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나씨대종회(종보에서--)
경파사직공 14세손 재찬(京派司直公 14世孫 在燦)
우리 안정나씨 대종회가 임원과 종인이 일체가 되어 지난 30유여년간 헌신적인 참여로 발전을 거듭하여 2호 종보를 발행하게 되니 감사한 마음으로 축하를 드림니다
선계고찰이란 시조공 윗대를 찿아 정립,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자는 것이며 이를 소홀히할때 영양실조가 되어 다른 뿌리에서 영양공급을 받게 됩니다
이를 우려하여 83년도에 상인(相仁)씨가 자비로 나씨세계고찰(羅氏世系考察)이란 책자를 만들어 배포한바 있고 88년도에 상오(相午)씨가 무진보에 상계비고(上系備考)를 썼으며,3번째로 필자가 98년도에 CD(200매)를 제작(제작비 주찬씨 부담)하여 일부는 배포하고 나머지는 대종회에 비치되어 있습니다
이상 3가지 모두 금성 나씨의 위보조작에 현혹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킨 내용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종원들이 혼동하고 있는 실정이며 심지어 안정 나씨의 정체성을 의심하기로 이기회에 다시 한번 선계고찰로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금성나씨 작란파의 위보조작 진상을 밝히니 이를 숙지하여 우리 종인들에게 널리 홍보하시길 바랍니다
1.안정나씨(安定羅氏)
안정나씨라 함은 진무(鎭憮) 천서(天瑞)公께서 이성계를 도와 요동의 동령부(東寧府)를 1370년에 평정(平征)한 공로(功勞)로 안천군(安川君)에 봉했고 안정백(安定伯) 이며 안정현(安定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이분의 후손을 안정나씨라 합니다.
그러면 시조공 이전은 관향이 어디인가?
고려국내에 산거한 나씨는 모두 나주나씨로 통칭하였으니 당연히 우리도 나주나씨였습니다.
2.금성나씨(錦城羅氏)
금성나씨 시조는 총례(聰禮)공으로 고려정종 2년(서기947)에 고려건국의 공로로 금성부원군으로 봉군되어 그 자손을 금성 나씨라 합니다.
이분들도 나주나씨로 관향을 쓰다가 서기1747년부터 현나주나씨와 관향을 달리 금성나씨로 개관(改貫) 을 하여 현재에 이릅니다.
개관 이전에는 나주나씨와 혼동을 피하여 현 나주나씨를 여황나씨라고도 하였습니다
3.나주나씨(羅州羅氏)
나주나씨 시조는 송나라 사람 부(富)공으로 고려조에 봉명사신으로 왔다가 송나라가 망하므로 여황에 정착, 벼슬은 정의대부감문위상장군이며,이분의 후손 득규(得규)공부터 일세로 자손을 나주나씨라 합니다
4.군위나씨(軍威羅氏)
군위나씨 시조는 문서(文瑞)공으로 우리 천서공의 둘째 아우입니다.벼슬은 적라백(赤羅伯)인데 적라는 지금의 군위인고로 이후 자손을 군위나씨라 하는데, 일세(一世)를 인(認)공으로 하고 있습니다.(2003년판 족보에 인(認)공을 원조(遠祖)로하고 문서(文瑞)공을 1세로 하였습니다.
위에서 말한 각 나씨들의 시조공을 연대순으로 정렬하여 봅니다.
1) 금성나씨 총례(聰禮)公 ---서기 947년(벼슬기준)
2) 나주나씨 부(富)公 -------서기 1127년(북송멸망기준)
3) 안정나씨 천서(天瑞)公 ---서기 1370년(벼슬기준)
4)군위나씨 문서(文瑞)公 ----서기 1370년(천서공의 동생)
이상에서 보는 바와같이 금성나씨의 총례공의 연대가 상위에 있음을 기화로 작란파들은 나씨지장록(서기 1927년판)과 나씨총보(羅氏總譜)(서기 1930년판)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동방의 나씨는 모두 총례(聰禮)공의 후손이라며 위보 조작을 반복하고있는 실정인데 문제는 이들의 물량공세로 일부 종인이 세뇌가 되어 우리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그들의 주장에 영합하고자 하는데 이는 안정나씨의 연대가 짧은것이 한가지 이유입니다.
이에 우리가 나주나씨때 선계를 찿으므로 의구심을 해소하고 금성나씨 위보자들의 죄악상을 밝히겠습니다
문헌 1. 교남지(橋南誌) 문헌 2. 비안 향교지(比安鄕校誌)
상기 문헌에서 안정나씨에 해당된 부분을 발췌해 싣겠습니다
1) 교남지 40권 인물 문과편
* 신라 : 나인(羅認) : 안정인으로 벼슬은 정승.
나천업(羅千業) : 인(認)의 아들로 벼슬은 정승이며 안정백에 봉하고, 이의 딸이 문창후 최치원
(崔致遠)의 처(妻)이다
* 고려 : 나천서(羅天瑞) : 안정인으로 벼슬은 시중(侍中)이다
2)교남지 40권 총묘편
* 나인(羅認) : 군 북 15리 해망산이 있는데 후손 나만갑이 안동부사때 증축하다.
* 나천서(羅天瑞) : 묘가 해망산 남록에 있다.
3)비안향교지(431쪽) 인물과 총묘편
*나인(羅認) : 안정인으로 신라때 벼슬은 정승이다. 묘는 현(縣) 북 15리 해망산록 兌龍에 庚坐甲向으로 있는데 그후손 안동부사 나만갑이 증축하고 가분(加墳)을 하다.
나천업(羅千業) : 인(認)의 아들로 벼슬은 정승이며 안정백으로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의 장인이다.
이상 2가지 문헌을 가감없이 풀이하였는데 서기1630년경 구포공(鷗浦公)께서 인(認)의 묘에 사초를 하신 기록으로 보아 신라때 실존(實存)한 우리 조상임을 확신케 한다.
더욱 이두문헌의 신빙성을 결정지을수있는것은 경주 최씨(慶州崔氏) 광정공파(匡正公派) 족보에 문창후 최치원의 생년이 서기857년이요. 배위는 "나주나씨 업(業)의 딸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사위가 서기857년생이면 장인은 또 그아버지는 금성나씨 시조 총례공 서기947년 보다 100여년이나 상위에 있습니다
우리가 금성나씨 10세 윤(允)공에서 분관하였다하는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음은 금성나씨 작란파 위보조작의 내막을 밝히겠습니다
1)나씨지장록(서기1927년판.1972년 국립도서관에 납본)
금성나씨 나수운(羅守運)과 나기풍(羅基豊)이 각 나씨의 지장록과 족보를 구하여 동방(東邦)의 모든 나씨는 총례공의 년대가 제일 높음을 기화로 적당히 자기들의 절손된 선조에 짜 맞추어 분파도,행장,묘비명,관직,묘산도는 물론 한 자손이니 나주나씨는 6세를 더하고 안정나씨와 군위나씨는 10세를 더하면 금성나씨와 댓수가 같다며 금성나씨 32세를 기준으로 65세까지 항렬표를 만들었는데, 안정나씨는 병진보(丙辰譜)(서기1916년판)와 지장록(서기1916년)을 군위나씨는 계해보(癸亥譜)(서기1923년판)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제작하였습니다.
2) 나씨총보(羅氏總譜)(서기1930년판)
금성나씨 나기풍외 여러 사람이 금성나씨 시조공을 모든 나씨의 시조로 하고 4권을 각각 파벌로 손록을 기록한 족보입니다
왜정때 조선총독부에 납본하여 현 국립중앙박물관에 비치되어있고 누구나 열람할수있습니다
1권(갑편) : 금성나씨
2권(을편) : 나주나씨(현재없음)
3권(병편) : 안정나씨
금성나씨 시조 총례공을 1세로부터 윤(允)공,11세를 안정나씨 천서공으로 하여 만든 위보인데,손록은 우리 병진보(서기1916년판)를 그대로 복사하였습니다.
4권(정편) : 군위나씨
시조 문서공 이상은 우리 안정나씨와같고 손록은 군위나씨 계해보(서기1923년판)를 그대로 복사하였습니다
그러면 금성나씨 작란파가 자기들 10세 선조 윤(允)공의 작명까지 하여 가면서 위보를 만들었다는것을 증명하겠습니다
나씨총보(서기1930년판)와 금성나씨 14번째 족보부터 변조된 10세 윤(允)부터 손록을 적어 봅니다
* 첫째 : 10세 윤(允) : 벼슬은 고려조 충렬왕 경자년(서기1300년판) 동경유수(東京留守)
(변조된 내용)
처음 이름은 인(認)이데 바뀐 이름이 윤(允)이다.벼슬도 첨의 정승을 추가했는데 나주지와 비안읍지를 근거로 하였다고 합니다
* 둘째 : 11세 천부(天富): 외아들로 딸만 2명.여기서부터 대가 끓어졌음.금성나씨 신해보(서기1911년판)와 계해보(서기1923년판) 내용.
(변조된 내용)
천부(天富)외에 없는 아우 3형제가 나오는데 천서(天瑞)는 안정나씨로 분관(分貫),원서(元瑞)는 무후(無後)문서(文瑞)는 군위나씨로 분관(分貫)했다.
나씨총보를 시작으로 서기1987년까지 대동보를 4번 파보를 6개를 제작했는데 위의 이부분이 위보라는것입니다. 이를 주도하는 인물이 금성나씨 나맹헌(羅孟獻)씨인데 타 나씨뿐만 아니라 금성나씨에게도 혼동과 반목을 유발케 할수있는 불행한 일입니다.
본론으로 나주지나 비안읍에 있다는 10세 윤(允)공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1)나주지(羅州誌)
나주지는 필자가 아직 못보았으나 그책에 윤(允)의 처음 이름이 인(認)이고 고친 이름이 윤(允)이며 첨의정승을 했다는것을 서기1923년 이전에는 못보았거나 없다는 이야기로 십중팔구 나씨지장록을 인용하고 혼동을 주기위해 나씨지라고 한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윤(允)공의 형님이 유(裕)인데 처음 이름은 철준(哲準)이고 윤(允)공의 아버지는 득황(得璜)인데 처음 이름이 득거(得巨)하며, 윤(允)의 할아버지는 효전(孝全)인데 처음 이름은 광취(光就)이다로 되었는데 1923년까지 윤(允)공의 처음 이름은 왜 몰랐을까요? 추가된 첨의정승 벼슬 역시 나씨 지장록에 나오니 이래도 나주지(羅州誌)를 인용했다고 하겠는가?
2) 비안읍지(比安邑誌)(원본 서울대학 도서관 규정각 소장)
@ 인물편
*나인(羅認) : 안정인으로 신라조에 벼슬은 정승이다.
*나천서(羅天瑞) : 인(認)의 아들로 벼슬은 정승이며 안정백에 봉했고,문창후 최치원의 장인이다.
아래로 천서공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다.
@ 총묘편
나인(羅認)묘 : 현(縣) 북쪽 15리 해망산록 兌龍에 庚坐甲向으로 있는데 그후손 나만갑이
안동부사로 있을때 증축하고 가봉(加封)했다
이상이 비안읍지의 인(認)공의 관련 내용이다.
첫째-어디에 윤(允)이 있고,
둘째-관명에 첨의정승이 있으며,
셋째-인(認)이 고려때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까? 이러하므로 670년전 자기 선조의 이름을 또 다른 이름 인(認)으로 작명하고 첨의정승 벼슬도 주었다는 웃지못할 비극이 생겼습니다 또 비안읍지 편집자는 나천업공이 들어갈 자리에 "최치원의 장인이다" 다음에 들어갈 나천서를 넣었는데 오기(誤記)임을 교남지나 비안향교지를 보면 알수있고 더구나 신라때 분 최치원이 고려말 나천서의 사위가 될수없음은 초등학교 역사 실력만 가지고도 능히 알수있는 일입니다 이런것으로 보아 금성나씨 위보자들은 비안읍지는 실제로 못보았다는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위보자들이 만든 나씨지장록이나 나씨총보가 안정나씨는 병진보(서기1916년판)를 군위나씨는 계해보(서기1923년판)를 인용하였다고 하였는데 군위나씨 계해보는 다음과같습니다
첫째-군위나씨 시조공 1세 나인(羅認) 고려말에 정승이다.(기록이 비안읍지에도 있다)
둘째-아들 2세 문서(文瑞) 벼슬은 삼중대광(계해보에는 삼중대신) 적라백,큰형은 천서공인데 안정나씨로 중형은 원서공으로 상산백,끝이 문서공으로 적라백인데 적라는 현 군위인고로 군위나씨라 한다.
비안읍지에서 보는바와같이 인(認)이 천서공의 아버지로 되어 있다. 계해보 저자 언숙(彦淑)씨는 기쁜 나머지 나천업(羅千業)의 오기(誤記)를 모르고 신라때 인(認)을 고려말 인(認)으로 고치고 나천서의 사위 기록된 문창후 최치원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무시하고 동생인 나문서를 2세로 기록하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금성나씨 나수운과 나기풍등 위보자들은 자기네 대가 끓긴 윤(允)의 초휘가 인(認)이며 개휘가 윤(允)이라는 웃지못할 망발로 어쩌면 잘못된 군위나씨 계해보(서기1923년판)를 인용했으며,나씨총보를 만들고 10세 윤(允)의 사실이 비안읍지에 있다고 함이 어떻게 같을까요?
이 위보자들이나 현재의 금성나씨 몇몇의 위보자들이 실제로 비안읍지를 보면 즉시 깨닫고 우금 70여년간 안정나씨와 군위나씨의혼란과 고통에 죽은 위보자를 대신하여 백배사죄하고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다음은 천서공,문서공,원서공 3형제가 과연 금성나씨의 10세 윤(允)의아들이 될수있나를 연대를 맞추어 보겠습니다
*윤(允)공의 나이 : 생년은 알수없음
족보에 나오는 1300년에 "동경유수"로 되어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벼슬이 동경유수이던 1300년에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옥에 갇힌 해입니다(고려사 참조)
윤(允)공의 형인 유(裕)공의 생존 연대가 서기1225년~서기1292년이므로 동생인 윤(允)공의 생년을 아무리 늦게 잡아도 서기1250년이 넘을수없습니다.
이 계산법은 금성나씨의 나맹헌씨와 필자의 견해가 일치합니다(생존연대는 생년이 아님)
정리를 하면 금성나씨 윤(允)공이 50세이던 동경유수일때 투옥되었고 천서공을 위시한 3형제는 40대부터 출생하였다고 가정한다면 천서공의 맏형인 고로 서기1294년생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겠습니다
그러면 서기1370년 동령부 평정시 이성계(서기1335년생)를 도와 진무(鎭撫) 나천서공이 76세의 할아버지로써 출정을 하였다는 말이 되니 이는 어불성설입니다.
서기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과 동시에 나라에서 불렀으나 금오산에 아들 직경과 함께 숨었는데 100세 노인에게 이성계가 도움을 청했다고?--- 이역시 어불성설입니다
또 있습니다 --야은 길재(吉再)선생은 서기1353년생입니다. 길재(吉再)의 손자인 길인종(吉仁種)과 천서공의 손녀가 혼인한것으로보아 대단히 외람되나 천서공의 생년을 1340년 내외로 추정 설정하여 봅니다 그래야 동령부 정벌때(서기1370년) 진무 나천서공의 활약 연대가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문헌(두문동실기)에 나라가 기울어져 감을 보고 아들 직경과 함께 금오산에 길재와 함께 은거하였다는 기록 또한 그렇습니다
이상으로 안정나씨가 금성나씨에서 분관될수없음을 증명하였습니다.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상 안정나씨의 최초의 조상은 신라조말 인(認)공과 그의 아들 천업(千業)공이 나주나씨였지만 이후로 가승(家乘)을 잇지 못하고 천서공(天瑞公)에 이르러 안정나씨로 개관(改貫)을 한것이므로 총례(聰禮)공의 후손이 될수없으며 현재 나주 나씨에서 분관된것은 더욱이 아님을 우리 종인들께서는 아셔야 할것이며 널리 홍보하시기 바람니다
금성나씨의 시조인 나총례의 성씨는 원래 김해김씨였읍니다.여러분들이 태조왕건이란 사극을 보셨다면 후삼국시대에 나주태수를 지냈던 종례란 사람을 기억하시겠죠?종례는 신라의 진골출신 태수였기에 신라에 반기를든 견훤을 따를수가 없어, 왕건의 편을 들어 고려에게 결정적 통일 교두보를 확보하게끔 도왔던 겄입니다.그 공으로 고려건국후 개국공신에 보해졌고 왕건은 종례에게 성씨인 금성과, 이름은 고려에 충성을 다했다하여 총애할총자, 예의예자 나총례란 이름을 하사 받은것입니다. 따라서 금성나씨는 엄격히 말해서 나씨가 아니고 김해김씨의 후손이라는게 정설입니다. 금성나씨중에는 자기들과 나주나가가 한 성씨라고 주장하는 파렴치한 작자들이 더러있으나 조선시대 족보를 보면 금성나씨와 나주나가가 혼인한 사례가 더러나오는걸로 볼때 과연 같은 성씨였다면 그런일이 가당키나 한일인지 되 묻고싶은 심정입니다. 지면관계상 이쯤하고 다음에 시조공(富자 할아버지)에 관한 연대상 잘못알려진 부분을 제가 소개키로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