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 그 해 겨울
그 해 겨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해본다. 그때 나는 왜 풍기로 갔을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라는 것은 용의주도하게 짜여진 어떤 거창한 플랜에 따라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어느 한 순간의 우연과 광기에 의해 사소하게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개인사(個人史)도 다를 바가 없어서 일정 부분의 우연과 일정 부분의 광기가 열아홉의 소년을 그곳으로 데려갔을지도 모르고, 서머셋 모옴이 ‘달과 6펜스’에서 말했듯 아득한 옛날로부터 내 핏속으로 전해져 온 어떤 격세유전(隔世遺傳)의 인연이 ‘이끄는 대로’였을지도 모르지만 풍기에서 보낸 그 해 겨울은 그 이후 내가 살아온 날들의 한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풍기가 고향인 친구가 얻어놓은 풍덕직물 맞은편의 허름한 자취방 쪽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죽령에서 내려온 거센 바람이 빨랫줄에 걸려 있던 뻐덕뻐덕 얼어 있는 검은 몸빼바지를 지붕 위로 날려 보냈다. 바람. 풍기에 대해 내가 갖게 된 첫인상은 바람이었다.
‘풍성할 풍(豊)’, ‘터 기(基)’의 풍기였지만 왜 사람들이 ‘바람의 입(風口)’라고들 하는지 쉽게 짐작이 된 순간이었다. 바람이 흙들을 쓸어 가버린 길들은 반들반들했고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밤이 지나면 식당이나 미장원 간판들이 떨어져 거리에 나뒹굴곤 했다.
그 시절의 풍기는 ‘뭍의 삼다도(三多島)’라고 불리었다. 제주도처럼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지금은 인삼축제장으로 일부가 메워져 있는 남원천 바닥은 손바닥만 한 모래톱조차 찾아볼 수 없는 돌밭이었다. 오랜 세월 소백산 골짜기들에서 솟아나 흘러온 맑은 물에 씻겨 둥글어진 돌멩이들이 때로는 바람에 날리고 때론 비에 젖기도 하면서 천변(川邊)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포장이 안 돼 있던 신작로에는 또 얼마나 돌멩이들이 많았던지 미루나무들이 늘어선 그 길을 걷다보면 하루에 일고여덟 번쯤 덜컹거리며 영주를 오가던 합승버스 바퀴에서 작은 돌멩이들이 피융 피융 튀어 오르곤 했다. 면사무소를 비롯해 골목 안의 대부분의 집들은 나지막하고 정겨운 돌담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가끔 풍기에 가서 그 골목들을 걷다보면 사라져버린 돌담들이 그립다. 편리하고 견고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근대화적 사고가 정겨움과 아늑함을 사라져버리게 하고 우리의 기억 속에서마저 지워버린 것은 아닐까?
누군가가 그 시절, 그곳에 가서 하루를 보내며 작은 읍내의 분위기와 색채의 단조로움에 혹시 따분해지기라도 했다면 저녁 무렵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작업 교대시간이 되면 크고 작은 직물공장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처녀들로 거리들은 갑자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수백 대의 기계들을 갖춘 큰 공장들을 비롯해서 족답 베틀기 두어 대를 가진 작은 가내(家內) 공장들에는 멀고 가까운 지역에서 온 2000여 명의 처녀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 많은 청춘들이 읍내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지만 미장원이나 양장점, 유흥가들이 발전하거나 득을 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머리에서 ‘행복한 가정은 똑같은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고 한 톨스토이는 틀렸다. 그때 그 푸르렀던 처녀들은 똑같은 이유로 행복하지 못했다. 그들의 모든 고향집에는 늙고 병든 부모와 학비를 필요로 하는 동생들이 있었다.
얇디얇은 월급봉투에 양장점이나 미장원에 갈 엄두를 내기도 쉽지 않았고 호사스럽게 외식을 하거나 유흥을 즐길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작은 읍내에 시장 안에 하나, 남원다리 옆에 하나, 그렇게 극장이 두 개씩이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극장은 고달픈 공장 일과 시골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 걱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남원다리 옆 동보극장,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고 껌 씹는 소리가 낭자하던 어둠 속에서 그 처녀들 사이에 끼어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와 ‘쏭 오브 노르웨이’를 봤던 밤들이 지금도 조금은 짠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대 예언자였던 격암(格庵) 남사고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소백산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넙죽 절을 하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했다. 그 남사고가 남긴 격암유록(格庵遺錄)과 한 뿌리가 닿아 있는 정감록의 비결(秘訣)은 말할 것도 없고 풍수지리에 능통했던 모든 술사(術士)들이 하나같이 소백산을 우리 땅 제일의 산으로(지리산이 두 번째다) 추켜세우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을 찾아 갔던 고대의 유태인들처럼 많은 이들이 평화와 안락의 땅을 찾아 풍기로 왔고 오늘날 풍기가 전국 최고의 인견과 인삼의 주산지가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바람만은 좀 난폭하다) 넉넉한 은혜의 산자락 아래서 풍기 사람들은 인재를 키우고 생업을 일구었다.
그 해 겨울을 서(西)로는 공원산, 독산, 반도산의 으슥한 산길까지, 동으로는 토성의 과수원들 사이로 난 붉은 황토 길까지, 북으로는 금선정 지나 욱금, 삼가동까지 페트릭 쥐쉬킨트의 ‘좀머 씨’처럼 터벅거리며 걸어 다니고 밤이면 태평당 시계점 맞은 편, 선지국을 잘 끓이던 인심 좋은 아지매가 있던 용궁집에서 이슥하도록 술을 마시며 보냈다. 짚으로 나지막하게 이엉을 이어 덮어놓은 인삼밭들과 흰 눈을 머리에 인 소백의 봉우리들과 성내동의 골목길을 걸으면 찰그닥 찰그닥 돌담을 넘어오던 베틀 돌아가는 소리와 교대시간이면 거리로 쏟아져 나오던 처녀들의 나직한 웃음소리와 언 몸빼바지를 날리게 하던 그곳의 바람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내가 살아온 날들과 그 날들만큼 많은 생각의 갈피들 속에 진한 풀물처럼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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