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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면 문화유산
장기면은 포항시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경주시 감포읍과 경계를 하고 있고, 해안과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옛날부터 왜구들의 침입이 잦았으나, 필사 항전의 의지로 저항해 지켜온 충효의 고장이며 관련된문화유적으로 장기읍성, 뇌성산성, 척화비 등이 후손들에게 많은 가르침과 본보기가 되고 있으며, 또한 선비의 고장으로 조선시대 석학인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 선생으로부터 질 높은 학문을 전수 받은 흔적들로 향교, 서원,사적비와 충효관 등이 있어 젊은이들에게 충효를 가르치는 산교육장이 되는 곳이다.
[장기면의 연혁]
* 신라초기 - 지답현(只沓縣).
* 통일신라시대 - 경덕왕 16년(757) 기립현으로 개명, 의창군(義昌郡)의영현이 됨.
* 고려시대 - 태조 13년(930)에 장기현으로 개명, 현종 9년(1018) 경주부에 내속.
* 조선시대 - 장기현[縣監:종6품]으로 경주부(慶州府)의 영현.
- 1895년 장기현이 장기군으로 개칭되어 동채부(東萊府)에 속함,3면 49리 관할.
- 1896년 : 13도제(道制)실시로 장기군(長?郡)이 경상북도(41군)의 관할이 됨.
* 대한민국시대 - 1991년12월지행면(只杏面)을 장기면(長?面)으로 면명(面名)을 바르게 정정.
- 1994년 10월 현재 : 법정리 23, 행정리33.
[장기면의 역사]
장기는 지답현(只沓縣)으로 출발,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기립현으로 개명되었다가 고려조 현종 9년(1018)부터 장기현으로 불렀다. 1011년 장기성을 쌓고 1290년 군량.마초를 저장했으며 세종 21년(1439)에는 성을 다시 쌓고 수직군(水直軍)이 주둔하는 등 장기는 흥해, 연일, 청하와 함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점철된 포항을 대표하는 역사의 고장이다. 또 현재의 구룡포읍과 호미곶면을 포괄했던 포항역사의 뿌리와 같은 고장이다. 장기는 조선조의 대표적 유배지(流配地)로 당대의 실세 정객들이 유배생활을 하며 중앙의 고급
문화와 최고수준의 학문(유학)을 유포했다. 특히 유교의 대가인 송시열, 실학파의 태두인 정약용 등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역 선비들을 교육하여 유학의 고장으로 변화시켰다. 송시열을 기리는 죽림서원(竹林書院) 등이 세워지는 등 동일지역 내에서 가장 많은 서원이 운영되는 등 장기는 그야말로 최고수준의 유학이 꽃을 피운 포항정신문화의 본산이 아닐 수 없다. 장기는 신라 때부터 국방의 일익을 담당한 군사기지로 그 역할을 다했던 충절의 고장이다. 고려조 현종 때 동여진)의 침공을 격퇴했고, 조선조 태조5년(1396)에는 침입한 왜구를 괴멸시켰다.
세종은 모포에 병선 8척과 병사 6백여 명을 주둔시켰으며 종4품 벼슬인 수군만호(水軍萬戶)를 두었다. 현감이 종6품임을 감안할 때 상당한 고위직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들이 소봉대 앞바다에서 왜적을 물리치는 등 역내에만 6개소의 봉수대가 있었던 국방의 전진기지였다. 이렇게 장기는 외침에 결사 항전했던 충절의 고장으로 호국의 견학지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과거 장기를 방문하는 시인묵객들은 반드시 ‘소봉대’를 찾았다고 한다. 이렇듯 장기는 수려한 해안선과 천혜의 절경, 장기읍성·뇌성산성·척화비 등 수많은 문화유적과 풍성한 먹을거리를 지닌 포항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꼽힌다. 특히 현내들 하단의 독산과 장기천 하구의 날물치, 그 위에 자생하는 소나무, 그 위로 떠오르는 일출, 장기읍성 조현루 유허지에서 보는 일출 광경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영감바위와 할매바위의 전설도 흥미롭다. 또한 친환경 농산물과 청정해안에서 건져 올린 갖가지 해산물이 있고, 장기산딸기는 대표적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높다.
[장기면의 대표적인 문화유적지]
1. 장기읍성(사적 제386호):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 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말한다. 고려때 처음 이 성을 쌓았는데 동쪽으로 왜적을 막고 북쪽으로는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현종2년(1011) 당시에는 흙으로 성을 쌓았으나, 조선시대에 돌로 다시 쌓았다 한다.
성의 형태는 타원형으로 둘레가 1440m이며 3개의 성문과 문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작은 성인 옹성, 성벽 바깥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서 만든 치성을 갖추고 있다.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인 음마지(飮馬池)가 있다. 성 안쪽에는 교육기관이었던 장기향교와 관청이었던 동헌 터가 남아 있는데 동헌은 현재 면사무소 안으로 옮겨 보호하고 있다. 산꼭대기에 있으면서 읍을 다스리는 기능도 갖추고 있는 장기읍성은 읍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2. 장기향교(문화재자료 제327호):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장기향교는 조선 태종5년(1405)에 처음 지었으나, 임진외란때 불타 없어지자 선조33년(1600)에 다시 지었다. 정조 9년(1785)에 마현동으로 옮겨지었고, 1931년 읍성 내에 있던 구객관을 수리. 위패를 모셔 지금의 향교로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 서문경. 서극인. 이대임. 이눌 등이 향교에 모시고 있던 위패를 용암석굴에 옮겨 놓아 위패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향교를 옮겨 지을때 덕계 임재화가 자기 집터를 내놓아 재건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교육 기능을 수행하는 강당인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그의 제자들과 중국, 우리나라의 성현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책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3. 장기척화비(문화재자료 제224호):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더욱 강력히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의 중요 도로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습이며, 비몸의 네 모서리와 윗변의 양끝을 단정히 다듬어 놓았다. 앞면에는 비문을 새겨 두었는데 내용에는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할 수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는 강한 어투의 경고를 적고 있다.
고종8년(1871) 신미양요 이후 같은 해에 일제히 세운 것으로, 고종19년(1882)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되면서 대부분의 척화비들은 철거되고, 몇 기의 비들만이 남아 역사의 한 부분을 전해주고 있다. 이 대원군척화비(大院君斥和碑)의 원래 위치는 장기읍성내에 있었던 것을 1990. 12. 1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이설(移設)하여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4. 고석사: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 장기면 방산리(芳山里) 망해산 아래에 있는 사찰이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때 경주에 있던 궁전 동쪽에서 세 줄기의 서광이 3일간 계속하여 비치므로, 그 빛의 발원지를 찾게 하였더니 망해산 아래 고석사 바위에서 나오는 빛이었다 한다. 왕이 태사관을 시켜 점을 치게 하니 그 바위를 다듬어 부처를 만들고 절을 지으면 길(吉)하다고 하므로 분황사 주지 혜능을 시켜 바위를 깎아 불상을 만들게 하니 지금의 마애 미륵 의좌상(통일신라)이 만들어 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약사 여래불로 불리었으나 몇 년 전에 수리되기 전의 불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작업을 한 결과 우리나라에 3번째로 발견된 의자에 앉아있는 형태의 아주 귀한 형태의 석불로 동국대 미술사학을 하시는 문명대교수는 보물급 이상의 석불로 평가를 하고 있다. 이 석불을 봉안한 법당 보광전(普光殿)은 주심포(柱心包) 집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지었다. 이 전설 이외에는 정확한 연혁이나 사적을 알 수 없다.
5. 석남사지(石南寺址)의 남파대사비석(南坡大師碑石): 포항지역에서 출생하였거나 활동을 하신 큰 스님들을 보면, 청하 보경사 주지를 지내신 원진국사, 고려충열왕 때 흥해에서 출생하여 국사의 자리에 까지 오르신 진각국사 배천희, 고려 우왕때 청하현 오두촌에서 태어나신 오암대사, 조선 영조 때 장기에서 태어나신 남파대사를 들 수 있겠다. 특히, 남파대사의 비석은 현재 장기면 방산리 묘봉산 자락에 있는 석남사지에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 학문과 서예에 일가를 이룬 계오라는 스님이 비문을 짓고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남파대사의 속성은 월성 이씨, 휘(諱)는 화묵, 자(子)는 자은(自隱), 호는 남파(南坡)로 조선조 영조 경신년에 장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머니는 허(許)씨다. 남파대사는 조선조 때 선(禪)?교(敎) 양종을 두루 섭렵한 화엄경의 조종으로 일컬어질 정도의 고승이었다. 남파대사는 만년에 향리인 석남사에 돌아와 체류하다. 순조 정축년에 세상을 뜨니 향년 78세로 입적하였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남파대사비의 중요성은 남파대사의 유일한 옛 비석이라는 것과 함께 비문의 글씨 또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는 것에 있다. 남파대사의 비석 내용을 짓고 쓰신 분은 조선시대 명필로 이름을 날린 계오라는 스님이다. 이분의 내력은 1773년(영조49년)~1849(헌종15년). 벽암문파에 속하는 승려로 속성은 안동권씨이다. 자는 붕거(鵬擧)이고 호는 월하(月荷)이다. 아버지는 모현(募賢)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11세에 어버이의 뜻에 따라 출가하여 팔공산에서 월암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뒤 침허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우기(祐祈)의 법을 이었다. 20세에 당을 열어 학인을 지도하였고,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필체나 시문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높이170㎝, 폭 80㎝의 화강암인 남파대사비는 현재 포항시 남구 장기면 괴정마을(방산2리) 서쪽 산골짜기(묘봉산 자락)에 있다. 일부 비문이 떨어져 나가는등 200년 세월의 온갖 풍상 속에 석남사 옛 절터 잡초 속에 홀로 서 있던 것을 지난 2005년 11월 포항시에서 비각을 세웠다.
6. 모포줄(중요민속자료 제187호): 줄다리기 때 사용되는 줄이다. 모포리에서는 오랫동안 줄다리기 행사가 전해지는데 이때 사용되는 모포줄은 단순한 줄이 아닌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지고 있다. 뇌성산 아래 골매기당에 있으며, 줄은 수호신이자 신체(神體)로서 할배신과 할매신을 의미한다. 마을에서는 풍요와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정초에 당제를 지내고, 음력8월 16일에는 골매기당의 줄을 꺼내어 줄다리기를 하는데 이기는 마을에 풍년이 든다고 한다. 줄다리기는 동서 두 패로 편이 나뉘어 진행된다. 바다 쪽에 있는 마을들이 동편이 되고 산 쪽에 있는 마을들이 서편이 된다. 이 때 사용되는 줄은 맞물리는 부분의 올가미모양 고리가 큰 것이 암줄이고 작은 것이 숫줄로 동편은 암줄이고, 서편은 숫줄이다. 놀이가 끝난 뒤 줄은 다시 골매기당에 모셔진다. 당 내부의 마루바닥 위에 암줄을 또아리 틀 듯 둥굴게 말아놓고 그 위에 숫줄을 올려 놓는데 할배신과 할매신의 교합상태를 보이는 듯하다. 그 모습대로 골매기신으로 모셔지다가 1년에 한 번씩 줄다리기 줄로 이용되는 것이다. 줄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볏짚에 칡넝쿨이나 피나무 껍질을 혼합하여 만드는데 이 모포줄의 제작시기는 추정하기 어려우나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보통 줄다리기가 끝난 줄은 버려지거나 태워지는데 이곳 모포리에서는 신앙대상물로 모셔두는게 특이하고 다양한 민간신앙의 대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7. 광남서원(廣南書院): 조선 단종 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1453년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황보인과 그의 두 아들(錫, 欽)을 제향(祭享)하는 곳이다. 황보인(1387-1453)은 호가 지봉(芝峯)으로 조선 태종 14년 과거에 급제하여 세종14년(1414)에 병조판서가 되었고, 1440년에 평안?함길도 관찰사가 되어 약 10년간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하였다. 문종 2년에 영의정이 되고, 중종이 죽은 후 단종을 보좌하다가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살해되었다. 이 때 두 아들도 함께 화를 입었는데, 숙종때 복관(復官)되었다. 현재 서원이 있는 이 마을에는 후손 영천황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단양(丹良)의 비(婢)
계유정난이 일어난 단종 1년(1453년 10월)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기위하여 여러 고명(顧命) 대신을 척살하는 과정에 먼저 김종서와 그 아들을 척살하고 이어 황보인의 장자와 차자 그리고 장성한 두 손자까지 모두 다섯 명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단양은 황보인의 젖먹이 손자 황보단을 물동이에 숨겨 머리에 이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800여리를 걸어 황보인의 사위 윤당이 살고 있던 경북 봉화 닭실마을까지 갔으나 삼족까지 멸하는 때라 그곳에 있을수 없어 노자를 얻어가지고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치다 더 갈 곳이 없는 동해안 끝마을인 대보 짚신골에서 친자식처럼 단을 키웠다. 단이 성인이 된 뒤에 집안에 대한 슬픈 내력을 말해주었다. 4대를 이어오며 은둔 생활을 하였다. 단의 증손 황보억은 성동리 뇌성산 뒷자락으로 이주 해 와 세거지를 이루었고 이곳에 숨어산 지 290년만인 숙종 때에 와서야 누명이 풀렸다. 황보인과 그의 두아들(석, 흠)은 관직을 회복하였고, 황보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도 하사받았다.
가문의 명예가 회복될 무렵 충비 단양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서원 뒤뜰 단양의 비를세웠다. 신분을 엄격히 가리던 조선시대 때, 천한 노비의 은공에 감사하여 양반들이 세웠다는 단양의 비는 문화재적 가치를 넘어 교훈적 가치가 더 크다.
[장기면과 관련된 역사 속의 인물들]
1. 우암 송시열 : 우암 송시열 선생은 조선조 숙종 원년(1675) 윤 5월 장기현으로 와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숙종5년(1679) 4월10일에 자신이 머물던 사관안에 홀연히 자생한 느티나무를 베어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 죽교에 올라 거제도로 떠났다. 우암이 머물던 곳의 집 주인이었던 오도전은 우암에게 수학하여 향교의 훈장이 되었고 서유원 역시 끝까지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여 훈도를 받았으며 장기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은행나무 또한 우암이 심었다고 알려져 있다. 우암이 장기를 떠난 후 29년 되는 해 장기에 살고 있던 오도종, 이석증, 황보 헌,이동철, 한시유 등이 죽림서원을 창건하여 배향했다. 장기인들은 우암을 통하여 유학의 진수와 중앙정계의 동향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접할 기회를 가졌고, 아울러 궁벽한 해곡(海曲)이 예절을 숭상하는 유향(儒鄕)이 되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우암은 장기에서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고 많은 량의 시문(詩文)도 창작했다.
2. 다산 정약용 : 다산은 1801년 신유년의 천주교도 박해사건으로 그해 3월 9일에 이곳 장기 고을 마현으로 유배왔다가 사위인 황사영이 작성한 백서사건이 발생하면서 관련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에 서울로 다시 압송되었으니, 7개월간 이곳에 머물렀던 셈이다. 다산은 이곳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삶의 모습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형태를 글로써 남겼으니. 부옹정가, 기성잡시 27수, 장기농가십장, 아가사, 해랑행, 오적어행, 타맥행 등 130여수가 그것이다. 전하는 시작들은 토속적이고도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도 은유적이다. 그 밖에도 <이이술>, <기해방례변>등의 서책도 장기에서 저술하였으나 의금부로의 압송과정에 유실되어 없어졌으니 안타깝기가 그지 없다. 시대적 어려움을 떨쳐낼 사상가로서, 바름을 실천하는 표상적 지식인으로서 현실참여와 서정을 적절히 표현해내는 문학가로서 살다간 다산의 혼백이 장기에 남아 있다.
3. 장헌문(蔣憲文) 의병대장 : 장헌문의 자는 무장(武章), 호는 뇌헌(磊軒), 본관은 아산이다.
1870년 5월 9일 장기군 서면 죽곡리(현 죽정리 죽실마을)에서 태어났다.1895년(고종 32년)의 민비시해(閔妃弑害)와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봉기하자, 1896년 영일장기에서 1차 거의(擧義), 항일투쟁을 개시하였다. 그 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 국권을 침탈함을 보고, 김재홍?김복선 등과 함께 재기를 결의하고, 이듬해 5월 300여명의 의병을 모집, 그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그가 이끄는 ‘장기의진’은 주로 영일군내의 죽장,흥해,청하,장기, 경주군 등지에서 활약함으로써 부근의 정환직(鄭煥直)?신돌석(申乭石)의 병진과 협공을 이루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전쟁터에서 많은 병사를 잃고 1908년 5월 7일 총상을 입고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된 곳은 장기군 내남면 공동(公洞)이란 곳이다.
[기타 사료]
태봉산(胎封山) 황인 : 포항시 남구 장기면 죽정리(竹井里)에 있는 태봉산이다. 앞에 있는 것은 안태봉(혹은 암태봉)이고 건너편 것은 바깥태봉(혹은 숫태봉)이다. 정상에 2단으로 돌을 원형으로 쌓아 놓았는데, 위의것은 지름 2m 50㎝, 높이 60㎝이고, 아랫것은 지름 7m, 높이 30㎝로 바닥은 자연석을 고르게 깔아 놓았다. 어찌보면 죽장면 두마(竹長面 斗麻)에 있는 천제단(天祭壇)과 흡사하나 크기가 작고 형태도 천제단과는 차이가 난다. 신라시대 왕자의 태(胎)를 묻었다고 한다.
영일읍지(迎日邑誌)에는 “면(面)에서 서쪽10리 지점에 있다.신라(新羅)시대 왕자의 태를 이곳에 봉하였기 때문에 태봉이라 했다. 차부현(嗟夫峴), 일명 조항령(鳥項嶺)이라 하는데 차부현, 조항령 두 산(山)은 우뚝 마주 보고 있다. 다만 웅장하고 위엄이 있으나, 산 자체가 조치해서 태봉산에는 미치지 못한다.” 라고 되어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지지(地誌)영일군편(迎日郡篇)에는 “군(郡)의 서쪽 10리에 있다.신라때 왕자의 태(胎)를 여기 봉했으므로 태봉(胎封)이라 이름하였다.
” 일월향지(日月鄕誌)에는 “지행면(只杏面) 대곡리(大谷里) 소재로 해발 100미(米)의 고원지대다. 옛날 신라시대에 왕자(王子)의 산태(産胎)를 안치하였다 하여 태봉산이라 하였고, 신라시대에는 잡인 출입엄금(雜人出入嚴禁)이었다. 하는데 차부현 또는 조항령이라 한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산 정상이 도굴 흔적이 뚜렷하고 주변에는 석실(石室)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장대석이나 큰돌들이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다. 이곳에 슬픈재와 울음골에 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는데, 신라시대 왕자의 태를 태우러 이곳에 왔다가 안태봉과 조항산 사이에 습기와 물이 많이 있어 태를 태우지 못하고 슬픔맘으로 돌아 갔다고 하여 슬픈재라 불리고 있고, 바깥태봉 쪽으로 고개를 넘어 가다가 계곡에서 통곡을 하였다 하여 그 계곡을 울음골이라 불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