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 영조의 건강법 (3)
오늘도 조선의 제21대 임금인 영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보죠.
장동민 한의사, 연결돼 있습니다.
(전화 연결 - 인사 나누기)
Q1. 영조하면, 비운의 왕자 사도세자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네 맞습니다. 비록 다음번 왕위계승자인 세자 신분이었지만, 아버지 영조의 명으로 인해, 강제로 뒤주 속에 갇혀서 사망한 이가 바로 사도세자인데요, 다른 사람도 아닌 친 어머니가 아들을 죽여 달라고 요청을 했고, 이 요청을 받아 친 아버지인 영조가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으며, 심지어 처가 집안에서도 장인 홍봉한 등이 나서서 적극 가담했을 정도로, 아무도 사도세자를 위해 나선 이가 없었습니다.
딱 한사람 그 당시 세손이었던 어린 정조만 나서서 아버지를 구해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비정한 영조와 신하들은 그러한 세손을 궁에서 내보내고, 한 여름 뙤약볕 밑 조그만 뒤주 속에 건장한 사도세자를 가둬두고, 물 한 모금 밥 한술 주지 않아, 결국 사도세자는 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합니다.
Q2. 한 나라의 다음 대 왕위계승자가
친 아버지의 손에,
그것도 매우 끔찍한 방법으로
사망한다는 것이 충격적인데요.
그 배경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죠?
사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영조는 사실 미천한 신분인 무수리를 친모로 두었기에, 마땅한 지지 기반이 없었습니다. 특히 이복형인 선왕을 죽였다는 ‘경종독살설’에 휘말리면서 재위 기간 동안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고 반란과 역모가 끊이지 않았었는데요, 사실상 영조는 노론의 힘으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이러한 영조의 지지 세력인 노론세력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개혁적 성향의 사도세자가 못마땅했던 그 당시 권력층과 영조가 정적 제거를 했다는 설이 유력한데요, 실제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 등의 대신 들이 앞장서 사도세자의 처형에 한몫을 한 것이 그 증거들이라고 합니다.
Q3. 아, 사도세자의 처가에서
편을 들어준 게 아니라
오히려 나서서 더 공격을 했었군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그 원한을 잊지 않고 있다가 처절한 복수를 하는데요, 외가인 홍 씨 집안을 어머니 혜경궁 홍씨만 빼고 거의 몰살을 시킵니다. 그만큼 홍씨 일가가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역할을 했던 것이지요.
사실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 씨도, 남편의 안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홍씨가 말년에 사도세자의 일대기에 대해 저술한 <한중록>이라는 책을 지은 목적도, 남편인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친정 집안을 보호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실제 내용을 보면, 사도세자가 광증(狂症) 즉 정신병을 앓아 언행이 부적절했기에, 영조가 정당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Q4. <한중록>의 책 내용도
사도세자에게 불리하게 기록이 되어 있었을텐데요.
그렇다면 다른 기록을 참고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맞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을 <임오화변>이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그런데 조선시대의 공식기록인 <왕조실록>에는 겨우 몇 줄의 기사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조가 이 사건이후로 이 일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말라고 금언령을 내렸기 때문에, 아예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요, 예를 들어 ‘뒤주’라는 말도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일물(一物)’ 즉 하나의 물건이라고 지칭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더군다나 왕의 비서실 기록에 해당되는 <승정원일기>에서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모두 삭제되었는데요, 이는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의 간곡한 요청에 의한 것입니다. 결국 이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Q5. 그럼, <한중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증세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사도세자가 처음부터 광증을 앓았던 것은 아니고요, 15세 무렵에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을 할 때부터 그 증세가 나타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가장 심한 것은 ‘의대(衣帶)증’이었는데요,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증상입니다. 한번 옷을 입기 위해 이삼십 벌씩 입어봐야 했었는데요, 이 때문에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맞아 죽기도 했는데, 옷 수발을 들던 애첩 ‘빙애’를 발로 차죽이고 그 사이에 낳았던 자식도 칼로 죽일 뻔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외출 할 때는 사람들이 보인다고 해서, 가마에 지붕과 창문을 다 가리고 다니거나 일반인들을 통행 제한시키기도 했었구요, 자신의 처소를 무덤처럼 꾸미기도 했는데, 땅을 파서 세 칸짜리 집을 짓고 시신 넣는 관처럼 꾸미고 잔디를 깔아 지하방을 만들어 살기도 했답니다.
특히 사소한 이유로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는데요, 자신이 죽인 내관의 머리를 들고 다니는 기행을 보이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Q6. 다른 건 몰라도
함부로 사람을 죽이는 건
왕위를 계승하는데 문제가 좀 있었을 것 같네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사도세자의 친모도 바로 그러한 이유로 아들을 벌해달라고 영조에게 직접 요청을 하고 있는데요, 그 내용을 보면, “세자가 내인 내관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백여 명이오며, 그들에게 불로 지지는 형벌을 가하는 등 차마 눈으로 볼 수 없고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친모인 자신도 몇 번이나 죽이려고 했으며, 영조도 위험하다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영조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요, 세자가 스물네 살 때 왜 자꾸 사람을 죽이냐고 이미 물어봤습니다. 이 때 사도세자가 답하기를, “심화(心火), 즉 마음에 불이 나면 참을 수가 없어 사람을 죽이는데, 닭이나 짐승이라도 죽여야 낫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Q7. 워낙 영조와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사도세자도 울화병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혹시 <왕조실록>기록에도
사도세자의 화병 증상이 나오는지요?
네 있습니다. 영조 31년 4월 28일의 기록을 보면, 어의가 사도세자의 증상과 처방을 보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사도세자는 그 즈음 가슴이 막히고 뛰는 증상이 있었는데,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이런 증세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담탕(溫膽湯)’이라는 처방을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원래 온담탕은 심과 담이 허약해서 깜짝깜짝 잘 놀라고 겁이 많고 잠을 잘 못자는 증상에 사용되는 처방입니다.
또한 영조 38년 5월 22일에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사도세자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내는 증상을 앓았음을 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실제 2007년도에 동경대에서 사도세자가 장인인 홍봉한에게 보냈던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편지 안에도 세자가 영조를 뵙고 나오면 열이 오르고 울증이 극에 달해 답답하니, 의관들 몰래 약을 지어서 보내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Q8. 내용을 들어보니, 화병뿐만 아니라
불안공포증도 있었던 걸로 보이는데요?
네 맞습니다. 사도세자가 사망하기 일 년 전인 영조 37년의 기록들이 심상치가 않은데요. 영조 37년 2월 25일에 신하가 사도세자에게 서류를 가져와 보고하려고 하니, “바람이 싫어 문을 열 수가 없으니 바깥에서 큰 소리로 읽어서 보고하라.”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한 같은 해 3월 27일에는 사도세자가 두통과 치통 복통 등이 심해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다.”라고 말하니, 신하들이 바람에 닿지 않게 잘 가리면 된다고 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미 이 때 사도세자는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던 것 같은데요. 평소 심담이 허약해서 불안공포증을 앓고 있었던 사도세자의 병증이 극한으로 치달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Q9. 사도세자의 광증이 매우 심각했던 것 같은데요.
어릴 때부터 이런 증세가 있었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자는 어릴 때 매우 영특하고 총명해서 사랑받았다고 하는데요, 영조가 첫 번째 아들인 효장세자를 잃은 지 7년 만에, 즉 마흔 두 살의 나이에 얻은 아들이어서 영조가 매우 즐겁고 기뻐했다고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돌이 지나자마자 조선시대 최연소 세자로 책봉되었는데요, “세살인 세자가 효경을 읽고 글을 쓴다.”면서 영조가 기뻐하는 장면이 실록에도 나옵니다.
하지만 부자간의 성격이 워낙 달랐다는 기록들이 있는데요. 학문을 중요시 여기던 영조에 비해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와 잡기를 더 좋아했던 세자는 차츰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고요, 정조가 열 살이 된 이후로 영조의 태도는 더욱 더 혹독해지기 시작해, 칭찬의 수가 급격히 줄고 질책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급기야 대리청정을 하면서부터 불화가 시작되었는데, 차츰 문안인사도 하지 않게 되고, 몰래 궁을 빠져나가 놀다 오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궁으로 비구니와 기생들을 불러 난잡하게 놀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도 장동민 한의사와 함께
영조의 건강법에 대해 살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