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은 축구를 가장 즐기는 민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축구를 론할라치면 누구와 어디서든 금시 《백가쟁명》의 열변장이 벌어진다. 조선족 축구나 선수들에 대한 관심은 더 말할것 없고. 그러다 각자 《무엇무엇해도 누가 뽈을 제일 잘 차더라》로 아퀴를 짓기가 일쑤다. 허나 조선족축구명장들을 핵으로 그어온 조선족축구력사에 진정 관심을 가지고 쟁론하는 이들은 흔치 않다고 본다. 조선족을 빛냈던 대표적인 축구명장 몇몇이나마 소개한다.
조선족축구의 시작
1905년이후 조선의 애국문화의 영향하에 연변을 중심으로 한 조선족지방들에서 축구운동이 차츰 보급되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대항경기가 좀씩 있기 시작, 명동학교와 장동학교간의 축구경기가 그 대표적인 일례로 된다. 1920년부터는 조선족축구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여 많은《축구명장》들이 속출되였다.
20세기 30, 40년대 박익환 그리고 그의 고향
박익환은 룡정시 덕신향 남양촌에서 태여났다. 뽈로 유명해진 후 부모뵈러 오게 되면서 마을사람들이 그의 뽈재주를 보자고 졸라 남양학교 운동장 주위에 있는 수십대의 나무를 겨냥하고 뽈을 찼는데 정말로 백발백중이였다는 전설을 비롯한《박익환전설》이 아직 남양촌일대에서 류전되고있다. 박익환형제는 당시 간도성팀의 선수였는데 박익환은 하프선에서《명중포》란 별호를 가졌다고 한다. 박주환은 광복이 나던 해 쏘련홍군과 별동대의 축구경기중 불명하게 잡혀간 후 종무소식이 되였다고 한다.
박익환은 체대가 크고 남달리 건장하며 중학시절에 벌써 위만주국일대와 일본에서 명성을 날렸다. 박익환의 발에 뽈이 걸리기만 하면 100% 정확하게 공격수들에게로 넘겨주었다고 한다. 1937년 전 만주국 도시 대항 겸 동양축구대회에 출전하여 간도성팀이 우승을 거두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때 이미 박익환은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출중한 선수였다. 1938년 박익환은 프로축구선수의 꿈을 안고 조선으로 갔다.
한국 《월간스포츠》에서 박익환에 대해 수차 소개한 몇구절 옮겨본다.
1978년 9월 23일 2446호에는 《간도성팀과 전 일본에 이름 떨친 박익환은 고려대학에서 공부도 하면서 학교팀의 선수로 1940년 전 일본축구대회에서 강팀인 일본 관서학원팀을 전승하는데 위훈을 떨쳤다》고 기재하고있다.
1979년 5월 12일 2542호에는 당대 하프선에서 가장 뛰여난 선수로 민병대 버금으로 박익환을 꼽은 기사가 실렸다. 동아세아에 명성을 떨친 박익환이기에 연전(연전대학의 략칭, 광복후 서울 연세대학으로 개칭)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고 바로 하프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는 내용도 널리 알려졌다.
박익환의 죽음 또한 뽈을 너무 잘 차니깐 모해당했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일간스포츠 1979년 5월 12일 2543호 스포츠일화에는《뜻밖의 물사고로 죽음, 연세대학과 한국의 큰 손실》이라고 밝혀졌다.
박익환의 《태줄》을 물고 나왔는지 당시 만주국팀에서 주력으로 있은 김용식, 국가 명선수로 이름 날린 최태환과 최증석 두 형제(《국가건장》칭호)도 다 덕신향 남양촌 출신이였다. 간도성팀과 만주국팀에서 활약했던 최죽송, 박장송, 김용식, 길림성팀과 국가팀에서 활약했던 국가축구건장 손중천도 다 덕신향 사람이였다. 덕신향은 중국조선족축구선수들이 가장 많이 나온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듯싶다. 조선에서 출판한《조선의 어제와 오늘의 축구》란 책에서는 길림성 연길현에서 출생한 허죽산을 세계축구왕 벨리와 못지 않게 뽈을 잘 차 그의 다리는 《기계다리》와 같고《곡예단 배우처럼 공을 잘 다룬다》고 높이 평가했다. 허죽산 역시 덕신향 출신이라고 한다.
50, 60년대 장경천
1935년 심양출신, 키 1.68메터, 체중 65킬로그람, 별칭 《작은 호랑이》.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수》칭호를 수여받았다. 1953년 심양체육학원 입학, 동북팀의 핵심선수, 1954년 웽그리아 류학경력후 국가팀의 하프선수로 활약하였다. 1957년 제6회세계선수권대회 아세아와 대양주 지역의 예선경기에 출전, 그해《북경일보》와 북경방송국이 공동으로 진행한 국내《가장 사랑스러운 축구선수》에 당선, 국가체육운동위원회서 선정한《축구운동건장》22명 명단에 3위순으로 올랐다. 기술, 체력겸비, 전술의식이 강하고 대경기 경험이 많은 선수로서 국가팀 감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아온 조선족선수며 국가팀에 제일 오래 있은 선수로 알려졌다.
1962년 10월 17일, 국가《체육보》가 조직한 22명《전국우수축구선수》평선에서 장경천이 첫 자리에 있었고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수》란 칭호도 수여받았다. 1973년 장경천은 전국 중학생팀 지도를 맡았다. 이듬해 오스트리아에서 있은 세계중학생축구선수권대회서 중학생팀은 6전5승1무의 성적으로 제1위를 과시했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장경천은 국가희망팀, 공군팀, 수도강철공사팀 등 권위 축구팀 지도를 력임해 축구생애를 연장하고 빛냈다. 1981년 국가《체육보》는 건국이래 소수민족 우수한 선수들이 속출되여 중대한 공헌을 했다는 론평에서 장경천 등을 지명 치하했다.
70년대의 별 리주철
1943년 흑룡강성 계동현 계림향 출신,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장》칭호를 수여받았다. 계림향당위의 알선으로 그의 동생 리동철도 직접 만나볼수 있었다. 리주철은 돌상에서 빨간 뽈을 잡았고 또한《뽈개지》로 자란 많은 이야기들을 고향에 남기였다. 1963년 8월 계림중학교에서 공군부대로 참군, 뽈을 잘 찬 그는 입대후 대뜸 심양공군부대팀에 뽑혔다. 전국공군부대운동회 여섯껨의 경기에서 혼자 꼴 8개를 넣어 전국공군부대팀에서 스카우트해갔다.
1965년 11월, 남녕에서 진행된 전국을급팀련맹 흑룡강성팀과의 경기에서 7개의 꼴이 났는데 5개를 리주철형제간이 냈다. 그의 형님 리주찬은 당시 흑룡강성팀 선수로서 3꼴, 리주철이 2꼴을 내 신문계의 흥미로운 조선족축구뉴스거리로 전해졌다고 한다.
1969년 리주철은 국가팀의 우익공격수로 선발되여 제6회, 제7회 아세아운동대회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선수이기도 하다. 특히 제6회 일본팀과의 겨룸에서 승부를 결정하는 관건적인 꼴을 넣은 선수로서 조선족의 명성을 크게 떨치였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수》로 추대되였고《아세아최우수우익공격수》로 구단에 명성을 날렸었다. 2002년 북경에서 별세했다.
80, 90년대 고종훈
우리가 가장 낯익은 조선족추구명장이라고도 할수 있다. 1965년 길림성 룡정시 출생. 국가《체육명장》이다. 1984년 룡정시체육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성축구팀에 선발되였다가 그후 국가팀 선수로 선발되였다. 1985년 전국청소년팀의 선수로 구쏘련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의 가장 유망한 축구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2년 고종훈은 국가팀을 대표해 일본에서 있은 아세아컵 축구경기에 참가해 중국팀이 3등을 하는데서의 유공자로 이름을 날렸었다. 1994년 길림성팀 축구감독조리로 있었다. 그해 국가팀을 대표해 제12회아세아운동대회 대 일본팀 경기에서 중국팀이 2등을 하는데 관건적인 꼴을 넣어 대공을 세웠다. 국내 구단의 스타로 인정받았을뿐만 아니라 1996년 국가팀의 하프선 핵심으로 로씨야, 화란 등 나라와 지역에서 있은 대항경기들에서 조선족의 명성을 떨쳤다.
90년대 그는 《길림성 10대 걸출한 청년》,《최우수하프선수》,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체육명장》으로 명명받았다. 그후《당대조선족인물록》에 수록되였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연변축구의 재기와 더불어《백가쟁명》팬들은 더 많은 조선족축구명장이 솟아나기를 소망하고있다. 고훈감독은 《젊은 선수 양성에 힘을 기을이고있는 연변팀에 언제면 고종훈, 리홍군 등과 같은 국가명선수들이 나타나리라 생각하는가?》하는 매체기자들의 물음에 《연변팀에 수년간 국가명선수는 없었지만 싹수를 보이는 선수는 적지 않다고 본다. 이미 3명의 국가 청, 소년팀 선수가 속출되였고 현재 목적성있게 양성하고있는바 이제 1-2년정도면 꼭 국가명선수가 나타날것이다》고 확신적으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