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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나의 대학관계인 순례를 완결하게 한 1등 공신이지만
대학관계인 순례자들에 대한 각 대학의 관심과 협조 분위기는 각기 온도 차가 있기는 해도 범상하지 않은
내 질문 공세에 대개는 내 경력을 가늠하고 협조적이었다.
홍보 이상의 브리핑(briefing)에 이어 각종 책자와 배(badge)를 비롯해 기념품들을 내게 기증하였으니까.
행정 책임자와 교수 중에는 자기의 저서 또는 자기 논문(글)이 게재된 서책들을 내게 주었다.
자기 PR의 기회를 만난 듯이.
다다익선으로 좋기는 하나 문제는 즐거운 비명의 한계를 넘어버리는 중량이었다.
두께가 후(厚)하고 고급 지질의 용지라 우리의 보편적 서책중량의 개념으로는 대책이 나오지 않는 무게다.
난제(難題)라는 이유로 받기를 사양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 때(대학방문)마다 우체국으로 직행했으며 우체국만이 해결사였다.
우체국의 이 좋은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아마도 나의 대학관계인 순례길은 험난했을 것이며 도중에 포기
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한데, 이 파띠마의 새벽 걸음에 그 우체국 간판이 포착되었다.
아직 어스름한 여명(黎明)이라 어렴풋했지만 다가가서 확인했다.
할 일이 없다고 생각되었고, 새벽잠은 달아나버렸고, 그 때문에 정처 없는 새벽 걸음이 파띠마시를 누비는
중이었는데 맞닥뜨린 우체국이 발길을 숙소로 돌리게 한 것.
까미노를 걷는 중에, 특히 방문하는 대학들로부터 받는 서책을 비롯해 제반 물품들.(특정 행사의 기념품과
홍보용 물품 등)
까미노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의 까미노에서는 필요하나 님은 뽀르뚜 길에서는 불요한 것들을 골라냈다.
수차의 숙고를 거쳐 확정한 것들이다.
다음 루트인 쁠라따 길(Via de la Plata/Saint Jame's Mozarab way)의 시발지 세비야(Sevilla/Andalu
cia지방, 세비야州의 州都) 또는 그 길 초반의 어느 지점 우체국으로 탁송할 요량으로 알베르게를 나섰다.
이 편리하고 유익한 제도의 애용은 전번(2011년)의 뽀르뚜 길(Camino Portugues) 종주 때부터다.
뽀르뚜(Porto/뽀르뚜갈)를 시발점으로 하여 뽀~스(Portugal~Spain) 국경을 넘어 레돈델라(Redondela/
Pontevedra 주)에서 1박할 때였다.
프랑스 길에서 했던 것처럼 책자들을 비롯하여, 요긴하지만 까미노에서는 무거운 짐이 될 뿐인 물품들을
한국의 집으로 보내기 위해 우체국을 방문한 것.
그 때, 그 우체국의 친절한 남 직원이 소개하며 이용을 권한 것이 우체국에서 시행 중인 '뻬레그리노스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program)이다.
뻬레그리노스가 까미노 상의 우체국에서 탁송한 물품을 행선지 우체국이 15일 동안 보관하는 제도다.
까미노를 걷는 중에 15일 이내에는 불요불급한 물건들을 그 기간 내에 도착 예정인 지역 우체국착(着)으로
보낸 후 도착(기일엄수)하여 인출하거나 같은 방식으로 재 탁송한다.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백팩의 중량을 임의로 조정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다.
이런 우체국도 있다
연간 600만 ~ 800만명이 방문한다는데도 협소하기 짝이 없는 우체국.
상주 인구(11.788명/2011년 인구 조사)만 이용해도 넉넉하지 못할 것 같은 공간에서 30여분 이상 대기한
보람 없이 이 의도는 저지되었다.
같은 화폐(Euro)를 사용하는, 같은 이유 회원국(EU/European Union/유럽 연합)이며 서로 이웃 마을일
뿐인데도 비싼 탁송료를 내야 한다니까.
원근 불고하고, 타국이기 때문이란다.
동일한 비용이라면 수취지를 스페인의 우체국에서 한국의 집으로 바꾸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나, 짐을 다시 꾸려야 하는 문제가 뒤따른다.
뽀르뚜갈에서는 불요하나 스페인에서는 필요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재포장한 물품을 받아 스케일(scale/저울) 위에 올려놓은 창구의 남 직원이 한 한마디에 나는 기겁했다.
내가 잘못 알아들었나 싶어서 그에게 물었다.
꾸안뚜 꾸스따(cuanto custa/how much)?
그는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메모지를 보여주었다.
setenta e um euro(세뗀따 에 웅 에우루/71유로)
너무 비싸다는 내 표정을 읽은 그는 2kg을 초과(2.158kg)하기 때문이므로 0.158kg을 줄이면 24€란다.
158g은 보통 팸플릿 하나의 무게도 되지 않는다.
그 중량(158g)이 47€( 2kg 탁송료의 2배)를 더 물게 한다면 아무리 힘든 포장 작업이라 해도 다시 하는 것
이 당연하지 않은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팸플릿 하나를 골라냈다.
47€를 절감하기 위함이었으며 3번이나 하는 포장 해프닝(happening)이었다.
문제는 이 0.158kg(158g)이 부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탁송료가 24€인 2kg의 7.9%(12.65분의 1)에 불과한 중량에 2kg의 비용보다 1€가 부족한 2배(47€)라니
말이 되는가.
2.158kg 1뭉치의 탁송료는 71€지만 이 무게를 줄이지 않고 2개로 나누면 48€(2kg까지 1개당 24€니까)로
23€가 절약된다.
더구나 이 금액(48€)으로는 1.842kg이 더 많은 4kg까지(개당2kg씩) 보낼 수 있다.
2.158kg 1개의 탁송비료71€)로 4kg(2kg씩2개로나눈)을 보내고도 23€가 남는 이 어처구니없는 법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시비가 되지도 않고,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세상은 난생(81세) 처음이다.
이성적이지 않으면 참지 못하고 시비를 가리는 알레만이 나와 함께 이 일을 겪게 되었으면 어떠했을까.
팸플릿 1개를 제거한 박스(2kg)를 신용카드와 함께 창구에 올려 놓았으나 이번에는 거절어었다.
이유(EU 아닌 refuse)는 현금 결제만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21c에, 1c 전(1917년)의 성모 마리아의 발현으로 최소 600만명(연간)이 다녀간다는 곳, 파띠마의 관문 중
하나인 우체국에서 신용카드가 통용되지 않는다?
믿기는 일인가.
사자도 터득하는 지혜를 사람이 못할까
또 다른 황당한 일이 일어날까 겁이 난 파띠마의 꼬헤이우(Correio).
지금껏 유일한 해결사였으나 질식할 정도로 답답한 공기를 느끼게 하는 우체국을 뛰처나왔다.
심호흡으로 체내의 공기를 바꾼 후 비로소 파띠마에서는 최후의 일이라 생각되는 작업에 들어갔다.
까미노의 알베르게에서 다음 날 미명에 걸어갈 길을 미리 확인하는 습관 대로 남서쪽으로 난 길들을 확인
하는 작업이었다.
이베리아 반도인들은 늦잠꾸러기인데다 시골에는 대면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전일의 이 작업은 무비유환
(無備有患)을 미연에 막는 필요불가결의 일이다.
그러나 일반 방문객들은 물론, 순례자마저도 보행자는 희소하기 때문인가.
파랑 노랑 가릴 것 없이 애로(arrow/화살표) 불모지대다.
파띠마를 향하는 뽀르뚜 길에는 지천이건만 선하심후하심(先何心後何心)인가.
없는 애로를 찾느라 혈안이 되기 보다 손쉽게 찾아지는 버스 터미널에 간 후 숙소로 돌아왔다.
도보자와 전혀 무관한 곳에 왜 갔는가.
더구나 버스 터미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언짢아졌는가.
오늘의 남은 시간들에서 괄목할만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내일의 나는 궤도를 이탈하게 될 것임을 시사
하는 짓 아닌가.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 도보 순례자에게도 형체가 없을 뿐이지 궤도는 있다.
궤도를 이탈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이 하루의 남은 시간들에서 정녕 궤도의 이탈 여부가 판가름될 것이다.
희망적이었던 아침과 달리 풀이 죽은 듯 맥진 상태가 되어 있는 내 머리를 문득 한 명언이 스쳐갔다.
"희망에 부풀어 있는 아침의 사자;
저녁 때에는 배가 고프지만 지혜를 터득한다.
(The lion at morning is full of hope;
the lion at evening is hungry, but touched with wisdom.)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Honoré de Balzac/1799~1850)가 했다는 말이다.
싱싱하고 맛 좋은 먹이들을 포식하는 하루가 될 것을 기대하였으나(까탈을 부리다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하루가 된 사자는 비로소 지혜롭게 된다.
맥이 빠져 있을 것이 아니다.
맹수도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데 하물며 사람이?
보람을 느낄 만한 무언가를 능히 찾아낼 지혜를 가진 만물의 영장 아닌가.
성모 마리아의 발현
무명의 목축지대에서 성모 마리아의 발현으로 일약 성소(聖所), 명소(名所)로 바뀐 파띠마.
나로 하여금 가톨릭교회가 믿는 성모 마리아의 발현과 지역의 발전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곳이다.
한자 사용국(韓 中 日)은 발현(發現), 출현(出現), 현현(顯現)이라 하며 우리 말로는 '나타난다'는 뜻이다.
'발현'은 라틴어(Apparitiones)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어(Apparition), 스페인어(Aparición), 뽀르뚜갈어
(Aparição), 기타 서양 제국이 표현하는 이 단어는 '유령'을 의미한다.
가톨릭교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경우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을 초월한 특이한 방법으로 어떤 특정인에
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정의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성모 발현은 AD 40년, 사라고사(Zaragoza/Spain, Aragon州 州都)에서 사도 야고보에게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마리아의 선종(善終/몽소승천) 해(年)는 AD41년이란다.
그렇다면, 야고보 앞에 나타난 마리아는 승천 전해(前年)로 성모 발현이 아니고 실체라야 맞다.
선교 성과가 여의치 않아서 낙담 상태인 야고보를 격려하기 위해 스페인까지 찾아간 성모로 보는 것이.
아무튼 카르멜 산(Carmel/영국) 성모 발현(1251년) 등 1531년의 과달루페(Guadalupe/Mexico) 발현 이
전 15c 동안 의심 없이, 교회는 전승에 의한 발현으로 보았고 일반 신도들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M. Luther/1483~1546)의 95개조 반박문이 발표(1517년)되면서 상황이 급전했다.
종교개혁파는 성모 공경을 도마에 올려 놓았고(俎上肉), 성모 발현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픽션(fiction)
으로 몰고 가는 판인데 성모 발현의 보고는 눈치도 없이 증가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교황청이 개 닭보듯 할 수 있는가.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ient/1545 ~1563/Italia의 북부)의 말미에 "성모 발현과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기적으로 공인할 수 있는 권한을 각 지역의 주교에게 부여한다"고 결정했다.
최초의 성모 발현지라는 사라고사(AD40) 이후 지금까지 보고된 발현 건수는 총 2.500여건이란다.
그 중 20c 이후의 보고가 386건으로 급증했다.
공인 제도가 개시된 1563년 이후 공인받은 것은 전체의 1%(25건)에 불과했으며 20c 이후에는 8건, 2.07
%로 증가는 했으나 여전히 대부분이 허위라는 것이다.
386건 중 378건이 조작이라면 48건 중 겨우 1건만이 진짜라는 것 아닌가.
성모의 발현 효과와 역효과 효과
왜 이처럼 허위, 가짜 보고(發現)가 많은가.
'공인'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하면 온 마을이 로또(lotto) 당첨에 다름 아니고, 공인받지 못한다 해도 손해
볼 일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밑져도 이익이 되는 기이한 현상 때문일 것이다.
당연히 뱓아야 할 모럴 해저드(moral hazard/道德的解弛)라는 비판은 고사하고 '역효과 효과'(backfire
effect)를 거둠으로서 공인에 버금가는 이익을 얻게 되는데 꾸며 볼 만 하지 않은 일인가.
성모 마리아의 발현을 갈망하는 신도들은 자기를 실망하게 하는 증거나 사실(fact)은 거부 또는 무시할 뿐
아니라 기존의 믿음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공인 제도가 발효한 16c부터의 성모 발현 상황을 살펴보았다.
성모는 과달루페(Guadalupe/Mexico/1531)와 레자이스크(Lezajsk/Poland/1578) 발현 이후 17c에 실루
바(Siluva/Lithuania/1608), 루한(Luján/Argentina/1630)과 로(Laus/France/1664) 등지에 나타났다.
18c를 건너 뛴, 19c에 들어서 발현지는
파리(Paris/France/1830), 로마(Rome/Italia/1842),
라 살레트(La Salette/France/1846), 루르드(Lourdes/France/1858),
위스콘신(Wisconsin/U. S. A./1859), 필립스도르프(Filipsdorf/Czech Republic/1866),
퐁맹( Pontmain/France/1871), 기에트시바우두(Gietzwald/Poland/1877),
노크(Knock/Ireland/1879) 등 9곳이다.
20c 이후를 제외한 19개c(세기) 동안에 공인된 셩모의 발현수는 16번이다.
9개국이 1회에 그쳤고 2번 나타난 나라가 1곳(Poland)인데 프랑스에는 무려 5번이나 발현했다.
특히 19c, 1800년대 100년 동안에는 9회 발현이라는 최고 기록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5개국에 각 1번씩
인데 프랑스에만 4번이다.
1830년~1871년, 41년 사이에 나타났으므로 10년에 1번 꼴이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 장소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는 글이 있다.(다음 카페 '라면식탁에 평화를...)
"1) '기적의 메달' 발현(Paris/France)을 제외하고는 모두 접근하기 어려운 외딴 곳에서 일어났고,
2) 무시되고 비웃음 당하고 혹은 격렬하게 박해 당하는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것.
또 다른 특징으로는 "마리아 발현 지역들이 반교회적 분위기에 휩싸였던 곳"이었다는 것.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수세기에 걸쳐 열렬한 가톨릭 국가였으나 불신자들이 정치 권력을
잡을 때가 많았으며 마리아는 당신이 사랑하는 나라의 백성들을 억압하려는 세력에 대해 저항하도록 하고
사람들을 옛 신앙으로 다시 부른 것이라는 글이다.
성모는 왜 프랑스에만 자주 나타났는가
과연 그러한가.
한 인터넷 카페의 주관적인 글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거니와 그럴 의사도 없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fact)의 왜곡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말한대로 성모 마리아의 발현 역사상 전무 후무하게 5번 나타났으며 19c에는 41년(1830~71) 사이에
4번이나 발현할 수 밖에 없는 정황이었던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로 시작된 19c의 프랑스가.
대 러시아 전쟁에서 대패,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마저도 패배함으로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났고
프랑스 혁명으로 쫓겨났던 부르봉 왕정이 복고되었으나 7월혁명으로 이 역시 끝났다.
오를레앙가(Maison d'Orléans)의 7월왕정도 2월혁명으로 무너졌고, 나폴레옹 3세의 등극까지 우여곡절
은 많았으나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고 세계 전역에 식민지들을 경영하는 식민제국을 이루는 시기였다.
대영제국 다음으로 거대한 식민제국으로 부상하였는데 아무리 보고 또 보고, 샅샅이 뒤져보아도 애오라지
자비로우실 뿐인 성모 마리아가 프랑스만을 편애하였다는 것인가.
프랑스가 가톨릭 국가라고 볼 수도 있을 만큼 기톨릭 신도가 절대적 우위를 차자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라이시슴(laïcisme/政敎分離)을 법으로 공포한(1905년) 나라다.
그런데도 성모 마리아의 발현은 역사상 유례 없는 다발(多發)이다.
궁색하다 못해 견강부회하는 그 이유가 가관이다.
발현 장소들을 나라별로 추려보는 내 작업이 부질없는 짓이었는가.
어떤 소득은 커녕 내게 경악과 실망, 의문을 키워주었을 뿐이니까.
까미노의 자국(自國)인 스페인, 국경국 프랑스, 프랑스의 다른 쪽 국경국인 독일 등은 연간 뻬레그리노스
수(數)에서 부동의 3대국이다.
나는 이들 나라인을 신체의 한 부분이 유난히 큰 것으로 평(評)한 적이 있다(續까미노이야기23번글 참조)
에스빠뇰은 배가, 프랑세스는 가슴이, 알레만은 머리가 각기 크다(大)고.
배가 크다는 것은 현실적임을 의미하며 큰 머리는 이성적이고 냉철하다는 뜻으로 실체가 없는 아빠리씨온
(aparicion/유령)과는 친근하거나 호의적일 수 없는 관계다.
유령은 물론 환시(幻視), 환청(幻聽), 환후(幻嗅) 환미(幻味) 등 환각 현상도 실체처럼 느끼는 감성은 큰(넓
은) 가슴에서 나온다.
성모의 발현 회수와 사람의 감성을 비례관계로 본다면 프랑스인들에게 자주 나타난 것이 긍정적이고 합리
적일 것이다.
성모 마리아님, 극동에는 왜 안오십니까
한국에서는 이씨조선 후기에 전래된 기독교(가톨릭)로 1만명이 넘는 순교자를 낳았다.
103인의 순교복자(福者)가 가톨릭교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시성식(諡聖式)을 거행함으로서 103인이 일시
에 성인(聖)의 품위에 오른 한국이다.
시성에 필수(必須)인 기적 심사를 생략하고, 시성식을 지정 장소(로마의 베드로 광장)가 아닌 현지(대한민
국)에서 거행하는 파격(破格)을 서슴지 않고.
시성의 전 단계인 시복식을 마친 복자도 124명이다.
가장 짧은 역사에서 성인 복자가 227명으로 '순교자의땅'이라는 위상을 높이고 있다는 나라에 위로와 격려
를 위해 있을 법 한데도 아직껏 깜깜무소식인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섬나라 일본의 순교 역사는 더욱 비극적이었다.
국가 권력의 반대와 탄압에도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기독교(가톨릭)를 들여왔으며 능동적으로 신앙한 한국
과 전혀 달리 일본은 거국적으로 환영했다.
총포와 인쇄 등 서양 신문물의 원활한 수입에 아용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목적 달성에 실컷 이용된 기독교는 금제(禁制/兔死狗烹) 시대를 맞게 되었다.
2014년에 일본의 시코쿠헨로(四國遍路) 1.200km를 걸을 때였다.
53번 사찰인 엔묘지(圓明寺/愛媛県松山市) 후원의 은밀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크리스탕 등롱(キリシタン
灯籠(Portugal語 Christão)을 목도했다(10월 2일)
크리스천 금제(禁制) 시기(江戶幕府시대)에 에히메 겐(愛媛県)에 숨어 사는 많은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이
불교 사찰에 숨어들어와서 미사를 드렸고 사찰측에서는 이들(크리스천)을 숨겨주었슴을 의미한다.
불교의 도량(度量)으로 은밀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기독교 신도의 총수가
수만명이었다.
그랬는데도 자비로우신 성모의 발현은 없었다.
성모의 발현은 가톨릭 교리(敎理)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그(가톨릭) 신앙과 무관한 삼자(三者)가 시비 또는 개입하는 것은 금기(禁忌/taboo)를 깨는 짓임
에도 불구하고 나는 왈가왈부했다.
“무시되고 비웃음 당하고 혹은 격렬하게 박해를 당하는 지역에서 일어났다"는 가톨릭계의 글이 내 대꾸를
부추긴 것이다.
{20c 후반인 1973년에 일본 아키타(秋田)에 나타났으며 그밖에 20c의 발현지는
파띠마(Fátima/Portugal/1917년), 보랭(Beauraing/Belgie/1932년)
바뇌(Banneeux/Belgie/1933년), 시라쿠제(Syracuse,Siracusa/Italia/1953년)
키베호(Kibeho/Rwanda/1981년) 등이다.
성모의 발현지는 착오가 있을 수 있다}
고백하건대, 파띠마의 마지막 날까지도 어떤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레서 파띠마 경유를 의미있게 장식하고 뻬레그리노로 복귀, 남은 뽀르뚜 길을 완료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반전은 고사하고 파띠마 경유까지 부질없고 무위한 짓으로 만들어 버린 악수(惡手)가 되고 말았다.
몸은 릴랙스(relax)는 커녕 더 무겁고 찌뿌듯해졌고.
백두대간과 정맥에 들어가서 살다시피 할 때 먹거리 조달 산우(山友)가 와서 배낭을 정리해 주며 한 말이
떠나지 않고 교훈처럼 늘 따라다닌다.
"지쳐갈 때는 배낭에 머리카락 한올이 얹혀도 무겁게 느껴진다"던 말이.
백팩에서 2kg을 빼냈을 뿐 아니라 남아있는 먹거리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물리적으로라도 홀가분하게 해야겠기에.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