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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네티즌본부 원문보기 글쓴이: BenHur
내가 김석원 회장을 처음 만나게 된 시기는 아마 1972-3 년경으로 기억이 되는데 그때 김 회장은 미국에서 공부를 끝내고 구릅 경영자로서 업무 파악할 단계였을 것입니다. 워낙 스키를 좋아하는 분이였지요, 그러나 환경과 시설이 좋은 미국과 달리 한국 땅에는 시설을 갖춘 스키장이라고는 없었답니다.
강원도 평창군 횡계리 작은 마을을 가운데 두고 동쪽으로는 지르매 슬로프, 북쪽으로는 오스토리 산장, 그리고 해병스키부대 막사가 있는 내차항 슬로프가 전부였답니다. 그것도 리프트 시설이 없어 지르매 슬로프는 걸어서 올라가기 때문에 부지런히 타면 오전에 3-4번 정도는 탈수가 있는데 다리가 뻐근하면서 근육통이 가끔 생기곤 했었지요.
이렇게 한반도 안에 스키장이 없는 당시에 상황을 미리 파악한 김 석원회장은 즉시 발왕산 일대를 L -19으로 비행 정찰한 후 스키장 건설에 따른 계획에 들어갔고 평창군 용산리 일대의 산을 매입하였으며 유국개발(유창건설)에서 용평스키장을 만들었는데, 먼저 엘로 라인을 설치했고 핑크 레드 국방 실버 순으로 설치하면서 리프트에 맞추어 숙박 시설도 함께 건축하였던 것입니다.(공사완료 후 유창건설이 쌍용건설로)
사실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들의 겨울 체력향상에 이바지 하신 분이 있다면 바로 쌍용구릅에 김석원 회장이라고 나는 힘주어 말합니다.
당시에 스키장 총책인 김동백 부장 밑에서 김강우 동지는 용평 한가운데 넓은 평지를 만들기 위해 앞을 가로 막고 있는 큰 산을 불우도져로 날려 보낸 집념의 사나이였답니다. 그는 부지런하고 열심히 근무한 결과 김 회장이 스키장 총책으로 위임하였으며 외국에 스키장들을 한국형에 맞도록 만든 실제 인물이기에 월드컵 스키대회를 개최하여 스키분야에 볼품없었던 코리아를 세계 스키 인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숨은 공로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 용평 못가서 무슨 스키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윤 종수 동지도 횡계리에서 자라나 내가 수색대장 당시 소대장으로 함께 근무한 수색대원으로 한국 스키 발전에 숨은 공로자였지요. 그의 형은 윤종림, 한국 노르딕 국가 대표선수였답니다.
사실인즉 스키를 가르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리프트입니다. 스키는 리프트로 많이 타는 사람들이 기술이 좋아지지 실재 타지 않고 논리적으로, 즉 머리로 타는 사람은 절대로 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은 땅거미가 지기를 고대하면서 하루를 지겹게 보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밤만 되면 대관령 산장, 바리악 산장, 오스토리 산장, 지르매 산장 모닥불 앞에서 한잔 엎지르면서 입으로 스키 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사람들끼리 모여서 고스톱을 하는 방키, 끼리끼리 한잔 마시는 술키, 얼큰하게 취하면 양복(兩腹) 맞추려고 찾아가는 디스코텍에 춤키. 그러다 보면 서로 눈이 맞아 엎어져 타는 스키인 들이 많았답니다.
일본 혹가이도는 눈 설량이 많은 곳이기에 기동성이 없다보니 가정에 모여서 술 마시고 도박하는 것이 그들의 낙이였지요. 또 기나 긴 겨울밤을 보내다보니 자연히 자식들이 많아지면서 생활에 궁핍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할 뿐만 아니라 평균 키와 몸무게가 중학교 학생정도였고 기관지염환자들이 많았다는 사실이 그들의 역사에서 나타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 년 전 국민 생활 정서에 심각성을 안 정부에서는 국민 체력 향상을 위하여 제일 먼저 스키를 무료로 배급하고 스키장 개발에 박차를 기하면서 스키학교를 설립하여 국민들로 하여금 스키의 필요성을 실전 교육하므로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향상되어가다 보니 세계에서 수명이 가장 긴 나라가 되지 않았나 싶으며 일본에 스키 학교가 무려 600여 개나 된다고 합니다.
이 글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당시 한국 방문 중에 있는 혹가이도 합본스키학교 교장인 도끼로이마까라상인지 깐 이마 또까상인지 이름은 기억이 없지만 밤늦게까지 한잔하면서 들었던 이야깁니다.
이글을 쓰는 나는 1969년부터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에 스키타려고 들랑날랑하던 사람이라 거짓 없이 말합니다만 대관령 일대가 바로 가난하고 초라한 마을이었습니다.
횡계리를 제외한 인접 동네는 일체 전기가 없었고 횡계 다방만이 TV가 있을 정도였고, 초등학교 학생들 중에 생활이 나은 학생은 검정 장화로 그렇지 못한 학생은 검정 통고무신을 신고 다니므로 동상환자가 많이 있었던 당시에 가난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답니다.
아마 그 학생들이 지금은 40대로서 혹 이글을 읽고 있다면 그때 그 시절이 그리울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모른다고 하던데…….
72년 세 번 째 훈련 준비 중에 하나가 바로 군의관(내과, 외과, 치과, 산부인과/ 진료완료 후 외과만 남고 모두 철수)과 위생병, 그리고 많은 약품을 상부에 요청 확보하여 훈련 중 횡계리 중학교 운동장에 대형 천막을 설치하고 대민 진료 사업을 시작하였고 전기가 들어가지 못한 지역에는 호롱불에 사용하라고 훈련 중에 남은 경유를 한가구당 소주병 한 병씩 분배도 했었지요.
그 이듬해 그 병을 들고 부대를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데 일 년간 잘 썼는데 한 병씩 더 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단보급대대에서 제대자들이 반납한 동내의 상하 50여벌을 얻어서 그들에게 배급하였답니다.
503 까치부대<MIU> 공작 관으로 근무할 당시도 역시 도와줬는데 그때는 이미 전기가 다 들어간 상태라 가난한 가정들만 골라서 식량과 옷으로 도와주곤 했었지요.
도암초등학교 강당을 빌려서 훈련 숙소로 사용할 때 속살 리에 살다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렇게 부르짖다가 북한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된 이 승복이가 다녔던 도암 초등학교에 모범 학생 남녀 각각 5만원씩 재임기간동안 장학금을 전달해 주었고 도암중학교 화재 때 모두 출동하여 화마를 진압하였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납니다.
매년 동계 체전 스키대회는 열리고 있었는데 그때 시합장은 주로 개울 따라 용평으로 들어가다가 오른쪽 에는 동태 건조장이 있고 좌측 산비탈이 바로 지르매 슬로프입니다.
당시에는 검정장화에다가 파라핀을 바른 합판으로 된 스키를 고무줄과 철사로 꿰매어 타는 학생들이 대부분이고 서울에 살거나 아니면 미국이나 일본에 살면서 겨울 방학에 온 학생들은 플라스틱으로 된 스키를 신고 시합을 했는데 스키구두는 달나라 가는 우주인들이 신는 구두 같기에 구경하는 사람들도 많았답니다.
그때 시합 중에 하나가 산돼지 잡는 시합인데 가상된 산돼지를 쌀가마니로 만들어서 창살로 찍으면서 회전하고 또 찍으면서 회전하면서 명중의 정확도와 시간으로 우승을 결정지으며 복장은 하얀 솜바지 저고리를 입고 창 하나로 제동도 방향도 조종하면서 슬로프를 내려오는 경기입니다. 아마 옛날에 그렇게 하면서 산돼지 사냥을 했던 것을 시합 종목으로 만들었던 것인데 지금도 이런 시합을 하고 있는지.......
당시에 스키를 제일 잘 타는 학생들이라고 하면,
고태복 고태현, 어재식 어재석, 그리고 정몽준 김남웅, 채기병 학생들이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잘 타는 학생들이었지요, 재식 이와 태복 이는 바로 횡계리에서 태어나 같은 학교에 선후배 관계며, 고태복 선수를 해병대에(약230-40) 입대를 시켜서 김포 여단 본부 내 밑에서 근무하게 하였고 겨울이 되면 스키 훈련장으로 교관 발령을 내어 스키 훈련에 교관으로 활용하였고 동계 체전을 위한 개인 훈련에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답니다.
동계 체전 날이 가까워지면 모두가 마음을 조이는 것이 바로 설량입니다. 어느 땐가 시합 날은 가까이 닥아 오는데 눈은 오지 않고 많은 고심을 하고 있을 때 어재식, 고태복, 정몽준 등등 여러 스키선수들이 돼지 대가리와 진땡 술과 부개대가리를 들고 지르매 정상에 올라가 기설제를 지냈지요.
씨-웃고 있는 돼지 대갈님 앞에 술잔 따르고 절하면서 옥황상제님께 눈 좀 오게 해 달라고 제사를 지냈는데. 그만 절하다가 파카71 만년필을 잃어버렸는데 얼마나 아까운지 화딱지가 나 술 마시고 안주로는 돼지 코를 물어뜯어 깨끗히 날려 보낸, 철 딱선을 탔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이 난답니다.
결국 눈은 오지 않아 할 수 없이 해병대 전원이 골짝기에 눈을 판초로 날라다가 깔아주었기에 시합을 할 수가 있었지요. 그 시합 때 정몽준 학생은 중간쯤에서 바인딩이 풀어지면서 엉덩이 부분을 다치고 스키 한 짝은 찾지 못해 봄에 나물케러온 처녀들이 찾았지요.
이렇게 눈을 퍼다 나르는 일만 아니라 숙소에서 시합장까지 선수, 임원들을 태워 주고 시합에 따른 장비 일체의 수송수단은 오직 해병대 스키부대가 지원 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특전 단이 스키 훈련을 오지 못하였다가 후에 전투경찰대 막사를 빌려서 스키 훈련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시합 날에 응원의 열기는 대단하였지요. 어재식이는 특전 단에 입대하였기에 소수의 특전 단 대원들이 응원하고 고태복이는 해병대가 응원하였는데, 주로 활강이나 대회전은 몸집이 큰 재식이가 먹고 , 소회전는 태복이가 우승을 할 때가 많았지요. 그래도 태복 이는 핀란드에서 개최한 세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출전하여 7위에 성적을 거둔 선수였답니다.
나도 73년에 지르매 슬로프에서 개최한 제2회 전국 신인 스키대회에 출전하였으나 꼴 라인 다가서 바인딩이 풀어지는 바람에 서너 바퀴 돌아 떨어지면서 졸도 직전에 기권하였지요,
이 사실을 안 정몽준이가 이듬해 "형 ! 기술은 그만하면 되는데 시합은 장비가 좋아야 되 ! 그런 스키가지고는 절대로 우승할 수가 없으니 이것 가지고 시합에 나가!" 라고 Yamaha-250을 선물로 줘서 3회 전국 신인대회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받았는데 그 스키를 기념으로 부대 휴게실 벽에 걸어 놓았는데 누가그만 김빠이(도난) 해 갔지요.
정몽준이는 당시 우리나라 스키인중에서 최고 잘타는 5인방에 들정도로 붕붕 날으곤 하였답니다. 그 후 바로 정몽준이는 국방에 의무를 다하기 위해 육군 ROTC 장교로 입대를 하였고 후에 대한 학생스키협회 회장직도…….
69-72년경에는 한국에 스키 인들이 모두 합치면 100-150 명 정도이므로 매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운지 맛있는 음식을 싸가지고 와서 스키 타면서 나누어 먹고 심지어는 눈 위에서 반하로 고기를 구워 솔 냄새가 나는 드라이진을 마시면서 그간 있었던 일들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발동이 걸리면 주막집에 들어가 진땡이나 머루주를 퍼마시면서 놀던 그때 그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오늘날에 한국은 스키장도 많고 타는 사람들도 많고 장비나 시설이 엄청나게 좋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인간관계는 옛날처럼 훈훈한 분위기는 찾아 볼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이 되네요. 74년 용평스키장이 생기면서 해외로부터 스키 문화가 물밀듯 들어왔던 것이지요.
횡계리 들어가는 길목, 옛날 전투 경찰대 앞 길가에 "스키의 발상지" 란 탑이 보일 것입니다.(맨 아래 두번 째 사진/ 맨 끝 사진은 고태복 선수가 활강 시합중에...) 년도는 기억이 없는데 마침 내가 고국 방문 중에 제막식을 올리는 중 챔피언스키 수쿠버 크럽 이 종석 회장님과 함께 참석을 하였는데 제막식이 끝난 후에 탑에 새긴 글들을 보니 과거 스키 발전을 위하여 애쓴 분들의 이름들이 나열 되어있는 것을 보았는데, 한국 스키 발전에 큰공로자며 대부 격인 김석원 회장의 이름은 눈을 씻고 봐도 없는 것입니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그 탑을 건립하기 위해 주선한 사람이 용평에 오래 동안 근무하다가 갑짝스리 매운 명태 국을 먹고 속이 쓰려서 그렇게 했다는데 멋있는 설인들의 스키역사를 그렇게 만들어서야 되겠는지요?
사실 위에도 언급한바와 같이 최초 한국스키 발전에 숨은 공로가 많은 쌍용 구릅에 김석원 회장님을 생각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때 용평스키장이 설립되지 않았다면 그만큼 스키발전이 늦었을 것은 분명할 것이며, 당시 매년마다 3-4억이란 거액에 적자를 보면서도 스키발전을 위해 용평을 보강 발전시키면서 운영해 나간 김석원 회장의 노고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올 겨울에도 은색 준령을 누비는 설인들의 건투를 빌면서…….
2007.12.23
<옛 해병스키부대장 벤허가>
해병스키부대장 당시 참피온 스키 수크버 크럽과의 자매결연 (1981.1.15)
참피온 스키 수크버크럽에서 위문품을 ....
쌍룡그릅 김석원 회장에게 감사패 전달
1974년 오스토리 산장에서 실시한 제3회 전국 신인 스키대회에 출전 활강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답니다.
첫댓글 왠지 현실적으로 공감이 많이 가는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