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사건이 언론을 장식한적이 있다.
교수님도 한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작년 쳇방에 드나드시던분 두분과 예전 채무관계가 있던 동생같은 한 분이 또 내 곁을 떠났다.
여러해전 교육대학교 학생들이 임용고시 철폐를 외치면서 연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것을 목격한적이 있다.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을 바치면서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대한민국임은 확실하다.
요즘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이들이 주위에 많다.
잘 들어보면 내가 그분들보다 객관적인상황이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데도 나는 그런 극단적인 생각이 덜든다.
그런데 왜 나는 힘들지만 좀 더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아마 살아감의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본능을 지키기는데 조금은 양의방향으로 지난 세월을 보냈나보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가는 모든것들은 살려는 본능이 있다.
그러함에도 인간은 살아가는데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 하고 그것을 이루면서 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성공했을경우만을 예상하면서 살아가는가보다 .
이루지 못했을경우를 상정한 삶을 예상하지 못한다.
파생에서도 손실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과 사뭇 같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데 의미를 두는 것은 오직 삶 그자체이고 보면 욕심도 별로 없다.
좋은 말로 말하면 그냥 잘살고 싶고 그냥 지금 살아가는 것 자체가 잘살고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이 파생을 하는데도 똑같이 인정하고 싶다.
그래서 한번 질때 잘 지고 싶다.
조카 한놈이 있다.
중학교때는 비평준화된 김포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김포고등학교를 못가서 걱정을 했는데
차순위 고등학교를 입학해서 지방대 4년 장학생으로라도 입학을 할 수 있었다.
이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형님과 형수님도 많이 어려우셔서 이놈에게 물질적으로 해준것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때만해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나름 질갱이같은 삶을 스스로 잘 개척을 한듯해서 기분이 좋다.
혼자의 힘으로 교환학생으로 미국을 다녀오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미국으로 4학년 편입을 했었다.
미국생활 2년도 않되서 이번에는 7000명이 다니는 학교 총학생회장(?)선거에 나서서 아쉽게 2등으로 낙선을 한 모양이다.
큰형님은 그래도 그 놈이 자랑 스러운 모양이다.
이놈의 눈에는 항상 총명하며 어디가서도 기가 죽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다른 조카들과는 다르게 이놈은 항상 나를 보면 " 작은아버지 또 인생철학 시작한다" 하면서 "나도 잘살고 있거든요? "
하면서 당당하던 모습이 선하다.
우리 아이들도 공부를 그렇게 썩 잘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요즘 특목고니 서울대니 하면서 학벌 혹은 무차별한 학습열기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저렇게 화초처럼 키워지다가 갑자기 사회로 나오고 스스로 인생의 설계를 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좌절의 순간을 맞이 했을때 당당하게 맞서서 싸울 아이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우리아이들에게는 나는 매일 잔소리처럼 말한다.
"최선을 다함이 아름다운것이지 그 결과는 별로 소중하지 않다."
우리 아이들이 꼭 그 의미를 알았으면 한다.
혹시 내가 아이들을 화초처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된다.
봄기운이 가득하다.
그래도 아직 밤과 아침은 쌀쌀하다.
내가 걷고있는 이 파생판에서도 무한 경쟁의 쳇바튀는 돌아가고 있다.
저마다 목표를 하고 목표를 이루리라 생각하지만 대부분 낙차를 한다.
그 실패의 지점에서 살아가는 본능의 힘은 발휘되기를 바랄뿐이다.
그럴려면 파생에 목숨을 거는것보다 인생에 목숨을 건다고 생각하고
지금 이순간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과 그 결과에 승복하는 사람이고 싶다.
나도 이 봄에 봄기운을 만끽하고 조카처럼 당당히 도전하고 나의 삶에 최선을 다해서 이겨내고 싶다.
그리고 한번 질때 잘 지고 싶다.
첫댓글 멋진글 멋진 철학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