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2. 24.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오후 8시. 자비네 마이어 & 서울시향
자비네 마이어. 이름이 곧 명성이며 전설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경우 쓰는 말이리라. 예당 곳곳에 부착된 그녀의 브로마이드 주위로 열성팬들이 몰려들었다. 금발, 하얀 셔츠 차림 그리고 클라리넷. 그녀는 내 눈에 꼭 뮤즈처럼 보였다. ‘뮤즈가 연주하는 천상의 선율은 어떨까?’ 어쩌면 그토록 보고 싶었던 미(美)의 맨얼굴을 목격하게 될 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진정 기대하는 순간은 1부가 아닌 2부에 있었다. 이유인즉 일단은 내가 자비네 마이어의 광팬은 아니니까. 그리고........ 아마도 ‘나’라는 사람의 ‘예술적 취향’을 잘 아는 지인들은 익히 짐작했겠지만, 2부에 ‘나의 사랑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이 연주되니까. 그렇다. 나는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매우 좋아한다.
<불새>가 연주될 예정이었다.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교수님이 좋아하는 작품이구나. 난 <불새> 보단 <봄의 제전>이 더 좋은데.......하지만 아무려면 어때?! 어찌되었던 그의 작품인걸.’
자, 그렇다면 오늘밤의 감상에 대해서 여러분과 본격적으로 ‘수다’ 떨려고 한다. 앞으로 전개될 글은 거창한 ‘평’도 현학적인 ‘분석’도 아니다. 말 그대로 ‘후기’일 뿐이다. 사실 내가 뭘 알겠는가?! 재차 밝히지만, 나는 전공자도 아니고 단지 클래식 마니아이며 내 감정에 솔직할 뿐이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그 음악회에 있었는데 필자와 상반되게 느꼈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을 양해해주시길!!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서곡이 식전 주처럼 음악회의 흥을 돋은 후, 웃기는 해프닝이 있었다. 대기실 문이 열렸고, 그녀가 나오려나보다 싶었다. 그녀의 추종자들이 그새를 못 참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등장인물은 그녀가 아닌 어시스턴트였다. 막간을 이용해 무대 배치를 손보려 나왔나보다. 여기저기서 큭큭대는 소리가 났고, 짓궂은 관객들은 더더욱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어시스턴트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으리라.......
드디어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여제께서 등장하셨다. 여제답게 기품 있는 자색 드레스를 입고 말이다. 청중의 엄청난 환호에 그녀는 길고 날씬한 팔로 우아하게 답례했다. 잠시 후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622번이 시작되었다. 한 해 전 그녀의 애제자 클라리네티스트 김한씨가 연주한 바로 그 곡이었다.
내가 종종 느끼는 바로는 서양인 연주자들은 음악을 진정 즐길 줄 안다는 거다. 그들에게 음악은 ‘일’이 아닌 ‘유희’인 듯싶고, 애초에 완벽해지려는 욕심을 버린 듯하며 그래서인지 얼굴표정과 몸짓이 한없이 편안하고 꾸밈없다. 모차르트도 자연스럽고 그녀도 자연스럽고, 덕분에 우리 관객들도 쉼을 얻고.......이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클라리넷의 음색이 매우 아름다워 첫눈에 반했었지요.” 모 인터뷰에서 고백한 그녀의 말마따나 나 역시 클라리넷을 목관악기 중 가장 좋아한다. 그 부드러운 소리를 보석으로 비유하자면.......마치 에메랄드 같다할까?! 게다가 초, 중, 고음역대마다 음색의 현저한 농담(濃淡)은 어떻고!! 따라서 난 클라리넷의 음역대별 특성과 서정성이 충분히 돋보이는 2악장을 선호하는 편이다. 오늘 연주된 <클라리넷 협주곡 K622>도 그렇고, <클라리넷 5중주 K581>도 그렇고. 그래서 앙코르로 클라리넷 5중주 3악장이 연주될 때 살짝 아쉬웠다. 2악장이면 더 좋았으련만.......
이렇게 1부는 내 유미주의적인 취향에 딱 맞는 모차르트의 곡들로 알차게 채워져 매우 만족스러웠고, 이어서 2부에서는 모차르트에 대한 오마쥬가 담긴 메시앙의 <미소(Un Sourire)>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가 연주되었는데, 이 또한 매우 흡족했다. 신비주의와 유미주의는 결국에는 병립 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메시앙의 <미소>에서는 전체적으로 고요함이 잔잔히 감도는 가운데 종종 관악과 타악이 불현듯 튀어나와 익살을 떨었는데, 내 앞 왼쪽에 앉은 여성 관객이 그때마다 픽픽 웃었고 그 근처에 앉아 있던 남성 관객은 그때마다 그녀를 째려봤다. 그녀의 유별난 행동이 감상에 적잖은 방해가 된 건 사실이나, 어찌되었든 그녀는 분명 메시앙의 작품과 서울시향의 연주에 반응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여타의 현대 음악이 그러하듯 이 곡의 의미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했다. 마치 모차르트라는 한 천재의 음악에 내재된 미소가 미묘하듯이.
드디어 때가 왔다. 그토록 기다리던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관현악 모음곡>, 1919년 버전이었다. 풍부하면서 생생한 색감, 몽환적이면서 이국적인 분위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 프랑스인들처럼, 나는 연주를 듣는 내내 희열에 들떴다. 새빨간 불새, 금발의 공주들, 왕자의 푸른 젊음 그리고 마왕의 사악한 흑(黑)심. 그야말로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강렬한 원색의 하모니였다. 불새가 비상(飛上)하는 피날레 부분은 핫 레드의 향연 그 자체였다.
이렇듯 서울시향이 빚어내는 환상적인 <불새>에 매료되다보니, 자연스레 <봄의 제전>도 듣고 싶어지더라. 분명 서울시향의 <봄의 제전>은 아주 원시적이고 자극적이리라. 샤임수틴의 작품 <가죽이 벗겨진 소>처럼.
여기저기서 브라보가 터지고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지라 앙코르를 안할래야 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휘자가 준비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이었는데, 작곡가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모차르트를 본받아 쓴 작품이니만큼 어찌 보면 1부 모차르트의 연장선 같기도 했다. 왈츠풍의 따스한 현의 울림에서 봄의 예고편을 보았고 봄햇살을 느꼈으며 봄내음을 맡았다.
음악회가 종료되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두 손바닥은 여전히 얼얼하다. 숙면을 취하기는 글렀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왜 이리 만족스러운 것일까?!
첫댓글 항상 맛갈스런 음악회 평이
음악회를 더욱 빛내 줍니다.
오호호홍 감사...
ㅎㅎㅎ어찌된 게...고대 이집트 연재가 양은 훨 많지만 음악회 후기가 골백배 쓰기 어려워요 ㅠㅠ희한하게도 감동적인 연주나 좋아하는 작품일수록 오히려 쓰기가 어렵더라는
ㅎㅎㅎ ㅠㅠ
콘트라베이스 안수석님이 그리도 봄의 제전 보고프냐?? 통영으로 와라
....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