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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은선(吳銀善) |
출생 | 1966년 3월 25일 (55세)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1][2] | |
거주지 |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 |
학력 | 중곡초등학교 (졸업) 송곡여자고등학교 (졸업) 수원대학교 (전자계산학 / 학사) |
등반경력 | 여성최초 히말라야 8,000m 14좌완등(?) 세계 7대륙최고봉 완등 |
종교 | 불교 |
오은선
1. 개요.
한국의 여성 산악인. 2010년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산맥과 카라코람 산맥의 8,000m 이상의 봉우리 통칭, 14좌 완등에 성공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산악계에서 10번째인 칸첸중가는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는(혹은 않았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대한산악연맹은 두 차례에 걸친 비공개 청문회 끝에 오은선은 칸첸중가 정상에 선 적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산악연맹의 조사발표 이후 오은선은 "공신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처음 의혹을 제기했던 내 안티들이다"라며 항의하고 있다. 참고로 산악연맹이 소집한 청문회 조사위원들은 국내에서 칸첸중가 정상 등반 경험이 있는 전문산악인들로, 이들에 따르면 청문회에서 오은선은 칸첸중가 정상부의 지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오은선은 "새로운 증거자료를 제출하겠다"라며 호언장담했으나 어떠한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좋게 말하면 등산인, 나쁘게 말하면 아마추어 등반인이란 인상이 강하다. 칸첸중가 등반 의혹이 제기된 이후 인터뷰에서 "앞장서 올라가는 셰르파의 꽁무니만 쳐다보고 올라가는 바람에 길이 기억나질 않는다"라고 발언했는데 이는 셰르파(안내인)에게 전체를 걸쳐 의지한다는 뜻이라서 전문 산악인으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여론에 쐐기를 박았다.[3] 물론 세계의 유명 산들을 무산소 등반으로 올랐으니 생초보나 아마추어란 식으로 부를 순 없지만 원정대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같은 전라북도 출신에 여성 고봉 등반가라는 공통점이 있는 고미영[4]과 벌인 세계 최초 8,000m 이상 14좌 완등 여성 산악인 타이틀 매치에서 벌인 지나친 속도전, 최초 경쟁[5]을 두고 혹자는 알피니즘의 위기라고 얘기한다.
알피니즘은 간단히 말해 등반의 과정을 중시하는 것. 위에 기술한 '무조건 정상 가서 사진만 찍고 후딱 내려오자'는 스타일은 등정주의, 상업등반이라고 전세계에서 까인다. 이미 20세기 중반에 전 세계의 모든 고산 등정이 완료되었다. 이후 해외 산악계는 단독/무산소/겨울 등정 등 신개념의 제시나 신루트의 개척 등 과정에서의 새로움을 추구한다. 특히 신루트의 개척이 가장 높은 성과로 평가받는 추세이다. 한국 산악계도 박영석이나 박정헌 등 신루트에 도전하는 탐험가들이 있고 이러한 분들은 앞서 언급한 등정주의와는 연관이 없다. 현재 한국 산악계의 현실과 위기에 대해서는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불편한 진실 이 기사를 참조할 것. 다만 신루트 개척의 난도로 인해 애초에 일생 단 한 번이라도 성공하는 탐험가 자체가 드물다. 한국에서 신루트를 개척한 사람이 나오지 못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루트에 개척하는 이가 없다'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6] -> 박영석원정대 대원으로 같이 등반할 때 보면 박영석은 늘 셀파와 후배들을 앞세워 등반했다. 정상갈 때도 센 셀파 뒤따라 정상에 다녀오곤 했다.
한편 고미영이나 오은선 양측 다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고미영은 코오롱, 오은선은 블랙야크의 직원이다. 원래 고산 등반은 거액의 자금이 소모되며 스폰서의 지원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들은 소속 회사에서 해마다 거액을 지원받으니 당연히 타이틀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고 한 해에 8,000m 이상 고봉을 4개씩 오르는 말 그대로 미친 짓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내몰렸다. 그 결과가 고미영의 사망과 오은선의 칸첸중가 미등정 논란이다. 오은선은 고미영이 사망한 직후에도 등반에 나서면서 또다시 비난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오은선과 고 고미영은 마지막 안나푸르나는 함께 오르자고 말하는 사이였으며 이런 스폰서와 언론의 과도한 상업성에 의해 굴절되게 그려지고 만다. 오은선과 반대쪽 회사의 스폰을 받는 산악인들이 오은선을 생매장한 것이라는 주장도 산악계에서 나왔다. 마지막 안나푸르나 등반은 오은선이 고 고미영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함께 오른 후에 안전하게 베이스캠프로 다시 되돌아오며 끝이 났다.
1993년 지현옥[7] 등반대장이 구성한, 한국 최초의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참가했다.
하지만 등정 기록을 남기는 데에는 실패했고 4년 뒤인 1997년에서야 가셔브룸을 올라 히말라야 등정 기록을 남긴다. 그런 뒤 약 5년 간은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않았고 2002년에서야 유럽의 엘브르즈를 등반하며 등정 기록을 남긴다.
여성 산악인으로 주목받은 것은 2004년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단독 등정한 후이고 그 전엔 매우 느릿한 페이스인 1년에 한 번 정도 등정 기록을 남겨 오다가 스폰서를 얻은 뒤에야 등정 속도가 올랐기에 초기엔 아마추어 등산인이라고 평했다.
오은선의 라이벌이라고 평가받는 스페인의 여성 산악인, 에두르네 파사반이 오은선이 제시한 칸첸중가의 정상 사진을 두고 공개로 의혹을 제기하면서 시작된다.
또한 에두르네 파사반 이외의 칸첸중가를 등반한 산악인(특히 한국)도 의혹을 제기하여 대한산악연맹은 연맹 차원으로 칸첸중가 등반 의혹을 공식으로 제기하게 된다.
3.1. 의혹의 근거[편집]3.1.1. 부실한 인증[편집]
히말라야 14좌를 목표로 하는 산악인에게 인증만큼 중요한 것은 또 없을 것이다. 평지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스포츠의 기록과는 달리 그 어디에도 객관성이 담보되는 목격자가 존재할 수 없는 고산 지대에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산악인들은 다각도로 촬영한 사진 십수 장과 동영상은 물론이거니와 GPS기기, 깃발 등으로 자신이 정상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아 증거로서의 제기능을 하지 못할 경우엔, 하다못해 자신의 물건을 묻어 놓고 하산하여 다음 등반팀에 의해 인증이 된다거나, 혹은 앞서 다른 팀이 묻어 놓고 온 물건을 가지고 내려오는 방법을 써서라도 (말 그대로 "어떻게든") 인증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것이 산악인의 운명이자 관행이다.
하지만 오은선의 경우 공개한 사진은 단 두 장 뿐이고(이 사진마저도 칸첸중가 정상과는 다른 점이 많아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GPS는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하며 동영상의 경우 셰르파의 조작 실수로 무전기만 확대되어 잘못 찍혔다고 한다. 전술한 것처럼 물건을 묻어 놓고 오거나, 묻혀진 물건을 꺼내온 방식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오은선이 아마추어 등반가이거나 첫 히말라야 14좌 등반이었다면 백 번, 천 번 양보해 이해해줄 수 있다손 치더라도 칸첸중가는 히말라야 14좌 중 오은선의 10번 째로 도전하는 봉우리였으며, 그녀의 첫 번째 등정은 무려 1997년이었다. 칸첸중가에 오를 당시 그녀는 이미 잔뼈 굵은 베테랑 산악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정상 인증에 소홀했다?
또한 고무줄처럼 들쭉날쭉하는 등반 속도 역시 의혹을 받는다.
칸첸중가의 정상으로 통하는 손톱바위는 등산로가 험악하고 강풍이 부는 지역이라, 남성 산악인도 산소통을 이용한 유산소 등반에 5시간에서 7시간이 걸리며 운이 없을 때는 종일 발이 묶여 후퇴하기도 하는 헬게이트다.
오은선이 공개한 등정 기록을 보면, 손톱바위에서 정상까지 3시간 30분이 걸렸다고 나오되는데 유명한 산악인 박영석조차 유산소 등정으로 5시간이 걸린 곳이다.[8]
물론 고산에서는 여성 산악인이 남성 산악인보다 빠르다. 실제 폴란드의 전설적인 여성 산악인인 반다 루트키에비치[9]는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등반하여 크리스토프 비엘리키[10]가 불가능하다 할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반다는 오은선과는 달리 사진[11]을 제시했고 상세하게 정상지형을 묘사하여 등정이 인정되었다.
앞선 항목에서 전술했듯 오은선은 단 두 장의 인증 사진을 남겼는데, 이마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정상 사진에 바위가 찍혀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는데 칸첸중가를 등반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정상에는 바위 더미가 없다고 이구동성으로 증언했고 실제로 바위 더미가 없다.
이에 대해 오은선은 정상에 선 뒤 셰르파가 대장보다 아래에서 위를 향하는 형태로 사진을 찍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다르게 자신이 정상에서 몇 미터 아래 지점에 서서 셰르파가 그보다 위에 서서 자신을 아래로 바라보는 형태로 사진을 찍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팀에서 오은선의 스노고글에 비친 형상을 분석한 결과 사진을 찍은 사람이 피사체(오은선)보다 낮은 지형에 서 있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더군다나 사진을 찍은 셰르파가 얖 옆으로 넓게 펼쳐진 형태의 바위에 기대어 있었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아래 사진과 같은 형태.)
하지만 다수의 산악인들에 따르면 칸첸중가 정상에 저렇게 기댈 만한 지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로써 논란은 더욱 가열되었다. -> 정상주변에 바위 투성이다. 다양한 사진 자료에 바위가 많이 나온다.
오은선이 등반의 인증용으로 준비했다가 분실하였다고 증언한 산악회 깃발이 12일 뒤 칸첸중가를 오르던 김재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잃어버린 깃발 찾은 거야 별 문제가 될 건 없는데 하필이면 깃발의 상태가 김재수의 발언을 빌리면, "네 개의 주먹만한 돌에 눌려 평면으로 펼쳐진 상태로 있던 수원대산악회 깃발을 오은선이 구름에 가려 사라졌다는 손톱바위와 정상 중간 부근에서 발견했다" 란 것이다.
즉, 손톱바위로 진입하기 전의 지역을 정상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혹이 생겨난 것으로, 이 착각설은 대한산악연맹에 의해 열린 제1차 청문회에서 더더욱 증폭된다.
대한산악연맹에 의해 열린 제1차 청문회에서는 오은선이 칸첸중가의 정상으로 가려면 필수로 거치는 손톱바위의 중요한 지형을 모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3.2. 등정 의혹을 대상으로 한 대한산악연맹의 판단[편집]
2010년 8월 26일, 대한산악연맹은 칸첸중가 등정 경험자를 소집하여 오은선을 대상으로 한 청문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엄홍길(2000년 등정), 박영석(1999년), 한왕용(2002년), 김웅식(2001년), 김재수(2009년), 김창호(2010년) 등 6명이 참석했고 개인 문제로 석상에 참가하지 못한 서성호(2010년)는 전화로 참가했다. 그리고 여러 부분을 토의한 결과, '오은선 씨가 지금까지 공개한 칸첸중가 등정 자료를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정상 등정이라 보기 어렵다'고 결론했다. 이에 엄홍길 본인은 자신은 그런 의견 내놓은 적도 없는데 괜히 묶어서 발표하지 말라는 의견을 강연에서 발표했다.
물론 오은선 측의 추가 증빙 자료 제시나 대한산악연맹의 추가 청문회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지만, 과거 황우석 사건 때도 진실보다 국익을 더 중시하면서 황우석을 편들었던 적이 있듯이, 정황 증거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고서 애국주의식 보도를 일삼은 주요한 신문사들과 방송국들도 이번 의혹에 도의적책임을 져야 한다.
반면에 이 문제를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공론화시켰던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은 오은선 등정에서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앞장섰던 정상 등정 경험자 셰르파 옹추와 페마는 제외하고 오은선 뒤에서 따라오던 초보 셰르파의 주장만 방송하면서 오히려 역편향 시비가 휩싸이기도 했다. 더구나 중요 증인이던 그는 결국 홀리 여사에게 제출하겠다던 미등정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말도 계속 바뀌면서 더더욱 신빙성을 떨어드렸다.
홀리 여사는 이 문제를 두고 오은선의 등정을 인정하기 힘들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대한산악연맹은 두 번의 비공개 청문회 끝에 '오은선은 정상에 가지 못했다'라는 결론을 발표했지만, 정작 그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와 청문위원들의 견해는 제시하지 않아서 많은 뒷말을 남겼다. 대한산악연맹 홈페이지에 올라온 발표문은
이게 전부이다. 아무런 구체적 자료가 없다. 엄홍길은 훗날 다른 강연에서 '나는 오은선이 칸첸중가에 오르지 못했다고 한 적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방송이나 다른 언론에서는 셰르파 페마는 다른 등반 팀과 함께 등정 중이었는데 그냥 쉽게 잠적으로 처리해 버린 것도 아쉬우면서 무책임한 점으로 남아있다. -> 김재수씨와 등반 중이었다. 왜 김재수는 굳이 페마를 데리고 등반을 떠났을까? 의문이든다.
스포츠 경기나 기타 국가 간 경쟁 이벤트에 대한 한국 언론의 설레발과 호들갑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계속 진정되고 시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같은 사례가 반복될 수 있다.
2013년 월간 사람과 산 11월호에서 인터뷰하길 2012년 미국 알래스카주의 디날리국립공원에 있는 디날리산 등정이라든지 여전히 산악 활동은 했다고 한다. 더불어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를 준비 중이라고. 물론 이 책자에서 말하길 억울하다고 여전히 하던 소리를 하고 있으며 지인들에게 "그럼 다시 칸첸중가에 올라서 확인시키면 논란은 사라지는 거 아니냐?" 라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속으로도 '그렇지, 그럼 되지'라고도 생각했지만 결국 재도전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인터뷰했다.[13] 이전까지의 등정 도전이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한 것이었는데 논란 후 칸첸중가를 다시 간다면 그때는 독을 품고 가는 길 아니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그 산에서 생존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죽고 나면 그 기록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단, 나를 응원해준 분들께는 지금까지도 너무나 미안하다. 그 많은 빚을 평생 다 어떻게 갚나"라고 말하며 다시 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2014년 1월 TvN '고성국의 빨간 의자'에서는 '자신은 너무나 상처를 받아서 더 이상 등산을 할 수가 없다. 8,000m 봉우리 다시는 올라가지 않겠다'는 눈물의 심경고백을 하였다.
2020년 4월 논문을 썼는데 산악인들의 사적인 내용과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이 있어 논란을 빚었다.기사 -> 자문화기술지는 자신이 속한 문화 속에서 직접 체험한 일을 학문적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사적 내용이 들어갈 수 밖에 없다. 기억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록물과 각종 신문과 잡지에 실린 기사들이 기초 자료다.
4. 해외 등반 기록[편집]4.1. 히말라야 14좌[편집]
1997. 7. 17
가셔브룸(8,035m) - 무산소 등정.
2004. 5. 20
에베레스트(8,848m) - 여성 최초 단독 등정.
2006. 10. 13
시샤팡마(8,046m) - 무산소 등정.
2007. 5. 8
초오유(8,201m) - 무산소, 단독 등정.
2007. 7. 20
K2 (8,611m) - 한국인 여성 최초 등정.
2008. 5. 13
마칼루(8,463m) - 무산소 등정.
2008. 5. 26
로체(8,516m) - 무산소, 단독 등정.
2008. 7. 31
브로드피크(8,047m) - 무산소, 단독 등정.
2008. 10. 12
마나슬루(8,163m) - 무산소 등정.
2009. 5. 6
칸첸중가(8,586m) - 무산소 등정 주장 중.
2010년 8월 26일,
한국 산악회 오은선 등정 선언. 이에 반해 대한산악연맹은 1차례의 청문회를 통해 등정을 하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2009. 5. 21
다울라기리(8,167m) - 무산소 등정.
2009. 7. 10
낭가파르밧(8,126m) - 무산소 등정.
2009. 8. 3
가셔브룸I(8,068m) - 무산소 등정.
2010. 4. 27
안나푸르나(8,091m) - 무산소 등정.
1997년 ~ 2010년 사이에 여성으론 세계 최초로 14좌를 완등했다고 주장했으나, 2010년 7월 무렵, 한국산악회와 반대로 대한산악연맹이 계속 완등 의혹 제기를 하여 현재까지 14 완등 옆에 논란 중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따라서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파사반이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여성으로 인정되고 있다.
2002. 8. 24
유럽 - 엘브르즈(5,642m) 쌍봉.
동봉은 8.23, 서봉은 8월 24일로 기록되었다.
2003. 5. 24
북미 - 매킨리(6,194m).
아시아 여성 최초, 단독 등정 기록.
2004. 1. 9
남미 - 아콩카구아(6,959m)
2004. 5. 20
아시아 - 에베레스트(8,848m)
아시아 여성 최초, 단독 등정 기록
2004. 8.19
아프리카 - 킬리만자로(5,895m)
2004. 11. 12
호주 - 코지어스코(2,230m)
2004. 12. 19
남극 - 빈슨매시프(4,897m)
2006. 12. 3
오세아니아 - 칼스텐츠(4,884m)
[1] #[2]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도 있었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상경했다.[3] 그런데 이점은 파사반도 마찬가지다[4] 2010년 5월 18일 칸첸중가를 올랐다. 그런데 그 후 두달 뒤인 7월 11일 낭가바르파트 등정 후 하산하다 추락사했다.[5] 한 봉우리를 등정한 후 고소 적응이 다 되어있으니 헬기 타고 바로 옆산으로 날아간 후, 짐은 전부 셰르파에게 짊어지워 앞세우고 셰르파가 자일 다 깔아놓으면 본인은 산소통 메고 등정.[6] 당장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남극점, 북극점,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모두 정복)을 이룬 박영석조차 안나푸르나에서 신루트를 개척하다가 실종됐다.[7] 1999년 4월 29일에 안나푸르나 정상에서 하산하던 도중 해발 7,800m 지점에서 실종.[8] 심지어 박영석은 일반인보다 적혈구 숫자가 훨씬 많아 폐활량과 체력이 범인의 수준을 뛰어넘는 괴수였다. 이 부분은 고려해야 할 것이 박영석은 다른 등반자보다 산소통을 많이 사용하였다[9] Wanda Rutkiewicz. 1943~1992. 폴란드의 여성 산악인으로 가셔브룸 3봉 초등, K2 여성 초등자이다. 여성 등반대를 조직하여 가셔브룸, 낭가파르바트를 등반하였다. 8,000m급 8곳을 등반했으며 9번째인 칸첸중가를 등반하다 실종되었다. 칸첸중가에서 사망하지만 않았다면 여성 최초 14좌 달성자는 반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베이 준코, 린 힐, 카트린 데스티벨등 뛰어난 여성 산악인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업적을 남겨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성 산악인으로 꼽힌다.[10] 14좌 5번째 달성자. 에베레스트, 칸첸중가, 로체 동계 초등자이며 브로드피크, 시샤팡마, 다울라기리, 가셔브룸2봉, 낭가파르바트를 단독등반했다. 마칼루, 로체는 최종 캠프에서 단독등반했다. 로체는 단독으로 동계 초등한 것이며 현재까지 동계 등정이 이뤄진 8,000m급 13곳 중 유일한 단독 동계 초등이다.[11] 정상에서 고장난 카메라를 눈밭에 집어던졌는데 우연히 셔터가 눌려서(...) 사진이 찍혔다[12] 이 문제를 처음 제기했던 '박기성' <사람과 산> 전 편집장은 이후 엄홍길을 두고서도 과거에 제기되었던 가셔브룸 2 미등정 의혹을 다시 끄집어냈다. 이 기회에 산악인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던 각종 문제를 다 털고 가려는 의도였다. 이에 엄홍길은 정상 사진도 있고 다 끝난 문제라면서 주장했다. 관련 기사. 실제로 엄홍길은 14좌 완봉 과정에서 시샤팡마와 로체 미등정 의혹이 제기되자 그 두 곳을 다시 오른 적이 있다.[13] 주변 인물도 산악인이겠지만 8,000m의 고봉을 그냥 마음만 먹고 다시 오른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철저한 준비를 하고 가도 생사를 넘나드는 곳인데 심적으로 다시 오른다 생각하기 힘들 수 있다. 또한 하나의 팀으로 가기 때문에 이전에 사고가 없이 무사히 내려왔어도 또다시 오르다가 사고라도 나 팀원이 희생되기라도 한다면 그것도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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