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분야에서 오래도록 외길을 걸어오며 성공 사례로 자리잡은 전문기업들이 신사업에 진출하려다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경우를 심심치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야말로 바람한번 잘못 피워 애인도 놓치고, 가정도 파탄난 격. 가정에만 충실했더라면 여우같은 부인과 토끼같은 자식들과 알콩달콩 행복했을 거라고 후회해봐야 이미 놓쳐버린 화살이다.
지누스(구 진웅)
텐트 버리고 첨단사업 찾다 낭패
지난 2002년 말 이윤재 지누스(구 진웅) 회장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지누스의 성공 사례’라는 주제로 강연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누스를 세계 제1의 텐트 회사로 키운 후 벤처투자, 광통신, 보안장비 사업 등에 적극 진출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는 자리였다. 이 뿐 아니다. 그 해 초에는 세계적인 경제잡지 포브스지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했다. 79년 창업 이후 텐트제조업에 주력했던 지누스의 디지털기업으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알려주는 지표들로 세상은 이해했다.
그로부터 1년여. 지난 4월9일 증권거래소는 지누스 상장 폐지를 발표했다. 자본금의 50% 이상이 잠식됐고, 대손충당금 과소설정으로 외부감사인으로부터 한정 의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3월 17일 지누스는 화의 신청을 했다. 화의 신청 직후 한국기업평가는 지누스 기업어음 등급을 ‘D’로 하향조정했다.
2000년 텐트 사업 매출액만 2000억원. 텐트 업계 세계 최고 중소기업으로 군림하면서 수출 코리아 성가를 높이던 지누스 몰락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전문가들은 지난 99년 지누스가 디지털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발표한 때를 몰락 기점으로 잡는다. 텐트 산업만으로는 미래 성장에 한계가 있다며 시대 흐름인 디지털 분야에서 승부한다는 전략이었다.
지누스는 텐트 생산 해외법인을 한데 모아 ‘노스폴’이라는 지주회사를 설립하고 이 회사 지분 70%를 워버그핀커스에 팔아넘기며 총 5000만달러 외자유치에 성공했다. 대신 지누스는 노스폴에 각종 원·부자재를 공급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신사업을 찾아 나섰다. 그 때 찾은 업종이 바로 광통신과 DVR(잠깐용어 참조)이다. 그러나 두 분야는 매출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현재 두 분야 매출이 지누스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 미만이다.
지누스는 또 99년 9월부터 2003년 9월까지 4년동안 신사업을 하겠다고 각종 기업을 인수했다. 여기에 들인 비용이 무려 186억원. 순수 투자금만 이 정도니 실제 들어간 돈은 더 많을 것이라는 게 관계자들 전언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들인 10여개 기업은 이익은커녕 막대한 지분법손실만 안겨줬다. 지난해 지분법 평가손만 22억원 이상이다. 이에 대해 김광수 한국기업평가 책임연구원은 “당시 워버그핀커스로부터 외자유치했던 막대한 돈을 텐트의 고부가가치화와 신시장 찾기 등을 위해 썼거나, 수많은 분야 신사업 한다고 분산시킨 역량을 한 곳에 집중했더라면 절대 지금과 같은 결과를 빚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웅전기 산업
가정용 의료기기 잘못된 투자로 부도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대웅전기산업 공장 한켠에서 김용진 사장이 청산 작업을 진행하느라 바쁘다. 지적재산권만 430여가지, 2002년도 매출 320억원, 김 대표가 받은 대통령표창장만 5개. ‘모닝컴’ 브랜드로 유명한 압력밥솥 명가 대웅전기공업의 화려했던 시절을 알려주는 수치는 그러나 이제 한낱 꿈이 돼 버렸다. 김 사장 역시 실패한 경영진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85년 설립된 이래 10년 이상 압력보온밥솥 외길을 걸으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중소제조기업으로 자리잡았던 대웅전기공업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회사 관계자들은 2001년부터 추진해온 가정용 건강기기 사업 진출에 발목이 잡혔다고 얘기한다. 당시 김 대표는 “같은 전기전자 분야로 충분히 해볼만하다”며 호언장담 했었다.
대웅전기산업이 처음 외도한 품목은 홍삼중탕기. 중소기업으로서는 꽤 큰 돈인 20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제품을 생산해낸 데 이어 막대한 마케팅비용을 들여 홍보에 나섰다. 그러나 대당 100만원선의 고가인 홍삼중탕기는 예상만큼 팔리지 않으면서 재고만 쌓여갔다. 후속타로 10억원의 개발비를 들여 내놓은 가정용 온열매트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워낙 제조업체가 많아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전문업체로서의 이미지가 희박한 대웅전기산업이 뚫고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이 뿐 아니다. 대웅전기산업이 가정용 건강기기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쿠쿠 등 새로운 경쟁자가 나타나고 삼성, LG 등 대기업들이 밥솥 사업을 강화하면서 대웅전기산업 입지는 계속 좁아져갔다. 회사를 먹여 살리던 본업도 죽어가고, 신규 사업은 막대한 비용만 잡아먹은 채 망가져가다 결국 대웅전기산업은 부도를 맞게 된다. 지난해 중반 일이다.
결국 채권단은 용인 공장과 사옥을 경매에 붙여 현재 경매가 진행 중. 대웅전기산업이 갖고 있던 각종 지재권과 특허권은 기술신용보증기금이 가압류해 매각 절차를 밟고 있다.
이와 별도로 대웅전기산업은 또 다른 의료기기업체인 한국세라스톤에 인수됐다. 현재 한국세라스톤은 (주)대웅이라는 신규법인을 설립하고 이 곳에서 밥솥 제조를 계속한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세라스톤 자체가 지난해 상반기 매출 30억원에 6억6000만원의 적자를 기록할 만큼 취약한 업체라 대웅 압력밥솥의 미래가 확실하지는 않은 상황이다.
“워낙 밥솥이 캐시카우 역할을 했던 만큼 큰 욕심 내지 않고 밥솥에 주력하면서 밥솥 시장만 지켜냈더라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지요. 모두 한바탕 꿈만 같습니다.” 현재 대웅전기산업 청산 작업 진행에 관여하고 있는 한 관계자 얘기다.
바이오시스
의료기기 벤처가 브래지어 만들다가
“매출 올리기라는 허깨비를 좇다 본사업도 망하고 결국 코스닥 퇴출이라는 불명예까지 짊어지게 됐네요.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김학신 바이오시스 이사는 힘겹게 심경을 토로했다.
99년 12월 코스닥 등록에 성공한 바이오시스는 당시 가장 각광받던 의료벤처 중 하나였다. 생체신호계측기 전문업체로 코스닥 대표 바이오주로 자리잡은 바이오시스는 지난해 초 뜬금없이 끈없는 브라인 ‘누브라’ 판매를 시작한다고 발표해 업계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실리콘 재질의 접착력을 이용해 가슴을 지탱해줌으로써 노출이 심한 의상에 적합하다는 평을 받은 누브라. 한동안 화제를 일으키며 꽤 판매가 되는가 싶던 누브라가 어느 순간 사용의 불편함이 지적되면서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
덕분에 누브라 판매를 위해 막대한 마케팅 비용을 지불했던 바이오시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친 격이 되고 말았다.
바이오시스는 왜 전혀 관련없던 ‘누브라’ 유통 사업을 시작했을까. “매출을 늘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김 이사 설명이다.
코스닥 기업은 매출액 50억원이 넘지 못하면 관리종목이 된다. 이 규정을 2년 이상 못 지키면 바로 퇴출. 밀어내기식 수출로 매출액 요건을 지켜오던 바이오시스가 이같은 방식이 불가능해지자 차선으로 찾은 매출액 늘리기 방법이 바로 신규 사업 진출이었던 셈. 거슬러 올라가면 무리한 코스닥 등록이 건실한 의료기업 발목을 잡았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바이오시스는 당시 역량으로 50억원 안팎 매출이 가장 적당했던 회사입니다. 매출액을 늘리기 위해 여기저기 곁눈질하지 않고 본사업에만 집중했더라면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요.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잠깐 용어
·DVR(Digital Video Recorder) : 비디오카세트레코더(VCR)가 녹화를 여러번 반복하는 방식이라 화질이 떨이지고, 비디오테이프를 교체하는 등 사용이 번거롭다보니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발됐다. 하드디스크나 DVD 등에 디지털신호로 저장돼 화면 재생, 편집, 검색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