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들을 위한 서정시
다시 의문은 시작되었다 숙맥들은 눈치채지 못할 신호를 돌리다 슬며시 자리를 터는 그들은 어디로 몰려가는 걸까 뒤늦게 홀로 구두를 찾아 신고 내려오는 시간 확실히 내가 모르는 암호가 있는 것이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들 뭔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나에겐 너무도 힘들었던 문제들 흥나는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내심 옆사람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함부로 넘겨짚진 않지만, 내가 알고 싶어하는 건 벽 너머 세상, 어쩌면 그 호기심조차 다 똑같은 목적 때문이라 생각할지 모를 그래서 혹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해왔을지 모를 그들
하지만 성공까지는 바래본 적이 없다 종이가 무엇이란 걸 알기 때문에 목적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다 닥치는 대로 쓰고 핸들을 돌리고 돌리다보면 어디선가 들어맞을지 모를 숫자를 찾아 한 칸씩 한 칸씩 정교하게 조합해 맞춰보는 퍼즐 반쯤 왔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방향을 틀었다 알았다고 생각할 때 바보같이 머리를 쳤다 알만한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말도 생각하며 걸었다
오늘 다시 틀렸다고 생각한 말들을 지운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떨어져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 차갑고 단단한 구멍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단어는 뭘까 꼭두각시 하나 불태울 수 없는 말이라면 시 같은 건 손대지도 않았다
허혜정 시집 『적들을 위한 서정시』(문학세계사, 2008)
허혜정이 새 시집을 냈다. 첫 시집 『비 속에도 나비가 오나』이후 18년만이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는 내내 우울하고 처절하고 어둡다. 허혜정의 시는 빗장을 걸고 악몽을 견디며 쓴 시다. “밤마다 끔찍한 악몽에 시달리며 / 나는 쓴다”(「만약 나의 삶이 나쁜 스토리라면」)고 하지 않는가 ! 동거인은 죽었기에 유령이고, 그가 죽었으므로 시의 화자는 미망인의 삶을 받아들인다. 산 자를 유령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미망인으로 만든 이 삶은 지옥의 삶이다. 죽지 못하고 남은 생을 받아들인 여자가 미망인이다. 미망인이라는 어휘 자체가 여자에 대한 모독이다. 모독을 삼킨 이 여자의 삶은 침묵이거나 비명, 공포이거나 개그다. 스스로를 미망인의 자리로 밀어넣은 시의 화자에게서 비명은 주르르 쏟아진다. “나는 사망의 밤이요 / 죄악이요 / 시뻘건 달이요 / 폭풍우를 머름은 보랏빛 구름이요”(「미망인으로 살기」) 이것은 여성 삶의 안쪽에 각인된 트라우마의 흔적들이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는 그 절망과 비참과 모욕의 비망록이다. “역사의 벼루에 핏물을 붓던 어둠의 후궁들”(「스란치마」)이 쓰는 시, “폐허를 어슬렁거리는 똥개로 다시 태어나”(「재방송」)고 싶은 여성의 시가 허혜정의 시다. 그 절망과 비참과 모욕의 극단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살의다. 타인을 향한 것이든 스스로를 향한 것이든 살의는 섬뜩하다. 시인은 “미망인의 비참함을 즐기는 내게 / 때마다 안 늦었냐고 물어대는 머리통을 진짜로 / 끓는 냄비통에 처박아버리고 싶다”(「미망인으로 살기」)고 말한다. 이 유령의 집에서 할 수 있는 건 사생활의 지독한 불행을 견디는 것, 그리고 악몽과 나쁜 스토리를 견디는 것뿐이다. 시의 화자는 유령과 동거하는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고, 집 밖을 한없이 배회한다. “유령이 출몰하는 음산한 집보다는 / 떠들썩한 맥주집을 선택한다”(「미망인으로 살기」) 허혜정의 시는, 아마도 최승자 이후, 여성 삶에 대한 가장 나쁜 스토리를 쓰는 여성시인일 것이다. 장 주네는 “공포에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거기에 완전히 빠져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시인이 선택한 방법이다. 허혜정의 서정적 자아들은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절망에 온몸을 담근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는 “깊고 어두운 규방”(「스란치마」)에서 뛰쳐나온 여성의 노래다. 그녀들은 뛰쳐나왔지만 어디로 갈 지 모른다. 「적들을 위한 서정시」는 끝끝내 안이 될 수 없고, 안을 거부하고 “궁궐문을 함부로 따고 나온 / 방탕한 무수리”(「스란치마」)가 부르는 바깥의 노래다. 안이 “종묘사직의 국가”를 떠받치는 남성 지배의 세상이라면, 바깥은 “구천을 떠돌던 귀신들”, “벼락을 맞았던 볏짚인형”, “허연 소복 차림으로 백지에 수절해온 과부”(「스란치마」)들로 이루어진 여성 세상이다. 안에서 바깥으로 뛰쳐나온 여성 화자가 만난 것은 그들이 세운 벽이다. 허혜정의 여성 화자는 그 벽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날개가 꺾인다. “악수도 모르고 멀어지던 거만한 그들”, “뭔가 안 보이는 벽 너머에서 / 내일이 있는 척 웃어대던 얼굴들”, “흥나는대로 지껄여대던 혀들”, “알 수 없는 귓속말을 즐기는 그들”은 벽을 세우고, 그 안쪽에서 바깥을 식민지로 길들이고 지배한다.
그들은 유령이요, 나의 생명력과 열정을 남김없이 빨아먹고 거덜내는 흡혈귀요, 삶과 의식을 옥죄고 공포로 밀어넣는 에일리언이다. 허혜정의 시적 자아들은 그 적들과 싸운다. 허혜정의 시들은, 삶을 쥐고 조종하고 전제군주처럼 지배하려 드는 당신들, 내 밖의 모든 적들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모든 나들이를 취소하고 빗장을 걸어 잠그는 시간”(「미인도」) 속에서 숙성시키고 완성한 시들이다. 허혜정의 화자들은 “나는 당신들의 필법을 배우려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당신들의 필법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그들의 식민지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금팡이가 퍼렇게 슨 족자 속에 표구되어서도 / 나는 누구의 계집이었던 적이 없다”(「미인도」)고 노래한다. 누구의 계집이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 화자는 그들의 세상에서 격리되고 내쳐져 소외당한다.
그들이 만든 세상은 “종묘사직의 국가”(「미니어처」)다. “부패한 방언으로 가득한 대화에서 / 떨어져나온 외로운 미치광이가 되어”라는 시구에 따르면, 그 격리와 소외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들의 세상에는 “부패한 방언”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 끼어들 수 없던 시의 화자는 미치광이로 떠돈다. 저 안쪽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굳게 잠가놓은 안쪽에서 그들이 / 어떤 세상을 세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누구의 계집이 되는 것도 거부한 채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시의 화자는 세상 바깥을 떠돌 수밖에 없다. 외로운 미치광이의 삶은 “뽑혀나간 핸들을 움켜쥐고 / 악몽의 공회전에 갇혀 있”(「나, 더미」)는 삶이다. 그들은 “내 꿈을 안다고 재단”하지만, 그리하여 날마다 나의 사유와 웃음과 입술을 무엇이라고 규정하지만, 종묘사직, 굳게 잠가놓은 그 벽의 안쪽에 갇힌 그들이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성은 끝내 안이 될 수 없는 바깥이고, 외로운 미치광이고, 비천한 무수리고, 국가 없이도 정치적일 수 있는 아나키스트다. 여성은 “낯선 자가 아니라 / 낯설어지는 자”, 나쁜 덫에 걸려 “손가락을 자르고 꼬리를 자르고 뒤꿈치를 자”(「네 행을 쏴라」)르고 사라지는 자다. 허혜정의 시는 그 여성에 의한, 그 여성을 위한 울음이요, 비명이고, 노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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