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장에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적에 대해 당시 사람들이 보인 다양한 반응과 해석이 담겨있습니다. 첫 본문에는 예수님의 친 동생들이 예수님께 ‘뜻을 펼치려면 갈릴리에서 활동하지 말고 유대로 올라가라’고 권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을 세속적 출세를 위한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사람 못지않게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는 이야기, 예수님이 정식 교육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글을 아느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유대지도자들이 ‘갈릴리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며 예수님을 체포하려 했다는 이야기 등이 담겨 있습니다. 모두 공관복음서와 내용이 겹치므로 다시 설명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첫 본문은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이야기인데, 1~11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2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으로 들어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3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4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6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보고 고소할 구실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7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8 그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9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돌아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으며,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10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
11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 본문은 원래부터 요한복음의 이 자리에 있었던 글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초기 사본에는 이 본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후대에 삽입된 것입니다. 그래도 매우 예수님다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계명을 당시 유대지도자들과는 다르게 해석했다는 말씀은 여러 번 드렸습니다. 해석을 달리 하신 이유는, 유대지도자들은 율법의 계명을 쓰여진 문자 그대로 절대화했기에 변화된 시대와 사회 환경을 담아내지 못했고, 예수님은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계명이 주어진 근본 의도가 무엇인지를 읽으셨기에 둘 사이에 큰 간격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한계를 돌파하고 사랑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이 이야기도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될 수 없는 내용일 뿐입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문제를 타인이 참견한다는 것 자체가 오늘날에는 명예훼손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문제에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사자들의 배우자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형사소송이 아니라 민사소송만 제기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간통죄라는 것이 있어서 남편이나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배우자의 고소로 감옥에 갈 수도 있었지만, 2015년 2월에 간통죄가 폐지되면서 이 문제도 민사소송의 영역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대는 이천년 전입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이천년 전 그때 사람들보다 훨씬 깨인 현자임에는 틀림없지만, 오늘날과 같은 개방된 의식까지는 갖지 않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천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보통 사람들도 당연히 갖게 된 보편적인 인권의식을 예수께서 갖지 않으신, 또는 갖지 못하신 이유는, 예수님도 어쩔 수 없는 ‘그 시대의 아들’이었기에 시대의 한계를 넘어서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서를 읽을 때 이 점을 인식하고 읽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적 자기결정권에 속한 이런 문제에 대해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오늘날 누군가 말한다면 정신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집단이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는 여전히 있습니다. 어디일까요? 가톨릭교회와 보수정통이라는 개신교회입니다. 교회가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아직도 성서의 문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7장에서 시작된 유대지도자들과의 논쟁이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자, 자기 혼자 하는 증언은 효력이 없다고 유대지도자들이 반박합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하는 말은 나 혼자 하는 말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고 반박하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한 사람의 주장은 법적 효력이 없지만 두 명의 증인이 있으면 법적 효력이 있는데,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법적 효력을 갖는다는 논리가 되겠습니다.
계속되는 논쟁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고 반대만 일삼는 그들 유대지도자들에게 ‘악마의 자손’이라고 독설을 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죽지 않는다고 말하니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위대하냐?’고 묻는 말에는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은 제자들에게는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그 안에 머물라’고 당부하시면서 ‘그러면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긴 논쟁이 실제 예수님과 유대지도자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논쟁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현대 신학자들은 말합니다. 현대 신학자들 중에는, 요한복음에는 예수께서 실제로 하신 말씀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본문은 요한공동체 지도자들의 신학이 반영된 본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