사실 인생도, 신앙도 모두 선택의 과정입니다. 신앙의 길을 갈 것인가 불신앙의 길로 갈 것인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성실과 진실로 섬길 것인가 아니면 어제와 오늘의 다른 신을 섬길 것인가? 오늘 선택하라고 합니다. 현대영어성경(CEV)에서는 오늘을 ‘right now’(지금 바로)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급작스러운 선택 요구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관한 생각, 경험, 믿음에 관한 질문입니다. 또한 그들을 점검하는 것이고 진솔한 고백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각적인 결정 요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그들은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통해 동행하신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17 주 우리 하나님이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을 이집트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큰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우리가 이리로 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고, 우리가 여러 민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오는 동안에 줄곧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18 그리고 주께서는 이 모든 민족을, 이 땅에 사는 아모리 사람까지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사량(思量)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사랑의 고유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받고 누린 것 모두를 눈에 보듯이 항상 간직한다는 것은 사랑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어원을 보통 사량(思量)이라고 합니다. 사량은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 깊이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생각하고 헤아리고 있는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날 것이냐고 묻는 것 또한 예수님께서 주셨던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고 심장에 각인하며 살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식었다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구속의 은총을 잊은 것입니다. 반면에 기억, 하나님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 기도의 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기억의 은총은 우리의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십니다.
낙타 무릎이라고 불렸던 기도의 사람 야고보가 고난받을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라(약5:13)고 말씀을 할 수 있던 것은 그의 무릎이 낙타 무릎이 될 정도로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습관을 생활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삶의 영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기억의 은총을 누리고 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너져 가는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교회 빈들공동체교회로 부르심의 의미를 품고 간직해야 합니다. 야고보처럼 성심 기도가 생활 속에서 실제화되는 진정한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고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하면 고난의 때나 축제의 시간이나 언제든지 기억의 은총을 베푸셔서 현존하고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여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기도를 쉬거나 찬송이 멈추지 않도록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무너져 가는 교회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교회, 빈들공동체교회로 부르심에 감사하며 새로운 교회로 지어가심을 확신으로 기대하기를 바랍니다. 시대적 사명과 몸 된 교회의 거룩한 도리를 다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모쪼록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억의 은총이 저와 여러분 안에 충만하길 축원합니다. 참 평화
< 축 도 >
지금은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생명 지어 주시고 그 생명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하심과 보혜사 성령의 감화 감동 교통 역사 충만하심이 기억의 은총을 소망하고 새로운 교회로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결심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빈들공동체 위에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