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음악
김기원 지음, 《숲이 들려준 이야기》, 효형출판, 2004.
류인혜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서가를 다 비워내고 닦아서 책을 다시 꽂았다. 한 달여의 기간이 걸린 작업인데, 흩어져 있던 나무에 관한 책을 가지런히 꽂아 쉽게 찾을 수 있게는 되었다. 읽었어도 그 내용이 생소한 것은 건성으로 지나쳤기 때문이다. 다시 읽어보려고 작정한 책을 펼친다.
《숲이 들려준 이야기》에는 ‘신화와 예술로 만나는 숲의 세계’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저자 김기원 선생께서 15년 전, 2004년에 발간하여 보내주신 책이다. 신화와 예술의 각 분야를 나무와 관련시켜 연구한 내용이다. 검색을 해보니 지금은 절판이 되었다고 나온다. 차례 중에 음악에 관한 부분을 옮겨본다.
나무는 악기 숲은 콘서트홀
숲이 부르는 노래
소리와 악기의 고향
숲으로 간 음악가들
숲과 한 몸이 된 베토벤 | 숲을 찬미한 낭만주의자 슈베르트 |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빈 숲속 이야기 |
핀란드의 민족 음악가 시벨리우스 | <숲의 노래>로 예술 생명을 연장한 쇼스타코비치 | 황병기의 가야금이 노래한 숲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조금 어렵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는 물론 핀란드의 숲과 호수, 전설을 모티브로 한 음악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은 시벨리우스, 그리고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 선생도 좋아하는 작곡가이다.
그분들은 숲이 주는 은혜로움을 만끽하며 지냈나보다. 그래서 나무를 향한 모든 정서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생활하면서 저절로 스며든 감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무와 숲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그들의 음악을 즐겨들었던 이유가 분명해진다. 책의 내용 중에서 베토벤에 관한 부분을 정리해 보았다.
베토벤은 스물대여섯 살에 청각 장애를 갖기 시작하여 서른이 되던 1800년부터는 아주 심각한 정도에 이르렀다. 의사의 간곡한 권유로 그해 여름 빈 근교의 산촌 마을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가게 된다. 거의 매일 빈숲을 찾아 산책을 즐긴 베토벤은 울창한 숲의 맑은 기운으로 건강이 차츰 회복되어 다시 창작을 시작했다. 빈숲에서 음악적 영감을 받아 1808년에 완성된 교향곡 제6번 <전원>은 그가 지냈던 산촌이 직접적인 무대가 되어 시골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자주 거닐었던 큰 나무들이 서 있는 길은 ‘베토벤의 길’이 되어 베토벤강(Beethowengang)이라 이름 붙였고 그의 흉상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했던 곳이 오스트리아의 빈이다. 빈은 유럽대륙의 중앙에 위치한다. 도나우 강이 중앙에 흐르고 시의 안팎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빈숲이 있다. 비너발트(Wienerwald)라고 부른 그곳은 숲뿐만 아니라 산림과 마을을 포함한 넓은 지대로 중세시대에 황실과 귀족들의 소유였다. 나름대로 관리가 되어 야생동물이 보호되고 도벌이나 연료 채취가 불가능했다. 나무가 무성한 그 숲을 분별 있는 소유주, 통치자들이 시에 기부하였기에 일반인들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음악가와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자연과 숲에서 얻은 악상으로 불후의 명곡을 작곡한 예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바로크 시대의 비발디에서부터 하이든, 베토벤, 슈트라우스, 레스피기, 쇼스타코비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음악가들이 숲과의 교감을 통해서 얻은 영감을 음악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들은 때로 자연 전체를, 혹은 특정한 산이나 숲은, 또는 한 그루의 나무나 한 포기의 풀을 통해 얻은 악상을 주제나 모티브로 삼아 교향곡과 교향시, 오페라, 가곡 등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여러 형식에 맞춰 작곡했습니다. - 93쪽
《숲이 들려준 이야기》를 읽으며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핀란드 음악가 얀 시벨리우스에 관한 내용이다. 1993년에 발간된 필자의 첫 번째 수필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필 <해후>에 시벨리우스에 대한 내용이 있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5번>과 교향시 <핀란디아>를 되풀이해서 점심때까지 들었다. 참으로 편안하게 지낸 하루다. 좋은 친구를 만나 깊이 마음을 나누고 난 느낌이다.
그의 음악은 반항의 미학이다. 베토벤이 주관적인 자아 속에서 반항했다면 그는 외세, 즉 객관적인 것에 반항했다. 양심에 집중함으로써 자유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이 양심을 철저히 따라가는 생활은 그만큼 내면의 순수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의식의 자유뿐만 아니라 억압되어 있는 조국 핀란드의 자유를 되찾기 위한 정신적 조건을 구축하기 위해 작품을 썼다. 감성적인 예술혼을 불타는 애국심으로 지향해 건강한 저항운동을 했다.
그의 음악적 성공은 자아를 죽이고 조국에 대한 애정을 극대화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가장 친근하게 접근되어 있었던 소재들, 핀란드의 역사와 자연과 민족성 그리고 신화까지도 중요한 모티브로 음악에 도입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폭정에 오랫동안 지배를 당해온 민족의 깊은 우수가 가장 지성적인 음률로 표현되어 민족의 자존심을 지탱해 주었다. 음악은 사람의 감성 깊은 곳까지 미칠 수가 있기에 지배당하는 치욕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시벨리우스를 국민파음악의 거장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1925년 시벨리우스는 미국 뉴욕심포니로부터 요청을 받아 작품112번 <타피올라>를 작곡하게 된다. 이미 핀란드의 신화·역사·자연, 특히 민족적 서사시 <칼레발라>에서 영감을 받아 〈포횰라의 딸〉, 〈루온노타르〉 등을 포함한 많은 교향시를 작곡했지만 <타피올라>는 그 모든 것의 조화를 완벽하게 이뤄낸 작품이다.
드디어 궁금해서 찾고 싶었던 나무의 이름이 들어간 곡이 나온다. 시벨리우스가 작곡한 많은 곡 중 작품75번은 다섯 개의 소품으로 구성된 피아노곡으로, 각각의 곡에 모두 나무이름이 붙어 있다. <마가목 꽃이 필 때>, <고독한 소나무>, <사시나무>, <자작나무>, <전나무> 등이다. 피아노 소품 중에서 유명한 곡이라는데 왜 들어보지 못했을까.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즐겨 듣던 수십 년 전에는 그 곡의 음반이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마가목 꽃이 필 때>를 설명한 글을 옮겨온다.
<마가목 꽃이 필 때>는 부드럽고, 때때로 슬프기도 한데 진지한 핀란드 풍의 감정을 쇼팽의 분위기와 잘 융합시킨 작품입니다. 마가목은 유럽 지역 어느 곳을 가더라도 숲이나 도시의 공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꽃은 오월에서 유월에 걸쳐 하얀색으로 핍니다. 가을에 나뭇가지가 축 늘어지도록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은 정말 장관을 이룹니다. - 130~131쪽
마가목은 울릉도 나무를 이야기할 때, 조금 언급했다. 울릉도에 간 것이 칠월 초순이다. 숙소 정원의 마가목에 붉은 열매가 달렸다고 사진을 올렸지만 무더기로 피는 하얀 꽃도, 나뭇가지가 늘어지도록 달린다는 빨간 열매도 보지 못했다. 나무에 대한 궁금증보다 부드럽고, 때때로 슬프기도 하다는 시벨리우스의 피아노곡을 듣고 싶다. 연달아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를 들으면 도입부의 비장함이 남은 삶에 대한 채찍이 될 것이다.
류인혜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수필집: 《풀처럼 이슬처럼》, 《움직이는 미술관》, 《순환》.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시집: 《은총》. 나무수필집: 《나무이야기》, 《나무에게 묻는 말》.
인문서: 《아름다운 책–류인혜의 책읽기》. 8인 수필집: 《뿌리는 내리는 사람들》
수상: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