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옛날 이야기 -33-
(두망강을 넘어서 38선까지 -4-)
이산에서 나무를 하는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에게 38선이 가까우냐고 물었다.
그 청년은 마을 앞 들판을 가리키며 바로 저곳에 38선이라는 팻말이 있다고
하였다.
그는 솔가지를 쳐서 다발로 묶고 그것을 나무썰매 (Y자도 된 나뭇가지가 썰매
였다)에 싣고 소를 이용해 산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우리가 쉬고 있는 산은 아랫마을의 뒷산이었으며 좀 가파르고 높은 산이었다.
마을은 4-50호쯤 되었고 산을 등지고 남향인 마을 앞에는 임진강 상류인 작은
강이 흐르고 있는 아주 아늑하고 살기 좋아 보이는 마을이었다.
산 아래의 동네와 동네 앞을 흐르는 조그마한 강물과 그 앞에 펼쳐있는 들판을
바라보았다. 저 앞에 있다는 38선만 무사히 넘으면 그리운 식구를 만날 수 있
을 것이다. 가슴이 설레었다.
한참을 쉰 후 우리 일행은 아랫마을로 내려갔다. 동내에 들어서니 한 젊은 동네
청년이 다가와서 우리 일행보고 잠시 같이 가자고 하였다. 산에서 만난 그 나무
꾼 청년이 신고하였다 했다. 38선이 가까운 마을이니 단속을 할 수 밖에 없었
을 것이다.
언덕 밑으로 강이 흐르는 산모퉁이를 왼쪽으로 끼고 돌아 물레방아가 있는 곳을
지나 다리를 건너 한 붉은 벽돌집으로 안내하였다. 이곳이 바로 안전원이 있는
곳이었으며 그들이 우리를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옆의 방에서는 고문을 하는지 여자의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오고 있었다. 참으로
으시시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이구나.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으나 나는 태연한
척 했다.
우선 둘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연로하시니 문제 될게 없었고 육촌동생인 종자
네 네 자매도 어린 여자애들이니 문제될게 없었다.
그리고 형님은 형님대로 휴가증이 있었고 거기에는 집에 가서 휴양하라는 글이
쓰여 있느니 또 문제 될게 없었다. 다만 나는 증명서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찌겠는가.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에 대
하여 그들에게 설명했다.
"형님과 같이 만주에 공부하러 갔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둘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여동생들과 같이 부모가 살고 계시는 충청도 고향으로 가는 중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은 우리들의 짐과 몸을 수색하였으며 무언가 기록을 한 뒤 그 안전원이 우리
를 데리고 같이 간 청년을 보고 말했다.
"38선 경계선까지 모셔다 드려라"
그리고 우리들 보고는
“무사히 가십시오. 그리고 건강하십시요”
라고 깍듯이 인사를 하였다.
그곳을 나오니 긴장이 풀렸다.
이제 살았구나! 하늘을 나라갈것같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조상님 감사합니다.......
하늘을 푸르고 완연한 봄 날씨였다. 이 마을 남쪽 끝에 38선 이라는 팻말과 철
조망이 있었으며 그 팻말 옆에 초소가 있었고 철조망 바깥에 초가집이 두 채가
있었다. (그 두 채의 초가집은 38선 남쪽에 있었는데 어느 쪽서 관리하나? 하
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였다)
철조망 남쪽에는 신작로가 이어져 있었다. 거기서도 간단한 몸수색이 있었으며
우리를 데리고 왔던 청년이 몸을 90도 각도로 숙이면서
"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우리는 낮선 사람을 보면 신고하게 돼 있으며 만약 신고
안하면 문책을 받습니다. 부득이 한 일이었으니 용서하여 주십시요 그리고 평안
이 고향집에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매우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아마도그 청년이 지금 살아 있다면 90이 훨씬 넘었
을 것이다.
그 곳은 임진강 상류의 어느 조그마한 마을이었다. 지금도 그 마을이 있을까?
6.25 전란 때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분들이 지금도 살아 있을까?..
38선이란 팻말이 붙어 있는 곳을 지나 트럭 자욱이 나 있는 신작로를 따라
2~30분을 걸어가니 조금 큰 마을이 나왔다. 아마 읍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니 양문이 아닌가 싶다)

그곳에는 새까만 제복을 입은 남쪽 경찰이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우리는 그 경찰관과 같이 그곳 경찰서에 가서 간단한 조사와 몸수색을 받았다.
그리고는 우리들보고 고생이 많았다하며 여관으로 데려다 주고 밥도 사주었다.
참말로 친절하였다.
다음날 그들이 다시 찾아와서 우리를 포천으로 가는 트럭을 주선해 주었다.
이 트럭은 장작을 실은 트럭이었으며 우리는 장작 위에 앉아 포천까지 갔다.
포천서는 여러 경로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
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곳에서도 밥과 음료수를 나누어 주었으며 한쪽에서는 소독 해 준다고 한 사
람 한 사람에게 온몸에 DDT (흰 가루인 소독약)를 머리로부터 목 뒤로 하여
옷속까지 하얗게 뿌려 주었다. 온통 밀가루를 뒤집어 쓴 것 같아 서로보고 박장
대소를 하였다.
포천서는 또 서울로 가는 장작 실은 트럭을 알선해 주어 우리는 그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몇 해 전 나는 이미 남쪽 땅이 된 월정리에서 이곳 포천까지 오던 길을 다시 한
번 옛날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 보고 싶어 서울 종로2가 네거리에 있는 신신백
화점 (지금도 있나 모르겠다) 옆에 있는 지도를 파는 곳에 가서 아주 상세히
그려진 지도를 샀으나 아직까지 가보질 못하였다. 꼭 한번 가봐야지 지금도 가
끔 생각을 한다. 과연 생전에 가볼 수가 있을까…….
일주일 전에 얼음이 얼은 두만강을 건너 회령을 거쳐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의
밭둑에서는 파랗게 새싹이 돋아 있었으며 치마저고리 입은 여자애들이 떠들면
서 “얘 이 계집 애야..”하며 밭둑에서 평화롭게 나물을 캐고 있었다.
함경도 사투리 속에서 묻혀 살다가 이곳 꼬마 아가씨들의 나긋나긋한 경기도
말을 들으니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들녘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왠지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