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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당선자 스크랩 [월간 수필과비평 2015년 4월호, 제162회 신인상 수상작] 멀고 긴 시간 너머에서 - 송미정
신아출판 추천 0 조회 61 15.04.10 11: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렇게 되돌아 나올 수도 없는 삶을 살아오면서, 곳곳에 멈춰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던 길이 있었다. 내 생에서 마주했던 여러 갈래 길에도 저런 암호가 놓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암호를 해독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까. 어디를 어떻게 가고 있을까. 한번쯤 짚어보고 싶던,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그 질문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 아득하다. 햇살이 퍼지면서 일어나는 자잘한 소음들 속으로 매미 울음이 가늘게 흩어지고 있다."

 

 

 

 

 

 


 멀고 긴 시간 너머에서        -  송미정


   여름산 속은 풍성하고 넉넉하다. 아래서 올려다보면 발 디딜 틈도 없을 것 같은데, 진한 초록 사이로 오붓한 길을 단정하게 유지하고 있다. 새 울음으로 밤을 보내고 새소리로 아침을 시작한 산, 세상에서 가장 맑고 신선할 것 같은 바람이 숲을 일으킨다. 그 고요를 밟아가는 발아래 산벚나무의 익은 열매 떨어진 자리가 거뭇거뭇 얼룩져 있다. 저것도 이 산에 사는 누군가의 요긴한 먹이가 되는 것이리라. 메타세쿼이아, 소나무, 갈참나무 등 키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에 붉은 빛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호롱불처럼 마치 촛불처럼 산나리꽃 한 송이가 숲의 아침을 밝히고 있다. 어디선가 매미 울음이 조심스럽다. 길고 긴 기다림을 지나고 이제 막 삶을 시작하려나 보다. 캄캄한 어둠의 시간을 지나 본 사람만이 저 매미 울음을 진정 가슴으로 들어줄 수 있으리라.
   붉은 흙길에서 발이 자꾸 미끄러진다. 길에만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자잘한 돌 하나에도 내 몸의 중심이 흔들린다. “늙으면 어쩔 수 없는 거다.” 멀뚱하게 서서 바라보는 내 시선이 불편했는지, 한동안 말이 없으시더니 허공에 대고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요. 누구나…….” 나는 말을 더 이어가지 못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것 같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가슴에 돌덩이로 얹혔다. 환자복으로 침상에 누워 있으니 너무도 나약하고 안쓰러운 낯선 노인의 모습이었다.
   나는 그 방을 둘러보았다. 할머니 두 분은 벽을 향해 아기처럼 움츠린 채 누워 있었고, 한 분은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분들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분들의 막막한 외로움 앞에 무슨 말이건 해 드리고 싶었다. 나이가 지탱할 수 없는 신체의 변화 앞에 어떤 말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될 수 있을까?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그 외로움은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길인 것이다. 내가 자분 자분 말을 많이 하는 성격도 아니고 또 그런 관계유지도 하지 못한 고부간이었기에, 아이들 안부며 짧은 대화 몇 마디만 오고 갔다. “기운 내세요.” 하며 그분의 손등에 내 손바닥을 가만히 올려놓으니 “수고 했다. 이제 못 일어날 것 같다.” 하시며 나에게 잠깐 눈길을 주셨다. 며느리로 살아온 시간에 대한 것인지 그날 그곳을 방문한 것에 대한 표현인지 모를, ‘수고했다.’는 그 따뜻한 말에 내 안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가슴에 얹혀 있는 삼십여 년의 굴곡 많은 시간의 탑이었는지, 내 마음의 벽이었는지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제 어서 돌아가라고 손짓으로 밀어내는 그분 앞에,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노인 요양원을 나왔는데 그 말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대화가 되고 말았다.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과 진한 초록의 기운이 등을 미는데도 마음은 자꾸 그늘 속을 드나든다. 왜소해진 체격으로 힘없이 누워 있던 모습이 자꾸 어른거린다. 그런 모습으로라도 그분의 존재를 느끼고 싶은 것은 왜일까? 끝이라는 자막도 없이 내려진 연극 같고 마침표 없는 문장 같아, 나는 자꾸 그날의 대화 속으로 되돌아가보곤 한다. 잃어버린 사람들 이름 앞에서, 존재와 부재는 단지 생각의 차이라고 여기며 나를 위로하고 그들을 잊어 갔었다. 또 그런 과정 속에서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다 가신 한 여인의 부재도 익숙해져 가리라.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생각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지혜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죄의식도 이젠 부질없는 것이 되었다. 언제 나는 여기까지 흘러온 것일까? 뒤돌아보니 마음에서 늘 덧나던 상처가 되던 말들과, 내 일상을 어지럽히던 온갖 감정과 갈등으로 걸어온 그 길마저도 아쉽고 그리워진다.
   고요한 아침을 몇몇 사람이 조용히 나를 스쳐간다. 그들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금 저 사람들이 지고 있는 짐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내가 별것 아니라고 여길 수 있는 것도 누군가에겐 천 근 무게가 될 수 있을 것이기에, 아마도 아무런 문제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만치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뒷모습은 부러울 만큼 평온해 보인다.
   어디쯤 온 것인지 마을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데, 프로스트 시인이 노래한 길 같은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지금의 나처럼 산책길이 아닌, 자기 삶의 방향에 관계되는 결정이라면 얼마나 많은 갈등을 해야 하는 것일까. 한쪽 길로 몇 발 들어섰더니 더 이상 길이 없는 숲이다. 되돌아 나오다 보니, 길 한가운데에 어슷하게 놓여 있는 나뭇가지 몇 개가 그제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길이 아니니 가지 말라는 누군가의 무언의 표시였나 보다. 그 친절한 안내를 읽지 못하고 나는 그냥 지나쳤던 것이다. 이렇게 되돌아 나올 수도 없는 삶을 살아오면서, 곳곳에 멈춰 서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했던 길이 있었다. 내 생에서 마주했던 여러 갈래 길에도 저런 암호가 놓여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암호를 해독하고 다른 길을 택했다면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닐까. 어디를 어떻게 가고 있을까. 한번쯤 짚어보고 싶던,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그 질문으로 되돌아보는 시간이 아득하다. 햇살이 퍼지면서 일어나는 자잘한 소음들 속으로 매미 울음이 가늘게 흩어지고 있다.

 

 

송미정  --------------------------------------------------
   본명: 송현숙, ≪문학시대≫ 신인상으로 시 등단. 문파문학회 고양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저서로 시집 ≪어느 외출≫ 외 4권과 수필집 ≪감나무가 있는 풍경≫이 있음.

 

 

 

당선소감
   시를 써 오면서 틈틈이 넘겨다보던 수필이었지만 시의 길 하나도 온전하지 못해 마음 저편으로 밀어 둔 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끔 만나게 되는 감동적인 수필 한 편의 오랜 여운은 언제부턴가 슬며시 내 문학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자리에 작은 파문으로 오래 여울지고 싶은 것은 글을 쓰는 모두의 염원이겠지요. 능력이 되지 않으니 비록 욕심이겠지만 그 바람이 글을 쓰게 하고 하루하루를 사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수필과비평≫에서 길을 짚어 주셨으니 부지런히 그 길에 서 보겠습니다.
   용기 낼 수 있도록, 부족한 이름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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