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외로움 속에 우리 삶의 진상(眞相)이 있나 보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자발적이든 수동적이든 극심한 외로움을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극심한 외로움에 직면하여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줄을 놓아 버린 사람들은 이른바 미친 사람이 된다. 그것을 극복한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는데, 첫째 부류는 외로움을 온전히 극복한 경우로 공자, 석가모니, 예수 같은 성인들과 현자(賢者)들, 그리고 우리들 주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강호의 고수(高手)들이 아닌가 한다. 극복은 하였으되 심각한 상처를 입은 부류도 있는데 우리는 이들을 흔히 기인(奇人)이라고 한다.
고수 이상의 부류와 기인과 미친놈은 모두 삶의 진상을 보았다는 점에서 같다. 그래서 미친놈들도 우리들로 하여금 뭔가 비상한 암시를 느낄 둥 말 둥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게 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성인들의 말 가운데도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 있고, 기인들은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미친놈 취급을 받기도 한다.
저 엄혹하던 80년대에 이외수라는 소설가는 <들개>라는 소설로 기인 대접을 받기도 하고 미친놈 취급을 당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들개>라는 소설에 대한 논란도 많아서 당시 한창 문학도였던 우리들은 후배의 자취방에 모여 앉아 밤새 소주를 찌끄리며, 현실 참여가 어쩌니 예술지상주의가 어쩌니 떠들었던 적도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참여니 지상주의니 하는 것은 잘 몰랐지만, 그 소설을 읽고 상당한 위안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들개라는 이미지, 사회와 타인에게 무조건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당당함이 아득한 꿈 같았다. 황급한 복종만을 강요하던 군사 독재의 논리를 아무래도 순순히 따르기만 할 수도 없었지만 현실적으로 눈 부릅뜨고 저항할 용기 또한 없었던 나에게 <들개>처럼 차라리 이 세상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진 곳으로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들개의 이런 이미지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똥개의 이미지이다. 진돗개나 세퍼트처럼 당당한 족보가 있는 명견(名犬)이 아니라 그저 보신탕감으로 적당한 개를 우리는 똥개라고 한다. 그러나 똥개라는 말에는 그저 주인이 나타나면 사정없이 꼬리를 치며 그 똥도 마다하지 않는 이미지도 각인되어 있다. 더러 지나가는 사람을 물어 다치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들개는 80년대 내 서러운 꿈 정도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진실했기 때문이었을까? 나중에 걸견폐요(桀犬吠堯)라는 말을 접했을 때 내 정신은 또 한번 긴장했다. 걸왕의 개는 천하의 나쁜 놈인 걸왕을 향해 짖지 않고 인자한 요 임금을 보고 짖는다. 그 이유는 단지 걸왕은 자기 주인이고 그러니까 자기에게 고깃덩어리를 던져 주는 놈이고, 요 임금은 처음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던져 주는 사탕과 사회가 휘두르는 채찍 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고 걸왕의 개처럼 짖어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이런 자리 저런 자리에서 이 말을 자주 했는데, 결국 후배 김영승 선생은 이 말을 염두에 두었다가, 재판정에서 담당 검사에게 비유함으로써 검사로 하여금 격노하여 재판정을 떠나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래도 제발 온정을 베푸시어 가벼운 처벌을 내리기를 간절히 빌던 우리들 방청인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었던 적도 있었다.
근래에 이외수는 악플과 관련한 일 때문에 다시 유명해졌다. 얼마 전에 우연히 텔레비전을 보는데 이외수가 나와서 강연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찬찬히 그의 강연을 들었는데, 들을수록 마음은 혼란스러웠다. 80년대의 내가 그를 맹신했던 것인지 지금 내가 그를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들개>의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들개>를 읽어야만 했다.
<들개>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간호욱 선생님이 동덕여중 도서관에 있는 1993년 발행 개정 21쇄판을 구했다고 했다. 월요일 저녁에 그 책을 전해 받았는데, 정동운 선생이 반납 기한을 어기면 연체료를 톡톡히 받아내겠다고 벼르고 있다는 말도 전해 주었다. 화요일 오전에 서울 목동집을 나서서 지하철을 타면서부터 고속버스를 타고 전주에 도착할 때까지 그야말로 폭풍처럼 읽었다. 폭풍처럼 읽었던 이유 가운데에는 빨리 읽고 반납함으로써 정동운 선생에게 톡톡한 연체료를 물지 않겠다는 똥개 같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책을 펼쳤을 때는 내가 이런 소설을 읽은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전혀 생소하던 내용이 읽어 갈수록 뒷부분의 내용이 생각나기도 하면서 저 80년대의 스산하던 밤에 책장을 넘기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큰 고통은 아니었으나 늘 나를 불편하게 하던 어떤 상처-아니 욕망이나 결핍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가 생각났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그 작은 상처를 어루만져야 했던 가련한 내가 내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하면 지나치게 센치멘탈해진 것일까???
지난날을 뭐 생각할까. 지난날의 이외수가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읽은 <들개>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다만 지금의 이외수가 들개의 이미지는 아닌 듯하다. 내 앞에 놓인 연체료 문제를 생각할 따름이다.
첫댓글 걸견폐요..
내 아픈 허리만 생각할 따름이다...
연체료에 책내용은 잘 들어오지 않았다는것이 주제인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