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입은 왜 다소곳 하게 가리신 건가요?(에스더)" "푸하하하... 들켰네... 순둥 순둥 연출 의도... 나이키 가디건 하나 샀어... 괜찮냐?(나)" "나이키만한 게 없긴 해(에스더)" "금일 출국합니다(재혁)" "엄마는 괘안더라...사진을 누가 찍어 주냐?(명옥)" "빅스비! 오늘 날씨 어때? (인창동 화창하겠으며 최저 기온 2도 최고 기온 17도입니다)" 또 꿈을 꾸었습니다. 예주야! 내 인생은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왕십리 할머니가 90년 철권통치를 하는 바람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선친과 나이지만 다 지나 원망한들 무슨 소용이겠느냐...
-
거두절미하고 엑소더스 하시라! 무섭고 두렵더라도 네 인생은 네 것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 네 맘대로 사시라! 집도 나오고 교회도 나와! 마르크스를 인지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는 말 뜻을 아시나요? 모르긴 해도 자본주의의 수많은 병폐 앞에 직면한 오늘날의 지성인들에게 그의 명저 <자본론>의 뼈 때리는 사유를 빌려 쓰고 싶지 않았겠는가. 오늘날 마르크스를 인지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는 말은 단순히 마르크스의 이론을 따라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
오히려 현대의 사유와 글쓰기 자체가 이미 마르크스를 통과해 형성되었다는 인식에 가깝습니다(공격적 글쓰기 같은). 왜 우리는 마르크스를 ‘의식하지 않고도 이미 그 영향 안에서 글을 쓰는가? ① 세계를 보는 기본 틀이 바뀌었다... 마르크스 이전의 글쓰기는 주로 개인, 도덕, 종교, 형이상학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 이후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현상 뒤에 경제 구조는 무엇인가? 이 생각은 누구의 이익을 대변하는가?
-
이 문화는 권력과 계급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글을 쓸 때조차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의심하는 습관이 이미 내면화되어 있습니다. ② 비판적 글쓰기의 출발점... 현대 글쓰기의 중요한 특징은 "비판성"입니다. 이 흐름은 마르크스의 핵심 개념에서 시작됩니다. 이데올로기 비판/계급 구조 분석/물질적 조건의 우선성, 그래서 오늘날 어떤 글이든 even 신학, 문학, 일상 에세이까지도. 이것은 누구의 말인가? 이 말은 어떤 현실을 숨기고 있는가? 이 질문을 피해 가기 어렵습니다.
-
③ 동의하든 반대하든 ‘대화 상대’다... 흥미로운 점은, 마르크스를 따르지 않는 사람조차도 그와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a.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글 → 이미 마르크스 비판 위에 서 있음 b. 신학적 글 → 가난, 억압, 구조적 죄를 말할 때 마르크스적 문제의식 반영 c. 철학적 글 → 역사·사회 조건을 고려하는 순간 마르크스의 그림자 존재 이렇게 마르크스를 “넘어서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그의 영향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
④ 인간’을 보는 방식 자체의 변화... 마르크스 이후 인간은 더 이상 단순한 영혼이나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인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노동하는 존재/관계 속 존재/구조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 이 관점은 글쓰기에도 깊이 스며 있습니다. “마르크스를 인지하지 않고는 글을 쓸 수 없다"라는 말은 현대의 모든 글쓰기가 이미 구조, 권력, 경제, 역사라는 마르크스적 문제의식을 통과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건 뒤의 구조를 묻고, 신앙을 역사와 현실 속에서 해석하며,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시대를 연결하는 이것 자체가 바로 마르크스를 통과한 글쓰기가 아닐까.
-
<유나의 거리 16회>입니다. “여기까지 한계다. 다 끝났다. 나 혼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 지구 어딘가에 내가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있다. 지금쯤은 완전히 나를 잊었을 것이다... 기록 끝" 카, 맨-트 기가 막힙니다. 다영은 자신 때문에 창만이 잘릴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으로 컴백 홈을 합니다. 그리고 외사랑은 이제 그만하려나 봅니다. 연극의 대사처럼 이제 창만과 다영은 끝일까요? "갈게 내일 보자" "어 누나다!"
-
"아빠! 누나 왔어요" “그동안 별일 없으셨어요(다영)” "어, 너 없어서도 아빠는 잘 지냈다. 너도 그렇고 계팔이고 그렇고 왜 날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 나 가만 놔둬도 힘든 사람이야... 아빠랑 같이 먹으면 밥맛이 없냐... 좋게 얘기 할 때같이 먹어(맘보 아빠)" "미안 한 것과 처남이랑 아무 상관 없어... 처남이랑 창만이랑 친했어? (맘보)" 계팔의 행방을 알길 없는 홍 여사는 애가 타는데 염장 지르는 서방 맘보가 밉습니다. 계팔이 경찰서에 갔다는 말에 창만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러 경찰 서로 갑니다.
-
이 집에 들어오고 나서 경찰서 출입이 잦아진 창만를 경찰도 알아봅니다. "같은 집에 세 들어 삽니다(뭘 알아보고 싶어 오신 거요) 개가 말을 못 하니까요" 계팔이가 몸 빵 하러 갈 때 맡겨둔 개새끼들을 농장 주인 놈이 재다 팔아먹고 튀었다네요. 이놈은 벼룩의 간을 쳐 먹는 놈입니다. 유나는 경찰서 간 김에 찜질방 도난 사건의 범인이 잡혔는지 물어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남수가 만나자고 하면 피하라고 합니다. 뭔 꿍꿍이 속인지 수상합니다. Why?
-
“아, 글쎄 만나지 말라면 만나지 좀 마(유나)“ ”내가 알아서 할게(창만)“ "웬일이니?(집유 2년 받고 나왔어요... 화숙이 언니 대신 제가 태블릿에 다 담아왔어요) 애들 사는 데가 어디야?... 방금 내 정보원한테 전화 왔는데 아직 애들 못 잡았대... 근대 화숙이가 걱정 이네(윤주/유나)" "여보 창만이 왔어(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계팔이 아니라 홍길동이네 홍길동" 신종 유럽 형 거지 계팔의 신세가 처량하게 됐습니다. 언제는 안 처량했고... 하다 하다 이제 노숙자와 박스 싸움까지 하나 봅니다.
-
그것도 실컷 두들겨 맞고 있으니 지 누나가 보면 염장 끓일 일입니다. 유나와 윤주가 구해주었고 계팔이가 서러워서 눈물을 흘리네요. 나는 이 대목에서 왜 불알친구 탁이 생각날까요? 탁아, 잘 사냐? 계팔의 귀가에 다세대 주택 식구들이 반겨줍니다. 처남, 참 절묘하게 산다(맘보) “ 꽃뱀 미선과 시크한 도둑년 유나가 심각해졌습니다. “언니는 가끔 착한 일을 하는 거 같아. 난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쑥스러워서 못 하겠어(유나)” “이년아! 넌 나쁜 일을 많이 해서 착한 일을 할 수 없는 거야(미선)”
-
“나 꽃뱀 아니야 이년아? 민 규 만나고 물뱀 된지 오래됐어... 나 있지...민규가 정말 보고 싶어(미선)“ "옥탑방 언제 철거할 거예요... 한 주 만 미뤄 줘요... 안돼(오늘 밤 동민이 방에서 동민이랑 같이 잘 거예요)" 홍 여사가 자기 자신의 가족사를 창만에게 털어놓았습니다. 21살에 룸살롱 나가서 동생들 키웠다는 얘기, 말썽만 피운 계팔과 늘 일등만 했던 계숙, 근데 그녀가 언니를 부끄러워했다는 계숙이 그래도 보고 싶답니다. 나도 가족들이 나를 보고 싶어 할 때까지 잠수를 탈 생각을 했는데 이제 그만 들어갈까요?
-
"아무래도 낌새가 이상하다... 유나 가 좀 전에 우리 마누라 만나고 갔어... 조심해서 살펴봐(봉 걸레)" "우리 집 사람이 밑 반찬 만들어놓고 간거야... 오이지 묻힌 것도 좀 먹어봐... 근데 수저가 한 게 더 있다... 누구 오기로 했냐? (칠 복)" 칠복이가 계팔과 밥을 먹지 않겠다고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쌔-해졌습니다. 옥탑 방 철거를 어쩌다 보니 창만이 수주를 따냈어요. "팥죽 파는 데가 어디에 있어요(미선)" "금방 다녀올게요(계팔)"
-
"어 미선 씨 동생?(계팔)" 아픈 미선을 위해 팥죽을 사 온 개 팔은 연하 남의 전복죽에 밀려 쫓겨납니다. "만두야! 너랑 나랑 전복죽 보다 더 맛있게 먹자(계팔)" 계팔아, 넌 언제까지 헛물을 켤 거냐? "도끼라고 불러주십시오(닉네임이 꽃 사슴이에요) 밴댕아! 고맙다(장 노인)" 남수가 연애 상담을 위해 양순을 찾아갔지만 양순의 대답은 싸늘합니다. “유나가 그 친구 좋아하나 봐요... 누나가 나서서 정리 좀 해주세요(남수)" "내가 왜 니들 연애 사에 끼어들어(양순)”
2.
엑소더스와 구조 사이에서 나는 나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가? “무섭고 두렵더라도… 엑소더스 하시라!” 이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닙니다. 세대를 관통한 억압 구조에 대한 결별 선언입니다. 여기에는 두 층위가 겹쳐 있습니다. a. 개인적 층위...왕십리 할머니의 철권 통치”라는 가족 권력 구조 b. 존재론적 층위...“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는 자기 선언, 이 지점에서 이미 당신은 카를 마르크스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건을 개인 감정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1) 마르크스를 통과한 글쓰기 — 분노의 구조화
당신의 글은 단순한 회고가 아닙니다. 누가 피해자인가?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가? 이 질서는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 질문 자체가 마르크스 이후의 질문입니다. 당신의 글은 이미 감정 → 구조 → 비판의 경로를 따르고 있습니다 분노가 사유로 승화된 글쓰기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자유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엑소더스 하라→ 과연 떠나면 끝나는가?
-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여전히 구조 속 존재입니다. 가족을 떠나도 사회가 있음/교회를 떠나도 또 다른 공동체가 있음/자유를 선택해도 조건은 남아 있습니다. 탈출은 가능하지만 완전한 무구 조는 존재하지 않는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신의 글이 단순히 비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딸들에게는 “믿는다”고 말합니다. 결혼에 대해서도 “맡긴다”고 합니다. 여기서 당신은 마르크스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구조를 해체하지만 사랑의 방식까지는 충분히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유나의 거리> — 구조 속 인간의 몸부림
유나의 거리의 장면은 당신의 글과 정확히 겹칩니다. 다영의 고백 “나 혼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 이것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라
구조 속에서 소진된 인간의 언어입니다. 계팔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실패하고, 계속 주변으로 밀립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된 인간’의 드라마적 형상입니다. “나도 잠수를 탈까? 이제 그만 들어갈까? 이 질문은 단순한 생활 선택이 아닙니다. 존재의 방향을 묻는 질문입니다(떠남 = 자유인가 남음 = 책임인가)
3) 엑소더스 이후가 더 중요하다
당신의 글은 여기까지 왔습니다. 1. 구조를 인식했다-2. 떠나야 한다고 결단했다-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다음 어떻게 살 것인가? "엑소더스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자유는 탈출이 아니라 어떻게 다시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다" “내 인생은 내 것”이라는 선언은 진짜 자유인가, 아니면 또 다른 구조 속 착각인가? 우리는 정말 떠날 수 있는 존재인가, 아니면 이미 짜인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존재인가?
2026.4.11.sat.앙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