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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발도르프특수교육 지원센터
 
 
 
카페 게시글
인지학이야기 Re:삼성 규탄 대구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2007. 11. 21)
비바람 추천 0 조회 61 07.11.21 16:00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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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7.11.22 10:43

    첫댓글 '삼수리 제도'라는 신조어가 있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 지방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 자제들을 중앙에 인질로 머물게 하던 상수리 제도에 빗댄 말이라 합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자제를 삼성 계열사에 취직시켜주는 일명 '취직 로비'이지요. 세 자녀를 삼성 계열사에 취직시킨 어느 대법관의 사례를 보면, 삼성의 세심한 배려는 단순히 취직을 시켜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계열사 임직원 중 한 명을 그 직원의 '멘토'로 붙여줘서 회사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게 돕는다고 합디다. 자식 앞에서 약해지는 부모랍니다... 삼수리.. 참 가소롭습니다.

  • 07.11.21 18:20

    대법관이라는 작자가 자식을 하나도 아니고 셋이나 그렇게 삼성에 보냈다니... 헛참... 대대로 꼬고 엮은 튼튼한 동아줄로 서민의 목을 옭아 매는군요. 비리의 규모가 이 정도까지라니 참 걱정됩니다. 그러니 누구도 삼성을 건드리려 하지 않고, 한국이 삼성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 07.11.22 00:28

    그런데 비바람님은 사진에 어디쯤 있나요?

  • 작성자 07.11.22 11:09

    전 아래사진의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있습니다. 긴머리, 황색외투에 청바지.. 아, 그렇군요. Tat tvam asi! 저것이 바로 저로군요. ^^

  • 07.11.22 14:52

    오, 긴머리에 도사님 같은 분~~ 하하~~~ 더 큰 사진으로 올려여, 그래야 잘 보이져~~ ^^

  • 작성자 07.11.22 15:47

    예. 그럼.. 사진을 좀 확대합니다. ^^

  • 07.11.22 15:53

    에구, 그 확대했다는 사진이 이 늙은이 눈에는 그게 그것이네요. 저의 학교에는 그저 여인네들이 득시글 거린답니다. 한 학년에 남학생 한명 있을 때도 있고, 한 명도 없을 때도 있고. 그랴서 씩씩한 청년을 보믄 반갑져~~

  • 작성자 07.11.22 18:30

    ㅎㅎㅎ ... 음, 근데, 그건 어째서인가요? 왜 여성들이 유독 많은지요? 남성들이 희귀한 이유가...? (혹시, 그 전설의 아마존 여전사들이 모여사는...?? ^^) 아, 전 이제 그 '씩씩한 청년'시절이 그리운 나이입니다. 오히려 그 '주름 속에서 환하게 빛나는 인식'을 동경한답니다.

  • 07.11.22 17:26

    이상하게도 예술이나 교육이라는 것이 아직도 여인네의 몫이라는 생각이 충만해서인가 봅니다. 그런데 제가 증말 이해할 수 엄는 것은 강사들은 모두 남성이라는 것 아닙니까. 저희 학교에서 테라피 강사가 여성이고, 미술담당 강사 중에서는 제가 유일한 여성입니다. 제가 이 학교에 발을 디디게 된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여학생들의 강력한 바램에 의해서지요. 한국에서는 유치원 교사연수의 강사도 독일남성이 한다는 어이없는 야그를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유치원 교사연수의 강사들은 어김없이 모두 여자입니다. 발도르프 유치원에 남자 교사 본적이 없는데, 우째 독일 남성이 한국에서 유치교사 연수를 하는지 증말 신기하군요. ㅎㅎㅎㅎ

  • 작성자 07.11.22 18:38

    그러게요. 여인들의 그 배움이 많은데, 어찌 그 가르침은 유독 남자의 몫이 되는지... 심히 수상쩍은 역사의 냄새가 나는 듯... ^^ 그 '예술'과 '교육'이란 단어가 제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 작성자 07.11.22 19:00

    '...(전략)...각 개인이 자기 집(자기 안)에서 스스로 그것을 찾아야만 정신화가 시작되니, 어려운 것입니다'란 선생님의 말씀은 참 인상적입니다. 저의 현실적 어려움은 이런 것입니다. '각 개인 스스로'에게 집중되는 순간, 제가 그런 주장을 하는 순간, 소위 '사회적 문제의 공공적 대응과 연대'라는 문제제기를 받곤 한답니다. 왈 '영성' 대 '사회운동'의 대립이라고 할까요. '개인적 차원에서의 집중'은 곧 '사회적 모순의 방임 내지는 강화'라는 문제제기에 항상 직면한답니다. 참 난해한 문제제기입니다.

  • 07.11.22 19:44

    개인과 사회, 참 어려운 문제예요. 제 삶은 나름대로 굴곡이 꽤 된답니다. 제가 거주했던 주소만 적어내려도 세 대륙에 열개 정도의 국가이름이 들어갑니다. 요즘 아이때문에 한 집에 벌써 삼년째 살고 있는데 거주라기 보다 이사가 제 삶을 장식합니다. ^^ 뭔가를 찾으려고 지구의 표면을 샅샅이 훑고 다닌 듯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고 보니 제 안에 있지 않더랍니까. 그것을 찾고 보니, 그 이전의 사회활동과 그 이후의 사회활동간에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청소를 해도 질적 내용이 다릅니다. 한 마디를 해도, 이전에는 항상 내적인 불확실성이 따랐습니다.

  • 07.11.22 19:49

    가난하게 살아야지라는 결정도 이전에는 그렇게 살아야 좋은 것이라는 신념으로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그것이 그냥 자연스런 저 자신이기 때문에 가난하게 삽니다. 인지학적으로 보면, 어쩐지 "자유"라는 단어와는 완전히 상치되는 듯한 "진정한 자아에 대한 헌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찾기 위해서 사회를 떠날 필요가 없습니다. 사회활동은 그것대로 자신의 현재 상태에 맞추어서 하되, 자신 안에서 자신을 찾는 일은 내적으로 병행할 수 있습니다.

  • 작성자 07.11.23 01:55

    세 대륙 열개 국가 그리고 가난.. 아, 그건 진정한 노마드로군요. 그에 비하면 확실히 전 정주인입니다만, 가난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는 자본화된 노마디즘은 경멸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저 자신 역시 그 가난에 대한 '내적인 불확실성'이 아직 남아있기에, '진정한 자아에 대한 헌신'이 여전히 두렵습니다. 그래서 아직은 '자유'롭지 않은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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