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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과 부시 대통령
엘리자베스 2세를 영접하는 부시 대통령
1.부시 미국 대통령이 7일 워싱턴 백악관의 북쪽 주랑현관에서 공식만찬 참석차 도착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영접하고 있다.
2.워싱턴의 백악관에서 열린 공식 만찬중.
3. 5.8일 미국 NASA 기지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8일 메릴랜드주 그린벨트 소재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고더드 우주비행센터를 방문중 마이클 그리핀 NASA 국장이 쳐다보는 가운데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chosun.com
입력시간 : 2007-05-08
"황사를 막아라" 中사막에 묘목심기
"황사를 막아라" 中사막에 묘목심기
한중우호 녹색장성(綠色長城) 건설 사업에 참여한 두 나라 대학생들이 12일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쿠부치 사막에서 사막버들 묘목을 정성스럽게 심고 있다. 한중문화청소년협회 미래숲과 중국 정부가 사막화 진전과 황사 방지를 위해 손잡은 이 사업은 한국일보와 산림청, SK㈜, 유한킴벌리 등이 후원하며 총 70억원이 투입된다. 달라터치=고영권기자 hk.co.kr
입력시간 : 2007-05-13
2인승 자전거로 10년간 세계일주
일 30대부부 “스트레스 가득찬 도쿄생활 탈출”
2인승 자전거로 10년간 세계일주
88개국 여행 내달 대만서 대장정 마쳐
잠은 텐트서 자고… 하루 10달러로 생활
타이중(臺中)=DPA 연합뉴스 (chosun.com)
입력 : 2007.05.17
▲2003년 8월 키르기스스탄 관광명소인 이시쿨 호수변을 찾아 기념촬영한 우쓰노미야 가즈나리-도모코씨 부부. 출처 www.pedalian.net/tandem 10년 전 자전거 세계일주를 시작했던 일본인 부부가 88개국을 여행한 끝에 6월 초 대만에서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39세 동갑인 우쓰노미야 가즈나리와 부인 도모코는 지난 1997년 앞뒤로 나란히 앉는 2인승 자전거로 북미에서 세계일주 여행을 시작했었다.
‘자전거 세계일주’는 모험에 관심 많고 자전거광이기도 하던 교사 출신 남편 가즈나리의 아이디어였다. 회사원이던 아내 도모코는 자전거에는 관심도 없었고, 외국에 가서 낯선 사람 만나는 일을 겁냈었다.
도모코는 “미국 하면 총이 생각났고 아프리카 하면 가난과 지저분함이 느껴져 무서웠다”면서도 “그런 내게 남편은 ‘2인승 자전거를 탈 거니까 당신은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오르막길에서만 페달을 밟으면 된다’며 나를 꾀었다”고 말했다.
도모코는 “하지만 힘든 여행을 마치고 나니 엄청나게 힘든 여행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었다”라고 회고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아름다운 곳도 많이 가 봤습니다. 남편과 길 위에 있을 때 행복했고 모든 어려움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고 회고했다.
이들 부부는 북미를 누빈 뒤 뉴질랜드, 호주, 남미,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를 거쳐 지난 5일 대만에 도착했다. 국가 사이를 이동할 때는 자전거를 분해해 배나 비행기 탁송화물로 수송했다. 대만을 마지막 코스로 선택한 것은 1999년 뉴질랜드 여행 중 역시 자전거 여행 중이던 30대의 대만 모험가 린쑨칭과 치앙신칭을 만난 게 계기가 됐다. 두 사람이 일본 부부를 대만으로 초청했기 때문이다. 가즈나리와 도모코 부부는 현재 10여 명의 대만 사이클리스트와 함께 대만 중·남부를 자전거로 여행 중이며 6월 5일 지룽(基隆)항에서 선박 편으로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아내 도모코는 빠듯한 예산과 거친 날씨 탓에 세계일주가 매우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하루 10달러로 살았습니다. 미국 여행 6개월간 호텔에서 잔 건 단 한 번뿐이었어요. 아침과 점심은 빵으로 때우고 저녁에는 통조림만 먹었습니다.” 이들은 옷을 기워 입고 자전거가 고장 나면 스스로 고치면서 여행했다. 티베트의 해발 5000m 고원에서 지독한 감기에 걸리기도 했고, 슬로베니아에서는 영하 15도의 혹한 속에 텐트에서 잠을 잤다.
가즈나리·도모코 부부는 10년간의 여행 중 네 번만 일본으로 돌아와 2~3개월간 휴식을 취했다. 도모코는 “10년에 걸친 여행은 스트레스에 찬 도쿄(東京)생활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었다”고 말했다. 남편 가즈나리는 “아내가 강인하고 건강해졌다. 예전의 아내와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가면 일자리를 찾아야 하지만, 세계를 여행했고 무슨 일이든 할 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 앞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사진 같이 사물을 재현하는 작가 이정웅
Culture & Living | ‘귀신 같은 재주’로 사물을 재현하는 작가 이정웅
이정웅
1963년 울릉도 출생. 198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 1993년 신라미술대전 특선 등 다수의 미술대전에서 특선 수상. 1990년부터 20여 회의 개인전. 싱가포르 아트 페어 등 국내외 주요 단체전 참여. 현재 대구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중.
이진숙 미술평론가
“귀신 같은 재주”라고 사람들은 이정웅의 그림을 보고 말한다. 도무지 사람이 그린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눈을 의심하게 된다고. 어떤 이들은 ‘사진이 분명하다’며 확대경을 들이대기도 하고, 성격 급한 사람은 손을 뻗어 만져본다. 먹물은 먹물대로, 붓은 붓대로 생생하다. 사실 그의 붓 그림은 사진보다 더 사실적이다. 붓의 터럭 하나하나가 표현되어 있는 데다가 여러 겹으로 올린 물감의 두께 때문에 입체감까지 느껴지기 때문이다. 첫눈에 사람들은 그 귀신 같은 재주에 놀라지만, 잠시 후엔 재주 이상의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지와 유채의 결합, 먹의 번짐과 사실주의적 묘사 등 동서양의 작법을 교묘하게 결합시킨 그 발상뿐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세련미가 지적인 쾌감을 느끼게 한다. 이정웅의 그림이 전시 때마다 전작 매진이라는 폭발적인 관심을 끄는 이유이다. 이 붓 그림은 작가의 7년간 노고 끝에 탄생했다. “아이템만 있다고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죠.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만 나오는 것이죠. 그게 7년이 걸렸지요.”
울릉도 출신의 말수가 적은 작가가 툭 던지듯이 말한다. 원래부터 이정웅의 장기는 꽃, 과일 같은 정물이었다. 전통 도기에 담긴 우리 꽃과 우리 과일은 사실적이면서도 깊은 한국적인 정조를 가진 작품이었다. 사람들의 찬사가 이어졌지만, 그는 자신이 더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림이 변하려면 캔버스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식탁의 정물을 그릴 때 식탁보 천의 올을 그대로 살리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천위에 코팅제를 입혀 그림을 그려 보았다. 캔버스 위에 식탁보를 그리는 대신 식탁보 위에 직접 사물을 그려 넣은 것이다. 실제 식탁보 위로 올라간 그림. 회화와 현실을 새롭게 연결시키면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원래 붓이 있는 자리인 한지 위에 붓을 그려서 올렸다. 종이의 결뿐 아니라 구겨진 흔적조차도 그림에 자연스럽게 끌어들여서 보는 재미를 더한다.
“한 7년 붓을 그려 보니까 그중에 어떤 게 잘생긴 것인지 알게 되더라고요.”
1.붓_ Oil on Korean Paper, 2006
작업실 한쪽 벽에는 그가 그동안 수집해 온 붓 50여 개가 빼곡히 걸려있다. 한국적인 소재에 관심이 많았던 그에게 서예 붓은 친숙한 존재였다. 처음에는 붓과 연적, 벼루 같은 것이 함께 등장하는 정물화였다가 이제 붓이 주인공으로 독립했다. 저마다 다른 붓의 생김새는 화면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한다. 화면의 정갈함과 달리 그의 작업실은 여기저기 먹물이 튄 자국들로 어수선하다. 한지 위에 먹을 치는 과정에서 생긴 흔적들이다.
그의 붓 그림은 단순한 붓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그것은 ‘행위 미술-추상미술-사실주의’ 등 현대미술의 미학이 여러 겹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실제 붓에 먹을 묻히고, 한지 위에 뿌리고 올리는 이 모든 행위 자체가 일종의 행위 미술이다. 수없이 붓을 던져서 이루어진 붓 자국이 완성이 되면 붓 자국과 붓의 관계에 대한 치밀한 생각이 뒤를 잇는다. 먹의 흔적 위에 그냥 엎어져 있는 붓, 먹선과 나란히 있는 붓 등등. 추상적인 사유가 개입되는 단계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붓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려진 붓이 자신의 흔적을 마주하고 있는 것은 마치 화가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과 같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어떤 행위의 결과물 앞에서 성찰하는 사람 같은 느낌마저도 전한다. 해외에서 그의 작품이 좋은 평을 받는 것은 그림 속에 담긴 이런 중층적인 의미 때문이다.
2.매화_ Oil on Korean Paper, 2005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낮에는 전화와 이런저런 일상적인 일로 방해를 받기 때문에 주로 작업실에서 밤샘 작업을 한다. 맥주 두어 병과 담배 한 갑을 들고 텅 빈 캔버스를 바라보며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색약으로 미대 입학 포기한 후 독학으로 전업 작가 돼
3.붓_ Oil on Korean Paper, 2006
이 “귀신 같은 재주”를 가진 작가에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이 문제인 단계는 이미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리는 기법은 이미 중-고등학교 때 모두 터득했다.
“그림은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배우면 영원히 2인자가 될 뿐이죠. 중요한 것은 독창성입니다. 혼자서 습득하는 것이 자신의 독창성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오늘날 그의 솜씨는 철저한 독학으로 이루어진 것이어서 더 값지다.
“사실, 어제가 졸업식인데 바빠서 가지도 못했어요.”
그는 지난 2월 대구의 계명대학교를 졸업했다. 학맥이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한국 미술계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작가가 성공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실력이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연유 또한 놀랍다. 일찍이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난 그가 신체검사에서 색약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당시 미대 입학 규정에 따르면 색약 판정을 받으면 입학을 할 수 없었다. 미대에 들어가기 위해 검사용 책의 순서를 통째로 외우기도 하고, 특별한 렌즈를 사용해 보기도 했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대 입학을 포기했다고 그림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1985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했다. 그때부터 그는 전업 작가가 되어 생계를 책임졌다. 대한민국에서 그림만 그려서 먹고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IMF 이전 호황기에 그는 좋은 시절을 맛보았다. 그림 경기가 꺾였을 때쯤 미대 입시 규정이 바뀌었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붓그림을 시작한 최근에는 한국 미술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편이죠. 예전에는 해외 전시가 쉬운 일이 아니었잖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가만히 앉아 있어도 그림을 사러 오지요. 저는 그림만 그리면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붓_ Oil on Korean Paper, 2007
실제로 그의 작품은 수년간 각종 아트 페어에서 대부분 솔드 아웃되는 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2월 한국이 주빈국으로 초청돼 관심을 끌었던 스페인의 아르코 아트 페어에서도 그의 작품은 오프닝 당일의 VIP 개막과 동시에 판매되었다. 지난 1월 21일부터 2월 20일까지 베이징의 ‘라 카세 예술공간’에서 이정웅은 김기수와 2인전을 가졌다. 베이징 아트 페어에 출품했던 작품을 눈여겨본 현지 화랑의 초청으로 열리는 전시였다. 아트 페어와 해외 경매에 작품이 출품되는 경우는 많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초대전이 열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이 전시 오프닝에도 그는 가지 못했다. 밀려드는 주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일정을 맞추려다 보니 그에게는 그림 그리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루 12~14시간씩 그림을 그려도 늘 부족하다고 느낀다. 2007년에도 그의 일정은 꽉 차있다. 인터뷰를 하는 짧은 시간에도 그의 머릿속은 4월의 개인전 준비로 분주했다.
사진 : 장성용
사진 전문 갤러리 뤼미에르 최미리 관장
Culture & Living | 사진 전문 갤러리 뤼미에르 최미리 관장
“젊은 사진작가들을 발굴해 지원할 겁니다”
추명희 TOP CLASS 기자
지난 2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에드워드 슈타이켄의 사진 <달밤의 연못(The Pond-Moonlight)>이 무려 290만 달러(한화 약 29억원)에 낙찰돼 사진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사진 한 장이 30억 원 가까이에 팔렸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외국에서는 사진이 각광 받은 지 오래다. 해외 주요 아트페어나 소더비, 크리스티의 현대미술 경매에 나오는 작품 중 사진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굵직한 사진 전시회가 줄을 이으면서 예술로서 사진이 재조명받고 있다.
“지금은 사진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미술 시장에서 사진은 초기 진입 단계라고 할 수 있어요. 고가에 작품이 팔리는 작가는 극소수이고, 전문 화랑이나 미술관 등 인프라는 턱없이 모자라는 실정이죠. 대중이 사진을 제대로 알고 즐기는 수준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어요.”
국내 최고의 사진 컬렉터이자 서울 청담동의 사진 전문 갤러리 뤼미에르의 대표인 최미리 관장(47). 대학과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유리공예를 공부하고 돌아 와 원래 유리공예 화랑을 열 계획이었다. 그런데 가까이 지내던 수녀님이 “뉴욕에 가보니 사진 전시회가 줄을 잇더라”면서 사진 전문 갤러리를 열 것을 적극 추천했고, 그도 금방 사진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리고 말았다. 이후 지금까지 3년 반 동안 세계 시장을 돌며 전투적(?)으로 사진을 수집했다.
“뤼미에르는 세계적 사진 시장의 메카인 뉴욕 맨해튼의 시스템을 도입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전문 갤러리예요. 오직 소장품만으로 전시를 하는 거죠. 사진만큼은 우리나라에서 제가 최고라고 자부해요.”(웃음)
최 대표가 소장하고 있는 사진 작품의 규모는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확한 작품 수는 아무도 모른다고. 그는 “소장품 전부를 공개하기는 힘들다”며 웃는다. 그는 사진 교과서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명작들을 사들여 전시회를 열면서 한국에 사진 붐을 일으키고 있는 주인공이다. 개관전으로 <20세기 세계 명작 사진展>을 연 데 이어 세계적인 사진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들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전시 도중 작가가 타계하는 바람에 마지막 개인전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브레송이 저에게 더 열심히 하라며 선물을 줬다고 생각해요. 원래 작가가 사망하면 작품 가격이 뛰잖아요? 브레송 사진도 몇 배가 올랐어요. 그렇다고 작품을 팔 생각은 없어요. 저의 영혼을 버티게 하는 힘이니까요.”(웃음)
세계적인 명작들을 소장한 갤러리
요즘 뤼미에르에서는 <프랑스 사진 명작전>이 열리고 있다. 스트레이트 사진의 대명사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과 휴머니즘 사진의 대부인 96세의 윌리 로니(1910~), ‘시청 앞에서의 키스’로 유명한 로베르 두아노(1912~1994)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3대 사진작가와 미국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자인 만 레이(1890~1976), 파리와 파리 외곽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찍어낸 외젠 아제(1857~1927), 프랑스 상류사회의 일상을 찍은 자크 앙리 라티그(1894~1986)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사진작가들의 작품 1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모두 소장품으로, 크리스티나 소더비 등 국제 경매 시장에서도 만나기 힘든 대작들이다.
“사진은 복제 예술이에요. 때문에 ‘같은 사진을 몇 장이고 인화할 수 있으니 희소성이 떨어져 투자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아요. 한 작품을 몇 장만 찍는다고 제한하는 ‘에디션’이라는 게 있거든요. 해외 경매에서 팔리는 유명 작가의 에디션은 보통 10장 이내입니다. 사진을 살 때는 작가와 작품에 대한 공부 외에 에디션이 몇 장인지, 한 에디션의 작품들이 어디 누구에게 가있는지 알아봐야 해요. 작가의 서명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최 대표는 사진을 사는 사람들을 이미지가 좋아서 무조건 사는 사람과 투자 가치를 보고 사는 사람 그리고 둘 다 충족하는 것을 사는 사람 이렇게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한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그는 당연히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한다. 지금은 이름이 없지만 앞으로 전도유망한 작가의 작품을 골라 사들이기도 한다.
“주식으로 치면 우량주와 기대주에 분산투자하는 셈이죠. 유명한 작가의 사진이라고 꼭 우량주는 아닙니다. 가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경우도 많아요. 가치 있는 작가와 작품을 발굴한다는 점에서 사진 갤러리의 역할이 중요하죠.”
최 대표는 젊은 작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LIPA(Lumiere International Photography Award)를 제정했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세계 각지의 재능 있는 사진가들을 발굴·육성하는 것이 목표다. 수상자에게 개인전을 열어주고, 주요 전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것. 세계적인 사진작가와 교수·미술관과 화랑 추천을 받아 작가를 선정하는데, 상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심사위원단은 공개하지 않는다. 최 대표의 이름 미리는 아름다울 미(美)에 마을 리(里)로 아버지가 “아름다운 마을처럼 살라”고 붙여준 이름이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넌 어쩜 그렇게 예쁘게 생각을 하니’, ‘어쩜 그렇게 목소리가 곱니’하면서 뭐든 칭찬을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모든 사물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 같아요. 처음 사진의 매력에 빠지는 순간, 너무 좋아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어요. 내가 느낀 기쁨을 사람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갤러리를 합니다.”
‘한국의 소나무’로 세계 컬렉터 사로잡다 . 사진 작사 배병우
Culture & Living | 배병우
‘한국의 소나무’로 세계 컬렉터 사로잡다
배병우
1950년 전남 여수 출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 졸업. 독일 빌레펠트 대학 연구 생활. 티센 미술관(2006,마드리드) 등에서 10여 회의 개인전과 주요 국내외 단체전 참가. <청산에 살으리랏다>(2005), (1999) 등 사진집 출간. 현재 서울예술대학 사진과 교수로 재직 중.
이진숙 미술평론가
최근 2년간 가장 많이 화제에 오른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사진작가 배병우일 것이다. 2005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가수 엘튼 존이 그의 소나무 사진을 구입한 것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높아졌다. 2005년 2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1만3200달러에 팔렸던 그의 작품이 올 3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3배 이상 오른 4만800달러에 낙찰됐다. 한국 미술 출품작의 낙찰률이 44.4%의 저조한 성적을 보였던 9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도 그의 작품만은 6만4800달러에 낙찰돼 기록 경신 행진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이 세계 미술 시장에서 확실한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한국 미술계가 모두 나서서 기뻐할 일이다.
“외국에서 한국 미술을 보는 시각은 우리와 다르다. 내 작품에 대해 자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평가한 것은 외국 사람들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일관되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누볐다. 우리 미술계가 한때 외국 사조를 따라가기 급급하던 시절, 그의 작품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우주적인 통일성을 간직한 자연을 서정적으로 포착해 내는 그의 사진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묵묵히 한국 사진계를 이끌어 온 1세대의 대표주자인 그의 작품은 지금 고등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대한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배병우의 모습은 꿋꿋이 세월을 지켜온 그의 작품 속 소나무와 닮았다. 한 길을 가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에게 보이는 단단함과 속 깊은 정이 있다. 그는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번 인터뷰를 하면서 나는 그가 웃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의 눈 때문이다. 멀리 있는 사물을 가까이 끌어당겨 보느라 가늘게 눈을 뜨는 것이 버릇이 된 모양이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자연을 관조하는 눈매이다. 그러나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이 한 꺼풀 벗겨지니 사람에 대한 배려와 따뜻함이 배어 나온다. 인터뷰 내내 구수한 냄새가 퍼지더니 손에 갓 쪄낸 고구마를 쥐여준다. 8년 전 사별한 아내를 대신해서 두 남매를 키운 그는 남다른 요리 솜씨로 소문이 짜하다.
대부분의 한국 1세대 사진작가들이 그렇듯이 그도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는 홍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했다. 당시에는 사진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었으니 그도 독학으로 사진을 배웠다. 그는 사진과 미술을 구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할 뿐, 사진은 표현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붓으로 그리는 대신 사진을 찍는 거다. 사진을 찍을 때는 빛을 잘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사물의 형태와 색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인물이 아니라 풍경에 관심이 간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는 겸재 정선이다. 그는 우리의 풍경을 어떻게 사진으로 표현할까를 늘 고민했다. 여수 출신인 그는 1970년대 후반부터 그가 보고 자라온 남쪽 바다의 풍경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 후 종묘, 바다, 제주의 오름, 소나무 등을 찍었다. 그의 사진은 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 익숙한 이 풍경들을 한 폭의 수묵화처럼 담아낸다. 제주도 오름을 찍은 사진은 먹의 농담을 이용해 그려낸 듯 깊은 맛이 있다. 그 유명한 경주의 소나무 사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면의 전경은 묵직하고 어둡고 오히려 화면의 뒤로 갈수록 밝아진다. 구체적인 것에서 아련하고 먼 것으로 시선이 이동하면서 보는 사람도 육체의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유현한 우주의 일부가 되는 듯한 신비스러운 느낌에 빠져든다.
“난 도피하는 사람이다. 풍경 속에 숨어 있다. 워낙 가난하게 살다보니 오히려 세상 거친 이야기가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
자연으로 숨어들어 하나가 되려는 마음 역시 문인화를 그리던 옛 선비들의 자세와 닮아 있다. 이 깊은 자연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가 택한 시간은 이른 새벽이나 흐린 저녁이다. 빛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시간에 깊은 호흡을 하고 있는 자연의 모습은 그가 찾아낸 한국미의 절정이다.
오늘날 그를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소나무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85년 동해 낙산사의 소나무를 보았을 때부터다. 그때부터 그는 전국의 유명하다는 소나무는 다 찾아보았다. 경주 삼릉의 소나무는 그를 완전히 매료시켰다. 왜 경주의 소나무냐고 물었다.
“경주의 소나무는 다르다. 그건 경배를 위한 소나무 숲이다. 천년 신라 왕들의 무덤가에는 늘 솔밭이 있다. 무덤가에 심는 소나무를 도리솔이라고 하는데, 소나무는 땅과 하늘을 연결해 주는 영혼의 매개체이다.”
그의 사진은 소나무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샤머니즘적인 혼령제의 핵심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소나무 이야기가 나오자 막힘이 없다. 우리 선조들의 삶에서 소나무의 의미, 한국에서 가장 좋은 소나무를 볼 수 있는 곳 등등. 20년간 소나무를 찍은 내공의 부산물이다. “정이품송, 정경부인송, 석령송이 있다. 나무를 인격화시킨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30대부터 22년 동안 소나무를 본 소감을 물었다.
“소나무도 사람하고 똑같더라. 나무도 사람처럼 아름다운 전성기를 갖는다. 한 100여 년 된 나무가 가장 아름답다. 양지바른 곳에서 태어난 부자 나무도 있고 가난한 나무도 있다. 사람하고 똑같다.”
1994년 일본 전시부터 그는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인정받기까지 그는 오랜 시간을 묵묵히 버텨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작품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라 다른 일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가가 왜 그렇게 외톨이로 사느냐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했단다.
“호랑이가 같이 다니는 것 봤느냐? 난 호랑이띠라서 혼자 다닌다.”
한국 사진계 호랑이의 일정은 빡빡하다. 지난 7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 미술관에서 열린 제9회 포토 에스파냐에 초대되어 전시를 가졌다. 마드리드의 3대 미술관에 속하는 티센 미술관은 배병우의 전시를 시작으로 현대미술을 매년 정기적으로 전시할 예정이니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내년부터 2년간은 스페인의 정원을 촬영하는 일정이 잡혀 있다. 그가 아끼는 린호프 카메라를 들고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누빌 것이다. 세계는 이제 경주의 소나무뿐 아니라 자연을 읽어내는 그의 눈 자체를 원하고 있다. from: top class 2006.12
보석처럼 빛나는 도시 프라하
|조갑제의 세계 명소 기행| 보석처럼 빛나는 도시 프라하
[ 글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위원 ]
프라하 일대는 보헤미아 지방으로 불린다. ‘보헤미안’이란 말은 뭔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동반하고 ‘프라하’라는 이름은 동서 냉전시대에 들었을 때는 비극적으로 끝난 1968년의 ‘프라하의 봄’이 생각나 다소 슬픈 느낌이 들었다. 그 ‘프라하의 봄’은 1989년엔 공산당 지배를 평화적으로 끝장 낸 ‘벨벳혁명’으로 해피 엔딩을 맺었다.
필자는 밤늦게 구시가(舊市街) 광장과 카를 다리를 걸어 보았다. 이 광장과 다리는 프라하 성(城)과 함께 이 도시의 가장 유명한 구경거리다.
구시가 광장에는 종교개혁가 후스의 동상이 있다. 1372년 후스는 보헤미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의 카를 대학에 들어가 공부했고, 신학대학 학장도 지냈다. 그는 면죄부를 판매하는 체코 왕을 비판하면서 당대의 두 권력집단인 정권과 교회를 적(敵)으로 돌렸다. 1415년 종교재판에서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구시가 광장의 후스 동상은 1915년 화형 500년이 되는 해에 만들어졌다.
카를 다리는 이곳을 지배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4세가 1400년에 완공한 길이 500m, 높이 50m, 너비 20m의 돌다리다. 다리가 시작되는 쪽에 높이 40m가량의 탑이 서 있고 다리 난간을 따라 30여 개의 조각상이 있다. 참으로 멋진 예술품이다.
블타바 강(독일어로는 몰다우 강)은 한강의 반 정도 폭을 가진 강인데 프라하의 한가운데를 흐른다. 이 강을 가로지르는 카를 다리는 아름답기도 하지만 견고하다. 만든 지 550년간은 사람, 마차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통과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차량통행을 금지시켰다.
밤중에 이 다리 위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언덕 위에 프라하 성과 구시가 광장의 성당 첨탑이 은은한 조명 속에서 오막살이처럼 경건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연인의 프러포즈를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2002년 여름에 블타바 강에 큰 홍수가 나서 카를 다리가 유실될 뻔했다고 한다. 프라하에는 카를 4세 대제(大帝)가 만든 다리, 학교, 성(城) 등 문화유산이 많다. 보헤미아 공주를 어머니로 두었던 그는 독일 신성로마제국(독일권 영주 국가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일종의 연방국가) 황제로서 이곳 왕을 겸하면서 오늘의 프라하, 그 토대를 만들었다. 다리 입구에 놓인 그의 동상은 인자한 임금님 모습이다.
카를 다리처럼 잘 만든 다리는 훌륭한 관광자원이자 후손들에게 돈벌이를 시켜 주는가 하면 시민들의 놀이터이고 거리 악사들의 무대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힘이 세다. 우리 여행단의 한 사람이 “이 다리가 만들어지던 때가 조선(朝鮮) 개국 무렵인데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프라하에는 600년 된 건물들이 많다. 카를 4세 때가 이 도시의 전성기인데, 그때부터 600년간 전화(戰火)에 휩쓸리지 않았으므로(2차 세계대전 때도) 이 도시는 여러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하나하나 추가해 가면서 진주 같은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다. 프라하는 14세기 말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 16세기 말엔 루돌프 2세에 의해 두 차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체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동구(東歐)로 분류하면 화를 낸다. 체코는 유럽 문명의 주류에서 놀았던 중구(中歐)국가다. 프라하에 오면 슬라브 냄새보다는 독일 냄새가 더 많이 난다. 체코 민족의 내면에는 슬라브 민족과 독일 민족의 피가 섞여 있다. 양쪽의 좋은 점을 다 받은 것 같기도 하다. 슬라브 민족의 양순함, 우수(憂愁), 예술성, 독일민족의 근면과 성실과 치밀함이 융화된 것이 체코의 민족성, 예술성, 그리고 역사의 성격이 아닌가 생각했다.
블타바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800년에 걸쳐 건설된 왕궁성은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의 성(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길이 570m, 너비 128m. 그 안에 성당과 왕궁(지금은 대통령궁)이 들어서 있다. 이 프라하 성의 성문(城門)이 대단하다. 성문 위에 큰 석조상이 두 개 있는데, 칼과 몽둥이로 사람을 때리고 찔러 죽이는 모습이다. 이 조각상은 1767~1770년에 만들어진 그리스 신화 타이탄상(像)이다.
이 조각상 밑에 부동자세로 서 있는 두 군인의 옷이 아름답다. 이 옷에는 유래가 있다. 체코 출신의 밀로시 포르만이 감독한 영화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의 일생을 그렸다. 영화의 내용은 비엔나가 배경이지만 프라하에서 촬영됐다. 체코 민주화 이후 하벨 대통령은 이 영화의 의상 담당자를 불러 대통령궁 성문지기들을 포함한 전체 군인들의 정복을 새로 디자인해 달라고 했다.
현실적인 체코인들
프라하를 찾는 관광객은 연간 6,000만~1억 명, 그러니까 우리나라 전체 입국 관광객의 열 배 정도다. 지금 세계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 프라하다. 인구 120만 명의 도시가 관광객 반, 시민 반이란 인상을 받았다.
프라하 성(城) 안에는 수많은 역사적 일화를 간직한 옛 왕궁이 있다. 1618년 5월 28일 신교(新敎)로 개종한 체코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파견한 관리들과 그 비서들을 왕궁의 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사건은 그 뒤 30년간 중부유럽을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으로 몰아간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독일과 그 주변국인데 인구의 4분의 1이 죽었다고 한다. 지금은 평화롭기 짝이 없는 프라하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 중의 하나가 여기서 터졌다.
17세기의 30년 전쟁은 체코 사람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결말이 났다. 구교도 세력이 이 지역에선 이겼기 때문이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다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그들은 신교도들을 다시 구교도로 돌려 놓는 정책을 폈다. 체코 사람들의 인구는 3분의 1로 줄었다. 그런 희생을 거치면서 체코인들은 실력에 넘치는 모험의 무모성을 체득했을 것이고, 그 현명함은 1989년 11월 공산정권 타도 때 극적으로 발휘됐다.
1989년 11월 17일 공산당 지배하의 체코 정부는 민주화 시위를 벌이는 학생들을 구타했다. 여기에 항의하는 시위가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연일 계속됐다. 한때는 70만 명의 시위대가 이 광장을 메웠다. 1989년 11월 24일 이 광장 거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 국립박물관 발코니에 두브체크(1968년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공산당 서기장)와 하벨(뒤에 대통령)이 나타나 공산 정권 타도를 선언했다. 공산 정권은 즉시 정부를 인계하고 조용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필자는 민주화의 현장인 바츨라프 광장을 거닐었다. 지금은 철거된 우리 중앙청과 거의 같은 크기의 국립미술관에도 들어가 보았다. 체코인들은 똑똑한데도 어리숙한 척하면서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 간다고 한다.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할 때도 조용히 평화적으로 했다. 체코는 현재 1인당 GNP가 약 8,000달러,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1만 6,000달러 수준이다. 찬란한 문화와 역사의 축적이란 등바람을 받으면서 체코는 단시간에 공산치하의 흔적을 지워 버리고 서구문명으로 복귀하고 있다.
from: topclass
페루 사막 한복판의 ‘신비한 오아시스’
신기루 같은... 페루 사막 한복판의 ‘신비한 오아시스’
후아카치나(Huacachina)는 페루 남서부 이카 지방의 조그만 마을이자 오아시스다. 인구는 100명 내외이며 주위에는 모래 언덕이 둘러싸고 있고 야자수 그늘과 작은 호수가 아름답다.
사막 한 가운데 숨어 있는 이 오아시스는 수 세기 동안 뙤약볕과 갈증에 기력을 잃은 여행객들에게는 생명의 샘과도 같은 구실을 했다.
휘청거리며 사막을 헤매던 사람들 눈앞에 오아시스는 마치 신기루처럼 나타난다. 신비함, 환희, 구원 등의 이미지가 후아카치나에 따라 붙을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곳은 요즘은 휴식과 수영 그리고 ‘모래 보드’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에게 명소가 되었다.
해발 600미터이고 모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이곳에서는 선사 시대의 고래 화석과 상어 이빨이 다수 발견된다는 점이 특별하다. 2007.515 chosun.com
영국군이 본 1953년 한국
6·25 막바지… 삶의 고단함도 막바지였으면
영국군이 본 1953년 한국… 서울대에서 18일부터 전시
1.▲ 전쟁 속에서도 삶의 맥박은 이어졌다. 동대문시장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물건을 고르는 어느 어머니. 1953년 촬영한 사진이다. /앤소니 영거 · 키스 글래니-스미스 촬영
2.▲ 우연한 서울 방문길에서 카메라에 담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카메라를 바라보는 경호원의 시선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1953년 촬영한 사진이다. /앤소니 영거 · 키스 글래니-스미스 촬영
3. ▲ 미아리고개의 도자기와 유리 판매점. 1953년 촬영한 사진이다. /앤소니 영거 · 키스 글래니-스미스 촬영
4.▲ 창경궁을 찾은 여학생들(왼쪽)과 먼 곳을 응시하는 어느 아이의 모습. 사진을 촬영한 앤서니 영거는 '전쟁 고아'라고 표현했다. /앤소니 영거 · 키스 글래니-스미스 촬영
6·25 후반부였던 1953년, 한국에서의 삶을 생생하게 포착한 사진 60여 장이 공개 전시된다. 영국군 포병장교로 참전한 앤소니 영거(Anthony Younger·78)와 역시 영국군 의무장교로 참전한 키스 글래니-스미스(Keith Glennie-Smith·80)씨가 촬영한 사진이다. 이 사진들은 오는 2007.5.18일부터 8월 18일까지 서울대박물관 2층 특별전시실에서 ‘1953,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 처음으로 공개된다.
1952년 12월 하순, 한국에 도착해 그해 크리스마스 때 첫 전투를 치른 이들은 1953년 휴전 뒤 본국으로 돌아가기까지 전쟁이 한창인 이곳에서의 고단하고 남루한 삶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부분 서울이 배경이지만, 부대가 주둔했던 경기도 연천지역 풍경도 담겨 있다.
전쟁은 제 몫의 고통과 비참함을 훑고 지나가지만 그래도 삶은 지속돼야 했다. 푼돈을 쥔 아낙은 젖도 나오지 않을 법한 가슴을 아이에게 물리며 동대문시장에서 잠자리를 잡듯 물건을 살폈다. 전쟁 고아들은 부대 주위 식당이나 세탁소에서 숙식을 대가로 잔일을 했다. 영국식 악센트를 써가며 영어 몇 마디를 했던 이들을 영국 군인들은 죄다 “킴”이라고 불렀다. 미아리고개에 있는 어느 가게에서는 ‘싼 가격, 서울 최고의 도자기가게’(reasonable prices, best China shop in Seoul)라는 푯말을 붙여 외국인 고객의 눈길을 끌기도 했다. chosun.com 2007.5.15
운보 김기창의 가을 외
1.가을 1934년
운보 김기창 화백의 목적 외
1.목적
1970년 작/비단에 수묵담채/미상/소장처 미상
2.능소화
1970년 작/종이에 채색/65.5 * 43cm/김중묵 소장
3.강변
1976년 작/비단에 수묵채색/51 * 57cm/개인소장
운보 김기창 화백의 청산도 외
1.청산도
1975년 작/종이에 수묵채색/63 * 50cm/동아미술관 소장
2.雪野
1975년 작/종이에 수묵/41 * 32cm/개인소장
3.청화백자호취도대대
1974년 작/백지에 청화/49cm/개인소장
운보 김기창의 세종대왕 외
1.세종대왕
1975년 작/비단에 수묵채색/85 * 120cm/한국은행 소장
2.태양과 말
1975년 작/비단에 수묵/41.5 * 38cm/이승백 소장
3.신선도
1975년 작/종이에 수묵담채/33 * 55.5cm/이교웅 소장
운보 김기창의 청산강호 외
1.청산강호
1985년 작/비단에 수묵채색/128 * 64cm/개인 소장
2.호랑이
1986년 작/두방에 수묵담채/60.5 * 50cm/작가소장
3.십자가
1986년 작/적색종이에 수묵/151 * 87cm/東圓육영회 소장
예수의 생애 연작2 -운보 김기창
9.최후의 만찬
10.게세마니 동산의 기도
11.재판받다
12.십자가를 지고
13.십자가에 못박힘
14.시체를 옮기는 제자들
15.부활
16. 승천
예수의 생애 연작 - 운보 김기창
1.수태고지
2.아기예수의 탄생
3.요한에게 세례받음
4.제자들을 만남
5.5000인을 먹임
6.물위를 걷다
7.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8.여인 예수의 발을 씻음
빨래터
빨래터
서울옥션이 5월 22일 실시하는 미술품 경매에 나오는 박수근 화백의 유화다. 다채로운 색상의 저고리를 입은 여인 6명이 냇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1950년대 작품으로 경매 추정가는 35억∼45억원. 지난 3월7일 K옥션 경매에서 25억원에 팔린 박 화백의 1961년작 ‘시장의 사람들’ 최고가 기록을 경신할지 주목된다.
청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던 시절을 나무판에 새긴다.
귓가에 들려오는 고운 노랫소리. 돌아보면 저녁 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는 추억을 마음으로 담는다.
김준권 목판화전(3월28일∼4월3일·서울 관훈동 인사아트센터·02-736-1020)
150년전 ‘세계최초 스파이카메라’,가격은 4천만원
시계로 위장..150년전 ‘세계최초 스파이카메라’,가격은 4천만원
19세기에 제작된 ‘스파이 카메라’가 예상보다 훨씬 높은 가격인 21,600파운드(약 4,000만원)에 팔렸다고 2007.5.9일 영국 경매 회사 본햄스가 발표했다.
‘회중시계’ 모양의 이 카메라는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종류인데, 본햄스 경매 측은 당초 이 스파이 카메라가 10,000~15,000파운드에 팔릴 것으로 내다봤었다.
회중시계 형 스파이 카메라는 9일 경매를 통해 약 4,000만원에 낙찰되었는데, 문제의 카메라가 현재 몇 대 남아있지 않은 대단히 희귀한 종류라는 것이 경매회사 관계자의 설명.
최근 개발된 만년필, 손목시계형 카메라 못지 않은 정교한 디자인을 뽐내는 ‘회중시계 카메라’를 구입한 이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사진 : 4,000만원에 팔린 ‘회중시계 스파이 카메라’ / 본햄스 경매 보도 자료 사진)조선일보
회중시계(懷中時計) a pocket watch;a ticker《속어》
양복의 포켓 등 품속에 넣고 휴대하는 소형의 시계.
손목시계보다 약간 큰 것이 많다. 기계시계는 최초에는 제법 대형이었으나, 15세기 말경 북이탈리아에서 목에 걸고 사용하는 휴대시계가 만들어졌고, 이 기술은 독일남부의 뉘른베르크에 전해졌다. 그리고 P.헨라인의 달걀형의 휴대시계 <뉘른베르크의 달걀>의 전설이 생겼다.
다시 이 기술은 영국에 전해져서, 18세기에는 런던이 휴대시계 제작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시계 기술자는 균형바퀴 ·태엽을 사용하였고 18세기 중엽에는 휴대시계가 목걸이 시계에서 회중시계로 변하였다.
아래 사진: 윤봉길의사 유물-회중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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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황사 문제지요. 좋은 작품도 감상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