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김민기가 대학가 노래운동의 주역들을 규합하여 만든 '노찾사'의 일원으로 처음 모습을 들어냈다. 87년 6월항쟁 직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던 '노찾사'의 첫 번째 공식 공연에서 그는 「녹두꽃」으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직업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노찾사'가 아니라 대학가의 또다른 감수성을 형상화한 그룹인 '동물원'을 통해서 였다. 김창기. 유준열 등 재기 넘치는 청년들이 결집한 '동물원'은 88년의 데뷔 앨범과 그것의 성공을 이어간 이듬해의 두 번째 앨범을 통해 민중속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거리에서」와「변해 가네」「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혜화동」등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일상적 구체성과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명징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우리 대중음악계에 작은 대안으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솔로로 데뷔한 그의 음악적 과제는 결국 '노찾사'와 '동물원'의 음악적 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섯 개의 자작곡을 담은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팬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비제도권과 제도권을 통틀어 질주해 온 그의 여정은 잠시 점검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 그러나 최초로 닥쳐 온 이 시련을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91년 두 번째 앨범인 「사랑했지만」을 내세워 스타덤에 올라섰고, 쉴 새 없는 소극장 공연을 통해 '통기타 정신의 파수꾼'이 되었다.
두 번째 앨범의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모던 포크의 핵심을 향해 나아간다. 세 번째 앨범에 임한 김광석의 전략은 김민기의 후예들이자 70년대 말의 대학가 노래운동의 숨은 주역들인 한동헌과 한돌의 소박하고 건강한 의식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행진곡풍의 리듬과 과격한 정치선동으로 무장한 저항의 원심력에 밀려 '소시민적'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던 「나의 노래」와「외사랑」, 그리고 「나무」는 김광석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재등장한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음유시인적 이미지가 정착한 것은 바로 이 싯점이며, 서구 대중음악의 영향 아래 때마침 일기 시작한 '언플러그드' 열풍은 기존의 언더그라운드 이미지 위에다 빛나는 훈장을 하나 더 그에게 달아 주었지만......
김광석의 노래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가로지른 심연의 혼돈 속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는 저 70년대부터 대항문화의 이름으로 대학가에 복류해 온 통기타의 자유주의 정신이 밑그림을 이루고, 80년대라는 거대한 함성에 대응하는 '신디사이저' 음향이 새로운 음악의 집단적 경험을 제련해 나아갈 즈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그는 순식간에 이미지의 무한경쟁으로치달은 90년대에 이르러, 달랑 남은 기타와 하모니카를 이용하여 또다시 외로운 백병전을 전개해야 했다.
따라서 80년대 전반 서울지역 대학의 노래동아리인 '연합 메아리'에서 '새벽', 그리고 '노찾사'의 활동에 이어 그룹 '동물원'의 보컬리스트로 전신했다가 마침내 직업 음악인이 된 그의 어깨에 걸린 노래운동이라는 전력과 모던 포크라는 음악적 과제는 힘겹기 그지없는 화두였다. 80년대의 비합법적인 공연에서 그의 「녹두꽃」과「이 산하에」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그가 김민기와 한돌, 그리고 정태춘으로 내려온 '민중 가객'의 명맥을 이어 주기를 희망했으며, 사랑타령과 탈인간적인 기계적 리듬의 범람에 휩쓸려 버린 비판 정신의 담지자가 되어 주길 기대했다.
이런 점이 그를 견디기 힘든 중압감속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다. 하루 아침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사인은 자살인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돌연한 퇴장이 한국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 된다는 것을 몰랐거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했었던 것 같다.
84년 김민기가 대학가 노래운동의 주역들을 규합하여 만든 '노찾사'의 일원으로 처음 모습을 들어냈다. 87년 6월항쟁 직후 기독교 백주년 기념관에서 열렸던 '노찾사'의 첫 번째 공식 공연에서 그는 「녹두꽃」으로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인 직업 음악인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노찾사'가 아니라 대학가의 또다른 감수성을 형상화한 그룹인 '동물원'을 통해서 였다. 김창기. 유준열 등 재기 넘치는 청년들이 결집한 '동물원'은 88년의 데뷔 앨범과 그것의 성공을 이어간 이듬해의 두 번째 앨범을 통해 민중속으로 다가갔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거리에서」와「변해 가네」「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혜화동」등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노래는 일상적 구체성과 상업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명징한 이미지를 구축하여 천편일률적인 사랑타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우리 대중음악계에 작은 대안으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를 마감하는 해에 솔로로 데뷔한 그의 음악적 과제는 결국 '노찾사'와 '동물원'의 음악적 이념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섯 개의 자작곡을 담은 그의 솔로 데뷔 앨범은 팬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고, 비제도권과 제도권을 통틀어 질주해 온 그의 여정은 잠시 점검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 그러나 최초로 닥쳐 온 이 시련을 극복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는 91년 두 번째 앨범인 「사랑했지만」을 내세워 스타덤에 올라섰고, 쉴 새 없는 소극장 공연을 통해 '통기타 정신의 파수꾼'이 되었다.
두 번째 앨범의 상업적 성공을 바탕으로 그는 모던 포크의 핵심을 향해 나아간다. 세 번째 앨범에 임한 김광석의 전략은 김민기의 후예들이자 70년대 말의 대학가 노래운동의 숨은 주역들인 한동헌과 한돌의 소박하고 건강한 의식을 되살려 내는 것이었다. 행진곡풍의 리듬과 과격한 정치선동으로 무장한 저항의 원심력에 밀려 '소시민적'이라는 낙인이 찍혀있던 「나의 노래」와「외사랑」, 그리고 「나무」는 김광석에 의해 새로운 옷을 입고 재등장한다. 통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음유시인적 이미지가 정착한 것은 바로 이 싯점이며, 서구 대중음악의 영향 아래 때마침 일기 시작한 '언플러그드' 열풍은 기존의 언더그라운드 이미지 위에다 빛나는 훈장을 하나 더 그에게 달아 주었지만......
김광석의 노래들은 80년대와 90년대를 가로지른 심연의 혼돈 속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는 저 70년대부터 대항문화의 이름으로 대학가에 복류해 온 통기타의 자유주의 정신이 밑그림을 이루고, 80년대라는 거대한 함성에 대응하는 '신디사이저' 음향이 새로운 음악의 집단적 경험을 제련해 나아갈 즈음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던 그는 순식간에 이미지의 무한경쟁으로치달은 90년대에 이르러, 달랑 남은 기타와 하모니카를 이용하여 또다시 외로운 백병전을 전개해야 했다.
따라서 80년대 전반 서울지역 대학의 노래동아리인 '연합 메아리'에서 '새벽', 그리고 '노찾사'의 활동에 이어 그룹 '동물원'의 보컬리스트로 전신했다가 마침내 직업 음악인이 된 그의 어깨에 걸린 노래운동이라는 전력과 모던 포크라는 음악적 과제는 힘겹기 그지없는 화두였다. 80년대의 비합법적인 공연에서 그의 「녹두꽃」과「이 산하에」에 매료되었던 사람들은 그가 김민기와 한돌, 그리고 정태춘으로 내려온 '민중 가객'의 명맥을 이어 주기를 희망했으며, 사랑타령과 탈인간적인 기계적 리듬의 범람에 휩쓸려 버린 비판 정신의 담지자가 되어 주길 기대했다.
이런 점이 그를 견디기 힘든 중압감속으로 몰아넣었던 것 같다. 하루 아침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그의 사인은 자살인 것으로 판명 되었다. 그는 자신의 돌연한 퇴장이 한국 음악계의 커다란 손실이 된다는 것을 몰랐거나,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 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